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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이후 60년대 광주의 산악운동
정순택 (鄭舜澤)
정순택(鄭舜澤․60)은 1962년 제4회 60km 극복 전국등산대회에 참가하였고, 1981년 제5회 일본 어재소악(御在所岳 藤內壁) 암등경기회 참석 및 일본 북알프스 등반, 1989년 동계에베레스트 등반, 1993년 유럽 알프스 3대 북벽과 몽블랑 답사. 1997년 전남대학교 초오유 원정대 단장으로 등반에 참가한바 있고, 1964년 전남대학교 산악회장, 전남학생산악연맹 대표상임위원, 일고산우회 창립 부회장을 맡았고, 1973년 삼악회 창립회장, 1976년 전남산악연맹 이사, 1979년 전남학생산악연맹 부회장, 1981~1985년 대한산악연맹 이사, 운영위원, 1986~1991년 대한산악연맹 감사, 1986~1991년 광주등산학교 교장,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 회장, 1993~1995년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공동의장, 1993~1997년 광주전남산악연맹 회장, 1993~1996년 대한산악연맹 상임이사. 1997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등을 역임한바 있으며 현재 무등산연구소 소장, (사)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산악계에 대한 업적으로 1983년 대한산악연맹 공로표창, 1993년 금정대상, 1994년 대통령 표창, 1994년 팔공산악상, 1998년 대통령 표창, 2001년 대한산악연맹의 대한민국 등산교육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목포대학교의 공과대학 학장, 산업기술대학원장, 교무처장,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이 대학교의 식품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정 순 택 (鄭 舜 澤)
1943년 9월 4일 광주생
1962 제4회 60km극복 전국등산대회 참가
1964 전남대학교 산악회장, 전남학생산악연맹 대표상임위원, 일고산우회 창립부회장
1973 삼악회 창립회장
1976 전남산악연맹 이사
1979 전남학생산악연맹 부회장
1981-1982 대한산악연맹 이사
1982-1985 대한산악연맹 운영위원
1986-1991 대한산악연맹 감사
1981 제5회 일본 어재소악(御在所岳) 암등경기회 참석 및 일본 북알프스 등반
1986-1991 광주등산학교 교장,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 회장
1989 한국 동계Everest원정대 고문
1990 대만 아리산 옥산 등반
1993 유럽Alps 삼대북벽 및 몽브랑 답사
1993-1995 (사)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공동의장
1993-1997 광주․ 전남산악연맹 회장
1995 한일 산악인교류 및 오사카 금강산 산악마라톤대회 참가
1996 일본등산협회, 일본산악회, 히말라야크럽, 오사카산악연맹 교류방문
1997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1997 전남대학교 쵸오유 원정대 단장
2001-현재 무등산연구소 소장
2002-현재 (사)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공동의장
상훈 1983 대한산악연맹 공로표창
1993 금정대상
1994 대통령 표창
1994 팔공산악상
1998 대통령 표창
2001 대한민국 등산교육상
목포대학교 공과대학 학장, 목포대학교 산업기술대학원 원장, 교무처장, 대학원장 역임
(현) 목포대학교 공과대학 식품공학과 교수
〈광주편 1〉
산에 인적이 끈기고 산이 두렵던 시절
2000년 11월18일 훈봉형이 귀현형과 점심이나 하자며 남해에서 만나자고 한다. 주인 향식은 서울에 가고 부재중이어 서이서 동태찌게 점심을 먹으며 훈봉형이 얘기를 꺼낸다. 이번 금정산의 60대산회 모임과 지금 연재되고 있는 월간 산의 새 연재물인 한국등산사 초록의 얘기다. 대구편을 박재곤형이 쓰고 있는데 대구편이 끝나면 광주편을 계속 연재하여야 할 텐데 누가 쓸것인가의 얘기다. 귀현이 형이 써야겠구먼 했다. 먹을 만치 늙기도 하고 이 지방에 글도 말도 산경력도 귀현이 형만 한 사람이 있느냐고 하였다. 귀현형은 이미 박진형에게 사양하였다며 순택이 네가 써야한다고 한다. 필자는 그러면 신문사 편집국장 출신인 승철이 형이 적임자라고 우겼다. 승철 형에게 전화를 한다. 펄쩍뛰는 모양이다. 자료도 시간도 없고 글은 보기도 싫다 한다. 필자를 정하지 못한 체 일방적으로 훈봉이 형이 박진형에게 결정되었다고 전화한다. 서이서 한봉 전 전무이사 사무실로 가 바둑을 두면서도 머리가 무거워 툴툴거린다. 늦게 온 무등산악회 민회장도 신 전무도 형님이 써야겠구먼 한다. 자료타령을 한다. 갖고있던 자료철들은 20여개 대학산악부들이 30여년 동안 매년 장비전시회를 할 때마다 조금씩 없어져 이제 얇아져 있고, 몇 장 남지 않은 사진들도 무등산악회 40년사 편집한다며 준호가 3년 전에 빌려갔으나 출판사의 부도로 회수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글이라면 몰라도 기록이 많지 않은 초기의「등산사 초록」은 무거운 짐이다. 자료가 부족한 초기의 역사는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전하여진 자료도 그 자료 중심의 기록일 뿐 그때의 주변을 모두 읽지 못하여 자칫 객관성을 잃어 사실을 오도하기 쉽다. 그리고 집필자도 자기중심의 사실과 논조에 빠질 위험이 많다. 산에 가는 사람들은 그마다 개성이 강하고 산사람들은 유독 자기세계를 즐기고 등산이 하나의 취미나 스포츠로 정착하면서 등산인, 산악인으로 자처한다. 한때 산을 오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렵고 고단할 때 산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 있을가. 이미 광주지역의 산악사에 관하여여는 「山」2집(1964, 수락산우회)과 박선홍회장에 의하여 무등의 소식26(1988, 무등산악회) 월간 내외춘추(1989,7, 내외춘추사),「무등산」증보판(1997, 박선홍)에 많이 정리되어있어 그를 참고삼아 쓰기로 하다.
산사람들만의 산들
1953년, 늦가을의 햇볕을 받은 통명산의 매봉은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으로 아름답기 그지없고 하늘은 눈물이 나게 푸르렀다. 코앞의 무등산이 우람하게 버티고 백아산의 마당바위가 내려다보고 있다. 한때 수없이 오르고 내리던 따발고지, 폭탄고지, 승리고지, 강철고지들이 무등산으로부터 첩첩이 봉우리 져 이어지고 조계산을 중심으로 동으로 백운산 남쪽으로 모후산이, 북으로 추월산, 서쪽으로 월출산이 우뚝 솟았다. 산사람으로 살아온 「太白山脈」(태백산맥, 조정래)의 염상진은 그의 젊은 일생을 살아온 산 생활을 백아산에서 마지막으로 정리하려하고 있었다. 그가 살아온 조계산, 가지산, 제암산, 제석산, 무등산, 백아산에서 보낸 6년의 산 생활이 만감이 교차되며 9월에 조계산으로 가서 만난 하대치에게 못 다한 얘기들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도 조계산 숯막에서 선암사 쇠북소리를 들으며 어울리던 시절엔 산생활에 꿈과 희망이 넘쳤었다. 산사람에게 산은 삶의 무대였고 아무 것도 거리낌없는 산의 제왕이었으며 산은 산사람만의 천지였다. 산은 은신처이면서도 활동의 무대였다. 지난 봄 스탈린이 죽고, 산 속의 더위도 한참이던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에다 9월 말경 지리산의 이현상 소식을 접한 염상진은 산 생활을 더 지탱할 비상식량도 기력도 없었다. 해방전 일본의 징집을 피하여 산 생활을 시작한 후 해방 후에도 형무소생활과 잠시를 빼고는 산에서 지냈다. 1947년 10월 대구사건과 제주의 4․3사건, 1948년 10월20일 여순사건이 실패하자 하대치 강동식과 조계산으로 들어가 다시 1년여를 살았고,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진주하던 9월에 백아산에 입산하여 산 생활을 한지도 3년이 넘었다. 안창민, 이해룡, 조원제들과 광주를 서쪽에 두고 지실 연천을 지나 무등산 뒷골인 백아산으로 입산 할 때만 하여도 산생활이 그리 길지 않으리라 생각하였고 기대도 컷다. 그러나 그 지긋지긋한 겨울을 세 번이나 넘겼다. 평지에서 야산으로, 야산에서 좀 더 크고 깊은 산으로 이산에서 저 산으로 옮겨 붙으면서 칼바람을 맞으며 설릉을 넘고 얼어 터진 계곡을 타고 오르내렸다.
입산과 산생활
해방 후로부터 50년대 초반까지 등산은 엄두도 못내는 시기였다. 산에서 사람이 무서운 시대였다. 산에 가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해방 후의 거의 10년 동안 광주주변의 산들은 사람의 발길이 끈긴 체, 겉으로 보이기엔 아늑하고 평안에 보였다. 들꽃이 피고 산새들이 지저귈 뿐 정적이 감돌았다. 산에 인적이 없고 일반인들은 산에 갈 수 없었으나 산엔 사람들이 있었고 산들은 산사람들의 세상이었다. 깡 마르고 검게 탄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하고 개털모자에 다 떨어빠진 땀내가 진동하는 누더기가 다 된 누비솜옷을 걸친데다 장총을 멘 산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산 경력이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6,7년씩 되는 산사람들이 산 생활을 하고있었다. 산 속에서는 산사람들의 정치학교, 군사학교의 강의가 진행되고 소단위의 학습들이 이루어지고, 산들은 밤이 되면 산사람들로 더욱 활기를 띄었다. 취사를 하고 비트를 옮기면서 루트를 공작하고 보투에 참여한 밤손님들은 저 밑 마을까지 내려와 온 마을이 전전긍긍하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인적은 없으나 산은 안으로 불타고 있었다.
산에 간다는 입산(入山)의 의미는 승가에 귀의한다는 의미와도 다르게 당시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상의 전환을 의미하였다. 입산은 대한민국 정부와 자본주의, 남북분단에 저항하는 사회주의 사상가, 전사, 혁명가로의 변신을 의미하였다. 입산한 산사람들은 사상가, 혁명가로 자처하였다. 그리고 산사람에게 산은 거기 있는 막연한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의탁하여야 하는 유일의 확실한 존재였었다. 입산해 온 산사람들에게 산은 달라진 현실을 일깨워주는 거부할 수 없는 생존의 조건이면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상이었다. 해방 전 독립운동가들이 산에 숨어 살 듯이 여순사건 후에 많은 사람들이 입산하였고 한국전쟁 중에 200명, 300명씩 무리 지어 구빨치 신빨치의 인도로 이 지방의 명산들인 불갑산, 추월산, 백아산, 조계산, 백운산, 가지산, 지리산의 심산유곡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산을 점령하였다. 전남지방도 대구나 경상남도와 거의 같이 산사람의 수가 2만 여명에 이르러 동부에 백운산, 서부에 불갑산, 남부에 유치 가지산, 북부에 노령, 중부에 조계산, 북동부에 백아산의 6개 지구로 편성되어 산사람들이 산생활을 독점하고있었다.
이 시기는 민주화 서구세력 물질문명이 진입하는 우리 역사상 가장 심한 격동기로 해방, 전쟁, 폭력, 폭동, 사상의 갈등, 증오로 가득 차고 전화의 비극 속에 절규하던 시기였다. 산사람들이 우리의 산을 독점하고있는 동안, 세계 산악계는 흥분하고있었다. 1949년 네팔왕국의 외국인 입산금지가 해제되면서 히말라야 고산등반이 활기를 띄고 1950년 6월3일, 안나푸르나 초등정, 1953년 5월 29일, 에베레스트 초등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 준엄하고 냉혹하게 군림하는 8000m이상의 거봉들을 등정하려는 인류의 집념어린 이상이 실현된 시기이기도 하다.
조국강산
무등산이 있는 광주는 우리나라 서남권의 중심도시이다. 1945년 광복 될 때까지 전라남도에 시(市)라고는 광주시와 목포시뿐이었다. 1946년 8월 제주도가 도(道)로 승격되어 전라남도에서 분리되고 1949년에야 여수읍과 순천읍이 각각 여수시와 순천시로 개편되면서 이들 광주, 목포, 여수, 순천의 4개 도시가 50년대 이후 이 지역 정치, 문화, 사회활동의 중심역활을 하였다. 초기의 등산이나 산악활동은 도청과 무등산이 있는 광주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무등산을 비롯한 전국의 산들은 일제의 침탈과 한국전쟁으로 그늘을 만들어 줄 변변한 나무 한 그루 없이 헐벗었고 해방후의 사회분위기와 산들의 형편이 등산이나 산악활동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많은 인사들이 망명지와 객지에서 돌아오고 형무소의 문이 열려 많은 인재들이 주의 주장을 내세우며 각종 사회단체들을 급조하고, 대학문이 열리면서 자연을 조사하고 잃었던 조국을 탐색하자는 지식인 그룹도 탄생하였다. 후일 광주산악계에 크게 영향를 줄 이은상선생, 정종선생, 고재기선생들도 각각 형무소에서, 서울에서, 만주에서 광주로 돌아왔다.
후일 한국산악회의 회장을 1967년의 7대에서부터 11대까지를 연임한 한국 산악계의 거목인 노산선생이 그의 40대 장년기를 광주에서 보내게 된 것은 광주의 사회와 문화, 신질서의식형성에 직간접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미 시인, 학자, 시조작가, 이충무공과 독립운동연구가, 언론인으로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노산은 30대에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들을 답사하고 시와 시조, 수필, 기행문을 남겨 놓고있었으며 광주에 체류하면서 그가 답사한 우리의 산과 강을 시조로 엮어 조국강산이라는 시조집을 발간하였다. 1945년 9월 15일 창립한 한국산악회의 석남 송석하회장의 1년 위로 서울과 일본에서 같이 공부하고 조선일보사 향토문화조사에도 조사위원장을 맡아 석남회장과 같이 답사하였으며 한국산악회의 창립에도 막후역할을 하여 신생의 한국산악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있기도 하였었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1903년 마산에서 대한제국 국민으로 태어나 서울과 일본에서 청년기를 보내고 이화여전교수와 동아일보 기자,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일하다 해방되는 날까지 3,4년을 옥중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미군정치하의 광주에 정착하여 호남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광주지방의 언론과 학술 문화의 중심 축이 되었고 한국전쟁으로 영남과 호남을 넘나들며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의 초대 전남지사인 서민호 도지사와 원로 국문학자 가람 이병기선생과는 한글학회 감옥동지들이며 서민호지사와는 동갑내기이기도 하였다. 노산선생이 광주로 오기는 이와 같은 동기 외에도 오랫동안 광주와 맺은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노산은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치료중인 나환자들의 참상을 위로하며 1934년 동아일보 기자시절 광주의 최홍종목사, 민병기, 고재욱, 일본교토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최상채박사 등 전남지방 70여 인사들과 조선나병환자 근절회를 발기하였으며 1944년5월엔 무등산 증심사계곡에서 최인식, 김종선, 정호용, 고재휘 등 10여명과 미군이 상륙하면, 일본 경찰서를 기습하기로 한 항일결사대를 조직하였으나 곧 발각되어 검거되어 투옥되기도 한 깊은 인연이 있고, 전라도 지방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 그에게 광주와 광주사람은 고향과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등산을 사랑하고 애송하였다. 노산선생은 서석, 수창초등학교와 광주서중․일고, 전남여중․고와 중앙여중․고 그리고 전남대학의 교가 등 광주인근 학교들의 많은 교가를 작사하였다. 그가 작사한 교가들은 무등산 마주보고 우뚝 솟았네(전남여중), 무등산 아침해같이 눈부신(광주서중), 아침햇빛 눈부신 무등산아래(중앙여중)와 같이 거의 무등산을 주제로 하였다. 1952년 봄 호남신문사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전남특산품 전시회를 개최하고 당시 사장인 노산선생이 무려 1500여자의 전남의 풍물과 물산을 노래하는 전남 특산가를 발표하기도 하여 전남지방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애정을 보이기도 하였다.
산악 정신론
경성보육학교 교감으로 지내던 정종선생이 해방을 맞고 1945년 고향 찾아 영광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하여오고 고재기선생은 만주의 신경(장춘)에서 매일신보 기자생활을 하다 광주서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왔다. 정종선생과 고재기선생은 곧 이어 광주로 내려온 노산선생을 맞이하고 산과 인생을 깊이 생각하게되었다. 정종선생은 1915년 물무산, 관람산, 성산, 우산으로 둘러 쌓인 산골 영광에서 태어나 연실봉에 올라 무등산을 바라보며 자랐다. 서울의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 전신)와 동경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겨울의 금강산에 삭발 입산하여 월여를 지내기도 하고 노고단을 오르고 천왕봉을 종주하기도 하였다. 동경 유학중엔 일본의 관동평야와 三原화산을 접하면서 등산을 산악정신론으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해석하려고 하였다. 위대한 인간이란 무엇인가?위대한 인간의 존재방식이 무었인가?위대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위대한 젊은이야말로 위대한 인간임을 시인하였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위대한 젊은이가 되어야 하겠다.는 결론을 끌어내고 산악운동에서 그 구체적인 실현방법을 찾으려 하였다. 등산과 철학의 접목을 시도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그가 1948년 광주공립의학전문학교(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전신)를 거쳐 1952년 전남대학교로 옮겨 철학개론을 강의하면서 실현되었다. 1956년 10월 13일 수락산우회를 조직하여 산악활동을 하면서 매 학기 강의가 끝나면 수강생들을 고재기선생과 같이 인솔하여 무등산으로 안내하였으며 후일 1957년 12월 1일 자유등반회로 발전시켰다. 1958년 동국대학교로 직장을 옮겨서도 그의 노력은 계속되어 동국대산악부의 지주가 되었으며 서울과 광주를 오르내리며 광주의 고재기, 오종태, 손상우, 박상식, 최금동, 이을호, 장준한, 배필상, 신귀현, 김용석 등과 산행을 계속하였다. 정종선생의 너와 나의 산행일지에 의하면 특히 고재기선생과의 산행기록이 많다. . 고재기선생은 1917년 창평에서 태어났다. 노산 보다는 14년이 뒤지고 정종선생 보다는 2살 아래다. 광주고보(광주 서중․일고의 전신)를 거처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보전 도서관에서 2년여 근무하다가 1939년 만주 신경에서 만선일보 학예부기자로 기자생활을 시작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매일신문기자로 활동하다 해방이 되어 광주로 환향하였다. 광주서중에서 함평을 거쳐 광주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1955년 목포상과대학(전남대학교 상과대학 전신)으로 옮겨 1961년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학장으로 봉직하였다. 고재기선생은 광주에 돌아와 양림동에서 경성보육의 독고교장과 생활하던 노산댁을 방문하고, 노산의 아우이며 선생의 친구인 화학자 이길상박사를 찾아 서울 아현동의 노산댁을 자주 방문하기도하였고, 처가 동네의 정종선생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 평생을 산친구로 지내었다. 고재기선생은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산악활동을 시작하여 전남대학교산악부와 무등산악회를 창설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58년 전남대학교산악부를 조직하고 지도교수로 8년을 혼자서 지도하였으며, 그 후 1983년 전남대학을 그만둘 때까지 공동지도교수를 맡아 산악인들의 사표가 되시어 수많은 산악인을 배출하였다. 또 무등산악회 창립이후 후임 박선홍회장에게 인계할 때까지 13년간 회장직을 맡았다. 고재기선생님은 철저한 산악정신과 등산관, 해외등반사와 최신의 해외 산악계의 동향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광범위한 정보로 후학들을 질책하기도하고 지도하고 다그쳤다. 바르지 않다거나, 원칙에서 벗어나거나, 정확하지 않는 것을 못 보는 선비정신에다, 또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따라서 지금 나이가 60이 넘은 광주의 산악인들도 고재기선생 앞에선 언행을 조심한다. 자신과 남에게 그만치 엄격하고, 원칙을 정하고 스스로를 다스린다. 산이 그러한 것인지, 법학을 전공한 기자출신이어 선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싫어하시던 TV도 보시고, 오늘날까지 50년 동안 산을 통하여 맺은 산사람들과의 인연을 아끼며 건강하게 등산과 산악활동을 계속하시는 광주․전남산악계의 지주이시다.
