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를 그리워하며
흔히 에피쿠로스(Epicurus, BC 341년-270년)하면 쾌락주의자, 향락주의자로 그를 떠올린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바로 선(善)'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삶에서 쾌락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에피쿠로스에 대한 오해이거나 피상적 이해이다. 실제 에피쿠로스는 지극히 소박하고 자유롭게 한 생을 살다간 지혜로운 생활인이었다. 그는 그 당시 사회 분위기와는 달리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결코 감추거나 죄악시하지 않았다. 그저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 한 발 물러나 있으면서 한 인간으로서 소박한 쾌락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열심히 추구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 여겼다.
에피쿠로스는 번잡한 도시 생활을 벗어나 아테네 외곽에 소박한 '정원'(Kepos)을 만들어 뜻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일종의 원시 공동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에피쿠로스적'이라는 용어가 연상시키는 보통의 의미와는 달리 그 집과 정원에서의 생활은 단순했다. 하루에 1/2파인트 분량의 포도주가 허용되었지만 평소 마시는 것은 물이었고 보리빵이 주식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와 달리 공유재산도 없었다. 기근이 일어났을 때 에피쿠로스는 매일 콩을 여러 알씩 나누어주면서 학생들을 구했다. 반면에 학생들 사이의 관계는 당대의 의미에서든 후대의 의미에서든 플라토닉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그가 만든 공동체에는 노예나 여성, 심지어 창녀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고 한다.
에피쿠로스는 "나에게는 빵과 물과 한 조각의 치즈와 무화과만 있으면 그것이 쾌락이다." 라고 말하며 "즐거운 가난은 훌륭한 것이다." 라고 토로했다. 실제 그가 창설한 케포스(정원)는 오히려 쾌락을 벗어남으로써 쾌락을 취하는 곳이었다. 에피쿠로스는 아무 양념도 하지 않고 삶은 콩 한 사발을 더 좋아했다. 그는 감각적인 쾌감을 추구 하지 않았다. 그는 콩을 직접 재배하여, 자신의 직접 키운 것으로 만든 음식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 그가 만든 원시 공동체인 '정원'에서는 자신의 철학에 동조하는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정원'에서 채소를 가꾸고 끝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정원' 대문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 이곳을 처음 찾아온 이여! 여기에 머물러도 좋다. 이곳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선(善)은 쾌락이다. "
72세 때 위궤양과 방광염으로 고통스럽게 죽던 날 에피쿠로스는 친구 이도메네우스에게 보내는 감동적이고 애정 어린 편지를 받아 적게 했다. "병으로 인해 고통이 극도의 이르렀지만, 그때까지의 나날이 자기에게는 늘 행복했노라고." 이 행동은 그가 심한 고통 속에서도 안식과 평온에 관한 자신의 철학에 끝까지 충실했음을 잘 보여주었다. 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어 오늘 따라 인간이라는 여러 불리한 조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결코 인간 이상이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살아있음의 즐거움을 진실하게 충실하게 누리고 간 에피쿠로스가 참 그립다.(수연)
첫댓글 "즐거운 가난은 훌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