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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심타”
“그냥 공룡으로 가자.”
“명렬(기상청 근무)이가 서쪽으로 가라고 했다.”
“설악산은 통제할거니까 월악산-속리산 산행으로 바꾸자.”
“대청봉 올라갈 수 있습니까?”
“입산 통제중입니다.” 하늘이 무심한 순간이다.
월악산
몇 번을 시도해도 불통이던 설악산 오색분소와 연결이 됐다. 8시 11분,“통제중입니다” 한 마디에 산행지는 공룡능선에서 월악산-속리산으로 변경됐다. 5월부터 준비해온 설악산 공룡능선 등반이 무산되는 순간이다. 10호 태풍 ‘우쿵’ 때문에 설악산 입산이 통제됐기 때문이다.
7월 15~16일 폭우로 입산 통제됐다가, 7월 29일부터 부분적으로 입산금지가 해제돼 공룡능선-당초 계획했던 ‘설악산-대청봉-중청산장-공룡능선-오세암-백담사코스’는 불가피하게 ‘오색-중청산장-공룡능선-오세암-백담사코스’로 변경했지만-을 갈수 있게 돼 여간 다행이 아니었는데 태풍이 불어와 그만.......
황제산행
태풍 우쿵이 나를 25년 만에 다시 월악산을 찾게 했다.
1981년 10월 1일인가 3일인가로 기억된다. 그때는 충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비포장 길을 따라 월악산을 찾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산행전날 월악산 밑 텐트(현 동창교매표소 바로 위)에서 바로 본 석양이 붉게 물들인 월악산의 암봉, 그리고 “시내버스 놓치겠다”며 겁도 없이 40m 길이의 자일만 믿고 암벽으로 질러가자고 3~40m 내려갔다가 자일 끝이 암벽 중간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오른쪽으로 돌다가 길을 잃어 고생한 일 밖에는.
그 이후 많이 알려진 월악산 송계계곡, 마애불상과 내가 숙박하고 산행했던 등산로와 연계를 시켜보려고 했지만 도무지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없어 포기하곤 했던 기억밖에는....... 그런데 이제 와서 알아보니 동창교매표소가 바로 송계계곡의 중간지점이다.
어쨌든 이번 산행코스는 월악산의 가장 긴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서울 잠실역을 떠난 대절버스는 정확하게 3시간 만에 우리를 내려준다. 버스에서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쌍둥이 송아지가 어미 소와 다정하게 앉아 있다. 찰칵. 바로 농촌의 모습이고 농촌의 정이다.
시골집 마당에서 무엇을 하시는 지 분주한 할머니한테 “이 마을 이름이 뭐지요?”하고 물어보니 “(제천시 한수면) 수산리”라고 답을 하신다. ‘수산 1리’이다.
마을을 벗어나 산 쪽으로 향하니 산비탈 밭 고추대가 누렇게 말라죽었다. 붉은 고추를 매단 채. 탄저병 때문이다. 시골의 정을 느끼게 했던 송아지와 농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을 고추밭이 오버랩 되며 가슴을 시리게 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70여m를 올랐을까? 밭에서 일을 하던 할머니가 소리를 지른다. “왜 그러시지??”
“위쪽(왼쪽) 길로 가야 한다”고 소리를 치신다. 배낭매고 밭두렁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모습이 얄밉기도 하련만 친절하게 “잘못 가고 있다”며 등산길을 알려 주신다. 이게 바로 농촌의 인심이다.
보덕암 밑 그늘에서 점심을 준비한다. 점심 메뉴는 ‘햇반’과 ‘묵은지’에 꽁치통조림과 라면을 넣은 김치찌개.
벌써 오후 1시다. 월악산 밑 조그만 암자인 보덕암에 들렀다가 등산로를 잃었다. 앞서 간 친구들이 해우소로 간 기억은 있는데 설마 그곳으로 길이 났을 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법당 뒤에 있는 토끼 길로 접어드니 그곳이 끝이다. 다시 반대편 길로 방향을 잡으니 농로다.