산악회의 태동-전남산악회와 구례연하반
일본의 통치와 계속 이어진 전쟁으로 국토와 산은 황폐되고 동족상잔으로 죽은자와 죽인자의 질시로 인심은 흉흉하고 사람들의 심성은 황량하였었다. 한국전쟁후의 가난과 갈등과 증오에 얼룩진 군상들과 낮에는 경찰, 밤엔 산사람에 시달리다, 농촌의 전통사회가 붕괴되면서 일자리를 찾아 모두들 광주로 몰리면서 광주는 갑자기 비대하여졌다. 광주에는 피폐하여진 시민들의 마음과 피난민의 피곤한 피난살이를 위로하여줄 무등산이 가까이 있었다. 정황이 질서를 되찾게 되자 1954, 5년부터 무등산을 중심으로 산행이 시작되었다. 예전엔 원족, 소풍으로 자주 올랐던 무등산의 실체를 보고싶고, 폐허가 된 무등산을 안타까워하는 지식인들이 무등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동호인모임을 만들었다.
박선홍회장의 기록(「무등의 소식26」1988,무등산악회, 「월간 내외춘추」1989,7,내외춘추사,「무등산증보판」,1997, 박선홍) 에 의하면 광주 최초의 산악회는 1955년 창립된 전남산악회라고 하였다. 1955년 4월 상공회의소 박선홍, 보이스카우트의 김학준, 서상덕, YMCA의 이영생, 육상경기연맹의 최일출, 화가 이의섭, 고고학자인 김창호 등이 발기인이 되어 광주상공회의소에서 전남산악회 창립총회를 갖고 초대회장에 최정기 교수(조선대 총장, 전남교육감, 국회의원 등 역임), 부회장에 전남대학교의 김창호박물관장, 총무에 이영생, 간사에 박선홍이 선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남산악회의 활동상과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무렵 지리산의 화엄사골, 문수리골, 피아골 등에서 지친 산사람들이 하산하자, 지리산 기슭의 구례에서도 1955년 5월 5일에 우종수, 이규종, 안석문, 양한익, 손재훈, 김태준, 김용선 등 구례지역의 산악동호인들이 노고단의 첫 등행을 마치고 돌아와 등산클럽인 구례연하반(求禮烟霞伴, 1967년 지리산악회로 개칭)을 창립하고 약국을 운영하는 손재훈씨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구례연하반은 창립 취지문인 연하반의 반지문(伴旨文)에서 연하반은 정열적으로 산수를 애호 동경하는 구례 산악인의 모임이라 하고, 아름다운 산수를 향해 젊음의 낭만과 정열을 한껏 쏟아 삶의 보람을 느껴보자 하였다. 천지 호연의 영기와 고매한 인간정서를 길러 심신의 수양을 쌓고 날로 황폐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애호하고 더욱 아름답게 가꿔 지상의 낙원 금수강산을 이룩하는데 기여하자며 그 창립취지를 확실히 하였다. 그리고 자연애호운동의 선구자, 민족적 정서운동의 줄기찬 분수가 되자고 다짐하여 우리나라 산악운동목표의 일단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지리산 등산로의 개척 명승고적 조사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노고단 첫 등산 후 1956년 8월엔 반야봉을 등반하고, 1957년에는 화엄사에서 천왕봉까지의 종주등반코스를 개척하였으며 1958년 7월 종주등반 코스를 재답사, 1962년 3차답사후 1962년 지리산 등산 안내도를 작성하여 등산객에게 무료로 배부하였고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의 등산로 이정표 60개소, 안내표시 300개를 설치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사진설명
사진 1 : 무등산과 1950년대 광주시가지〈원로 산악인 사진작가 오종태 촬영〉
중앙이 남광주역, 대부분 초갓집이고 좌측의 깃대봉 아래 조선대학교엔 아직 백악 건물이 지어지지 않았고 우측 산록의 학동삼거리, 무등산 등산객의 집결지인 샤모 니였다.
사진 2 : 한적한 증심사 가는 길 〈원로 산악인 사진작가 오종태 촬영〉
매일 수많은 등산객으로 길이 꽉 차고 양쪽에 식당과 가게가 밀집된 증심사 길.
중앙에 관세음보살 바위가 보이고 저 멀리 608고지가 보인다. 관세음보살바위엔 오고가며 돌을 던져 올려 쌓아 건강과 행운을 빌고, 조덕형이 록․크라이밍하다 크게 다친 곳이다..
사진 3 : 황폐된 무등산과 원효사 작전도로 〈원로산악인 고재기제공〉
사진 4 : 80대 노산악인 정종과 고재기 선생 병풍산 산행(1995. 9.17)
사진 5 : 자유등반회의 무등산 등산 〈극작가 최금동교수 촬영〉
1957년 12월 13일 무등산의 입석뒤편에서. 이날 전남대 교수 학생 일반인 고교생등 100여명이 등행 하였고 고재기, 정종, 문형만, 이굉우, 신귀현, 김용석이 보인다.
사진 6 : 정종과 고재기선생의 벽소령 가는길(1959)
사진 7 : 구례 연하반 산악클럽의 창립 취지문과 반야봉 등산〈지리산 3호에서〉
산악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전개
전남대학교 산악반과 무등산악회, 고교산악반 창립
역사의 시작이나 단체의 창설엔 나름데로 의의를 제시하고 추구하는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고 동의를 구한다. 그리고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그 연원을 찾고 당시의 상황에 따른 필연성을 도출하여 합리화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의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거나 말살하고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여 최초이고자 하고 가능하면 그 시기를 과거로 연장하고자 한다. 기록이 확실하지 않은 산악계의 경우에도 구전이나 기억에만 의존하여 그 연역이 불확실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광주․전남지역의 초기 산악회들은 뿌리가 없이 창립된 자생조직들이다. 학창시절 원족으로 무등산을 오르고 수학여행으로 금강산을 다녀온 분들이 더러 있고 1930년대 후반에 광주등산구락부(최일출)가 활동하였다고는 하지만 조직적인 산악운동이나 산악정신을 규범으로 한 산악모임이나 동호인회는 조직되지 않았었다. 1950년대에 전남대학교 외에 조선대학교, 광주사범대학에서도 산악활동이 이루어 졌으나 그 기록은 찾을 수 없고 후반에야 광주지역에도 산악회가 조직되지만 타 지역에 비교하여 아주 늦은 시작이었으며 선진 산악문화를 도입하기에 열의를 다하던 시기다.
전남산악운동의 배경
서울에는 이미 해방 전에 조선산악회와 백령회 외에 경성제대 산악부, 양정고보 산악반, 보성전문 산악부, 세브란스의전 산악부, 이화여전 하이킹부들이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 곧 바로 대학산악부를 재건하였다. 대구지역도 1931년 대구에는 한인중심의 경북산악회(회장 일본인 上日)가 창립되어 산악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왔다. 이 무렵 한국산악회는 1946년부터 1955년까지의 10년간 11차에 걸쳐 의욕적으로 전개하여 온 국토구명사업은 그 동안 산악인 학자 문화인등 각계인사 연 339명이 참여하여 산악 동호인의 영역을 확장시켰으나 광주․전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산악인으로서 이 사업에 참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국토구명사업이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의 3대 산맥 학술조사와 한라산, 설악산 등 41개 산, 21개 도서해역 탐사를 통하여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1947년 노고단에서 스키대회를 개최하고, 1949년 흑산도, 추자도 등의 다도해 학술조사 등이 있었을 뿐 전남지역에서의 활동은 없었다. 그러나 국토구명사업이 끝나고, 한국산악회는 1956년 4월 15일부터 20일까지 광주에서 한국산악회 제1차 적설기 한라산 등반대의 전국 순회 보고회를 가졌다. 적설기 등반대는 한국산악회가 국토구명사업의 후속사업으로 추진하여 제1차 훈련을 1956년 1월 3일부터 1월 24일까지 한라산에서 실시하고 그 보고회를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개최한 후 전국 순회 전시회를 대구, 부산에 이어 광주에서 열게 된 것이다. 등산에 관심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많은 학생과 일반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열려, 행사는 대 성황이었으며 산악운동의 이해를 돕고 산악운동 방향의 일단을 계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주지방의 산악열기를 고조시켰다. 대형 적설기 등반사진 12매, 전지크기의 사진 35매와 동계등산장비 83점 그리고 학술자료 80여점이 전시되고 홍종인회장, 이숭녕교수, 김정태선생의 산악강좌 및 한라산 적설기 등반보고강연과 컬러스라이드 보고도 있었다. 광주지방 최초의 산악행사로서 등산하는 사람들에겐 경이적이었다. 광주에 온 일행 중 홍종인회장과 김근원, 윤두선선생은 광주의 김학준(전남보이스카웃), 박선홍(광주상공회의소), 강동수(전 일신방직 전기과장), 강희복(전남도 장학관)선생과 4월 20일 곡우날, 경찰관 3명을 앞세우고 1박 2일의 노고단 산행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광주의 산악인과 서울 산악인 사이의 처음 교류이었다. 한라산 적설기 보고회와 이 노고단산행은 광주지방 산악회 창립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산악운동의 기틀을 제공하였다. 광주에 산악회들이 조직 된 1959년에 한국산악회는 지리산에 제4회 해양산악훈련단을 파견하였고 광주․전남의 산악인들과 다시 접촉하게 되었다. 해양훈련단 훈련은 1959년 8월 1일부터 8월 16일까지 실시되었으며 홍종인 한국산악회 회장을 단장으로 하여 광주의 무등산악회와 전남대학 등 4개 대학과 6개 고교생 총 36명이 참가하였다. 이때 한국산악회는 홍종인회장이 영국산악회와 유럽산악회 방문중이었고, 재정이 어려워 사무실도 없는 형편에 치르는 행사이어 서울에서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 훈련단에 안종남, 전담, 이병구, 강병광, 윤두선, 김경호, 최영식, 이문행, 안병주, 최인갑, 이하영 등 서울의 에리트 산악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광주와 구례의 젊은 산악인들과 산행을 같이하고 친목을 돈독이 할 수 있었으며 대학산악부원들이 서울의 산악운동과 산악문화를 접하는 호기가 되었다. 산악훈련 준비 차 광주에 먼저 내려 온 최영식선생은 무등산 규봉에서 록 크라이밍을 지도 할 기회도 갖게되었다. 이들은 구례의 노고단과 천왕봉을 오르고 법계사를 거쳐 금산까지의 산악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악운동을 주도하던 한국산악회는 부산지부(신업제)를 1946년 4월 15일 발족시켜 남행수, 정명수, 최기익, 김교빈, 지원웅, 김재문, 이상훈, 이재수등이 활동하고, 1946년 10월 22일 창립된 대구산악회(엄성문)의 일부와 주병진, 김동사, 양인석 중심으로 1948년 한국산악회 경북지부(최계복)로 개편함으로서 지방산악계의 조직과 활성화에 노력하였었다. 그러나 한국산악회는 1973년에야 여수시의 여수산악회(고순익)에 전남동부지부를 설치하고 1973년 12월 11일에야 전남지부를 발족시킬 정도 한국산악회의 광주지방 진출은 늦었으며 해방 후 초기 산악회 창립에 기여하지 못했다.
자유등반회와 전남대학교 산악반
1944년에 창설된 광주의학전문학교와 해방 후 창립된 광주농업전문학교, 대성대학, 목포상업전문학교를 모체로 하여 1951년 6월 9일 개교한 전남대학교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1955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후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탄생한 모임이 정종교수가 주도한 1957년의 자유등반회 이었다. 이 자유등반회를 모체로 하여 전남대학교 산악반이 조직되었다고 하는데는 이견이 없다. 1957년 12월 1일 정종교수와 당시 대학원생인 문형만과 정외과 2학년인 김용석이 주도하여 무등산에서 제1차 자유등반을 실시한 후, 계속하여 12월 15일 제2차 자유등반회를 무등산에서 가졌다. 김용석이 학생을 리드하고 정종, 이을호교수 외에 박광, 조명원, 지춘상, 이원태, 이광우 등이 참여하였다. 그 후 자유등반회는 활기를 띄워 교수와 학생 외에 일반인의 참여도도 높아져 이을호, 고재기, 이가형, 최금동, 박규환, 홍순탁교수등과 장준한, 정근모, 오종태, 손상우, 배필상, 배성식등이 단골로 참여하여 학생들의 활동을 북 돋아주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학산악부가 조직되었다. 1958년 6월 4일의 무등산 자유등반회에서의 일이다. 1958년 6월 4일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외교학과 김용석, 신귀현, 김종규가 주축이 되어 정종, 고재기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전남대학교 산악반을 결성한 것이 광주지방 최초의 대학 산악크럽이 되었으며, 오늘 날 전남대학교 산악회로 발전하였다. 당시 같은 과의 3, 2학년이었던 김용석(1956년 입학)과 신귀현(1957년 입학)은 대학산악부 이후 전남대학교와 전남 산악계의 활동에 깊이 관여하여 왔다. 특히 신귀현은 대한산악연맹의 창립에 전남 대표로서 산파역을 하였으며 60년대 전남 산악계를 주도하였다. 여기에 철학과 4학년 정종구, 광주서중의 동기인 기양도(정외과 1년), 박석일(사학과 1년) 등이 참여하여 무등산 정례등행회를 개최하면서 창립초기부터 회원모집과 장비구입에 주력하였다. 창립 후 한라산 등반을 계획하고 대원선발과 등행준비에 서둘러 1958년 7월 27일부터 8월 2일까지 정종, 고재기교수와 김용석과 신귀현은 산악반을 인솔하여 목포에서 안성호를 타고 제주도 한라산을 등반하였다. 전남대학 산악반의 최초의 해외원정인 셈이다. 제주시에서 관음사를 거쳐 개미등을 타고 한라산정상을 오르고, 서귀포로 하산하여 돌아오는 6박 7일의 산행이었다. 이 산행에서 대원 1명이 허기에 지쳐 식사를 기다리지 못하고, 공복에 공동 비상식으로 준비 한 덩어리 진 미군 캔 버터를 먹고 급체하여 고재기교수가 미군이 관장용으로 사용하는 주사로 처치하여 치료하였다. 급체를 관장약으로 처치하였다하여 고재기 지도교수는 사표를 내지 않아도 되었고 한때 명의가 되었다.
