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뮴 중독으로 인한 중독증으로 등뼈, 손발, 관절이 아프고 뼈가 잘 부러지는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미나마타병과 함께 일본 4대 공해병이라 불린다.
일본 도야마현 진츠강 유역에서 약 1910년부터 발생했다고 한다. 이 이름의 유래는 환자가 아픔을 호소할때 '이타이 이타이(いたいいたい, 아프다 아프다)'라고 하는 것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이 병이 발생한 원인은 과거 주변의 광산(미쓰이금속광업(三井金属工業) 소유의 카미오카 광산(神岡鉱山))에서 아연의 제련 과정에 의해 배출된 폐광석을 통해 카드뮴이 유출되며 강으로 고스란히 흘러들어가 이를 식수, 농업용수로 사용한 주민들에게 발병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백명이 심한 고통을 호소했고 이 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56명이나 된다.
그러나 다른 광산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이 지역의 풍토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며 이 병은 다시 확산되었다. 당시 생산량이 늘어나 오염물질이 급격히 증가함과 전쟁중의 식량 부족이 증상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후에는 세균이나 영양실조에 이 병에 원인이 있다는 가설이 제기됐으나, 중금속 중독이라는 원인이 1957년에 밝혀졌다. 1961년에는 카드뮴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후 카드뮴 방류와 이타이이타이병의 인과관계는 1971년 행해진 소송에서 처음 인정되었다
공해병의 일종으로 수은 중독에 의해 나타나는 질병. 수은이 배출되지 않고 신체에 쌓이면서 특히 신경세포에 막대한 피해를 주며, 이 때문에 신체의 마비 증세와 정신지체 등의 각종 신경학적 증세가 발생한다.
국내에서도 화학산업단지가 밀집된 여수시에서 1970년대 발병사례가 다수 있었다.
이타이이타이병과 더불어 함께 일본 4대 공해병이라 불린다. 금속 성분이 인간의 몸에 축적되어 나타나는 유명한 공해병 중 하나.
처음 보고된 곳이자 그 명칭의 유래가 된 것은 1956년 일본의 구마모토 현 미나마타 시로, 메틸수은이 포함된 조개 및 어류를 먹은 고양이들이 미친 듯 발작하다 바닷물에 빠져 죽는 전조 현상이 있었고, 이후 주민들에게서 이 질환이 집단적으로 발병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메틸 수은은 인근의 화학 공장(신일본질소비료(新日本窒素肥料). 현 칫소(チッソ/Chisso) 사)에서 바다에 방류한 것으로 밝혀졌고, 2001년까지 공식적으로 2,265명의 환자가 확인되었다. 1965년에는 니가타 현에서도 대규모 수은중독이 발견되었고, '니가타 미나마타 병'이라고 명명되었다.
수은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수은이 몸에 축적되면 몸에 매우 해로우며, 특히 먹이사슬의 최최최상층에 있는 인간은 생물 농축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다.
이 사건을 다룬 하라다 마사즈미의 미나마타의 붉은 바다라는 동화책이 있다. 동화책이긴 해도 미나마타병의 기원과 결과, 그 후유증을 상당히 잘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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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일대에서 발생한 공해병.
1983년 농작물과 양식어장 피해로 시작되어 사람에게까지 발병함으로써 '우리나라 공해병의 고향','한국 공해문제의 대명사'라고 불린 대표적인 공해병 온산공단은 1974년 구리·아연·알루미늄 등 비철금속공업 기지로 지정된 후 1980년대 들어 화학·제지·자동차부품 등 다양한 업종의 공장들이 입주해 종합단지로 탈바꿈하였다. 그러나 공업단지 개발을 위한 종합계획도 세우지 않고 개별공장들이 공장을 세우는 바람에 전체 1만 4천여 명의 주민 가운데 1,800여 명만이 이주를 하고 나머지 1만 2천여 명은 공단에 포위되거나 고립된 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83년부터 주민들의 허리와 팔다리 등 전신이 쑤시고 아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2년 뒤인 1985년에는 이 지역 주민 1천여 명이 전신마비 증상을 보이자,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이타이이타이병의 초기 증세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다.'이라고 발표하면서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증세를 두고 환경청과 학계주민 사이에서 공해병 논쟁이 일어났으며 같은 해 12월 온산지역 주민들은 11개 공해배출업체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인체 피해 위자료, 농작물 피해보상금 지급 판결을 받음으로써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공해피해에 대한 법원의 구체적인 인정을 받았다.
이후 정부 당국도 공해피해를 인정하고 주민들의 집단이주를 결정, 공단에 둘러싸여 있던 1만여명의 주민을 온산읍 덕신리와 온양읍 남창리·대안리로 분산 이주시켰다.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
페놀은 유독물로 피부암과 생식이상을 일으키고 태아에도 영향을 끼치는 유해물질이다.
1차 페놀 오염은 1991년 3월16일 구미공단 두산전자에서 페놀원액이 파손된 파이프를 통해 낙동강으로 유입되어 발생하였다.
정수장에서는 페놀원액의 유입사실을 모르고 염소투입량을 늘렸다.
이 결과 염소와 페놀이 반응하여 클로로페놀을 생성. 악취가 심하게 발생하였다. 오염된 정수장 물이 대구시 거의 모든 지역에 식수로 공급되어 이 물을 마신 주민들은 두통과 구토증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2차 페놀오염은 두산전자가 다시 조업을 시작한 지 5일만인 4월22일 발생하였다.
부실 보수공사로 인해 페놀탱크 파이프 이음새 부분이 파열되어 페놀원액 1.3톤 가량이 낙동강으로 유입되면서 대구지역에 다시 식수공급이 중단되었다.
중독증상은 신경마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