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항쟁을 되새기자
“오늘 우리는 전세계의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 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 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한 6월 민주 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문이다. 항쟁이 시작된 1987년 6월 10일은 전두환의 뒤를 이어 군사 반란의 또 다른 주역인 노태우를 집권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날이었다. 1980년에 고친 헌법에 따라, 체육관 간접 선거로 노태우를 새 대통령으로 뽑으려는 속셈이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해야 한다는 것은 대다수 국민의 뜻이었다. 헌법 개정을 약속한 야당이 국회 의원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1986년부터는 야당을 포함한 민주 진영이 대대적으로 개헌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섰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 전두환 정권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민주 인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강경한 탄압을 일삼았다. 1987년에는 대학생 박종철을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전두환 정권은 1987년 4월 13일 헌법을 바꾸지 않겠다는 이른바 호헌 조치를 발표하였다. 민주 진영은 박종철 군을 추모하며 고문 살인을 자행한 정권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투쟁을 벌였다. 1987년 5월에는 야당을 포함한 최대의 민주화 운동 단체인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를 결성하였다.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 군 고문 살인 은폐 조작 및 민주 헌법 쟁취 범국민 대회'가 개최되었다. 항쟁은 날마다 이어졌으며, 6월 18일과 6월 26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파가 모여 독재 정권을 규탄하였다. 시위 현장에 학생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도시의 도심 시위에는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수없이 참가하였고, 중소 도시의 시위에는 평범한 시장 상인이나 농민들의 모습도 드물지 않았다. 온 나라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6월 29일,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헌법 개정과 민주 선거를 약속하였다. 군사 독재가 항복한 것이다. 탄압 속에서 계속된 민주화 운동의 결과였으며, 민주 진영이 야당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민주 대연합을 구성하여 함께 싸워 거둔 성과였다. 5·18 민주 항쟁 이후 반미 운동에 직면한 미국이 시위 진압을 위한 군대 동원을 반대한 것도 영향을 끼쳤다.
6월 항쟁 이후 국민들은 새로운 희망에 불타올랐다. 구속된 양심수들이 풀려났고, 언론의 자유도 확대되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하여 민주적인 권리가 담긴 새 헌법이 만들어졌다.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55%의 국민이 야당 지도자에게 표를 던졌으나, 당선된 것은 군부 출신의 노태우였다. 야당이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결과였다. 그러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국민들은 곧이어 열린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을 지지하였고, 생활 현장에서 자주적인 단체를 결성하여 실질적인 민주화를 이루어 나갔기 때문이다.
6월 민주 항쟁을 거치며 노동 운동이 폭발하였다. 1987년 7월에는 울산 현대 계열사 노동자들이 민주 노조 건설, 근로 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투쟁을 벌였다. 7월 말에서 8월 초에는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의 여러 공업 단지로 투쟁이 확산되었으며, 9월까지 전국 4,000여 사업장에서 민주 노조가 결성되었다. 사무직이나 전문직 종사자, 병원, 언론사 직원들도 노동조합 결성이라는 사회의 움직임에 동참하여, 그 동안 유명무실하던 노동 3권을 행사하고 나섰다. 교사들은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교육의 민주화와 노동 기본권의 확대를 위해 싸웠다.
농민들은 군 단위 농민회를 조직하고, 전국적으로 단결하여 투쟁하였다. 1988년까지 전국의 농촌 지역 대부분에서 시·군 농민회가 조직되었으며, 이들은 전국 단위 조직인 전국 농민 운동 연합(전농)으로 단결하여, 농산물 수입 개방 반대, 농산물 제값 받기, 농촌 의료 보험 개편 운동을 벌여 나갔다. 성장제일주의를 내걸고 개발로만 치닫던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경제 정의의 실천과 환경 보호를 목표로 내건 시민 단체들도 여럿 탄생하였다. 남성 중심의 문화와 여성 차별적인 제도의 개혁을 목표로 자주적인 여성 운동도 활발해졌다. 바야흐로 민주주의 새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6월 항쟁 1주년이 된 1988년 6월 10일,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연세대에 모여들었다. '남북 청년 학생 회담 성사 및 공동 올림픽 쟁취'를 위한 집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대회를 마친 학생 상당수는 판문점을 향해 길을 나섰다. 경찰의 저지로 학생들은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들이 판문점에 도착했다 해도 남북 학생 회담이 열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날 행사는 남북 관계를 개선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초부터 남북의 교류와 올림픽 공동 개최를 내건 학생과 재야 단체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북한이 불참한 가운데 '88 서울 올림픽이 치러진 뒤, 문익환 목사가 재야 단체의 대표 자격으로, 임수경이 대학생 대표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노태우 정부는 문익환, 임수경은 물론 관련자 상당수를 구속하고 학생 단체와 재야 단체를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하지만 화해 협력과 평화적인 통일을 추진하자는 국민 여론을 수용하여 민족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할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였다.
1988년에는 북한을 선의의 동반자로 규정하고, 교류 협력을 추진하자는 7·7 선언을 내놓았다. 이듬해에는 남북이 협력하여 공동 번영을 위해 노력하면서,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일하자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통일 방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90년에는 박정희 시대의 비밀 협상이 아니라,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남북 정부 간 대화를 시작하였다. 남북 총리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협상을 계속하였고, 1991년 마침내 남과 북은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내용의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였다.
북한과의 교류 협력을 내세운 정부의 정책은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한 국가 보안법과 충돌하는 것이다. 정부는 북한과 화해 협력을 추진하면서도 국가 보안법을 내세워,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을 엄격히 처벌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남북 관계가 원만하기만 하였던 것은 아니지만,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적 통일을 바라는 국민의 희망은 거역할 수 없는 큰 흐름이 되었다.
첫댓글 6월민주항쟁은 민주화의 승리로 진보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지금의 진보주의는 건전한 민주노동운동의 정신을 버리고 종북좌파활동을 하는 등 오히려 6월 민주항쟁의 정신을 흐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