그때 앞서 갔던 관선이가 걱정이 됐는지 해우소 앞에서 소리를 지른다. “여기야.”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야 그렇지만 산행대장과 산행부대장까지 3명이 등산로 초입을 몰라 헤매다니.
등산로는 시작부터 계단이다. 태풍의 직접적인 영향권인지, 간접적인 영향권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람이 세게 분다. 세차게 부는 바람이 땀을 식혀주며 힘을 보태준다. 한 친구는 세관이는 뒤로 처진다. 세관이 뒤로 산행대장이 따른다.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더 세 진다. 바람은 나뭇가지를 휘감으며 나뭇잎에 닿아 폭포수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낸다.
사람의 발길 그리 많지 않은 등산로에 산양이 흔적을 여기저기 남겼다. 여기저기가 아니다 . 등산로를 따라가며 계속 남겼다. 바로 분비물. 동글동글한 게 반들반들하다. 마치 김이 모락모락 날 것 같은 것도 있다.
얼마 전 월악산에 방사했다는 산양이 등산로 인근을 오가며 먹이를 찾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산양의 분비물은 보덕암에서 오르면 처음으로 만나는 암봉인 하봉, 그 다음 암봉인 중봉, 월악산의 가장 높은 암봉으로 1,097m의 위용을 자랑하는 영봉(靈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장식한다.
중봉 중턱쯤 갔나? 뒤를 돌아보니 하봉이 안개 속에서 살포시 머리를 든다. 뒤로 충주호가 겹치면서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월악산 하봉
25년 전 월악산을 찾았을 때는 이 능선은 생각도 못했다. 주봉인 영봉 오르는 길만 나선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마저 낙엽이 내려 길을 식별하기도 쉽지 않았었다. 하봉에서 중봉, 영봉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띠면서 생각하니 철책계단이 없으면 이곳은 접근이 불가능한 길 같다. 일반인들에게는.
영봉 밑에서 등산로 공사를 하는 인부를 2명 만났다. 4시간이 넘는 산행 만에 처음 만나는 사람이다. 반갑다. 더구나 우리 같은 사람을 위해 등산로를 보수하는 사람들이니 반가움은 두 배로 증가할 수밖에.
오늘 길 두 세 곳에 등산로 정비에 필요한 쇄 파이프와 라면, 생수 등이 보관돼 있는 것을 봤는데 이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영봉 오르막에서 세 명의 등산객을 만났다.
드디어 영봉이다. 영봉은 봉우리가 남과 북으로 두 개의 조그만 봉우리가 있다. 영봉이라는 표지석은 북쪽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친구들이 북쪽 봉우리로 몰려가는데 남쪽 봉우리를 선택했다. 남쪽 봉우리에서 북쪽 봉우리에 선 친구들을 사진촬영해줄 심산이었다.
월악산 정상 영봉 밑에서 숨고르기
발 아래로 푸른 점이 보이는가 싶더니 바람과 함께 그 짙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면서 백두대산으로 이어지는 남쪽 능선과 송계계곡이 한 눈에 들어온다. 먼저 동쪽인 덕산매표소 쪽 계곡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다음에 오른쪽으로 카메라 방향을 바꾸는데 보이는 것은 온통 안개뿐이다.
산행 중 만난 5명 가운데 한명이 영봉에서 단체 기념촬영 카메라 셔터를 눌러줬다. 다음은 개인 기념촬영. 사방이 온통 안개로 둘러싸여 기념촬영은 영봉 표지석이 모델이다. 친구들마다 제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한다. “내가 언제 여기 다시 올 줄 모르는데 기념사진은 찍어야 한다”고 한마디씩 보태며.
기억을 되새기니 25년 전에는 북쪽 봉우리로 올라선 것 같은데 현재 등산로는 남쪽에서 영봉 정상으로 올라간다. 전에는 영봉을 나선형으로 빙 돌아 올라갔는데 지금은 철책계단을 놓아 등산로가 바뀐 것 같다.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남쪽 봉우리로 발길을 옮기니 조금 전에 바람이 보여준 비경이 다시 연출된다. 자세히 보니 바람이 안개를 안고 다니는 듯하다. 바람결 따라, 풍속에 따라 순식간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다시 걷히고를 반복한다.