선진 산악계와의 교류
전남대학교 산악반은 1959년 7월 산악부로 개칭되고 산악부원의 수도 60명에 이를 만큼 성장하였다. 1956년 적설기 한라산 등정보고회가 전남 산악계를 깨웠다면 해양훈련단과의 지리산 합동등반은 산악조직과 운영의 묘를 터득하게 하고 알피니즘의 세계로의 길을 열었다. 전남대학교 산악부는 한국산악회가 지리산에서 개최한 제4회 해양산악훈련단 훈련에 정종교수와 함께 신귀현, 김용석, 최홍열, 곽종철, 김종규, 기양도가 참여하여 처음으로 대외적인 행사에 동참하고 서울의 산악인들과 교류하였다. 8월 1일 노고단을 지나 8월 5일 천왕봉을 오르고, 6일 남해로 가는 훈련단과 헤어졌다. 그러나 이 행사에 참여한 몇몇 대원은 한국산악회의 해양산악훈련인 것도 모른 체, 지리산등반으로만 알고 다녀온 짧은 1주일의 훈련이고 산행이었지만 이 행사에서 돌아 온 대원들은 등산용어와 등산복장에서부터 달라졌다. 개화된 것이다. 며칠사이에 산과 산악운동의 전문가가 되어 돌아왔고, 조직의 재정비가 시급한 과제가 되었으며 기술등반과 알피니즘 구현이 새 명제가 되었다. 1960년 1월 김용석과 신귀현은 월출산에서 2박 3일의 적설기 훈련에 참여하고, 8월엔 한라산 등반에 참여하는 등 두사람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이다. 8월 2일부터 10일까지의 장기 산행이었다. 정종교수가 인솔하여 오종태, 박상식, 윤재원, 조경자, 박영, 조영, 김문순등 10명이 참가하여 서귀포에서 등반을 시작하여 백록담, 개미등, 죽성리로 하산하여 8월 9일의 보름달을 목포행 가야호 선상에서 즐겼다. 8월 5일의 폭우속에 환자가 발생하여 조난 직전의 상황에도 처하고, 한여름에 비와 우박을 맞으며 산행하여 책과 얘기로만 듣던 산의 날씨를 체험하고, 두고두고 등산학교의 강의안으로 삼았다. 1960년 4월 공대, 의대, 법대에 산악부가 조직되었다. 1960년 하계방학중 1960년 12월 기양도(정외 3)가 제2대 산악부장에 취임하고, 1961년 5월 임춘재(광산 3)가 제3대 산악부장을 맡아, 그 해 6월 전남대학교 산악회로 개칭하고 산악회의 세 확장을 위하여 단과대학 산악회의 조직을 서둘렀다. 이에 따라 1961년 상과대학 산악회(김훈봉, 상학 3)가 조직되고 1962년 4월에 공과대학산악회(남상만, 화공 2), 5월에 농과대학산악회(박종현, 임학 4)를 창립하여 종합대학의 산악회로서 체재를 갖추고, 1962년 9월 김승철(법학 3)이 제4대 산악회장을 맡았다. 공과대학은 박윤성 김경명, 심봉섭, 서찬식, 박원정외에 금속과를 중심으로 장하송, 한상철, 정수현, 조병덕들이 장하송 사단을 구성하고 농과대학은 최동식, 김용옥을 중심으로 김재형, 김영부, 김정, 문규한, 박육재, 정순택, 정기팔, 허정식, 최순기, 이직창, 변동환, 유길평 임복길등이 매주 산행과 장비문제로 박종현의 버섯연구실을 찾았다. 이 무렵 전남대학의 유력서클인 밀알회와 SCA, 적십자회와 보이스카웃에서도 등산을 중심으로 한 산악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58년10월 무등산악회 창립
취미의 모임인 무등산악회는 산악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서 전개할 만한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고 그늘에서 이를 위하여 뒷받침을 한다. 회비로 운영하고 남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무등산악회 창립 규약의 골자이다. 전남대학교 산악반이 조직되고 곧 이어 1958년 10 월 2일 이미 조직되어 산발적으로 활동하던 등산모임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무등산악회가 발족되었다. 광주 충장로「나하나」그릴 별실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대표간사로 고재기교수를 선임하였다. 창립규약도 색다른 바가 없지않고, 흔히 사용하는 회장칭호 대신에 대표간사 제도를 채택한 것도 특이하다. 회의 대표를 내부 문건에는 대표간사, 외부로는 무등산악회 대표로 표기하고, 부르기는 고대장으로 호칭하였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회장, 부회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후에 정리한 기록들은 창립회장에 고재기교수, 부회장 오종태, 총무 박선홍으로 기록되고, 고재기 교수는 1971년 박선홍 회장에게 인계 할 때까지 창립이후 13년간 장기 집권하였고, 창립 때의 규약과 조직체계도 고대장의 뜻이 담긴 남다른 것이었다. 1959년의 2대와 3대 부회장엔 이남열, 1961년과 다음의 4대, 5대 부회장은 다시 오종태선생, 그리고 다음엔 복수 부회장제도를 채택하여 이남열, 오종태선생이 번갈아 맡았다. 그만큼 오종태선생과 이남열선생은 서로 달랐다. 오종태선생은 1955년 산사진 작품발표회를 열고 1956년 광주사진연구회를 창설한 산악사진작가로 작가 이형오를 배출한 사진가이면서, 산행에서앞으로 5분을 연발한 娛대장이다. 순천에서 사진작품 활동을 하면서 미화사진관을 운영하다 손아래 동서인 최명섭선생의 권유에 따라 광주로 옮겨, 학생회관 건너에 나하나 사진관을 열었다가 충장로 우체국 건너에 「나하나」그릴과 동보사 DP점을 열고 산악인들과 사진가들을 모아 들였다. 이 「나하나」그릴의 기차간 같은 길죽한 별실과 동보사가 산악인의 모임장소가 되었다. 오선생은 제2회 전국60km극복 등행대회에서 부터 6회 대회까지 심판으로 참가하여, 선생의 대머리와 베레모자로 전국산악인에게 친근한 오뻔득이란 애칭을 얻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이남열선생은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하여 광주에서 정치에 초연한 신생청년회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문학예술을 통한 자체교양과 계몽활동에 주력한 지성적인 청년운동을 주도하였다. 한국전쟁 때는 광주정신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전후엔 광주의 치안유지에 공헌하였고, 전남 관재국에 근무하면서 무등산악회 창립에 주동 역할을 하였다. 백과사전이라고 할만큼 풍부한 상식과 임기응변의 위트와 유모어에 호탕한 웃음으로 좌중의 분위기를 유도하였다. 장자풍의 서글서글한 품성과 온화한 표정으로 상대를 편안하게 하여주면서 산사랑이 곧 나라사랑임을 강조하는 존경받는 산악인이었다. 오선생과 이선생은 견해를 달리하는 산악운동관과 무등산악회의 운영방법에 이견을 보였고, 오종태선생은 1965년까지 무등산악회 회원으로 봉사하면서 1962년 별도의 산악단체인 너덜산우회(후의 너덜산악회)를 조직하였다. 초창기 무등회원으로는 위의 고재기, 오종태, 이남열, 박선홍 외에 박원식, 신동범, 최명섭, 김주종, 홍기근 김동주, 전만서, 김흥준, 이성우, 손상우, 황운택선생들이 참여하였다. 이들 중 지금까지 무등산악회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고재기교수, 박선홍회장과 부군을 대신하여 박원식선생의 사모님 하해여사가 산행에 건강하게 참여하고 있다. 무등산악회 창립에 당시 학생이던 신귀현과 김용석이 준회원으로 참여하고 실무는 모두 이들이 처리하였고, 1960년 전남대학산악회의 임춘재 김훈봉과 김승철이 가입하였다. 무등산악회는 창립 익일 10월 3일 창립기념 무등산등행을 시작으로 지리산, 가야산, 백운산, 속리산, 팔공산, 한라산등 전국의 산들을 오르고, 장비를 구입하기 위하여 양동시장을 뒤지고, 김주종은 서울의 남대문시장에서 수통, 군용륙샥, A텐트, 스키파카, 닭털 스리핑백 등을 츄럭으로 사와 나누어 가졌다. 발족 후 첫 사업으로 무등산 등산안내 철제 표지판 130여개를 만들어 세웠다. 무등산의 최초의 안내판이다. 그 후 산림의 남벌방지와 자연보호운동, 대학산악부와 고등학교 산악반의 등산과 산악운동의 지도를 비롯하여 무등산 그림엽서를 관광협회와 공동으로 발행하고 안내등반과 산사랑 운동을 전개하였다. 무등산악회는 창립 해부터 매년 년말 년시에 회원과 회원가족 중심의 송년등반을 실시하여 일년을 반성하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세배와 덕담을 나누고 새해를 설계하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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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사진 1 ; 1956년 한국산악회의 한라산적설기 등반 광주 보고회를 마치고 광주산악인과의 노고단 등반 중 화엄사에서, 뒷줄 왼편부터 무장경찰관 2명, 김학준, 홍종인 회장, 화엄사 주지, 박선홍, 김근원, 윤두선제씨〈박선홍 저 무등산에서〉
사진 2 : 전남대학교와 무등산악회 창립 회원인 고재기교수, 김용석, 신귀현
사진 3 : 무등산악회 모임장소인 「나하나」그릴에 걸렸던 주인 오종태선생의 눈사진 작품 「둔부」, 이 사진을 보기위해 더 자주 찾았는지 모른다.
사진 4 : 전남대학교 산악회의 알프스 3대 북벽 등반대(1991. 7)
사진 5 : 무등산악회와 전남대학 산악부의 뱃지. 한때 오른쪽 전남대 산악부 뱃지에 무등산악회라 표기하여 무등산악회 회원들이 패용하였다.
사진 6 : 무등산악회의 1982년 송년등반, 화양동 계곡 우암사당 입구에서. 무등산악회는 매년 년말 년시의 1박2일 전남대학교 OB산악회와 합동 송년의 밤 행사를 40여년 가져왔다.
사진 7 : 1958년의 광주서중 전교생의 집체훈련인 무등산 정상답사.
사진 8 : 사진작가협회의 1959년 무등산 입석, 사진작가들이 초창기 산악모임에 많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작품사진을 촬영하느라 산행이 지체되곤 하여 많은 얘기거리를 만들었다.〈송진화선생 촬영, 송희범 제공〉
사진 9 : 무등산관광협회의 무등산행 ,1961년 무등산 지왕봉 〈고재기교수 제공〉
〈광주편 3〉
광주 인이 대구․경북산악인에게 진 큰 빚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 전국60km극복등행대회
산악인이 국가와 국토를 지켜야 한다는 지사적 산악인들이 그들의 꿈을 산에서 실현하려는 시대가 있었다. 경북학생산악연맹이 1959년 11월 3일 「학생의 날」기념 제1회 전국60km극복등행대회를 개최하였다. 11월 3일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이름 없는 별들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1953년 10월 제정한 학생의 날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기미독립운동후의 10년인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 서중, 광주일고의 전신)학생들을 중심으로 광주 시민 학생 천 여명이 광주 시가지를 누비며 일제 탄압과 굴욕적인 식민지교육을 규탄하는 시가행진을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이 파급되어 1930년 3월까지 대학 1개교, 전문교 4개교, 고보교 136개교, 초등학교 45개교와 북간도의 8개교등 전국의 194개교 54,000여명이 참가한 거국적 독립운동이었다. 전국적으로 퇴학처분을 당한 학생이 582명에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이 2,330여명에 이르고 경찰에 검거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만도 1,642명이나 되는 큰 사건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지역의 국부적 항일운동이 아니라 전국적인 민중 항일운동이었으며 오랫동안 신간회와 각급 독서회를 중심으로 계획된 조직적 민중운동으로 소작인대회와 동맹휴학 그리고 6․10만세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3․1운동 후 10년만에 일어난 최대의 민족투쟁이었다. 경북산악회를 중심으로 한 대구․경북의 산악인들이 이 날을 기념하는 「학생의 날」을 맞아 등산경기를 통하여 광주학생사건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인내력과 투지력, 협동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1959년의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10월에 3박 4일 동안 팔공산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인 학생운동일지라도 명칭이 광주학생사건인데 매년 이 날을 기념하여 대구의 산악인들이 오늘날까지 계속하여 전국 등산대회를 개최하여주는 고마움에 광주 산악인들은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 그리고 이 대회를 시작할 때부터이제 광주에서 이 대회를 개최하면 어떻겠느냐또는이 대회를 광주와 대구에서 매년 번갈아 가면서 개최하자는 의견에 선뜻 응하지 못한 체 40년이 넘게 빚을 지면서 지내온다. 그리고 이 대회가 그 긴 역사 속에서 3박 4일의 경기기간이 1박 2일로, 16km구보경기가 8km로 단축되어 초기의 이념이 퇴색한 듯한 하여, 학생들의 과외활동 여건과 산악계의 열의를 아쉬워 한다.
팔공산의 사절들
광주․전남산악계는 어느 대회보다도 팔공산의 전국60㎞전국등행대회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대구산악인에게 고마워하고 있으며 1960년의 제2회 대회부터 매년 심판과 선수들을 파견하여 오고 있다. 이 영향으로 광주․전남의 초창기 산악사는 대구의 얘기로 시작하며 그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1960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팔공산에서 열린 제2회 대회에 무등산악회는 오종태회원을 심판으로 처음 파견하였고 제3회 대회가 열린 1961년10월21일-24일의 대회에도 무등산악회는 오종태 당시 부회장을 심판으로 다시 파견하고 전남대학교 산악회가 선수를 출전시켰다. 전남대학교 산악회가 등산대회라는 경기에 처음 참가한 것이며 전남지역 산악인의 최초의 출전이었다. 1962년 10월 20일-23일의 제4회 대회에도 오종태심판과 전남대학교 산악회가 참가하고 광주일고 산악부가 붉은 베레모로 처녀 출전하여 전국의 산악계에 선을 보이고 인기를 모았다. 산악운동과 등산에 관한 체계를 세우던 광주․전남의 산악계는 이 대회를 통하여 산악운동의 전개방향과 산악회의 운영, 등산대회의 운영방법과 등산장비, 등산식량, 등산기술, 산악정신을 도입하는데 열의를 다하였다. 그 후에도 무등산악회는 매년 심판과 선수들을 파견하였다, 1963년 5회 대회엔 신귀현간사를, 1964년 6회 대회에는 다시 오종태와 최명섭선생을, 1965년 7회 대회와 1966년 8회 대회, 1967년 9회 대회에 이어 1969년의 11회 대회까지 계속 신귀현선생이 심판으로 참여하다, 1970년 12회 대회부터 임춘재에게 전국60km극복등행대회의 심판을 인계하고 70년대를 맞게되었다. 1961년의 제3회 대회에 참가한 선수는 당시 전남산악계의 리더들인 임춘재(공대3)를 대장으로 하여 김훈봉(상대3), 김승철(법대2), 박윤성(공대1), 서찬식(공대1)이 출전하였으며 임춘재는 다음해에 전남학생산악연맹 창립의 산파역이 되고, 김훈봉은 90년대에 광주전남 산악연맹 회장으로 봉사하였으며 김승철은 현재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으로 새천년의 한국산악운동의 중책을 맡고있다. 4회 대회에는 전남대학교와 일고산악반이 참가하였다. 전남대학 팀으로는 서찬식(공대2)이 대장을 맡아 심용택(상대2)과 농과대학의 1학년들인 정순택, 정기팔, 허정식이 출전하였다. 특이한 것은 3회대회에 출전하였던 인사들은 광주를 지키며 산악운동을 계속하고 있으나 4회대회에 참가하였던 선수들은 거의 광주를 떠나고 정순택만 남아 이 글을 쓰고 있다. 광주일고 팀은 박주근과 같이 김장영, 이병림, 조광용, 최임일, 권현채와 김택곤등이 선수와 옵서버로 참가하였으며, 특히 4회 대회는 도봉산 특수체육대회와 겹쳐 선수선발과 장비확보와 준비로 부산을 떨던 시기였다. 1963년의 5회 대회에도 고교를 졸업한 김장영, 최창돈과 재학생인 이병림, 최임일 등이 고등학교부로 출전하였다. 광주일고산악회에서 활동하던 김장영과 최창돈은 이후 전남대학의 공대, 문리대에 입학하여 전남대학산악부에서 활동하면서 대학산악운동의 영역을 확장하고 알피니즘의 길을 열어 전남산악계의 기둥이 되었다. 김장영은 1964년 전남대학에 입학하여서도 대장을 맡아 1964년의 6회 대회와 7회대회에 계속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으며, 전국60㎞극복등산대회의 최다 출전선수가 되었다. 최창돈은 70년대 초에 마나스루 2차원정에 참여하여 히마라야로의 길을 열었으며 크라이머 크럽인 바자울 창립을 주도하였다.
Alpinism과 산악문화 확산
광주의 산악계는 자체 등반을 계속하면서도 산악운동 선진지역의 등반기술과 산악문화를 도입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외국의 산악서적과 세인봉, 입석, 원효계곡에서 실시한 자체 산악강습으로는 그 욕구를 충족할 수가 없었다. 산악문화와 등반기술의 이전방법으로 전국적인 산간학교와 등산대회의 참가에 참가하여 배워오는 방법과 서울이나 대구의 전문 산악인을 초빙하는 방법이었다. 전남대학교 산악부는 한국산악회의 최영식(1975-1980 한산이사, 1990-1995 한산감사)씨를 초빙하여 1959년 7월 19일 무등산 규봉에서 광주 최초의 록 크라이밍 강습회를 가졌다. 정종, 고재기교수와 배필상이 참석하고 김용석, 신귀현, 기양도, 임춘재, 박종현, 김훈봉이 참가하여 자일 메듭법, 확보, 암등과 하강, 침니통과 등을 실기로 가르치고 배웠다. 이 훈련방법과 기술이 후일 광주 암벽등반의 원전이 되었으며 광주에서 유일하게 나이론 자일(일본 동경제망회사제)을 갖고있던 기양도는 그 자일을 아무에게나 빌려주지 않아 그 주가가 매우 높았다. 자일을 빌리지 못하면 보이스카웃의 대마자일이나 군용 나이론 보조자일을 여러겹으로 겹쳐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창립멤버들인 정종교수는 동국대학으로, 신귀현은 재학 중 군에 입대하였으며, 김용석은 1960년 졸업하고 군대를 거쳐 장흥으로 내려갔다. 기양도는 후에 전남대학교 대학원으로 복귀하였으나 성균관대학으로 전학 가고, 박석일은 붉은 다우다 윈드쟈켓 입고 나홀로산행으로 빠져나가 자연스럽게 임춘재, 김훈봉, 박종현, 김승철, 최동식, 김용옥, 남상만, 장하송으로 학생산악활동의 맥이 이어지고 이들이 선진 산악기술도입에 앞장섰다.
1961년 4월 1일부터 2일까지 1박 2일로 대학산악부 출신인 한국산악회의 남궁기, 이은종, 송구섭을 초빙하여 무등산 세인봉에서 암벽등반 지도를 받고 실기훈련을 하였다. 강사로 초청된 송구섭은 경기고와 서울공대 산악동호인 라테르네 멤버이고, 이은종은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독일과 합작으로 창설중인 광주인근의 호남비료에 근무하면서, 연수차 독일에 체재하는 동안 1959년 스위스 로렌라우어 등산학교 개교 20주년 행사에 한국산악회 축하사절로 참가하였다가 로렌라우어 등산학교에서 교습을 받은 정통 크라이머 이었으나, 이번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은종은 이에 앞서 고재기교수, 기양도와 세인봉 선두암에서 하강훈련을 지도한 바 있어 서로 친숙하여진 관계였다. 한국전력에 근무하던 남궁기는 후일 한산의 해외원정대 부대장으로 적설기 설악산 해외원정 훈련중 조난당한 산악인으로 당대의 최고급의 전문산악인을 초빙한 것이다. 이 행사는 무등산악회와 공동으로 개최하여 무등산악회의 고재기, 박선홍, 오종태, 이남열, 최명섭등과 전남대학 산악부의 임춘재, 김훈봉, 박종현, 김승철, 최동식, 김용옥, 박윤성, 남상만, 장하송, 서찬식등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산악반과 일반 산악인들도 다수 참가하여 대 성황을 이루었다. 광주 산악계가 대구지역의 산악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계기는 또 하나의 대구산악운동의 핵심인 김기문형이 광주에서 군대생활을 하면서 광주의 산악인들과 자주 접촉하였다는 것이다. 1961년 상무대에서 군 복무하던 경북의 김기문형을 위문하기 위하여 광주에 온 서해창과 임문현은 임춘재, 김승철과 함께 입석대에서 록 크라이밍을 하고 광산동 김승철의 집에서 유숙하면서 밤새도록 산과 등산, 알피니즘의 얘기로 새우며 한국의 산악운동, 경북지방의 산악운동과 앞으로의 광주지방 산악운동의 방향과 전개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경북학생산악연맹과 경북산악회는 1960년부터 가야산 하계산간학교를 시작으로 2회(1961년)는 금오산, 3회는(1962년)는 소백산 희방사에서 개최하여 산악활동의 체계화와 확산에 노력하고 있었다. 1961년 7월 25일부터 8월 1일까지 금오산 채미정 부근에서 개최된 제2회 하계산간학교에 무등산악회 회원이면서 전남대학 산악부장인 임춘재와 법대의 김승철이 참가하여 등산학교의 체제와 교과과정 및 운영방법을 배워왔다. 1962년 폭우속의 소백산 희방사 마당과 법당에서 1962년 7월 28일부터 8월 3일까지 열린 제3회 하계산간학교에는 당시의 오종태 무등산악회 부회장과 전남대학의 신귀현과 김승철, 정순택이 참석하여 선진 산악운동과 등반기술을 배워오고, 이 산악운동 체재를 전남학생산악연맹을 조직하여 보급하고자 하였다. 산간학교가 열린 희방사까지 가기만도 어려운 길이었다. 광주에서 27일 7시 호남선 기차로 출발하여 대전에서 경부선으로 갈아타고, 대구에 새벽에 도착하여 28일 8시 하계산간학교 일행 70여명과 지방간선 영천행으로 출발하여 다시 중앙선으로 바꾸어 타 희방사역에 오후 3시에 내려, 희방사까지 6㎞의 길을 걸어 6시에 캠프사이드에 도착하였으니 24시간이 소요된 긴 여정이었다. 전남대학산악부는 산악운동의 확산과 고등학교산악반의 육성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1960년 6월 4일 광주일고, 광주사레지오여고, 광주숭의실고를 순회방문하여 장비전시회를 개최하고, 김용석 신귀현 기양도 임춘재 김훈봉의 산악강좌를 열어 큰 호응을 얻고 고등학교산악반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교산악운동과 일고산악회
1950년대 광주의 고등학교 산악활동은 광주일고, 광주고, 전남여고, 광주여고, 광주공고, 광주사범, 조대부고, 전남의대 간호고 등이 자연학습과 심신연마와 체력단련을 위하여 집체훈련으로, 전교생을 무등산으로 안내하기도 하고, 학도호국단 조직에 등산반이 편성되어 등산과 야외활동을 지도하였으나 산악운동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체계적인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도호국단의 등산반은 독자적인 취미크럽이나 친목단체를 결성하여 50년대 고등학교 등산활동의 기틀을 잡고 그 맥을 이어 대학산악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중․고등학교의 서클활동은 교장선생님의 의지와 유능한 지도교사에 의하여 진작되듯이, 전남여고 광주서중과 광주일고 광주고 광주공고는 전남대학의 산을 좋아하는 교수들과 산행을 같이하여 온 장준한교장 정근모교감이 광주의 중․고교를 순회 근무하시면서 학생들의 과외활동으로 등산을 추장하시어, 이들 학교에선 일찍 등산반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대학입시의 과열과 서클활동의 중단으로 그 연역을 더듬기 어렵고 당시의 교지나 기억을 수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광주농고 3학년인 최동식 일행은 1959년 하계 한라산 등반 후 사라호 태풍으로 배편이 막혀 일주일을 식당에서 국밥을 사먹으며, 빈손으로 기숙하고 겨우 경주호를 타고 돌아오고, 어려운 시대이지만 무전여행을 받아주는 사회분위기는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과외활동을 북 돈아 주었으며 특별한 취미활동이 없던 때 학생들에게 여행과 등산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광주일고의 경우 1959년 8월 광주일고 3학년이던 안장환(농장경영) 등산반장은 등산반원인 최병기(회사원), 남상만(사업), 노진영(대학 총장), 김종철(치과의사)등과 전남대학의 김주한, 박경석과 같이 2박 3일의 지리산 반야봉등반기록이 있다. 당시의 고등학생들에겐 무모한 산행이었으나 군용 워카에 륙샥을 메고, 군용 포라텐트를 돼지평전에 치고 야영 할 정도 체제를 갖춘 등산으로 고등학교 산악활동도 급속히 개선되었음을 시사한다. 지도도 없이 페인통을 등에 지고 지리산의 바위에, 구전을 수집하여 찾은 지명과 자기 이름을 낙서하며 야영지의 지명도 모른 체 쓰러져 야영하는 등산이지만, 우리강산을 알고 산이 주는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순수한 출발이었다. 1960년의 등산반의 활동은 당시 3학년이던 김형곤의무등산의 마루에서(무등 42, 1961)기록으로 그 활동상을 읽을 수 있으며 1960년엔 박주근이 등산반에 참여한다. 1960년 4․19학생의거 후 학도호국단이 학생회로 개편되고 1961년 5․16혁명으로 재건학생회로 재편성되면서 1961년 고광민선생님 지도하에 광주제일고 산악회가 창립되고 초대회장에 2학년인 김양진이 선출되었다. 2학년과 1학년인 오병수, 김장영, 최창돈, 송용남, 김택곤, 김용구, 이병림, 박희경, 최임일, 권현채, 조광룡, 서상룡, 박원영, 김인수, 마준용등이 주축을 이루고, 김용우, 조덕형, 허석들이 뒤를 이었다. 광주일고 산악회의 활동은 두드러져 지리산, 한라산을 비롯하여 월출산, 추월산, 조계산을 등반하고 1961년 전남일보주최의 제1회 등산대회와 1962년 제2회 대회에 이어 계속 참가하고 1962년의 제1회 특수체육도봉산 등산대회와 제4회 전국60km극복등행대회에 당시 광주일고 김양진회장과 김장영 각각 대장으로 처녀 출전하였다. 광주일고산악회와 일고 출신 대학산악회원들은 1964년 일고산우회를 결성하여 산악 신풍운동을 기도하였다. 광주고, 광주공고, 광주농고, 광주여고, 광주사범, 전남여고 등도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서클활동의 단절로 1950년대의 기록들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고, 역사는 계속되어야만 바로 평가받는다는 것을 절감한다.
