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득신이 78세때 쓴 글씨. 당나라 이백의 한시로 ‘9월9일 중앙절 용산에 올라 술을 마시니/산 국화가 좇겨난 신하를 비웃는 듯하네/취기에 얼핏 바람에 날리는 모자를 보고/춤추며 달을 보노라니 떠날 생각을 잊도다’ 라는 뜻이다. |
백곡 김득신(1604~1684). 조선 중기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히는 그에 대해서는 책읽기와 관련된 일화가 적잖이 전하고 있다. 백곡이 혼례를 치르던 날의 이야기다.
백곡이 책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신방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웠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밤 신랑은 신부를 제쳐두고 방을 뒤지며 책을 찾았다. 경대 밑에서 백곡이 발견한 것은 책력(冊曆). 밤새도록 읽고 또 읽은 백곡은 날이 새자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냐”고 말했다 한다.
백곡은 독서광이었다. 부친이 감사를 역임할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이면서도 머리가 나빴던 그는 유명 작품들을 반복하며 읽으며 외웠다. 그는 1634년부터 1670년 사이에 1만번 이상 읽은 옛글 36편을 ‘고문36수 독수기(讀數記)’에 밝혔는데, 그 횟수가 상상을 초월한다.
“한유의 ‘획린해’ ‘사설’ 등은 1만3천번씩 읽었고, ‘악어문’은 1만4천번씩 읽었다. ‘노자전’은 2만번, ‘능허대기’는 2만5백번, ‘귀신장’은 1만8천번, ‘목가산기’는 2만번, 그리고 중용의 서문과 ‘보망장’도 각각 2만번씩 읽었다….”
백곡이 가장 즐겨 읽는 글은 사기의 ‘백이전’. 그는 ‘독수기’에 백이전을 무려 11만1천번을 읽었다고 썼다. 이를 기념해 서재 이름도 ‘억만재’라고 지었다. 백곡은 ‘장자’ ‘한서’ 등도 읽었으나 읽은 횟수가 1만번을 채우지 못해 ‘독수기’에는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밝혔다.
백곡이 ‘백이전’을 즐겨 읽고 암송했다는 이야기는 이의현의 ‘도곡집’에 자세히 실려 있다. 80이 넘도록 장수한 백곡은 먼저 딸을 여의었는데, 분주한 장례 행렬을 따라가면서도 그가 손에서 놓지 않고 보았던 글이 바로 ‘백이전’이었다. 또 부인의 상중에 일가친척들이 ‘애고, 애고’ 곡을 하는데, 그는 곡소리에 맞춰 ‘백이전’의 구절을 읽었다고 이의현은 전하고 있다.
백곡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자질을 알아본 사람들은 글공부를 포기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40여년간 꾸준히 읽고 시를 공부한 끝에 그는 말년에 ‘당대 최고의 시인’(택당 이식)으로 불렸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노둔한 사람도 없겠지마는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조선시대의 독서왕’ 김득신의 문집 ‘백곡집’이 처음으로 번역됐다. 한문학자 신범식씨(충북대 강사)가 펴낸 ‘국역 백곡집’(도서출판 파미르) 제1권에는 5언·7언의 절구시 756수가 실렸다. 모두가 ‘다독’에서 나온 격조 높은 작품들이다. 시 가운데에는 역시 ‘독서시’(讀書詩)가 적지 않다.
‘이십육년간/등불 걸고 고문을 읽었네/붓은 과보(걸음걸이가 빠른 신화속의 인물)처럼 달리고/기상은 구름위로 솟으려 하네.’(讀罷偶吟·글 읽기를 마치고 읊다)
26년간 책읽기를 마치고 난 뒤에 쓴 시에서는 독서인의 기상이 엿보인다. ‘백이전’을 읽고 쓴 시 ‘제백이전’(題伯夷傳)에서는 ‘기이하구나 사기의 백이전/서애(유성룡)와 오산(차천로)은 만번을 읽었지/나 또한 억번이나 읽었으니/가슴 속에 의심나고 어두운 게 있을손가’라고 읊었다. 그에게 독서는 창작의 원천이자 생활 그 자체였다.
한번 읽기도 힘든 책들을 만 번 이상 읽은 이 사람은 조선 중기의 대표 시인,
백곡 김득신이다. 백곡이 독서광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부친이 감사를 역임할 정도로 명문 가문 출신이었지만
머리가 나빠 열 살이 되어서야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방 읽은 내용도 쉽게 잊어버리는 등 진도가 나가지 않자,
그는 책을 반복해 읽으며 외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몇만 번씩 읽어도 가끔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백곡이 말을 타고 하인과 함께 어느 집 앞을 지나다가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잠시 멈추고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나."
하인이 올려보며,
"이 내용은 나으리가 맨날 읽으신 것이라 소인도 알고 있는데,
나으리가 정녕 모른단 말씀이십니까?" 라고 물었다.
김득신은 그제야 그 글이 11만 1천 번이나 읽은 <백이전>임을 알았다.
하인도 지겹게 들어서 줄줄 외우고 있던 것이었다.
백곡은 이렇듯 제주가 뛰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글공부를 포기하라고 수없이 권고했지만
그는 40여 년간 꾸준히 읽고 공부한 끝에 말년에 '당대 최고의 시인' 으로 불렸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비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렸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