바람과 안개의 절경-월악산 영봉에서
영봉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표고는 해발 900m를 넘는다. 헬기장에 도달해 뒤를 보니 영봉이 “나 여기 있다” 하면서 웅장한 자태를 보여준다. 모두 입이 벌어진다. 25년 전 처음 본 영봉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바로 이 모습을 보려고 월악산을 찾는다.
다시 안개가 뒤덮는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도 계단 길이 이어지더니 왼쪽에 월악산의 자태가 안개 속에서 잠시 속살을 드러낸다. 감탄사 이외에는 특별히 표현할 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시 계단 길을 얼마를 내려갔나, 이번에는 오른쪽에 월악산의 비경이 충주호와 함께 펼쳐진다.
금강송(松)도 바위 위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웅장한 자태로 우리를 반긴다.
마애불상에 도착했다. 신라 마지막 태자와 경순왕의 귀여운 딸 덕주공주의 전설이 서린 곳이다.
길고 긴 내리 막 길도 끝이 나고 이제는 평지다. 월악산이 마지막 선물을 하나 더 하늘에 펼쳐준다. 하늘에 뜬 구름을 둥근 테두리 형태로 물들인다. 25년 전에는 월악산의 암봉을 붉게 물들이더니 지금은 구름을 붉게 물들여 장관을 연출한다.
덕주사에 도착하니 오후 7시 40분.
덕주골 입구에서 막걸리와 산채비빔밥으로 뒤풀이를 하고 차에 오르니 눈이 스르르 감긴다.
대절버스는 어둠을 뚫고 속리산에 도착했다. 숙소는 수학여행 학생들을 단체로 받는 로얄호텔. 방 하나에 6만원이란다. 아침 7시 50분에 올갱이국으로 아침을 하겠다는 예약도 하고. 산행대장과 부대장이 방 둘을 얻었다. 하나는 코고는 친구들, 다른 하나는 코를 안 고는 친구들이 쓰기로. 방은 2층이다. 2층에 투숙한 사람은 우리들뿐이다.
월악산도 우리들만을 위한 산이었다. 숙소 역시 우리들만을 위한 곳이다. 이게 바로 황제가 아닌가 싶다. 산행대장은 “산에 와서 이처럼 좋은 곳에서 잠자고, 푸짐하게 먹고 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중청산장에서는 칼잠을 잔다”는 말도 덧붙인다.
고등하교 졸업 27년 만에 만났으니 월악산 산행이 힘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냥 잘 수 없다. 산행대장은 이 순간을 위해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집에서 준비해왔다. 데우기만 하면 된다.
“저쪽 방(코 안고는 방)에서는 안 오나?”
“그냥 잔 다는데.......”
한잔, 두잔 술이 돌아가고
빈병이 하나 둘 쌓이고,
그냥 잠을 자기가 그랬는지 옆방에서 친구들이 하나 둘 건너오고,
그러다보니 11명 모두가 모여 밤 1시까지 술잔을 돌린다. 세상사는 얘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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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어떻게 키는 거지?”
잠결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일어났나보다. 어제는 아침 식사 7시 30분이 너무 빠르다고 시끄럽더니 새벽부터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빗소리도 나는 것 같다.
6시 30분이 되니까 모두 일어났다. 일찍 일어난 친구는 5시였다고 한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가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세관이는 “새끼발톱이 빠질 것 같다”며 “산행은 포기하고 법주사에만 갔다가 되돌아갔으면 한다”고 산행대장에게 양해를 구한다. 세관이는 재선이와 운명을 같이 한다며 동행했는데.
올갱이국으로 아침을 끝내고 양치질을 위해 모두들 방에 와 있는데 광수가 “비도 오는데 일단 서울로 올라가 청계산이나 관악산 등산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서울 가면 끝이다. 폭우가 오지 않는 한 속리산은 올라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광수 말이 걸작이다. “사실 내가 옆방 대표로 왔는데 그렇게 전하겠다”고 말하면 일어선다. 그 틈을 놓칠세라 누군가가 “옆방을 설득하라”고 등 뒤로 주문을 한다.