사진설명
1. 광주학생운동기념 제4회 전국60㎞극복등행대회 개회식. 대구역전의 경북문화회관 광장
2. 대구 서해창의 1961년 무등산 입석대 등반. 군복무중인 김기문을 위문 온 대구의 서해창과 임문현은 광주의 임춘재 김승철과 입석을 올랐다. 이때 박아둔 귀한 하켄은 곧 일고산악회원들이 회수하여 갖었다.〈대구 임문현회장 제공〉
3. 광주에서 처음으로 전국60㎞극복등행대회에 참가한 선수들. 1961년 제3회 대회에 전남대학의 박윤성 서찬식 김승철 임춘재 김훈봉이 팔공산 공산초등학교에서 구보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광주 김훈봉회장 제공〉.
4. 일고산우회 창립총회를 마치고. 중앙열에 격려하여 주신 고재기교수, 신귀현 김승철과 회장 남상만 부회장 정순택 박주근, 서있는 이는 김장영
5. 월보 岳友의 창간호와 2호의 표지. 광주지역 최초의 월간 소식지로 30면 등사판으로 발간되었다.
6. 등산대회에 참가한 전남대학교 산악회원들. 전남대 산악회원수가 200명이 되고 여학생들은 거의 산악회와 관계를 맺은 때가 있었다.
7. 1960년대 지리산 노고단 야영장 〈광주 최명섭회장 제공〉
<광주편 4>
산악인의 등용문, 등산대회와 참가선수들
특수체육등산대회와 전남일보 주최 무등산 등산대회
산에서 서로의 경쟁을 부추겨 우열을 겨루는 등산대회가 어떻게 가능하며 산악단체가 산에서 달리는 경기를 주최할 수 있느냐는 비판의 소리도 있었으나, 해방 후 1949년에 시작된 등산대회는 저변확대를 통한 등산의 대중화와 생활체육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등행대회 또는 등산대회는 그 자체가 산악회 정회원이 되는 관문이자 산악인이 되는 등용문이기도 했다. 60년대에 등산대회 참가는 산악회의 큰 사업이었다. 등산대회가 상악회원의 정예화와 산악회의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바가 컸기 때문이다. 전국 등산대회참가 경력은 참가자의 기량과 산악회 내의 비중을 나타냈다. 등산대회 선수 경험은 군대생활의 무용담처럼 많은 사연과 추억을 간직하게 했다. 출전을 위해 여기저기서 빌려 조달한 군용 휘발유버너나 반합등을 닦고 광을 내어 수입 포장하고, 스푼과 포크를 구하기 위해 경양식 식당에서 고가의 식사를 하고 훔치기도 하였다. 80년대 프리클라이밍 정도의 암벽등반 장비로 새인봉, 입석, 의상봉의 암장에서 마자일이나 군용 보조자일로 오르면서 대회에 대비해 준비했지만 선구자적인 자긍심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광주 산악운동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60년대의 각종 등산대회는 주최하였던 어느 기관에서도 정리된 기록을 찾아볼 수 없고 대회에 관여한 산악인들과 선수들에 대한 기록도 몇몇 사람들의 기억에만 의지할 뿐이다. 한사람이 산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였던 시절을 그냥 묻어두기엔 아쉽기 그지없으나 그 기록들을 모두 발굴하여 이 글에서 완전하게 정리하기엔 힘겨운 일이다. 이 연재물이 초록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이 글을 통하여 잊고 덮어두었던 아름다웠던 정황을 들추어내어 보완 수정함으로써 광주와 전남 지역의 중요한 산악활동 기록들이 일관되게 정리되기를 바란다.
산악마라톤대회
해방 후 우리나라에 산악회가 결성되면서 곧 등산대회가 시작됐다. 등산대회라기보다는 크로스컨트리성 대회이었다. 한국산악회는 1945년 5월8일 제1회 일반․학생단체 등행대회를 개최했다. 첫 대회에 21개팀 63명이 참가하였었다. 진행방식은 하중과 주력 시합이 주였으며 3인 1조로 15kg의 모래를 서브색에 넣고 시간차로 효자동 창의문을 출발하여 450m봉 문수암을 거쳐 백운대 간을 달리는 속도경기였다. 오늘의 산악마라톤대회와 같이 진행되었다. 이 대회에서 2시간 23분 15초 기록으로 주파한 백악회의 최영식 문행 김종선팀이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를 통하여 백운암터에 짓기로 한 백운산장 개축용 모래를 운반하는 효과를 얻었고, 우승한 최영식은 10년 후 무등산 규봉에서 광주 산악인에게 암벽등반을 전도했다. 이 대회는 1950년 4월30일 2회 대회를 개최한 후 한국전쟁으로 계속되지 못하고 1955년 5월22일에야 3회 대회를 계속하여 1961년의 9회 대회까지 지속되다 중단되었다. 오늘날 서울 산악계의 중진으로 참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등행대회는 산악인의 등용문 기능을 했고, 저변확대와 대중화에 공헌했다. 이와 유사한 대회가 1957년6월10일 광주무등산에서도 시도됐다. 조선대학교 동창회가 주최한 6.10만세 기념 무등산 등산 전국대회다. 광주 충장로1가의 조선대학교 동창회관을 출발하여 무등산 정상을 답사하고 되돌아오는 경기로, 주로 참가한 중고등학생들은 1조 5명으로 하여 운동복이나 팬티만 입고 달리는 경보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한 당시 광주 사레지오 중학교 2학년생이던 김내영(57.전남축산기술연구원)은 최초로 관문을 통과한 현역 산악인인 셈이다. 이 대회는 이동식 당시 조선대학교 동창회장의 지원과 심판장 최일출 선생에 의해 1959년까지 계속되어 무등산과 산악운동에 관한 일반의 이해와 참여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전국60km 극복 등행대회
광주 전남 산악계는 팔공산의 전국60km 등행대회에 60년대엔 매년 심판과 선수를 파견하였다. 제2회 대회의 오종태 선생 이후 신귀현 최명섭 임춘재 박향식들이 심판으로 참여하고, 전남대 광주일고 조선대 산악회원들이 선수로 출전하였다. 광주에서 이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연례행사 중 가장 의미있는 사업이었고, 참가한 선수는 개인적으로 큰 영예이었다. 앞서와 같이 1961년 제3회 대회에 임춘대(공대) 김훈봉(상대) 김승철(법대) 박윤성(공대) 서찬식(공대)이 제4회 대회에는 전남대학과 광주일고 산악반이 참가하였다. 전남대학팀으로는 서찬식(공대) 심용택(상대) 정순택 정기팔 허정식(농대)이, 광주일고팀엔 김장영 이병림 조광용 최임일 권현채 등이 출전하였고, 1963년 제5회 대회에도 고교를 졸업한 김장영 최창돈과 이병림 최임일 등이 고등부로 참가하였다. 1964년 제6회 대회에 전남대학의 김장영(공대) 장기수(공대) 송용남(문리대) 이영석(농대) 박하연(농대)이 참가하고, 김장영은 1965년 전남대학 산악회장을 맡아 제7회 대회에 송용남 (문리대) 장기수(공대) 임영호 임근태(공대)등과 제8회 대회에는 박향식(공대) 최영진(섬유3)들과 1962년부터 계속 선수로 참가하는 기록을 세웠다. 1966년 제8회 대회에는 전년도 에 창립한 조선대학 산악회도 출전했다. 조선대 산악회장 서용욱(2)을 대장으로 하여 이기량 황윤홍 정형기 박현수가 촐전하여 산악계에 선을 보이며 선전했고 다음해 제9회 대회에도 조선대학과 전남대학이 출전했다. 조선대학 산악회는 전년도의 대원인 서용욱 윤양현 정형기 박현수가 다시 참가하고 전남대학은 김장영 최영진 황윤홍(농2) 박향식(광산2) 김재일 서정원 박인진 차운재 박장일 오민교 신연식 박재황 정금성 박종민 장연우 박병석 등 선수 5명과 옵서버 16명 등 대거 21명이 참가하였으나 구보상만 수상하게 되어 심판의 평가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회 참가를 회피하여 2년 간 팔공산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1970년 10월29일부터 11월1일에 개최된 제12회 대회에 전남대학교 산악회가 다시 이 대회에 참가하여, 대회참가 10년 만에 전남대학산악회(회장 최창돈)가 우승하고, 대회사상 처음으로 대회기가 대구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12회 대회엔 전남대 농과대학 산악회장인 이정옥(임학2)을 대장으로 하여 김나연(자원2) 양형열(금속2) 김명곤(수의2)이 가산산성 파계사 수숫골의 3박4일 산행과 양형열이 16km를 구보하면서 금이빨을 빠뜨려 가며 달려 귀한 종합우승을 차지하고 60년대 60km극복 등행대회를 마무리지었다.
전남일보 주최 무등산등산대회와 고등학교 산악부의 전성기
광주지역에 1961년 최초로 등산대회가 열리었다. 침체된 이 고장 산악인의 사기를 북돋우고 등산의 근본이념을 재확인하여 극복정신과 투지력을 함양함으로서 내일의 굳건한 역군을 양성하기 위한 취지로 제1회 무등산 등산대회가 1961년 11월12일 개최되었다. 이 시기에 이웃의 전라북도에서도 전북학생산악연맹이 주최하고 전주산악회가 주관한 시범 등산대회가 열렸다.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주최 제1회 무등산 등산대회는 전남산악회가 주관하고 전남북 지구 계엄사무소와 재건국민운동 전남도지부, 전남 문교사회국이 후원하였다. 대회는 일반․ 대학부, 남자 중․고등부, 여자대학․고등부로 구분하여 진행되었다. 경기는 5인1조 단체경기로 28팀 140명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70년대 직장산악회와 일반산악회를 주도하여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컸으며 지금 거의 50대 산악인들로 직간접으로 산악계와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다. 이때 남자중등부 참가학교로는 광주서중과 광주사대 부속중학, 남자 고등부엔 광주일고 광주공고 광주사대와 조선대 부속고교 여자고등부엔 전남의대 간호고 광주여고 전남여고 광주사대 여자부가 참가하여 광주시내의 몇 고등학교(광주농고 숭고 수피아여고 사례지오고)를 제외하고는 모두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대학부로는 전남공대팀과 전남농대의 A․B․C팀, 전남상대 A․ B팀 조선대 문리대, 광주사대가 출전하였고, 일반부로 자이언트, 충장로, 조선대 약대P클럽이 참가해 열전을 펼쳤다. 이 대회에 참가한 학교와 참가팀의 수가 당시 광주지방 등산활동의 상황을 보여준다. 광주공고가 A․B 2팀, 전남여고가 A․B․C의 3팀을 참가시켰다. 전남도 문교사회국이 참가를 독려하기도 했지만 광주서중․일고의 고광민 선생과 광주공고의 김달수 선생 등 우수한 산악지도교사들의 공이 컸다. 당일 오전 9시에 주최측인 전남일보에 집합하여 장비검사와 중량심사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광주 지역 최초의 등산대회인 이대회의 운영방법은 이후 20여 년 지속된 광주 지역 등산대회의 운영지침이 되었기에 자세하게 기록한다. 기본장비로는 ① 1식분의 식량과 부식, 취사도구 ② 내의 및 수통 ③ 우장 ④ 1식분 휘발유 또는 기타 연료 ⑤ 팀 표식기를 준비하도록 하고, 총 중량은 3관(11.25kg)으로 고시하여, 대회 전날까지 신입금(1000환)을 내면 참가신청이 되고 대회 전날 오후 6시에 주장회의를 가졌다. 표현은 오늘날과 비교하면 어색한 점도 있으나 처음으로 치르는 대회로는 좋은 시도였다. 입장식은 오전 10시30분에 가져 송호림 도지사의 격려사와 고재기 심판장의 심판요령과 주의 사항 설명에 이어 전남여고 2학년생인 김건숙양의 선수대표 선서로 마쳤다. 입장식 후 헌병 백차의 선도로 금남로와 충장로를 지나 학동 삼거리까지 줄과 열을 맞추어 시가행진을 하고, 학동 삼거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증심사와 중머리재를 거쳐 샘골에서 각 조별로 점심 취사를 하고 심판들은 취사준비와 식사상태를 평가하였다. 선수들이 취사도구를 준비하기 위해 광주 지방의 휘발유버너와 코펠, 반합이 모두 집결됐으나 그 수가 크게 부족하여 솥을 걸고 나무로 취사하는 팀도 많아 좁은 골짜기가 연기로 자욱한 밥 짓는 풍경은 중세 서구인들의 부족생활과 집시족을 연상케 하였다. 식단도 팀별로 다양했으나 광주여고 E팀의 혼식밥과 광주여고 A팀과 간호고의 재건밥은 심판들의 관심을 끌었다. 당시의 사회상과 이 대회의 열기를 짐작케 한다. 점심식사 후 오후 2시까지 팀별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갖고 장불재~입석을 거쳐 무등산 인왕봉에 올라 참가자 모두가 정상 답사식을 가졌다. 오후3시30분 정상을 출발하여 삼밭실~늦재~바람고개에서 증심사 입구로 하산, 오후 4시40분 제1수원지에서 장비와 중량검사를 하고 추첨에 의하여 남자부는 팀간 1분 간격으로 출발하여 구보로, 여자부는 도보로 학동을 경유하여 7km거리의 전남일보사옥에 골인하여, 어두워져 가는 늦가을 오후 6시에 시상식을 가졌다. 일반․대학부 우승은 전남공대, 2등은 일반부 자이언트팀, 3등은 광주사대, 감투상은 조선대 약대P클럽이 차지하였다. 여자부 우승은 전남의대 부속간호고, 2등은 전남농대 밀알회, 3등은 전남상대 여자부이었고, 장려상은 전남여고와 광주여고가 받았다. 남자중․고등부 우승은 광주일고, 2등은 조대부고, 3등은 광주공고 B팀, 장려상은 광주사범, 광주서중, 사대부중에 돌아갔다. 구보부문은 일반부의 자이언트팀이 31분 기록으로 구보상을 차지했다. 일반․대학부에서 준우승을 하고 구보상을 받은 자이언트팀은 대학 혼성팀으로 구성하여 최동식(전남대 수의학과) 장상백(한양대) 이봉규(광주사대 체육과)등이 출전하였다. 이 대회에서 전남대학교 농대와 상대의 여대생들이 의욕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특히 전남대 농과대학 산악부원인 이안숙 최경순 황순지 등 여대생회원을 참가시킨 밀알회는 이 대회 이후 밀알회의 연간사업계획에 등산대회 참가를 포함시켜 활발하게 활동을 펼쳐 계속 이 대회에 선수를 출전시켰다. 전남대 상대 여학생부는 오종태 선생의 여식인 오민자와 이경자등 7명의 여학생이 한중길(무역1)과 산행에 열심이었으며 이 대회에서 입상하였다. 대회 심사기준은 협동상태, 극복인내상태, 중량, 장비, 언어, 행동, 복장, 여가선용, 취사, 7km 경보기록등을 대상으로 등산활동의 전반을 평점하였다. 오늘날과는 사뭇 다르게 진지하였다. 대회가 계속되는 동안 무등산 정상 등정이 불가능하여져, 하산 코스가 원효사로 바뀌어 경보거리가13km로 길어졌으나 심사기준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제2회 대회는 1962년 6월3일 무등산악회로 주관 단체가 바뀌어 열렸고, 제3회 대회는 일정을 세 차례나 바꾸어 1963년 5월11일 무등산악회와 전남학생산악연맹 공동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제2회 대회 때는 참가비가 1000환이었으나 제3회 때는 화폐개혁으로 200원이었다. 이 대회를 통하여 만은 산악인이 배출되었고, 대회 참가경력과 좋은 기억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표에 나타난 1960년대 참가규모와 수상팀들을 보면 시대에 따른 산악단체들의 활동을 가늠케 한다.
