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안씨 기해보의 안원, 안조동(安祖同), 안수(安隨) 3형제 기록
순흥안씨 (順興安氏) 기해보(已亥譜, 1659년) 기록의 논란에 대해
순흥안씨기해보 -출판년도,판차 1659년 인쇄판식 木板-족보
순흥안씨 족보(順興安氏族譜) : 기해보(已亥譜, 1659년) 화봉 옥션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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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안씨 문중의 두번째 족보-기해(1659년)보/서문/발문
순흥안씨 문중의 두번째 족보-기해(1659년)보/서문
기해(己亥)보 서문
안응창(安應昌)
옛날 가정(嘉靖) 병오년(1546)에 안(현 相國 玹)상국이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로 부임하여 비로소 족보를 편찬하였는바, 지금 병오년과는 이미 114년이 지났다. 그리하여 이름이 보첩에 올라 있으나 생존해 있는 자는 하나도 없으며, 늦게 태어나 기록되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니, 많은 후손들을 뒤이어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조고(祖考)이신 순계군(順溪君 世復)이 이것을 모으는 일에 뜻을 두시어, 세 파(派)의 후손들을 기록한 것이 거의 몇 권이었는데, 불행히도 병자년(1636)난리에 보관한 서적과 함께 보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 애석하다.
불초(不肖)는 선조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즉시 서울과 지방에 있는 보계(譜系)를 수록하여, 마침내 3파의 후손인 찰방(察訪) 홍정(弘靖氏)씨와 선비인 세형(世亨) ․ 도징(道徵) ․ 만유(晩瑜) ․ 만규(晩珪) ․ 만정(晩珽) 등 제씨와 함께 각 계파의 항렬을 연구하여 서로 대조하고 참고해서, 세 파의 족보를 다시 만들어 육 권(六券)의 책으로 나눈 다음, 각수들을 모집하여 판각하였다. 다만 이목(耳目)이 미치지 못해서 누락되어 기록되지 못한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행여 이다음에 뒤를 이어 편찬해서 중단하지 말고 영원히 이어간다면 이 족보에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다. 외손 중에 이 역사를 도운 자들을 왼쪽에 나열하여 후세에 보이는 바이다.
숭정(崇禎)3) 병자년 뒤 23년인 기해(1659)년 가을에.
후손인 통정대부 행 의성현령(通政大夫行義城縣令) 응창(應昌)은 재배하고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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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嘉靖):명(明)의 연호. 세종(世宗) 44년.
▶ 숭정(崇禎) 병자년 뒤 23년인
명(明)나라 연호. 병자년은 인조 14년(1636)에 조선은 청(淸)나라의 침공을 받아 항복하였고 명나라도 망했다. 오랑캐의 나라 청의 연호를 쓰기 싫어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순흥안씨 문중의 두번째 족보-기해(1659년)보/발문
기해(己亥)보 발문
안도징(安道徵)
기해년(1659)에 문소(聞韶)의 사군(使君)이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나에게 보내 왔다. “우리 집안의 족보가 가정(嘉靖) 병오년(1546)에 이루어졌으니, 이는 바로 안(左相 玹)좌상이 영남에 부임해 계실 때이다. 지금 이미 1백여 년이 지났으니, 여기에 기재되지 않은 자손들이 어찌 한(限)이 있겠는가. 이제 뒤이어 족보를 편수하지 않는다면, 뒤에 더욱 어두워 질 것이니, 그대가 어찌 나를 위하여 도모하지 않겠는가?” 나는 견문(見聞)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고 사양하였으나, 사군의 부탁이 더욱 간곡하므로, 부득이 집안사람인 만유(晩瑜) ․ 만규(晩珪) ․ 만정(晩珽)과 사제(舍悌)인 선징(善徵)과 함께, 여러 족보들을 수합(收合)하여 잘못된 것을 교정하고, 새로운 기록을 더욱 보태어, 세 파를 합해서 6책의 족보를 만들었는데, 두 달이 지나 손을 떼게 되었다.
아! 우리 안 씨는 바로 대현(大賢)의 후손이다. 전후(前後)에 크게 빛나는 분들을 이루 손꼽아 셀 수가 없을 정도인데, 1백여 년 전에 안(玹)상국을 얻어 보첩이 처음 만들어졌으며, 백여 년 뒤에 다시 안(應昌) 사군을 얻어서 보첩이 뒤이어 이루어졌으니, 여기에는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며, 사군이 선조들을 추모하는 정성이 안(玹) 상국에게 빛난다 하겠다. 사군은 또 말씀하기를 “안 상국이 족보를 편수할 때에도 종인(宗人)인 상사(上舍=進士) 승종(承宗) 공에게 족보를 교정하게 하고, 또 발문을 그 끝에 쓰게 하였으니, 자네도 또한 한 말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나는 감히 문장이 졸렬하다고 칭탁하지 못하여 두 번 절하고 쓰는 바이다.
이해(1659) 가을 9월에. 후손 도징(道徵)은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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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문을 지은 도징(道徵 1616-1678)공의 문집이 있다. 점리와선생문집(點离窩先生文集) 1898년 간행.
▶ 문소(聞韶)의 사군(使君)
문소는 의성(義城)의 옛 이름이고 사군은 ‘임금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수령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의성현령 안응창(應昌)을 지칭한 것이다.
順興安氏族譜 卷之一 [天] 第一派
牧隱李先生序云 順興安氏 世居竹溪之上 竹溪之水 出於太白山 山之大 水之遠 安氏之興 其無窮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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