숙소에서 우비를 꺼내 입고, 우비를 준비하지 않은 친구들은 대절버스 기사 아저씨기 전해주는 간이 우비를 입고 속리산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버스는 바퀴를 몇 바퀴 굴리는 가 싶더니 관광호텔 앞을 지나 법주사로 향한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였다면 걸어와야 했는데....... 버스가매표소까지 간다. 아침시간이라 이곳까지 버스가 올수 있었다고 한다. 역시 이번 산행은 황제등산이다.
매표소 앞에서 내가 불만을 쏟아냈다. 국립공원인 속리산 입장료 (1인당) 1,600원에 문화재 관람료가 1,800원이란다. “누가 문화재 관람한다고 나 했나?"
이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으면, 그리고 항의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의는 다 사라질 것이다. 국립공원 입장료에 붙여서 강제로 걷어 들이는 문화재 관람료는 사라져야 한다. 문화재 관람료는 문화재관람객에게만 받아야 한다.
어찌됐든 문화재 관람권을 획득한 우리는 법주사는 내려오는 길에 보기로 하고, 안개를 헤치며 등산길에 오른다. 복천암을 지나 휴게소에 들러 500원 짜리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혔다. 어제는 태풍의 영향으로 바람이 많이 불어 시원하다 못해 추운 기운까지 느꼈는데 오늘은 덮다.
주인 아주머니는 “아이스크림이 녹아 싸게 판다”고 했다. 그랬다. 비닐봉지를 벗기자 아이스크림은 엿가락 마냥 제멋대로다. 손잡이가 없는 아이스크림도 있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다시 얼린 것이다. 그렇지만 맛은 최고다, 값도 싸고(?).
다음 휴게소에 도착하니 주인 아주머니가 “마수를 못했다”며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시원한 맥주를 한잔하는데 “동동주 마셔라, 부침개 먹어라” 하며 야단이다. 매몰차게 거절하고 산에 오른다.
속리산 문장대 오르는 길
땀을 얼마나 흘렸던가? ‘호서제일가람’이라고 쓰여 진 법주사 일주문을 출발 3시간 만인 12시 문장대에 올랐다. 23년 만에 다시 찾은 문장대다. 바위는 그대로지만 문장대 정상의 모습도 조금은 바뀐 것 같고, 상점모습은 많이 변했다. 안개가 자욱해 산은 보이지 않는다.
지역이기주의에 화가 치밀었다. 문장대 밑에 안내지도가 크게 그려져 있어 기록으로 남길 겸 카메라를 들이대고 보니 이곳은 경상북도 상주시 쪽 속리산과 관광지만 그려져 있다. 같은 산을 하나 두고 자기네 관할구역인 상주지역만 안내한 것이다.
“밴댕이 소갈머리 같으니라고.”
관선이 중학교 친구가 운영하는 매점에서 따뜻한 잔치국수와 동동주로 목을 축이고 속리산 정상인 천왕봉으로 향한다. 길은 피로를 풀기 적합하다. 문장대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은 복조리를 만드는 조리대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다. 암봉이 있으면 철저하게 돌아간다. 위험한 구간은 없다. 그야말로 어머니 품 같다.
속리산을 등반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봉우리는 문장대지만 정상은 천왕봉이다. 문장대는 해발 1,054m, 천황봉은 1,057m다. 아직 이정표와 표지석에는 천황봉으로 적혀 있지만 일제의 잔재다. 천왕봉이 옳은 표현이다.
청법대, 신선대, 입석대를 지나 큰 암봉을 돌아서니 앞에 비경이 펼쳐진다. 줄지어선 암봉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 뒤로 머리에 안기를 휘감은 천왕봉이 숨어있다. 문수봉을 지나 뒤를 보니 비경이 다시 펼쳐진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는다. 안개가 그 모습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천왕봉 바로 밑 헬기장에서 소주로 목을 축이고,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랜 후 다시 조리대 숲길을 헤치고 천왕봉에 올랐다. 처음 찾은 천왕봉은 볼품이 없다. 돌무더기 같은 모습이다.