1960년대 전남일보 주최 무등산 등행 전국대회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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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회 구 분 최우수 우수 준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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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일반․남자대학부 전남대 공대 자이언트 광주사대
61. 11. 12 여자고등․대학부 전남의대 간호고 전남농대 밀알회 전남대 상대
28팀 140명 남자고등부 광주일고 조대 부고 광주공고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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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회 일반․남자대학부 곡성죽동27경비중대 전남대 공대
62.6.20/40팀 120명 여자․고등부 전남농대 밀알회 전남여고 제1팀 전남여고제3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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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회 일반․남자대학부 전남대 농대 광주일고OB 전남대 문리대
63. 5. 11 고등부 광주일고 광주공고 소년단 제7대
12팀 58명 특수상(경보) 전남대 공대 소년단 제11대 순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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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회 일반․남자대학부 전남대 공대 전남대 농대
64. 5. 31 여자대학부 전남대 농대 전남의대 간호고
30팀 120명 남자고등부 순천고A 광주일고A 소년단 제7대
구보상 광주고 광주일고A 순천고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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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회 일반부 최우수 국회산악회 너덜크럽 전남대 교수팀
70. 5. 23- 25 남자대학부 전남농대(국회의장기) 조선대A 전북농대,전남공대
70팀 280명 여자대학부 전주간호대(문교장관기)조선대B 전남문리대
남자고등부 광주상고(교육감기) 전북전라고 광주숭일고A
여자고등부 광주여고 광주여상고
종합상 명지대(국회의장기) 광주상고(문교장관기)광주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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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회
남자 일반 전주시청
71. 5. 1- 2 여자일반 우보회C 전남대 교수팀 들소,광파,호비,한전
38팀 152명 남자대학부 전남대 조대공전 조대공대
여자대학부 전주간호대 전남대 명지대
남자고등부 배재고 동신고 광주고,전남고,숭실고
여자고등부 광주여고C 광주여고A 광주여고B
경보상 조대부고A 조대부고C 조대부고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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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전국학생특수체육대회
군사정부 때인 1962년 10월7~8일 1박2일의 일정으로 한국특수체육회가 주최한 제1회 전국 특수체육회 도봉산 등산대회에 전남대학의 A․B 두 팀과 광주일고 산악회가 참가하여 서울로의 길을 열었다. 전남대학은 남상만 박윤성 서찬식 박원정이 A팀, 최동식 김용옥 김윤환 김윤걸이 B팀으로 출전하였다. 전남대A팀은 남상만을 대장으로 한 공과대학 2학년 회원이 참가하고 B팀은 농대 3학년 최동식을 대장으로 하여 상대와 문리대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광주일고 팀으로 김양진 김장영 최임일 권현채가 참가했다. 10월7일 오전 8시30분 중앙청에 집결하여 오전9시 개회식을 갖고 오전10시 출발하여 서울운동장에 다시 집결, 오후 1시10분 자동차편으로 광릉고교로 이동해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2시10분 광릉임업시험장을 견학한 후 막영을 하고 오후 5시에 장비검사를 받았다. 식사 후 오후 8시부터 캠프파이어와 전남대학을 비롯한 각 팀의 소개와 여흥을 가졌다. 이때 등산대회에 출전하기 위하여 키슬링을 새로 양동시장에서 맞춤 제작하고, 외국 등산잡지에 소개된 곤색 니커보커즈를 만들어 입고 출전하여 새로운 패션으로 대회 참가자들의 인기를 모았었다. 다음날 오전 5시에 기상, 8시에 산행을 시작하여 광릉림~소리봉~입암리~장수원을 경유해 도봉산 입구에 들어 쌍룡사 계곡에서 중식을 하고 망월사~천축사를 거쳐 도봉리로 하산하여 버스편으로 시민회관에 도착하여 해산하였다. 9일 오후4시 30분 중앙청의 폐회식에서 모범상을 수상했으나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고 야간 열차 편으로 광주로 돌아왔다. 1963년 제2회 대회에도 전남대학은 남상만 산악회장이 대장으로 장하송(공대 3), 허정식과 정기팔(농대 2)을 출전시켰다. 이때 동국대 산악회, 서울농대 산악회, 이화여대 산악부 등 서울의 대학산악부와 우의를 다질 좋은 기회가 되었다. 광주일고도 김장영 최창돈 최임일 권현채를 출전시켰다. 조정 수영 등과 함께 등산을 특수체육으로 장려하는 이 대회는 주최측의 지원이 많았고 중앙의 산악운동 경향을 접할 수 있는 행사로 지방 학생산악회의 호응도 좋았으나 이후 계속되지 못하고 중단됐다.
<사진설명>
1. 제1회 한국특수체육 도봉산대회에 출전한 전남대학 선수들(망월사에서 촬영). 박윤성, 박원정, 김용옥, 박윤걸, 최동식(B팀대장), 서찬식, 김윤환, 남상만(A팀대장)
2. 무등산등산대회를 마치고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인쇄소 광장에서. 금남로의 확장으로 지금은 헐렸으나 바로 옆의 보이스카우트 콘셋트 건물과 길 건너 YMCA건물은 산악인의 회의와 집합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3. 제1회 전남일보 무등산 등산대회의 시가행진. 응원단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jsqdqorck의선도로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를 돌아 학동 삼거리까지 군대식으로 행진하였다.
4. 제3회 전북 특수체육회 운장산 대회에 출전한 조선대학교 산악회원들(출발 전 조선대 본관 앞에서). 김상문, 이도형, 이재복, 서용욱, 황윤홍, 민긍규, 이기량, 박현수, 정형기 제씨.
5. 제12회 전국 60km 극복 등산대회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전남대학 선수들(전남대 본관 앞). 대장 이정옥, 김나연, 김광형, 고명권, 양형열 제씨. 전남대학교가 대회 출전 10년만에 우승, 우승기가 처음으로 대구를 벗어났다.
6. 무등산 등산대회 참가 선수들의 레크레이션 경연. 샘골에서 점심 취사하고 억새가 우거진 장불재에서 입석과 서석대 백마능선을 뒤로하고.
〈광주편 5〉
무등산 정상의 폐쇄와 알피니즘 개화
전남학생산악연맹 창립과 바위 찾아간 사람들
하루의 살림살이 어깨에 짊어지고 산사람 가는 곳은 낭만의 세계라네, 60년대 초에 부르던 산으로 또 산으로의 도입부분이다. 편하고 낭만적인 노래다. 그러나 곧 이어 검푸른 산악자이안트숨은 벽가로 산노래에 힘이 실리고 거칠어졌다. 전하여다오 산우여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전하여다오 아버님께 사내다웠다고․․로, 유언을 하는 듯한 로제 뒤푸리의 가사와 애조에 비감하여 진다. 산악사가 등정자에게 보내는 박수보다는 조난자의 엘레지이듯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조난자들이 산악인들에게 어느덧 영웅으로 자리하고 알피니즘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산악활동의 변천을 그들이 애창하던 산노래에서 보게된다. 산노래는 전국규모의 등산대회나 산간학교에 참가한 대학산악부를 통하여 빠르게 전파되었고, 산노래를 아는 정도를 산악회원의 경력으로 삼았다. 모든 선도적 사회운동이 그러하듯 광주의 초기 산악운동을 대학산악부가 주도하였음은 당연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학생만이 사고와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때 학생들의 역할은 컸다. 특히 산악활동은 그의 무대가 산이라는 동질성과 이산 저산으로 타 지역을 왕래하여야 하는 특질상 산악회와 회원간 강한 응집력과 연대감을 갖고 정보의 교환이 비교적 용이하여 그의 변화 속도가 빨랐다. 일찍이 대학산악부는 서구의 알피니즘을 이 땅에 도입하였고 국토구명사업, 국토애, 자연보호활동 등을 계몽적 입장에서 주도하였으며 우수한 지도인력을 양성하여 보급하여 왔다. 60년대에 잠재적 능력을 배양한 대학산악부원들은 70년대의 산업사회에서 직장산악회의 중추세력이 되었으며 산악활동의 활성화와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전남학생산악연맹창립
도봉산의 특수체육대회와 팔공산대회를 다녀온 전남산악인들은 학생산악연맹의 창립을 시급한 일이었다. 위의 두 대회들이 학생산악연맹에 의하여 운영되고 학생산악운동의 활성화가 산악운동을 지속적으로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학이라곤 전남대학과 조선대학 그리고 2년제의 광주사범대학이 있을 뿐이었으나 전남대학과 광주사범대학(광주교육대학 전신)에는 산악회가 결성되었고 조선대는 등산클럽은 있었으나 정규 산악회로 조직되지 않았었다. 전남대학의 임춘재는 조선대와 광주사대의 대표와 공동명의의 전남학생산악연맹의 발기취지문을 석판으로 인쇄하여 돌리고, 1962년 10월 30일 금남로의 보이스카웃 콘세트 건물에서 3개 대학과 광주일고, 광주공고산악부로 전남학생산악연맹 창립총회를 가져 6장 26조의 회칙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초대회장엔 박인천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이, 부회장엔 이남열 무등산악회 부회장이 추대되고 대표상임위원엔 전남대학의 임춘재, 고등학교 상임위원은 광주일고 3학년인 김장영이 지명되었다. 초대 박인천회장은 달리는 호남천리 곳곳마다 광주여객의 사장이면서 무등산개발추진위원회 회장을 맡아 광주 산수동에서 원효사까지의 도로를 개설하고, 원효계곡 의상봉 아래에 1961년 무등산 산장호텔을 건축하면서 무등산을 개발하기에 많은 노력을 하던 중이었다. 박회장은 준공된 호텔의 원효계곡 건너편에 200여평의 학생산악연맹 캠프사이드를 마련하여 주었다. 이 캠프사이드에 철제의 작은 입간판을 세우고 학생산악연맹의 야영장과 의상봉 스라브연습 베이스로 오래 이용되었으나, 이전등기가 되지 않고 개발붐에 밀려 자연스럽게 철수되었다. 초기의 전남학생산악연맹은 적극적으로 참여한 단체가 전남대 광주일고 광주공고정도이어서 거의 모든 행사가 전남대학교 산악부의 행사와 합동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2대 회장으로 조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최정기 공화당 전남도당위원장을 추대하고 오종태, 신귀현, 김장영이 방문하여 취임승락을 받으려 하였으나 확답을 얻지 못하고, 1964년 3대회장으로 산악활동을 계속하여 온 손상우사장(무등산악회, 광주냉동, 광주직의공사, 백마메리야스공업사)과 부회장으로 최명섭 합동통신 전남지사장을 추대하고, 사무실을 구 법원통에 있는 최명섭 부회장의 합동통신 전남지사의 2층 사무실로 정하였다. 손상우회장은 1970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힉생산악연맹을 운영하는 실무 책임자인 대표상임위원으로는 초대 임춘재의 뒤를 이어 1963년 남상만(전남대), 1964년 정순택(전남대), 1965년-1966년 김장영(전남대)이 선출되었다. 1967년의 대표상임위원은 조선대의 서용욱이 국제예식장에서 열린 총회에서 경선하여, 투표로 선출되었다. 1965년 창립한 조선대학교 산악회는, 이제는 조선대가 대표상임위원을 맡아야 한다는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 뒤의 1968년엔 박향식(전남대), 1970년 최창돈(전남대), 1971년 김상문(조선대)으로 이어져 70년대를 맞게되지만 이후 10년간 전남학생산악연맹은 1969년 창립된 전남산악연맹의 활동에 합류하게 되어 긴 잠을 자게된다. 등산활동을 통하여 학생산악회 상호간의 단결과 산악인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산악일반에 관한 연구 및 지도장려와 등반훈련을 통해 인내와 감투극복정신을 함양함과 아울러 산악운동을 통한 영원한 젊음의 구현을 목적으로 창립한 전남학생산악연맹이 꿈을 접은 체 긴 휴면기에 든 것이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 고등학교 산악부의 활동이 정지되어 학생산악연맹은 대학학생산악연맹으로 개편되어 활동의 영역이 축소되었으며 대학산악부는 고등학교산악부로부터 교육된 회원의 수혈을 받을 수 없게 된 것도 학생산악연맹이 침체의 길로 들어서게 한 원인이 되었다.
소식지 岳友 창간
한 걸음 또 한 걸음 올랐다. 심장은 심하게 뛰며 숨이 헐떡이었다. 호흡이 가라 안기를 바라며 계속 걸었다. 이러한 수천의 발자국은 내가 20여년 동안 가졌던 꿈의 하나를 실현시켜 준 겄이다. 나는 23,000피트 에베레스트 노스 콜의 빙설 위를 걷고 있다. 에베레스트의 북면은 오후의 따사한 햇볕을 담뿍 받으며 내 앞에 엎드려 있다. 전남대학교의「岳友」(악우)지 창간호에 당시 라이프지에 투고된 W.W.Sayre의 에베레스트 습격대를 남상만회장이 번역하여 게재한 연재물의 서두이다. 소식지는 그 모임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방한다. 조직이 확산되고 안정기반에 들어선 전남대학교 산악회가 히마라야의 고산 거벽에 관한 강한 의지를 표현한 기획기사이다. 1963년 6월 15일 30면 등사판의 기관지인 월보 「岳友」(악우)를 창간하였다. 월보로 창간하였으나 년보가 되고 그것도 거르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까지 계속 발간되고 있다. 1963년 4월 17일의 정기총회는 4대 김승철 회장의 후임으로 남상만(공대 3)을 5대회장으로 선임하고 총무로 정순택(농대 2)을 지명하였다. 남상만회장은 루문동 집에 산악회 캠프를 차리고, 고등학교와 공대에서 산악활동을 하여온 경륜을 펼치면서 월보창간, 공동장비 확보, 전남지역 산의 학술조사, 산악장비 전시회, 산악강습회, 10월의 산악제, 12월의 적설기 등반등 의욕적인 사업계획을 세우고 그 첫 사업으로 6월에 월보 「岳友」를 창간하고, 7월에 30면의 7․8월 월보 「岳友」2호를 발간하였다. 「岳友」창간호는 첫 면에 아마놀드의 산시를 실어 하얀산에 대한 동경을 담았다. 이어 그때까지 정리되지 않은 전남대학교 산악회의 기록을 조사하여 전남대학교 산악회의 이력을 정리하여 게재하였으며, 한국산악회에서 제정하여 배포한등산하는 사람들의 계명, 연재물인 신귀현의 독도법, 산악회소식, 무등산지도 등을 내용으로 하여 소식지와 등산교육겸용의 취지를 살렸다. 당시엔 1960년에 창간된 서울 문리대산악회와 부산산악회의 월보를 통하여 산악회의 동정을 전해 볼 수 있었을 뿐이었고, 일본의 산악잡지 외엔 등산에 관한 국내 서적과 자료가 부족하여 경북학생산악연맹이 1961년 펴낸 최초의 산지인 「山岳」(산악, 268면, 1961. 5. 10)과 1962년 손경석선생의 「山岳百科」(산악백과, 4․6판 462면, 1962. 7. 2), 경희대의 박철암교수가 1962년에 다울라기리 Ⅱ봉을 정찰등반하고 돌아와 단행본으로 발간 한 「히말라야」(4․6판 316면, 1963. 12. 9)가 산악인에겐 경전처럼 여겨지고 애독되었을 정도이다. 수락산우회는 1964년에 최초의 산악동인지 「山」(산, 50면, 1964. 3. 1)을 창간하여 전국 산악단체의 활동내역과 정보를 제공하여 중요한 자료로 삼았다. 전대산악회는 1964년 3월 28일 보이스카웃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정순택(농대 3), 총무에 김장영(공대 1)을 선출하고 각 단과대학 산악회장도 공대 정수현(4), 농대 정기팔(3), 문리대 박윤걸(3), 상대 심용택(4), 여학생회장 황순지(농4)를 선임하여 명실공히 종합대학산악회로서의 조직을 강화하여 60년대 전반기를 마쳤다. 뒤를 이어 김장영(공대 1965~1966), 박명선(문리대 1967), 박향식(공대 1968), 김용우(법대 1969), 최창돈(문리대 1970), 이정옥(농대 1971)이 각 년도에 산악회장을 맡고 박종민, 정금성, 차운제, 오민교, 장연우, 지덕신, 박춘화, 김재율, 박병석, 정창영, 정태영, 박현문, 김재일, 신한봉, 정찬승, 제갈호일, 조은채, 신연식, 이정상, 임백환, 김하경, 최정호, 양형렬, 김나연, 유종태, 이준호, 윤기현, 정부흥, 김준성, 김선지, 심근 등 기라성 같은 대학산악부원이 활동하던 전성기를 갖고, 70학번인 공대의 김평중(토목)에게 1972년의 산악회장을 인계하고 60년대의 산악활동을 정리한다. 그 후 박향식(1975-1980), 신한봉(1981-1983), 송희범(1984), 이정옥(1985-1992)이 광주․전남연맹 산악연맹의 전무이사, 박명선, 김재율, 김하경은 광주학생산악연맹 회장, 김용우는 대한산악연맹 이사를 맡아 전남의 산악운동을 주도하였다.
선배보다 더 두려운 지도교수님들
전남대학교 산악회의 큰 특징은 오늘까지 서클 지도교수제를 유지하고 있고 그 지도교수의 지도력을 인정하여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고재기교수가 지도하던 산악회는 1967년부터 복수 지도교수제를 채택하고 1967년엔 김용선(사범대)교수, 1968년엔 이방기(법대)교수, 1969년엔 송정현(문리대)교수를 모시고 70년대엔 윤재룡(의대), 박옥규(의대), 김현곤(문리대), 정정의(문리대), 송기숙(문리대)교수가 참여하여 막강한 지도교수단을 구성하였다. 이방기, 김현곤 교수는 후일 전남학생산악연맹회장과 광주․전남산악연맹회장을 역임하고 윤재룡 교수(전 서남대 총장)는 지리산 종주등반 10시간 43분의 기록을 갖고 있으며 1987년 전남의대산악회의 히말라야 렌포강 원정대를 이끌었다. 윤교수는 1979년 10월 7일 6시에 25㎏의 베낭을 메고 중산리의 법계사를 출발하여 천왕봉을 오르고 세석평전을 거쳐 오후 3시 35분 노고산장의 함태식선생을 만난 다음 4시 43분에 화엄사 공원관리사무소로 하산하였다. 10시간 43분이었다. 60분 걷고 1분 쉬는 운행으로 그의 강인한 체력과 의지는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전남대학의 산악부 지도교수는 하나같이 학생에게 몽둥이를 들 수 있는 스승이었고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윤재룡 김용선 박옥규 이방기교수에 이어, 2001년 2월 10일 남창골에서 전남대학교 OB산악회(회장 정순택)가 마련한 김현곤교수의 정년퇴임 송공연을 끝으로 6, 70년대 지도교수님들이 모두 전남대학을 떠난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고 건강과 산운을 빌 뿐이다.
