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관객이 뽑은 최고의 영화는 후인 루 감독의 <하얀 아오자이>였다.
베트남 여성의 고결하고 순수한 의지를 상징하는 아오자이에 바치는 헌사라고 소개된 이 영화는 어느 순간 관객들의 눈물샘을 펑하고 터트릴 만큼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배우들의 열연은 빛났다.
전쟁으로 상처받는 베트남 여인에의 삶을 조명함에 있어, 거의 다큐멘터리 수준의 선명한 메시지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영화가 주는 메타포의 미학이 다소는 아쉬웠지만 이 영화에 대해 두 가지의 뚜렷한 기억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흐느끼던 여배우(TTUONG Ahn Ngoc)의 눈물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무대에 오른 여배우는 자신을 낳아준 베트남 어머니들의 비극적 삶에서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감독 역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만큼 관객과의 대화는 비장함 그 자체였었다.
후인루 감독과 주연 여배우
또 하나, 스크린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베트남의 풍경이었다.
슬픔으로 숨이 막히는 이야기구조 속에서도 엽서 속을 그대로 찍어놓은 듯한 베트남의 한 도시는 충분히 매혹적이었고, 매혹적이었기에 이야기는 더 비극적으로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영화 속 그 도시가 바로 호이안이다.
호치민이나 하노이 정도의 베트남 대도시에 익숙한 우리에게 호이안은 여전히 낯설다.
다낭에서 30km 남쪽에 위치한 호이안은 17,18,19세기에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항이었다. 프랑스 식민지시절에는 다낭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고 남부 베트남에서 최초로 중국인들이 정착한 곳이었다.
그 덕분에 호이안 구석구석에는 베트남 고유문화와 프랑스, 중국, 그리고 동남아 문화가 적절하게 혼재해 있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1만 일 전쟁도 이 아름다운 도시를 거의 파괴하지 못했을 만큼 호이안은 시간의 유물이 빚은 미학의 극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호이안 사당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는 호이안 '옛 거리'는 차들이 다니지 않는 보행자 거리다. 타박타박 거리를 거닐다 보면 중세의 어느 한때로 회귀한 듯한 착각이 든다. 19세기 이전에 지어진 목조 건물들이 호텔이고 카페며 기념품 가게다. 돌담에 피어난 이끼 위로 오래전 살아갔던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이 선명하게 비친다.
희극과 비극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 듯 아름다움과 공포는 묘하게 공존한다. 인형의 이면에 비치는 섬뜩함, 유혹의 팜므 파탈로 묘사되는 메두사, 연못 속 제 얼굴에 반한 나르시우스가 느꼈을 두려움 등이 이러한 공존성을 비유한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기묘한 기운마저 느끼게 하는 이 도시 호이안. 그곳에서 지금 한국 영화의 촬영이 한창이다. 그것도 공포영화라고 한다. 촬영지의 선택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은, 절묘하다.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호이안 골목
따지고 보면, 아름다움을 떠나 베트남만큼 공포영화에 적합한 촬영지도 드물 듯하다. 미국 스스로 인정한 '더러운 베트남 전쟁(dirty war)' 은 260만 명의 베트남 목숨을 앗아갔다. 인구의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이 어마어마한 희생은 원혼으로 남아 역사로, 여배우의 눈물로 흐르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 숱한 민족의 죽음을 딛고 프랑스, 중국, 그리고 1만 일 베트남 전쟁을 거쳐 미국까지 제압한 베트남의 날 선 자존심은 전쟁을 이용한 그 어떠한 상업적인 행위도 허가하지 않을 만큼 단호하다. 뼈에 각인시켜야 할 과거의 시간을 후대의 감상 정도로 폄하시키지 않겠다는 금성홍기의 결연함이다.
그래서 한국의 공포영화가 촬영허가를 따냈을 때 일부에서는 기적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1992)이후 15년 만의 베트남 현지 촬영이자 비전쟁영화로는 처음인 셈이다.
그 영화가 <므이>다.
<령>에 이어 김태경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므이>는 1896년 베트남 달랏에서 발견된 '므이'라는 여인의 실제 초상화를 모티브로 삼는다. 영혼이 봉인된 므이의 초상화로 인해 벌어지는 무서운 사건들. 그리고 100년 후 서연(차예련 분)과 윤희(조안 분)가 므이의 초상화에 담긴 비밀을 파헤친다는 내용이다. 서연은 소설의 소재를 찾아 므이의 전설을 쫓아가는 작가로, 윤희는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서연의 친구로 등장한다.
영화 촬영지는 투본 강가에서 20여 분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마을이다. 강 한쪽에서는 몇 사람이 넓게 그물을 치고 있었고, 논에는 마치 정지된 그림처럼 아주 오랫동안 허리를 굽히고 풀을 뽑는 사람도 보인다. 그리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만 들려오는 그곳에 간간이 감독의 컷 소리가 울린다.
평화롭게 영화 촬영 현장을 지켜보는 호이안 주민들
소가 울어서 촬영이 멈추고, 배가 지나가는 소리에 또 멈추고, 갑자기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멀리 강 건넛 마을에서 들리는 흥겨운 음악소리에 촬영은 수시로 지연되었지만 그 열기만큼은 베트남의 태양보다 더 맹렬하다.
한국에서 온 이방인의 영화작업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현지인의 평화로운 눈빛으로 인해 세트 안 므이의 음산한 집과 이미 여고괴담을 통해 공포영화의 기본을 닦은 조안과 차예련의 서늘한 눈빛은 더욱더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에 뒤질세라 베트남의 전지현이라 불리는 '안트'와 '홍안' 두 유명 여배우의 연기도 긴장감이 감돈다.
조안과 차예련
사진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베트남 여배우, 조안, 차예련, 김태경 감독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무서운 장면만 기억나는 공포영화가 아니라 혹시 내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살진 않았나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말한다. 독특하고 기묘한 공포를 찍는다는 이유 외에 베트남에 대한 왜곡된 것들을 바로 알려주고 싶어서 이번 이야기를 택했다고도 말한다.
그 말은 틀림없을 것이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영화촬영의 허가를 얻었다는 것은 므이를 통해 공포영화 외적인 그 '무엇'을 담으려 하기 때문일 테다. 영화가 개봉되기 전까지 그 '무엇'에의 정체는 초상화처럼 봉인되어질 것이다. 아름다운 고도(古都) 호이안이 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보여질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영화 <므이>는 개봉 전부터 그 부가적 호기심으로 인해 고작 폐교나 폐가 정도에서 찍어대던 기존의 납량영화의 기대치를 훨씬 웃돈다. 최소한 <므이>는 단순히 무서운 영화로 기억되지는 않을 것같다. 6월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김태경 감독과 주연 배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