사실 나는 산행지를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월악산-속리산으로 바꾼 후 많은 기대를 했다. 내가 태어난 곳이 천왕봉 밑 조그만 산골마을이기 때문이다.
세살에 그곳을 떠나 다시 찾은 적도 없지만....... 내심 천왕봉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저곳이 내가 태어난 곳인가? 아니면 저쪽이 내가 태어난 고향인가?”하고 살펴볼 심산이었다. 그러나 천왕봉의 안개는 내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감귤로 달랬다.
하산이다. 내려가는 길은 상고암-상환암 코스다. 내가 속리산을 찾았을 때만해도 이 코스는 인적이 드물었다. 산악인들이나 찾고 하던 길이다. 그러나 지금은 등산객들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는 길이 됐다.
얼마 내려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상환암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상고암은 보지도 못했는데. 상환암 바로 앞 계곡에는 땅속에 숨은 폭포가 있다. 그래서 이름도 은폭(隱瀑)동이다. 전에 속리산에 살던 고종사촌들하고 은폭동을 찾은 적이 있는데, 물은 보이지 않고 계곡 밑에서 들여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청아하게 맑았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을 보내고 상환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환암에는 지난 8월 15일 돌아가신 당숙모가 이곳에 모셔졌다. 발인만 보고 17일 저녁에 올라왔는데, 삼우제를 지내고 상환암에서 49제까지 모실 예정이라는 얘기를 동생들한테서 들었다. 빠르면 어제 모셔졌을 테고, 늦었으면 오늘 모셔졌을 것이다.
아주 조그만 암자인 상환암에 오르니 인적이 없다. 고양이만이 암자 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보살님을 찾아 물으니 “어제 법당에 모셔졌다”고 한다.
최근 기억으로는 처음으로 법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절에 가면 부처님께 합장 예불은 하지만 법당 밖에서 인사를 드렸지 법당 안에 까지는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법당 부처님께 합장 예불을 하고, 당숙모에게 다가가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상환암은 고즈넉한 암자이다. 앞에 조그만 계곡이 있고, 앞산에는 적송들이 멋을 뽐낸다. 그 계곡이 바로 ‘은폭동’으로 불려진다. 암자 계단을 내려오니 은폭동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은폭동에 가 은폭의 물소리를 즐기고 싶지만 먼저 간 친구들이 너무 기다릴 것 같아 길을 아쉽지만 길을 재촉한다.
국보 55호로 기억되는 5층 목조건물 ‘팔상전’은 단청이 많이 퇴색해 더욱 아름답다.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단청을 바로 해서 그런지 호화롭기는 했지만 목조건물의 단아함을 느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목조건물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카메라 셔터가 저절로 눌러진다.
‘대웅보전’ 용마루도 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전에는 용마루에 청기와가 두 장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청기와가 세장으로 늘었고, 황금빛에 가까운 금속성의 기와가 용마루 가운데를 장식했다.
국보 5호인 ‘쌍사자 석등’의 수사자 갈기 뒷부분 돌은 떨어져나가는 등 많이 손상된 모습이다. 23년 전에도 그랬는지는 기억이 흐리지만.
국보 64호인 ‘석연지’를 보고 싶었지만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다. 아쉬움 속에 법주사 밖을 빠져 나오는데 그 무시무시한 사천왕상도 인자(?)한 모습이다. 중학교 때 처음 법주사를 찾았을 때는 무서워서 사천왕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왜 그런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급작tm럽게 변경된 월악산-속리산을 잇는 1박 2일 산행은 속세를 떠난 속리산(俗籬山)에서 속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며 막을 내렸다.
<<뒷 얘기>>
‘봉숭아학당’ ‘웃찻사’는 저리가!
“너 수학시험 왜 잘 못 봤어?”
“XXX 때문에요.”
“왜 지각했어?”
“XXX 때문에요.”
“요즘은 모든 것이 XXX 때문이래.”
세관이의 한 마디 한마디는 웃음보따리다. 입담이 어찌나 구수한지!!!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XXX 때문에”하면 모든 것은 통한단다.