산악인 증명서 지리산․한라산 등반
광주지방 산악회의 가장 큰 행사는 지리산과 한라산의 장기등반이었다. 설악산은 교통문제로 엄두도 못내고 지리산이나 한라산은 다녀와야 산악인 대접을 받고 회원으로 떳떳할 수 있었다. 요즘의 히말라야 트래킹 정도는 되겠다. 전남대학교 산악회는 앞 호에서와 같이 창립하자 곧 한라산(1958년8월, 1960년8월, 1961년8월)과 지리산(1959년8월, 1961년8월)을 등반하고 1962년엔 1월 29일부터 2월 4일까지 무등산악회와 합동으로 동계 한라산등반을 하였다. 7월에 농대산악회(최동식, 김용옥등)가 지리산을, 8월엔 전대산악회(김훈봉, 고무석, 최원열등)와 일고산악회(최임일등)가 합동으로 한라산을, 공대산악회(박윤성, 장하송등)가 한라산을 등반한 후 바로 지리산을 A조(박윤성, 장하송, 한상철, 조병덕), B조(서찬식, 박원정등)로 나누어 등반하였으며, 무등산악회도 7월과 8월의 제3회와 제4회 하기등반을 전남대학 산악회와 공동으로 지리산에서 가졌다. 조선대학교 산악회는 창립하자마자 하계장기등반계획을 세워 한라산(1965) 지리산(1966) 한라산(1967) 그리고 매년 10월 추계 지리산등반과 1월의 적설기등반을 실시하였다. 법원산악회 일고산우회 너덜산우회들도 한라산과 지리산 등반 러쉬를 이루었으나 모두가 어려운 산행이었다. 특이 한라산등반은 배가 격일로 목포를 출항하고, 하계등반은 자칫 태풍과 겹쳐 발목을 잡았으며, 제주에 식량이 넉넉하지 않아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전남대학 산악회의 8월 한라산 등반도 그런 경우다. 등반대는 농대산악회장 박종현이 고무석 최원열 김수봉 정광진(고인) 한희수 와 상대의 정광근 김상인과 대를 꾸렸으나 박종현이 오지 않아 김훈봉을 대장으로 하여 광주를 출발하였다. 목포에서 태풍으로 묶인 제주행 배를 기다리며, 광주일고의 최임일 권현채 조광용 박원영등 7명을 만나 합동등반이 이루어졌다. 목포에서 격일제로 운항하는 경주호를 3일이나 기다려 가까스로 승선하여 제주에 도착하였으나, 마침 8월 2일의 태풍으로 물이 분 탐라계곡을 건너려던 전남공대 오태근(장성)이 조난을 당하여, 도립병원 영안실 안치된 시신을 조문하고 조난상황을 조사하였다. 김훈봉대장이 무등산악회로 전보를 보내 최명섭선생이 전남대 엠브란스를 목포부두에 대어 영구를 후송할 수 있었고, 하산하여서도 일행 15명이 같이 승선하지 못하였다. 전남대생 7명은 먼저 배를 타고, 남은 8명은 경리를 맡은 고무석과 최원열의 인솔로 여분의 쌀을 팔아 돈을 구하여 부둣가의 광주집에서 2일을 기다려서야 목포행 경주호를 탈 수 있었다. 대장은 영풍상사의 목포지사장인 무등산악회원에게서 돈을 구하여 2일 후에 목포로 들어오는 대원들을 맞았다. 한라산 등반은 모두 이렇게 어렵게 진행되었다.
직장산악회의 활성화
한국특수체육회 전남지부 발족기념 시범 무등산 등산대회
한국특수체육회 전남지부 발족 기념 시범등산대회(대회장 안용백)가 1964년 12월 23일 무등산에서 개최되었다. 한국특수체육회 전남지부(이사장 김기회, 지부장 안용백교육감)가 주최하고 무등산악회가 주관하였다. 등산활동을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하고 산악운동을 학생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가장 좋은 스포츠로 권장하여 발전시키기 위한 행사였으나 특수체육 전남지부가 결성된지 1개월 여밖에 지나지 않아 거의 모든 일을 무등산악회가 주도하여 이론도 많았지만 임원과 심판진에 당시 활동하던 광주지역의 산악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1964년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무등산악회 고재기회장이 신용우 지사, 김익열 CAC사령관, 전남대, 조선대 양 대학 총장과, 전남일보, 전남매일신문 사장들과 같이 고문을 맡고 특수체육회 산악담당 이사인 최명섭 무등산악회 회원이 부임원장, 무등산악회의 신귀현간사가 진행부장, 김달수, 김용석, 김승철, 남상만이 진행을 맡고 장하송이 행사가록을 담당하였다. 오종태 무등산악회 부회장이 심판장, 그리고 이남열, 박선홍, 김만서, 박원식, 김동주, 홍기근, 김주종, 신동범, 손상우, 채정구, 이성우, 김용석, 장하송, 최명섭, 신귀현, 김승철, 남상만들이 심판을 맡았다. 당시에 활동하던 기성 산악인들이 망라되었으며 심판 모두가 무등산악회 회원 일색이다.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산악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각팀 5인으로 하여 17개팀 85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준비에 비하면 참가선수가 적은 것이 지적되었다. 경기 날자가 12월 23일로 학생들이 겨울방학을 시작한 시기이어 학생들의 참가가 적었으나 일반팀과 직장팀이 다수 참가하여 직장산악회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 큰 수확이었다. 추운 시기이지만 날씨는 봄 날씨처럼 포근하여 경기 진행은 순조로웠다. 시합날인 23일 8시 반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경찰백차의 선도아래 학동삼거리까지 시가행진을 하고 제1수원지. 증심사, 중머리재를 거쳐 샘골에서 점심 취사를 하고, 오후에 입석 무등산정상 삼밭등 작전도로 바람고개에서 하산하여 증심사입구 학동 충장로 금남로를 거쳐 어두워 진 오후 6시에 전남도청에 도착하여 시상식은 후로 미루고 폐회하였다. 등반코스와 대회의 진행방법은 전남일보의 무등산 등행대회와 같았다. 그러나 이 대회로 인하여 4회째 계속되어오던 전남일보(현 광주일보)가 주최한 무등산등행대회가 1965년 이후 중단되었으며 1970년 5월에야 5회 대회가 속개되었다. 이에 앞서 전북에서도 같은 형태의 대회인 한국특수체육회 전북지부 발족 기념 제1회 집중식 시범등산대회(대회장 김용환)가 1964년 11월 5일부터 8일까지 4일간 운장산에서 열렸다. 전남대 산악회장인 정순택을 대장으로 정기팔 김장영등이 우정참가하고, 2회대회에도 전남대학은 김장영을 대장으로하여 장기수 송용남 박종민 박하연이 참가하였으며, 조선대 산악회도 1966년의 3회 대회에 산악회장 서용욱을 대장으로 하여 민근규 황윤용 정형기가 출전하고, 다음의 4회 대회에도 서용욱을 대장으로 하여 이기량 박현수가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전북의 이 대회는 오랫동안 개최되었고 광주에서도 계속 참가하여 1969년의 6회대회에선 조선대산악회와 광주상고산악회가 대학부와 고등부에서 각각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무등산 정상의 폐쇄와 암벽등반
1960년대에 전국의 산과 정상들이 군사 요충지가 되어 군의 시설이 들어서면서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군의 물자 보급을 위한 수송로들이 개설되었다. 광주의 무등산도 1965년 5월 16일에 무등산정상을 잠정폐쇄하고 무등산정상에 정상경비대를 위한 건물2동과 반공포여단 233대대를 주둔시키기 위하여 1207공병대가 6월부터 부대건물공사를 시작하였다. 군사시설이 완공되어 군이 주둔하면서 1966년 7월 1일 무등산의 중머리재와 원효사의 늦재에 초병을 배치하고 민간인의 접근을 전면 통제하여 장불재를 포함한 서석대 입석 규봉 등의 정상권 등산이 불가능하였고, 산악행사와 특별한 경우에만 출입이 허가되었으나, 그것도 장불재 위로의 등산은 금지되었다. 그 후 중봉에서 천왕봉 사이에 70여 동의 건축물과 10여개의 송신․중게탑이 들어서고, 원효계곡 주차장에서 이들 군시설까지 산허리를 타고 8.8㎞의 군과 통신시설의 수송로를 개설하였다. 따라서 무등산은 586미터의 중머리재와 동화사터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되었다. 이후 산악인들은 원효와 용추계곡에서 계곡등반 핑계삼아 소일하거나 일부는 세인봉 의상봉의 암장을 택하거나 아예 무등산을 떠나 월출산의 바위를 찾아 나섰다. 이제까지의 워킹중심으로 운영되던 산악회들은 무등산에서 더 오를 곳이 없어지게 되고 산악회 운영방법과 등반형태의 변화를 강요받았으며 이에 대한 회원간의 논쟁은 표면화되었다. 무등산의 폐쇄는 록․크라이밍과 인공등반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였으며 산악인들도 워킹그룹과 크라이머그룹으로 구분되어 정통산악인 또는 알피니즘의 시비가 계속되고 크라이머클럽의 출현을 재촉하였다. 제갈호일 최창돈 윤양현 김용우 박태규 정태영 박현문 김재일 신한봉 조은채 송희범 김하경은 바위 찾아가고 현문과 박춘화의 사랑은 익는다.
사진설명
1. 전남학생산악연맹이 세인봉 밑에서 개최한 산간학교의 새벽체조. 학생연맹이 주최하였으나 전남대학산악회와 일고산우회의 계획서는 각자가 주최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회장단과 임원진이 겸직하여 그 얼굴이 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2. 월보 岳友의 창간호의 목차와 2호의 표지. 광주지역 최초의 월간 소식지로 30면 등사판으로 발간되었다.
3, 1962년 너덜산우회의 창립기념 지리산 산행. 1962년 창립한 가칭 너덜산우회는 1965년 법원산악회와 같이 너덜크럽(현재의 너덜산악회)을 창립하여 주 1회 등산을 강령으로 정하였다. 너덜과 일고산우회의 활동은 이단으로 보이기도 하였으나 너덜은 버스를 대절하여 산행을 할만큼 등산을 대중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최명섭회장 제공)
4. 제주 한라산의 관음사 야영장에서. 한라산 하계등반은 배편과 태풍으로 어려운 산행이었다. 제주대학이나 관음사에 무거운 포라텐트를 쳐 야영하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좌로부터 이병기 송희범 김용우(대장) 강진철 이정상 조덕형. 김용우가 이끈 한라산등반에 57명이 참가하고 등반 후 목포의 정순택 집에서 유숙하고 홍도까지 (사진작가산악인 송희범 제공)
5. 월출산에서 림보 록. 산으로 또 산으로, 산사나이의 참 바람, 검푸른 산악, 쟈이안트, 숨은 벽가를 부르고 트위스트, 림보록을 춤췄다. 필자와 변동환교장이 픽켈을 잡고 정권섭 김명호도 이제 교장선생님이시다.
6. 제1회 전남특수체육 시범등산대회의 전남도청 앞 시가행진
7. 1965년에 출입이 통제된 무등산 정상권의 인왕봉, 천왕봉아래 경비대를 위한 텐트 막사 2동이 있었으나 1965년 영구막사 건축을 시작하면서 30년간 입석대 위로의 등산이 금지되었다.
〈광주편 6〉
^60년대 산악회 이념논쟁과 알파인클럽 탄생
일고산우회․ 조선대산악회․ 너덜크럽의 창립
일반산악회와 직장산악회의 활동이 활발한 오늘날도 각 산악회마다 산악회의 방향설정을 위한 논의가 그치지 않고 분쟁이 계속되고 분파가 생기며 더러는 산악회가 나누어진다. 산악회는 무엇을 하여야하며 그의 목표는 무었인가. 산악회는 어떠한 조직이며 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산을 등지고 앞을 돌아 흘러가는 강을 보며 살아온 우리에게 산은 어떤 존재인가에서 경모의 대상인가, 아니면 개발과 정복의 대상인가로 시작된 논쟁들이 불을 튀겼다. 산악회마다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뉘게 되었다. 국토와 자연을 배우고 사랑하며 꾸준한 산행을 통하여 건전한 정서과 체력을 함양하고 산악인과 사회를 계도하자는 워킹그룹의 의견과 등반이론과 기술을 체계적으로 훈련하여 하얀산, 고봉, 오지, 극지에서의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미지의 인간영역을 추구하는 서구의 알피니즘이 현대의 등반사조이고 이것을 산악회의 목표로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였다. 특히 대학산악부 출신 산악인과 일반산악인으로 조직 된 산악회일수록 이 문제는 심각하였다. 고봉과 하얀산이 없는 우리의 여건에서 낮은산은 높게, 쉬운산은 어렵게 오르는 자세와 산행을 가져야 한다며, 산행계획 단계에서부터 이견을 보이곤 하였다. 한쪽을 보수적이라 하고 다른 쪽을 개혁성향이라고 서로 비난하였다. 그리고 답사와 워킹중심의 산악활동에 반기를 들었다. 해방되기 전 1931년 조선총독부 지질연구소장인 다치이와(立岩嚴)박사에 의하여 설립된 조선산악회에 많은 경성제대 교수들이 가입하여 주축을 이루어 그들의 학문중심으로 등산활동을 계획하였으며, 2차 대전 말기에 투철한 민족정신을 갖고 국토보존과 전문등산을 하여온 엄흥섭회징과 김정태선생 등 백령회의 한국 전문산악인이 가입하면서 조선산악회의 운영은 삼화연료공업사의 전문산악인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들은 해방 후 산악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하여 국민의 심신을 연마하고 산악문화를 창달하자는 기치를 들고 조선산악회(후의 한국산악회)를 창립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해방후의 초기 광주지방 산악회의 조직상 특징은 산악회를 주도하여온 계층이 주로 대학교수 그룹이고 여기에 록 크라이밍 중심의 전문산악인과 사진작가와 화가등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왔으며, 참여한 전통산악인들과의 산악회 방향 정립을 위한 끝없는 이념논쟁이 계속되어왔다. 대학교수를 주도로 하여 산악회가 마치 학술단체인 듯한 귀족집단으로 보였다. 1950년대에 산을 가는 사람들은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산악인 외에도 제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대학에서 연구하는 교수그룹들은 생태학과 분류학을 하는 생물학자들과 임학자, 고고학과 민속학, 방언을 연구하는 민속학자와 국어학자 그리고 동굴과 섬들을 탐사하는 지질학자들과 화가와 사진가들 이었었다. 특히 사진작가 그룹의 산악활동은 괄목할 만하였다. 광주사진작가협회의 송진화선생과 사진작가인 강봉규 전남일보 기자를 중심으로 한 사진가들은 처음엔 그들의 작품활동과 취재를 위하여 산행이 불가피 하였겠으나 산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후일 광주산악계의 한 산맥을 형성하엿다. 광주의 초기 산악운동에 관광사업에 목적을 둔 사업가들의 참여도 주의할 대목이었다. 산을 중심으로 사업을 계획한 관광개발논자와 관광사업가들은 산을 보는 시각을 다양화 시켰으며 무등산 개발추진위원들의 활동도 주목되었다. 전남의 신설 산악회들도 다양한 목적을 포용하는 단체에서 출발하여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 산악회의 목표설정 이외에 중요한 의견대립은 산악회 조직의 운영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폐쇄적인 조직운영과 조직의 개방 주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대립은 초기의 한국산악회에서도 나타났다. 한국산악회의 융성과 침체를 분석하는 시각에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회장의 조직운영 방침에 그 원인이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더러는 3-5대 회장을 역임 한 홍종인회장의 독선과 지나친 폐쇄적인 회의 운영 또는 6대와 1973-1982년의 회장을 지낸 이은상선생의 회원 배가운동과 개방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회의 전통과 순수성을 유지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가 하면 그와 같은 보수성은 회를 침체시킬 뿐이라는 주장도 거 세었다.
전남일보(현 광주일보)산악인들
등산의 대중화는 산악운동의 질적 분화를 유도하게 된다. 1950년대에 산을 가는 사람들은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산악인 외에도 제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대학에서 연구하는 교수그룹들은 생태학과 분류학을 하는 생물학자들과 임학자, 고고학과 민속학, 방언을 연구하는 민속학자와 국어학자 그리고 동굴과 섬들을 탐사하는 지질학자들과 화가와 사진가들로 다양하였다. 특히 전남일보(현 광주일보)기자와 사진작가 그룹의 산악활동은 괄목할 만하였으며 항상 사회와 문화를 선도하여 온 언론인 그룹의 산과 등산에 대한 이해와 선도는 지방 산악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등산을 좋아하는 전남일보의 김종태부사장(후의 광주일보 사장, 전남산악연맹회장, 대한산악연맹 부회장) 최승호 공이송 김권중부장들과 사진작가인 강봉규 신복진 서영진 김한수등 전남일보 기자들, 광주사진작가협회의 송진화 선생을 중심으로 한 사진가들은 처음엔 그들의 작품활동과 취재를 위하여 산행이 불가피 하였겠으나 산에 심취하게 되었으며 후일 광주산악계의 한 산맥을 형성하였다. 김종태사장은 70년대에 전일산악회를 창립하고 허연 전남산악연맹회장의 후임으로 2대 연맹회장을 맡아 전남산악연맹을 재건하였으며 1981년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으로 봉사하였다. 김종태사장은 1970년 국회의장기와 문교부장관기를 유치하여 무등산등산대회를 전국대회로 발전시켜 주최하였으며 산악인의 활동과 해외원정을 후원하면서 전남산악운동을 활성화시켰다. 이 대회의 규모와 리셉션은 오래도록 전국의 산악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공이송사장은 학생시절부터 등산을 시작하였고 신문사에 재직하면서 최승호사장과 함께 많은 산악인들의 후견인이 되었으며, 후일 한국산악회의 전남지부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강봉규국장은 1979년 전남학생산악연맹 부회장으로 학산의 재건에 노력하였고, 신복진국장은 바자울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광주의 초기 산악운동에 관광사업에 목적을 둔 사업가들의 참여도 주의할 대목이었다. 산을 중심으로 수익사업을 계획한 무등산개발논자와 관광사업가들은 산을 보는 시각을 다양화 시켰으며 무등산 개발추진위원들의 활동도 주목되었다.
일고산우회 적설기 극지법등반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그리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르네, 박주근이 그답지 않게 애송한 기용 아뽈리네르의 시다. 필자의 하숙방에서 며칠을 지세우며 산과 산악회의 운영에 관하여 불같은 열정으로 변화와 개혁의지를 토로하였다. 이 지방의 산악운동이 무등산악회와 전남대학교 산악회 중심으로 타성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비판하고, 산운동은 근대적 정통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추진세력으로 일고산악회원, 대학에서 산악활동을 하고있는 일고출신의 산악인과 대학산악부를 규합하여 1964년 10월 30일 수기동에 신축한 축산조합의 밀크센터에서 고재기 신귀현 김승철선생이 참석한 가운데 일고산우회(Ilko Kamerad Klub, IKKK)를 창립하였다. 총4장으로 된 일고산우회 헌장을 정하고, 회장 남상만 부회장엔 박주근 정순택, 대표상임위원으로 김장영을 선출하고 10월 31일 빗속의 원효계곡에서 후줄근이 젖어가며 창립기념캠핑을 하였다. 11월 일고교내 월출산등행대회를 주최하였다. 일고산우회의 헌장은 등산을 스포츠로 연구하고, 스포츠 등산의 지도장려를 통하여 영원한 젊음을 구현함으로서 산같은 젊은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하고, 우정적인 명령복종체제에서 협동 희생정신과, 감투 인내 극복정신을 기르자고 하였다. 그 첫사업으로 1965년 1월 12일부터 22일까지 11일간의 극지법에 의한 지리산 적설기등반을 계획하였다. 대장은 박주근이 맡고 리더엔 정순택, 총무 임영호, 운행 김장영, 기록 송용남이 담당하고 이영석(의료), 김대흠(촬영), 정순구(수송), 최임일, 정창영(기상) 이형배, 김규현(식량), 이병림(통신), 김윤호(운행), 서상룡, 박희경(장비)의 16명 대원을 3명 1조로 5개조를 편성하여 운행하도록 하였다. 회장의 인사말, 취지문에 이어 요강, 목적, 코스개념도, 일정 및 수송표, 장비, 식량, 메뉴, 기상관측계획 등을 수록한 등반계획서는 전남 최초의 적설기 등반계획서로서는 손색이 없는 체제였고, 뒷날의 등반계획서 작성의 모델이 되었다. 준비과정에서 설피와 오버슈즈를 만들고, 아이젠을 주문 제작하였으며, 오병수가 대원들의 교육훈련을 맡아 일고 강의실과 무등산에서 20일 동안 실시하였다. 일고산우회의 결성과 독자적인 활동에 비난의 소리도 있었으나 지방산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으며, 박주근의 집념어린 결정이었다. 일고산우회는 매주 금요일을 집회일로 하여 밀크센터에서 모이고, 구 법원통에 제일등산구점을 열었다.
너덜크럽창립
해방 전 1931년 조선총독부 지질연구소장인 다치이와(立岩嚴)박사에 의하여 설립된 조선산악회에 많은 경성제대 교수들이 가입하여 주축을 이루고 그들의 학문중심으로 등산활동을 계획하였으나 2차 대전 말기에 국토사랑과 투철한 민족정신을 갖고 전문등산을 하여온 엄흥섭회징과 김정태선생 등 백령회의 한국 전문산악인이 합류하면서 산악회의 운영은 삼화연료공업사의 전문산악인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들은 해방 후 산악운동을 국민운동으로 전개하여 국민의 심신을 연마하고 산악문화를 창달하자는 기치를 들고 조선산악회(후의 한국산악회)를 창립하는 주역이 되었다. 해방후의 초기 광주지방 산악회도 조직상 특징은 산악회를 주도하여온 계층이 주로 대학교수 그룹이고 여기에 대학산악부와 사진작가와 화가등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왔으며 참여한 전통산악인들과의 산악회 방향 정립을 위한 끝없는 이념논쟁이 계속되어왔다. 대학교수들이 주도한 산악회가 마치 학술단체처럼 제한된 귀족집단으로 보였다. 전남의 신설 산악회들도 다양한 목적을 포용하는 단체에서 출발하여 이합집산을 반복하면서 발전의 계기로 삼았다. 산악회의 목표설정 이외에 중요한 의견대립은 산악회 조직의 운영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배타적인 조직운영과 조직의 개방 주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대립은 초기의 한국산악회에서도 나타났다. 한국산악회의 융성과 침체를 분석하는 시각에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회장의 조직운영 방침에 그 원인이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더러는 3-5대 회장을 역임한 홍종인회장의 독선과 지나친 폐쇄적인 회의 운영 또는 6대와 1973-1982년의 회장을 지낸 이은상선생의 회원 배가운동과 개방주의가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산악회의 전통과 순수성을 유지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가 하면 그와 같은 보수성은 회를 침체시킬 뿐이라는 주장도 거세었다.
이와 같은 문제가 일고산우회와 너덜크럽을 탄생시켰다. 무등산악회의 오종태 최명섭선생은 회의 운영방법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회의 개방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안하였으나 20여명인 무등산악회원은 거의가 직장인으로 매월 첫 월요일에 회비 50원을 지참하고 차 한잔 마시는 정례 집회에도 제대로 참석하기 어려워 10여명 내외가 출석하는 상황에서 모두 수용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격동기에 각자의 생활에 얽메이고 세정이 각박하여지면서 산에 갈 하루도 쉽지않아 식목행사와 송년등반이 가장 중요한 행사가 되었으며 각종 등산대회에 임원으로 참석하기에도 분주하였다. 무등산악회의 입회는 까다로운 자격과 절차를 거쳐야 하였다. 산행경험이 있어야하고 광주시내에 거주하여야 하며 입회심사를 위하여 당사자를 대기시킨 체 심의하여 가부를 결정하였다. 직장을 옮겨 광주를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준회원이 되었다. 오종태 최명섭, 전만서 김동주 김주종선생은 육당의 무등산 너덜겅을 인용하여 1962년 9월 너덜산우회를 조직하여, 창립기념으로 지리산 등반을 한 후 독자적인 산행을 하여왔다. 오종태 최명섭회장은 특수체육 무등산 등산대회를 운영하면서 광주지방법원장이 선수로 출전한 법원산악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광주지방법원산악회는 대회 출전을 위하여 급조되기는 하였으나 광주지방 최초의 직장산악회였다. 1965년 너덜산우회는 법원산악회의 박동인 최기범 정영길 박만규등과 합병하여 너덜크럽을 발족시켰다. 김종영 김형표 김선무가 입회하고, 전남매일 4층의 합동통신 전남지사(지사장 최명섭)에 사무실을 정하고 한국산악회에 가입하였으며, 후일 너덜산악회로 재편되어 대한산악연맹에 참가하였다.
조선대학교 산악회 창립
조선대학교에 산악운동의 바람은 일찍이 조선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개교한 1953년부터 시작되었다. 조선대학교는 광주야간대학원(大學園)에서 출발하여 조선대학원(大學園)을 거쳐 1948년 5월 16일자 재단법인 조선대학 설립인가를 받고, 1953년 3월 10일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호남고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조선대학교 산악회는 1965년 5월 15일 축협 밀크센터에서 창립하였다. 조선대학교에도 개별적으로 또는 학과중심의 등산 취미크럽들이 산행을 계속하여 왔으며, 약학대학의 허학부(1960) 노금모(1961)들의 활동은 돋보였으나 조선대학교 산악회로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1965년 신입생들인 법정대의 오세근 이도형 김의섭 김방진 고재인 김봉곤 정진기 이기량 최영일, 문리대의 김상문 이재복 조광훈 민근규, 공과대학의 나병채 김창제 김선규 최익수, 약대의 양영오 서용욱들이 탐험과 도전정신을 고양하고 산과같이 정으로 뭉쳐 이 지방에 새로운 산악정신을 정착시키자는 취지 하에 체육과 유재영선생과 최동윤 고창현 김용철 주흥규 조갑현 송기연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창립총회를 가져 초대회장에 오세근을 선출하였다. 5월 23일 무등산으로 창립기념등반을 하고 한라산 하계장기등반을 가지면서 각 등산경기에 참여하는 등 의욕에 찬 출발을 하였다. 특히 창립해인 1965의 11월은 분주한 달이었다. 11월3일부터 6일까지 전북특수체육회가 주최한 운장산 등행대회에 오세근, 양영오, 이재복, 이도형, 정진기를 출전시키고, 14일부터 20일까지는 한국특수체육회가 주최한 제1회 설악제에 오세근, 민근기, 김창제가 참가하였으며 28일의 전남특수체육회주최의 제2회 무등산등산대회에는 약대팀을 포함하여 4개팀이 출전하였다. 약대팀은 양영오가 대장을 맡고, A팀은 이재복, 이도형, 이기량, 조광훈 B팀은 민근규, 김상문, 고재인, 최영일, C팀은 김창제, 나병채, 김선규, 최익수들로 창립회원이 거의 참가하는 막강한 멤버들이었다. 특히 창립회장 오세근은 군입대를 위하여 회장 재임기간은 짧았으나 6월에 산악강습회를 공동 주최하고 한국특수체육회가 개최한 설악제와 운장산대회에 참여하여, 전국의 산악인들과 폭 넓게 교류하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오세근은 군복무 후 복학하여 다시 산악회장을 맡았으나 1972년의 제2차 마나스루원정대에 참가하여 히말라야 사상 두 번째 대참사로 기록된 눈사태로 7,100미터에 28세의 젊음을 묻었다. 김상문은 90년대에 광주전남 학생산악연맹회장을 맡고 이도형 나병채 김방진은 광주산악연맹 부회장을 맡는등 광주전남산악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세근의 군입대로 공백이 생겨 1966년 3월 이제복이 2개월여 임시집행부를 구성하여 운영하다, 서용욱이 1968년 5월까지 2년간 회장을 맡아 산악회의 조직을 강화하고 치밀한 사업계획과 훈련으로 산악회를 안정된 기반위에 올려놓았으며, 서용욱은 경선에 의하여 전남학생산악연맹의 대표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는 매년 3월 3째주엔 신입생 환영등반, 5월 월출산 춘계야영등반, 하계장기등반(지리산 한라산 설악산), 매년 9 10월의 지리산 추계등반과 1 2월의 적설기 지리산등반을 정례화 하여 대학 산악부를 정예화 하여갔다. 그리고 한국특수체육회의 제1회설악제에 이어 제2회설악제(1966. 10)엔 윤양현 황윤홍 박현수와 같이 참석하였으며 전북연맹의 3회운장산등산대회와 1966년이후 전국60㎞극복팔공산등산대회에 매년 출전하고 서울연맹 관악산 등행대회(1967. 5), 충남연맹의 제3회 계룡산등산대회(1968.9.28-29)에 광주상고 학생팀과 같이 참가하는 등 각종 산악행사에 참여하면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서용욱의 뒤를 이어 정형기가 산악회를 맡고, 군에서 제대하여 돌아온 오세근은 1969년 9월부터 마나스루 원정에 참여하는 1971년 5월까지 2년 동안 회장을 맡았으며, 정종구에게 산악회를 맡기고 히말라야로 떠난다.
등산대회 시비와 크로스칸츄리대회
전남일보등산대회와 후속의 특수체육등산대회가 6년째 계속되면서 대회방식에 식상한 대학산악부들이 등산대회의 불가론과 무용론을 제기하면서 전남대학교 산악회 김장영회장은 전남대학교 개교 14주년을 기념하여 1966년 6월 9일 제1회 무등산 크로스 칸추리(Cross country)대회를 개최하였다. 참가범위를 재학생으로 한정하여 여자부 3kg, 남자부는 5kg의 납삭이나 세미삭을 지고 여․남팀은 각각 3인과 4인이 1조로, 전남대 운동장을 출발하여 학동 삼거리에서부터 숭의목장 세인봉 중머리재를 돌아 증심사 제1수원지로 하산하여 도청에서 대학 운동장까지 구보로 돌아오는 기록경기였다. 대회장은 박하욱 총장, 부대회장은 고재기교수, 심판장은 정순택, 기록은 이영석 오중록이 맡고 심천섭 장기수 박하연 김송현 이행주 오재남 이재년 박일규가 심판으로 활동하고 우승 준우승 감투상을 시상하였다. 이 대회는 1968년 전남대 재학생과 전남의 남자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남 제1회․교내 제3회로 개칭하여 계속되었으며, 1969년에는 여자고등학생을 포함하는 대회로 확대시켰다. 1971년의 6회 대회부터 전라남․북도 남녀 고교․대학의 크로스 칸추리대회로 발전시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어 매년 전남대학교 OB산악회원들이 함께 할 자리가 되고있으며, 그후 많은 크로스 칸추리대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러나 35년을 계속하여 온 대회에 걸맞지 않게 이대회의 사료와 시상기록이 정리되어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조선대학교 총장기 쟁탈 전국무등산등행대회
조선대학교산악회는 창립다음해인 1966년 11월 19일부터 20일까지 1박2일의 조선대학교 총장기 쟁탈 전국무등산등행대회를 시작하고 다음해인 1967년엔 11월 17일부터 19일까지 2박3일의 2회대회를 개최하였으나 1968년엔 사상 유례없는 한해로 학교의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여 9월 28일 예정이던 대회를 11월 16일-17일로 연기하였으나 대회를 치루지 못한체 오랫동안 이 대회는 중단되었다. 1971년 5월14일 신입생환영 교내 크로스칸츄리대회를 조선대학생회와 같이 개최하여 이 대회를 지속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계속하지 못하고 1982년에야 전국대회로 발전시켜 조선대학교와 조선대학교산악회를 전국에 선양하였다. 조선대학교에서 전국등산대회를 개최하게된 것은 산악회원들의 열성도 컷지만 조선대학교 박철웅총장의 배려가 지대하였다. 이 대학의 초대 총장이후 오랫동안 대학을 육성하여 온 박철웅 총장은 영욕이 점철 된 분이지만 광주와 전남의 산악운동의 발전과 산악인 양성을 위한 그의 이상과 열성은 큰 것으로 1982년부터 다시 시작된 조선대학교 총장기 쟁탈 전국대학생 남녀 크로스 칸츄리대회에 참가한 전국의 산악인들과 광주의 산악인들에겐 오래 기억되고 있다. 박철웅총장이 장대한 포부와 확실한 신념을 가진 진취적 기상의 청년학생을 양성하고자 하는 창학의지가 학생산악운동의 버팀목이 되어 개교 후 곧 1957년 조선대 동창회 주최의 6․10만세 기념 무등산등산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산악부들의 젊은정열과 하드 트레닝에 매료되었으며 고산 거벽으로의 진출을 촉구하였다. 조선대 산악회는 후일 안나푸르나 3봉 원정과 마나슬루를 등정하고 오세근 박태규(마나스루 원정대장) 김용철(광주전남산악연맹 전무이사) 전의천(에베레스트-로체원정단장, 광주학산 회장)) 임형칠(로체등정, 현 대산련 등반기술이사) 소병현(마나스루 등반대장) 최경주(안나푸르나3봉원정, 현 대산련 기획이사) 김두환 고광수 김경자 신욱철 김병규 이용철(마나스루 등정) 최종태와 신광철(에베레스트 등정)등 수많은 전국적인 알피니스트를 배출하는 베이스 캠프가 되었다.
사진설명
1. 너덜크럽의 1965년 마이산등반,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최명섭회장
2. 일고산우회의 1965지리산적설기 등반계획서 중 일정 및 수송표
3. 무등산악회회원들 (1972년)
4. 조선대산악회의 1965년 지리산등반
5. 전남학산주최의 1966년산악강습회 참가자들이 보이스카웃에서
6. 조선대설립자기 전국대회, 단상 좌측에 붉은 모자로 서있는 이가 고 박철웅총장
〈광주편 7〉
知山之祥則可謂之得山 산을 알되 아직 얻지 못한 산
국토종주 삼천리의 통일의지와 전남산악연맹 창립
산에 다니면서 아직 산을 알지도 못하는 필자이지만 이 글을 마치면서 돌아보는 제봉 고경명선생이 1574년에 기록한 무등산 등행기 「유서석록」의 경구다. 60년대 등산과 산악운동은 진지하였던 만큼 민중에겐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어려웠던 시절 등산복이 어색하고 재건운동과 새마을운동의 깃발사이를 지나는 등산길이 괴면적었다. 유독 가뭄이 많았던 때 겨우겨우 견디어 가는 시골을 색색의 등산복장으로 지나기가 주저되어 농가와 논밭을 피하여 멀리 우회하곤 하였다. 남녀혼성등산이 귀족의 여유나 유산처럼 인식되어 야유를 받기도 하고 지탄이 되기도 하였으나 더러는 노력봉사하고 새참을 먹기도 하였다. 양동시장을 뒤지어 군용장비를 조달하고 며칠 전부터 이집 저집을 돌며 장비를 수집하여 짐을 꾸린데다 몇십원의 버스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10km정도는 훈련삼아 구보로 때우는 산악인들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배 따뜻해서 하는 짓이지. 그러나 버스값 아껴 막걸리 마시는 맛은 그들도 몰랐다. 산행을 마치곤 개선장군처럼 충장로를 활보하고 반성회 한다며 영하당에서 토끼탕 하나 주문하곤 춘장 시금치 당면 육수를 번갈아 부탁하여 엄청나게 마셔댄다. 하나같이 술을 잘 마셔 술을 못 마시면 산쟁이가 아니라고까지 하였다. 학동 삼거리에서 왕대포 한잔으로 해산하거나 담보라고는 손목시계뿐인 처지에 광일각 왕자관 예명 태동루의 짜장면을 자주 찾고 큰 행사라도 치르고 대접받는 참새집의 백반과 조일식당의 곰탕 설농탕은 특식이었다. 모두가 어렵던 60년대에 평생을 같이할 것처럼 산정을 나누며 조오련과 바다거북이 헤엄치면 누가 더 빠를가 묻던 몇 선후배와 산우들이 광주를 떠나거나 산과의 연을 끊어 더러는 왕래가 서먹하여진지 오래다. 누가 흘러간 별이라 하였다. 지면으로 얘기를 다하지 못하였고 서두에서와 같이 다분히 기억과 개인 기록에 의지한 이 기록의 오류는 계속 정정되기를 바라며 이 연재가 옛 기억을 바르게 정리하는 자료가 되기를 바라며 글을 인계한다.
3개도 학산의 합동 산간학교
경북 전북 전남의 3개 도 학생산악연맹(학산)이 공동으로 개최한 산간학교가 1966년 7월말부터 8월초까지 6박7일 동안 무주구천동의 공산국민학교에서 개설되었다. 전남학산은 전남대 조선대 광주일고 광주공고산악부의 40여명이 함평여객의 버스를 대절하여, 7월 29일 금성여객에서 산간학교 학생부장을 김병룡과 공동으로 맡은 김훈봉과 김장영 학산대표상임위원이 인솔하여 참가하였다. 산간학교 교장인 손상우 전남학산회장과 고재기교수는 다음날 광주에 몇 대 없던 승용차로 참가하였으며, 5월에 군대를 제대한 정순택은 서울의 남대문시장에서 나이론 주자일을 구입하여, 대전 금산 무주를 거쳐 야영장인 공산국민학교에서 합류하였다. 전남에서 처음으로 구입한 공동용 자일이었다. 산간학교 명예교장인 국회의장 이효상 경북학산회장이 거창에서 구천동으로 신설되어 개통한 도로를 통하여 참석하시어, 산간학교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암벽훈련과 백련암까지의 행진등 꽉 짜인 긴 일정으로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교과목이 다양하고 이름으로만 접하던 강사들의 열강에 심취하였으며, 오랜만에 전주와 대구의 산친구들과 교류하는 좋은 기회였다. 이 행사는 3개도의 학산이 긴밀하게 협조하고 공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의 받고, 막영 취사하느라 정신없이 돌면서도, 전남학산팀은 캠프파이어에서 앞뒤 돌아보지 않고 소란을 피우다 학생부장 김훈봉의 소집으로 야밤에 별도로 집합하여 단체기합을 받기도 하였다. 전날 전북학산이 단체기합이더니 오늘은 전남이다 하였다.