성식이의 잊을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귀가 솔깃하고 들을수록 궁금증은 증폭된다. 그러나 더 듣고 있자면 헛물 킨 얘기(?)가 많다. 끝에 가서는 부처님 선문답하는 듯 해 계속 화두로 남는다. 바로 입담이다.
듣고 있던 광수 “우리 친구들 참 순진하지?”
“순 찐~하지.” 세관이의 이 한마디에 ‘광수생각’은 오갈 데가 없다.
그러다 광수가 전세를 역전시킨다.
“우리 이제 공부하자.”
경준이와 나는 웃기에 바쁘다. 세관이가 입을 열면 웃음부터 나온다. 그리고 나오는 얘기 하나 하나를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메모리칩에 입력시키지만 지금 기억나는 것은 없다. 재선이, 인관이도 주로 웃기에 바쁘다.
종윤이는 시보, 판사, 변호사를 하면서 실제로 맡은 많은 사건을 입담 좋게 풀어놓는데 그 한마디 한마디가 픽션 같은 웃음이고 지식이다. 관선이의 입심도 알아준다. 내가 옮기지만 못할 뿐이다. 그렇다고 “서운해 하면 안 된다” 관선아.
산행대장 기우는 웃을 새도 없다. 낙오 생 챙기랴, 일정 체크하랴, 등산로 조정하랴, 내 불평불만 들어주랴, 그러다보니 빙긋이 웃는 게 전부다. 부대장 영선이도 거기서 거기다. 총무역할 하랴, 산행 기록하랴, 대장명령 받들랴, 잔반(?) 처리하랴.......
걸어 다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법주사 일주문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세관이와 그 주치의(?)인 재선이와 안녕을 하고 이어지는 속리산 산행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냥 묻는데, 한나절은 몇 시간이고, 반나절은 몇 시간이지?” 광수의 이 같은 질문은 뒤이어 “차 한 잔 마실 시간은 얼마나 되지?”로 이어지고
종윤이는 “관운장이 조조로부터 따뜻한 차 한 잔을 받아놓고 출전해 적장 문추의 목을 베어 돌아오니 차가 식지 않고 따뜻하더라는 데서 유래됐다”고 말한다. 30분 정도 된다는 얘기다.
종윤이는 입을 열 때마다 역사책과 백과사전이 쏟아져 나온다. 이를 듣고 있던 광수는 “너는 모르는 게 없냐?”고 묻기까지 했다.
관선이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대가이자, 원리를 깨우치는 학문을 거침없이 설파한다. 상대성 원리는 빅뱅이론으로 이어지고, 다시 개화파 유길준이 미국에 가서 조세제도 등을 보고와 썼다는 ‘서유견문록’ 등등 지식의 샘은 한강의 발원지인 ‘검용소’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처럼 콸콸 솟는다.
그리고 미분, 로고로 이어진다. 여기에 성식이가 거든다. 나는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미분을 하면 상수가 되고, 그래프를 미분하면 상수가 나오기 때문에 XXX가 확실하다고 한다.
몸도 마음도 이팔청춘
“우리 2열종대로 가자.”
“하나~ 둘~ 셋~넷~”
경준이는 “학교 때도 기수를 했는데 또 기수를 하라”고 한다면서도 치우천왕 손수건을 스틱에 달아 하늘 높이 치켜든다.
이를 지켜보는 등산객들이 빙그레 웃는다.
속리산 하산길 2열종대 행군. 행군간에 군가는 물론이고 구보까지했다.
“행진 중에 군가하다. 군가는 진짜 사나이.”
“지금부터 법주사(속리산 내)까지 구보를 한다.”
물통이 땅바닥에 뒹굴고, 소주병이 배낭에서 점프를 하다고 길바닥에 쳐 박힌다.
속리산 문장대-청왕봉 코스를 무사하게 등정하고 산을 내려와 법주사로 가는 평탄한 길에서 젊음이 솟구친다.
어제 밤에 수학여행 단체전문 숙소에서 하루 밤을, 그것도 30년 수학여행갈 때 그 얼굴들이모이다 보니 그때가 생각났는지, 어제 월악산 靈峰에서 신령스런 정기를 받고, 속리산 문장대와 천왕봉에서 백두대간을 정기를 받았는지, 지금은 지칠 때도 됐는데 이팔청춘이다.
★ 일시 : 2006년 8월 19일 오전 8시 10분~8월 20일 오후 9시 10분
★ 산행친구 : 김광수, 김영선, 김재선, 박관선, 백성식, 연기우, 오세관, 오종윤, 이경준, 최기수, 최인관(총 11명)
★ 월악산 등산로(수산1리-보덕암-하봉-중봉-영봉-마애불-덕주암-덕주골; 오전 11시 5분~오후 7시 40분)
★ 속리산 등산로(법주사-복천암-중사자암-문장대-신선대-입석대-문수봉-청왕봉-상고암-상환암-법주사: 오전 9시~오후 4시 20분)
첫댓글 황제 산행 - 앞뒤에 등산객이 없어서? 재밌다. 함 따라가보고 싶은데 체력이 받쳐줄 지... 속리산 천왕봉(문장대)는 초딩시절 올라간 본 이래로 가본 적이 없다. 이후 순택이와 둘이 대학생 때 한겨울에 놀러갔다가 숱하게 넘어진 기억이... 아뭇튼 기행을 포함한 산행기가 재미있네..
앞 사람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최 국장의 생생한 레포트를 접하고 보니 나 또한 새롭군..... 충북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돌이켜 보면 충북의 산하 조차도 거의 둘러본 일이 없는 것 같아..... 기회가 된다면 충북의 명산들을 차례차례 올라 보는 것은 어떨지????
기수의 산행기를 듣고 보니, 산행 중 흥취와 정감이 절절이 전해오는구려! 적당하게 끼워 넣은 사진 한 컷 한 컷이 더욱 더 산행을 실감나게 전달되는구려! 금상첨화라고 하던가? 탁월한 글솜씨에 편집장 다운 글과 사진배치가 앉아서 영봉과 천왕을 넘는 기분이구려. 경업대 밑으로 아찔하게 펼쳐진 바위 절벽이 생각나는구려!
2 중 번호 붙여가, 군가는 진짜사나이로 시작을 해서 좌로봐 분열까지 햇다. 거기에 실력을 발휘하여 구보까지 했으니 참으로 추억의 황제 산행이었다. 이 것도 큰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최기수 리포터에게 감사한다. 세관이는 잘있겠지 그리고 재선아 너의 무릎보호대 너무 좋았다. 전혀 통증이 없었다. 언젠가 돌려 줘야하는데, 관악산 정상에서 만나자.
기수야, 정비석의 산정유한을 보는 듯하다. 좋은 친구들, 좋은 기회, 좋은 산행, 잊을 수 없는 1박2일이었다. 모두에게 감사한다.
메모리가 뒷받침이 안되는데 더 실감나고 재미있게 쓰지 못하는 아위움이 언제나 남는다.
기수 메모리는 천하가 보증한다. 정말 종윤이 말대로 앞사람 등산화 뒤축이나 보고, 운좋으면 멀리 산등성이 바라보는게 전부였는데 너는 어떻게 구비구비 기억해냈는지 용하다. 빈말이 아니라 거의 워낑 리코더 같은 느낌이다. 강추!! 그리고 이런 멋진 추억을 느끼게 해준 연기우 대장과 김영선부대장, 그리고 튼튼한 우리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자.
항시 기수의 맛갈 난 글을 보니 감칠 맛이 나는구먼. 고생은 하였지만 좋은 산행이었다. 안전하게 산행을 마친 친구들 모두에게 감사하고....
산행기를 이처럼 조리있고 담백하게 엮어나가다니 참으로 재주가 많구나. 좋은글 다시 한번 더감사. 월악산은 기억에 많이 남을것 같다.왜냐면, 입장료를 내고 싶었으나 어디서 내는지를 몰라 공짜로 했으나까.ㅎㅎㅎ
정말 신기하게 잘 엮어놨네~. 눈~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 또 이런 기회가 올까! 문장대는 2번(15년전,30년전), 천황봉(속리)과 월악은 처음이네. 쫗았는데... 지금은 회사! 뻐근한 현실은 답답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