대한산악연맹의 대통령기 등산대회
박철암교수가 주도한 한국특수체육회는 1965년 10월 제1회 설악제를 개최하고 다음해 1966년 10월 제2회 설악제와 등산학교를 열었으며 1967년 4월 27일부터 28일까지 북한산에서 한국특수체육회 등산대회를 개최하였다. 제1회 설악제에 전남대의 김장영, 조선대의 오세근(법정대) 민근규(문리대) 김창제(공대)가 참여하고 제2회 설악제엔 조선대의 서용욱 윤양현 황윤홍 박현수, 전남대의 김장영 박명선 박장일이 참석하여 봉정암과 대청봉에서 야영하면서 전국의 산악인들과 교류하였다. 1967년 한국특수체육회의 북한산대회에 조선대와 전남대의 김장영 박향식 황윤홍 최영진 김재일 박명선 조영무등이 참가하였다. 경비가 부족하여 안양행 기차표로 송정리까지 오는 만용을 부리고, 송정리에서 광주까지는 입장권도 제대로 사지않고 돌아왔다. 1969년 10월 3일-5일의 설악산악회 주최 제4회 설악제에 김용선교수와 전남대 조선대 산악회가 참가하였다. 대한산악연맹이 1964년에 시작한 국회의장기 전국등산대회가 4년간 열리지 못하고 제2회 대회가 1968년에야 4월 27일부터 28일까지 북한산에서 속개되었다. 전남대학교는 김장영을 대장으로 하여 공대의 박향식 최영진과 조선대에서 전남농대로 전학 온 황윤홍과 김재일 박명선 조영무가 선수와 옵서버로 출전하였다. 1969년 4월 26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제3회 북한산대회에서는 신귀현이 심판으로 참가하고, 4월13일 임시총회에서 전남대학교 산악회장에 선출된 김용우팀이 출전하여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1970년 4월의 4회 대한산악연맹 주최의 관악산대회에 신귀현이 심판으로, 송희범(법학2) 임백환(화학 2) 이정옥(임학1) 김희룡(광산1)의 출전하였으며, 1970년 5월에 전남일보의 제5회 무등산등산대회가 국회의장기와 문교부장관기를 유치하여 속개되었다. 5월 전북연맹의 대둔산 전국등산대회, 7월엔 금정산 하계산간학교가 열리고 대한산악연맹 충남연맹이 주최한 계룡산 전국등산대회가 10월에 개최되어 심판을 파견하고 11월엔 전남대학교산악회가 우승기를 차지한 팔공산 60km극복등산대회가 열렸다.
산간학교와 리더세미나
1968년 8월 2일부터 8일까지 대한산악연맹(회장 이은상)이 속리산에서 개강한 하계산간학교에 전남대산악회원과 지도교수 김용선교수, 무등산악회의 신귀현 김승철 장하송과 조선대산악회 광주일고 광주상고 사례지오고 숭일고산악회원등 30명이 대거 참석하였고, 9월10일부터 11일까지 1박2일로 개최한 한국산악회와 조선일보사기 주관한 20대 명산순례계획에 제4대로 참여하여 배석규선생 일행과 무등산을 올랐으며, 1969년10월 27일의 제2회 20대 명산순례에도 장하송등이 무등산 등행에 참가하였다. 대한산악연맹(회장 최두고)이 주최하는 제1회 리더세미나가 1969년11월4-8일에 도봉산 오봉에서 열려 신귀현 장하송이 참여하고, 전남대의 김용우 송희범등이 리더수료증을 받았으며, 이어 8-9일에 개최된 대산련의 범산악인대회에 참석하였다. 다음해인 1970년 7월말부터 8월1일까지 임랑(좌천)에서 대한산악연맹(회장 최두고)의 제11회 하계산간학교에 전남대산악회의 이방기교수와 최창돈 박명선 김용우 송희범 김나연 양형열 김평중 이준호 오경희등이 참가하여 리더증을 교부받았다. 최창돈회장이 김용선 이방기 김현곤지도교수와 함께 30여명의 대원과 덕유산을 등반하고, 포항 보경사를 거쳐 울릉도를 다녀오면서 식량 부식이 바닥난 체 임랑산간학교에 입교한 것이다. 이 산간학교에는 고 고상돈대장도 청주연초제조창 소속으로 입교하였다. 산간학교의 학생장을 맡은 전남대의 송희범이 부산의 선배에게 대들다 철수한다며 짐을 꾸리고, 전경과의 패싸움으로 성산 박진형이 경찰의 스리쿼터 앞자리에 버틴체 경찰서에 들어가, 국회 황소산악회의 힘을 빌리는 일화를 만들었다. 1970년11월19일과 20일에 관악산에서 열린 제2회 리더세미나에도 최창돈 오세근 김상문 김태순 박명선 박향식 이정옥들이 참가하였다.
일반산악회와 우보회의 창립
전남지역에서 60년대 무렵에 창립되어 오늘 30년 이상의 역사를 유지하여 온 산악회는 전남대(1958)와 광주교대(광주사대 1960 서규열), 조선대(1965 오세근), 너덜산악회(너덜크럽 1965 오종태), 광주우보회(1968 김두하), 조선대 의과대학산악회(1969 윤장현), 바자울(1971), 여수산악회(1971 고순익), 목포유달산악회(1971 강치언), 영암군산악회(1971 김희규), 전남대 의과대학산악회(1972 김하경 윤기현) 들이고 60년대에 창립한 일반산악회는 법원산악회, 너덜크럽과 우보회, 남전산악회(후의 한전산악회), 전남산악연구회(1969 임해림) 정도이다. 광주우보회는 최흥열 최일출 김두하 문석주 최윤주 정대하 홍정식 홍원숙 연금화 변경희 지정숙 서인섭 정광용교수들이 1968년5월30일 귀거래다방에서 우보회라는 등산 동호인회를 결성하여 출발하였다. 1969년에 우보회 총회에서 김두하선생을 대표로 선출하고, 1970년 11월1일에야 회칙을 제정하여 임원진을 정하고 산악회로서의 체재를 갖췄다. 창립해인 1968년의 13회의 산행기록을 남기고있으며, 1969년부터는 주말산행을 정례화하여 오고있다. 이후6년간 회장 김두하, 부회장 정대하, 홍원숙체제로 회를 운영하였으며, 1975년 정광용교수를 제2대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우보회는산수와 고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등산과 여행을 즐기는 가운데 국토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체위를 향상시키며 아울러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을 목적으로 한다고 회칙에 명시하고 전문산악단체에서는 기피하는 등산과 하이킹, 명승고적 사찰의 탐방, 산악과 고적에 관한 조사연구, 국토애호와 등산시설의 협조를 사업내용으로 하고 있어 회의 성격과 산악활동의 방향을 명료하게 밝히고 그대로 산행을 계속하여 왔다. 이와 같은 회의 운영과 산행방법에 대하여 젊은 회원들의 불만은 그치지 않았으며, 우보회는 80년대에 회의 명칭이 유사한 산악단체들의 발족으로 광주우보회로 개칭하였다. 우보회는 정대하 최양원 지정숙 지영길 박동열 이전규 조계철 윤기호 김동주 심종식 정인주 최암송 김준위 김재휘 윤영숙 손덕주 임석주 진문식 노정희 박기정 나사윤 조병연 윤순안 정만조 강중원 정희관 김판조 박춘석 송동준 임종기 장성철 백남인 김승두 최병완들이 주축을 이루어 왔다. 역사가 긴 일반산악회의 속성이 되어버린 분파와 파당의 장애를 극복하고, 귀거래 수기동 불노동의 다방겸 사무실을 옮기면서 박동열 심종식 김준위 김판조 정장규 박정희 윤기상 강중원 김종표 김순임 박유곤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창립정신에 따라야호야를 구호삼아 주말산행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33년간 산행일지를 기록하여오고 있으며, 우천불구 전천후등행은 우보회 주말등산의 불문율이다. 광주우보회는 일반산악회의 한 전형을 이루어 오면서 정대하 황도운 이전규부회장, 박동열 최암송등 광주전남산악연맹의 회장단을 배출하여 산악연맹의 발전과 직장 취미산악회의 창립과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1998년 대산련을 탈퇴하였다. 전국등산대회에서 대통령기를 차지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면서 74명의 정회원과 29명의 준회원을 포용하고 소걸음으로 오늘까지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국토종주 삼천리
대한산악연맹(회장 이은상)은 1968년 산악인이 온 국민의 의지를 대신하여 국토통일의 염원을 싣고 제주도의 마라도로부터 휴전선의 향로봉까지 각도의 산악회가 리레이방법으로 3년에 걸쳐 종주하는 의욕적인국토종주 3000리사업을 착수하였다. 국토종주는 각도의 산악회가 그 지역의 산업자원과 국립공원 명승지 고적을 답사하고 식물상과 자연경관을 조사하면서 명산을 등반하고 리레이방법으로 인접 산악회에 통일의기를 인계하면서 진행되었다. 제주산악회 무등산악회 전북산악연맹 경북산악연맹의 주관하여 제주도의 마라도에서 7월 10일에 시작한 1차년도 사업은 한라산 유달산(목포) 무등산(광주) 지리산 장안산 무룡산 덕유산 북덕유 대둔산 황학산을 거쳐 7월 31일 추풍령까지 종주되었다. 전남의 무등산악회는 고재기회장을 대장, 임춘재를 리더로하여 목포 유달산 유선각에서 제주산악회로부터 국토종주 삼천리 통일에의 의지기와 마라도의 흙한라산 에델바이스(솜다리)를 인계 받아 무등산과 지리산을 등반하고 전북 남원의 광한루에서 전북산악연맹에 전달하였으며 전북연맹은 무주구천동에서 경북의 조병우대에 인계하였다. 무등산악회는 12일 임춘재 김훈봉 박원정이 먼저 버스로 목포에 도착하고 뒤이어 기차편으로 온 고재기 박선홍 홍기근 이남열 김주종 신귀현 김승철과 합류하여 안성호편으로 5시에 도착하는 제주팀을 맞았다. 대한산악연맹의 김초영 강호기 명노철등 4인이 제주산악회의 3명, 한국일보의 정범태 김운영 유희원기자가 내렸다. 한일호텔과 삼일여관에 숙소를 정한후 7시 30분 유달산의 유선각에서 차제석 예총지부장 시총무과장 목포매일 기자등 목포의 30여 유지가 참석한 가운데 인수․인계식을 가졌다. 전남팀은통일에의 의지페난트를 앞세우고 임춘재 박선홍 김훈봉 홍기근 박원정 정순택이 8시55분 어둠이 밀리는 유달산에 올라 전남에서의 국토종주 첫발을 딛었다. 유달산을 다녀와 일식 옥천에서 정순택이 마련한 전남에서의 국토종주 제1일을 축하하였다. 유달산에 이어 무등산 등행을 위하여 13일 7시15분 목포를 출발하여 광주에 온 등반대는 신귀현의 안내로 기자2명과 대원 3명이 광주 학동삼거리에서 시작한 산행은 샘골을 거쳐 입석에서 하산하여 5시 광주로 돌아왔다. 14일 1시40분 중앙여객 버스편으로 임춘재 김훈봉 김승철 최동식 박원정 장하송 김장영과 본부팀 5명이 고재기 박선홍 정기팔 정순택의 환송을 받으며 지리산으로 출발하여 화엄사에서 1박하고 15일 8시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였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비가 내려 대산련의 3명을 포함한 12대원은 짙은 안개와 심한 비바람 속에서 어려운 운행을 하였다. 노고단에서 막영하고 임걸령 벽소령 장터목거쳐 18일에 천왕봉에 올라 11시15분 통일의기를 앞세워 정상 답사식을 갖으며 통일을 염원하였다. 백무동으로 하산하여 마천에서 민박하고 19일 남원에 도착하여 하루 휴식하였다. 지리산답사대원과 광주에서 남원으로 바로 온 고재기 박원식 박선홍 손상우 신귀현 최창열등이 20일 9시 40분 남원의 광한루에서 전북팀에게 통일에의 의지기를 전달하였다. 김훈봉의 보트는 오작교의 물에 뒤집히고, 7월 23일자 한국일보는 임춘재의 칼라사진으로 장식되었다. 전남구간은 임춘재 김훈봉 김승철 박원정이 완주한 셈이다. 마지막 구간의 국토종주에도 전남의 대표로 김장영 김용우가 참가하였다. 서울의 중앙청에서 국토종주 삼천리 통일에의 의지기를 인계받아, 기념비와 같이 군용 쓰리쿼터로 향로봉에 오르고 통일의 날에 이북을 산들을 답파하고 백두산까지 종주하기를 기약하였다. 향로봉에서 돌아오는 길에 김장영 김용우는 서남능에서 개최되고 있는 보이스카웃 잼보리대회에서 박향식과 함께 1주일간 봉사하고 돌아왔다. 대한산악연맹은 1997년 아시아산악연맹(UIAA)회장을 겸하던 당시의 임철순 회장이 1996년 창립한 북쪽의 DRP Korea Mountaineering Association의 조용남 회장(국토환경장관), 리이남 전무, 박명구, 조승훈, 김관철 부회장과 중국등산협회의 曾曙生회장을 통하여 접촉하고, 향로봉에서 백두산까지의 여정을 공동으로 국토종주삼천리 행진을 완수하고자 하였으나 남북관계의 개선에 따라 통일에 앞서 이 계획을 계속 추진하기로 하였다.
전남대 11차 학술조사단의 한라산․홍도기행
1969년 전남대산악회(회장 김용우)는 7월 12일부터 23일까지 11차 하계 한라산등반 및 홍도 학술조사단을 파견하였다. 대장은 김용우회장 진행은 박현문총무 기록은 송희범 단과대 산악회장인 유종걸(공대) 김재일(농대) 이병기(문리대) 이정상(법대) 윤성중(상대) 박원집(의대) 김점순(간호대)이 각 단과대학의 책임을 맡았다. 지도교수단과 전임회장인 박향식과 함께 전남대 산악회사상 최대규모인 57명이 7월 12일 목포로 출발하였으나 폭풍우로 제주배가 출항하지 않아 지도교수인 김용선 이방기 정종구교수는 한일호텔로 모시고 학생들은 정순택의 집에서 취사하며 숙박하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여름철 비좁은 집에서 문리대의 박정숙등 여학생 15명이 포함된 54명에다 12일간의 장기산행을 위한 엄청난 짐으로 북새통이었으나 다다미방에서 벌린 막걸리파티와 아리랑목동이 마냥 좋았다. 간호대의 정심에게서 밤을 세우며 배운산포도처녀는 오늘날도 산악부의 애창곡으로 이어오고 있다. 13일 제주로 들어가 관음사 용진각으로 백록담에 오르고 남성대 서귀포로 하산하여, 7월 17일 목포로 돌아왔다. 다음날 18일에 흑산도를 거쳐 홍도로 들어가 22일까지 5일간의 학술조사를 마치고 23일 목포로 나왔으나 역무원과의 트러블로 8시47분 완행기차를 타지 못하고 2등차 편으로 광주에 돌아오면서 많은 사연을 남겼다. 마침 루이 암스트롱의 달 착륙선 컬럼비아가 모선 아폴로와 도킹하고 시속 5000km로 지구로 귀환 중이었다.
전남산악연맹 창립
광주의 산악인들은 대한산악연맹에의 가입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전남의 주도 산악회인 무등산악회는 1968년의 6월 월례회(6. 3 금잔디다방)에서 대한산악연맹가입을 보류하고 7월의 임시총회에서도 유보하면서 전남학생산악연맹의 가입만을 권장키로 하는 등 대한산악연맹 가입에 소극적이었다. 그 동안 한국산악회의 20대명산 순례에 동참하여 오면서 한국산악회와의 관계가 밀접하기도 하여 처신이 어려웠다. 그러나 신귀현 임춘재 김승철등의 젊은 회원들과 전남대와 조선대의 산악회가 일찍이 대한산악연맹 행사에 참여하여 오고 국토종주 3000리 사업에 동참하면서 대한산악연맹에 가입하자는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1969년 12월 15일 시인인 허연 광주문화방송국장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전남산악연맹을 창립하고 1970년2월1일 대한산악연맹에 가입하였으며 2월16일 Y살롱에서 첫 이사회를 개최하였다. 부회장으로 박선홍(전 무등산악회 부회장) 전무이사 신귀현과 임춘재(총무) 김훈봉(재무) 장하송(기획) 서찬식(조직) 김승철(편집 섭외)이 이사로 참여하였으며 이남열과 박원식이 감사로 선임되었다. 모두가 무등산악회 회원이고 무등산악회의 간사와 감사가 그대로 전남연맹의 이사와 감사로 선임되었다. 전남산악연맹은 사무실을 갖추지 못한체 무등산악회의 광주우체국 사서함 156호와 장하송의 광주시 궁동 50-10번지를 통하여 문서를 수발하였으며 시민관 옆 한성빌딩의 라디오문화방송에서 이사회를 개최하곤 하였다. 허연 회장은 1969년부터 1975년까지 3대의 회장으로 재임하고, 후임 회장을 김종태 전남일보사장에게 인계하였다. 김종태 회장은 부회장에 신귀현 전무이사에 박향식을 임명하고 전남일보내에 전남야구협회와의 공동 사무실을 마련하여 전남산악연맹의 체제를 갖췄다. 제4공화국의 사회단체 정화로 김종태회장이 겸직을 사퇴하게 되고 1981년 박선홍회장이 추대되어 1984년의 제7,8대회장으로 재임하였으며, 화니백화점의 남해관광과 송희범의 예림칼라 정태영의 (주)유일로 연맹사무실이 옮겨다녔다.
의과대학 산악회
조선대학교 의과대학산악회는 69학번인 의학과1학년 윤장현 유근하 이지헌 문재선 김춘곤에 의하여 1969년에 조국의 역사와 미래를 위하여, 인격을 수양하고 패기찬 젊음을 구현하며, 삶에 충실한 의학도가 되자고 하는 전인지향의 철학적 명제를 갖고 창립하여 윤장현을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전남대학교 의대산악회는 의예과 시절부터 강정채 김하경 윤기현등에 의하여 의과대학내의 동호인형태로 등산반을 조직하여 전남대산악회와 공동으로 산악활동을 하거나 독자적으로 산행을 하여오다 1971년 윤기현(의예2) 강대석 김익성 김웅기(의예1)등이 전남대학 크로스칸츄리 대회의 참가를 계기로 양병익교수를 모시고 전남대의예과산악회를 발족시켯으며 1972년부터 회지 무돌을 발간하였다. 1972년 김하경 윤영준(의학3) 박강식 박재황 박제천(의학2) 윤기현(의학1)등이 윤재룡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전남의대산악회를 창립하여 전남대산악회와 의대내의 기존 등산서클로부터 독립하였으며 간호학과를 포함하여 의욕적인 활동을 하고있다. 산악회1기인 김하경(전 광주학생산악연맹회장)은 1977년 77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최종 대원선발에서 제외되어 천추의 한을 씹고있다. 1986년 김하경과 윤석기가 랑탕리룽을 정찰하고 1987년 원정대장으로 윤재룡교수룰 모시고 조석필이 꾸린 렌포강원정대는 권현 홍운기 이정훈 김수현과 함께 서벽을 초등하여 정상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으며 위계룡(현 전남학생산악연맹회장)은 빛고을 산악회의 브로드피크원정대와 전남산악연맹의 칸첸츙가원정대를 꾸려 등정에 성공하였다. 조선대학교 치과대학산악회는 김대수 고희종 김왕근에 의하여 1976년 창립되었다.
사진설명
1. 광주우보회 회원들
(1) 광주우보회 회원의 1969년7월의 무등산행과 증심사주변의 초가집 상점
(2) 광주우보회 초창기 회원들 1970년12월
2. 1965년 전남학생산악연맹의 무등산 집중식 등반
3. 대한산악연맹이 주최한 국토종주 삼천리의 전남팀이 제주산악회로부터통일에의 의지기와 마라도의 흙, 한라산의 에델바이스(솜다리)를 인계 받고있다.
4. 남원광한루에서 통일의 의지를 전북에 전한 전남대원들
5. 송희범이 학생장을 맡은 대한산악연맹이 부산 임랑의 바닷가에서 개설한 산간학교의 개교식
6. 전남대산악회의의 1969년5월 백운산등반
7. 제4회 관악산등산대회에서 송희범 임백환 이정옥 김희룡이 장비를 검사 받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