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에서 본 셀 교회:
역사성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2. 셀 교회 종류 2.1 순수한 셀 2.1.1 공격적인 성장 2.2 메타 셀 2.2.1 순수 셀과 메타 셀의 비교 2.3 기존교회 작은 모임 2.3.1 세런디퍼티 2.3.2 언약 3. 역사성 3.1 성경 3.2 초대교회 3.3 전 종교개혁 시대 3.4 경건주의 4. 나가는 글 참고문헌
라은성(역사신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마치 80년대 대학생 선교회들이 갖고 있던 ‘순’조직이나 ‘제자훈련’이 교회 성장의 대안인 듯 설쳤던 한국의 기성교회들은 어디든지 제자라는 말을 선호했다. 10여 년 전에는 강해설교의 물결이 한국교회를 휩쓸더니 21세기가 접어들면서 ‘셀 교회’(cell church)가 마치 교인성장의 ‘만병통치 약’을 구하기 위해 노고했던 진시황제처럼 목회자들은 전전긍긍하면서 이러 저리 많은 컨퍼런스에 쫓아다닌다. 정통이 역사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셀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셀 조직이 역사적임을 증명하며 정통성을 지녔다고 한다. 그 일을 위해 초대교회, 즉 사도행전에서 그 기원을 찾아본다. 그리하여 셀 교회의 역사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므로 현대교회에 가장 업데이트된 교회임을 주장한다. 교파를 초월하여 한국 교회들 가운데 다수가 셀 목회를 배우려고 노력한다. 셀 교회가 과연 한국 정통 장로교회 및 개혁신학을 지향하는 교회에서 수용하는데 역사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다 하겠다. 역사성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그 역사성이 설득력을 주기 때문이고 정통성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셀 교회가 사도 시대부터 있었다고 증명하므로 셀 교회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이론가들은 노력한다. 그러한 역사성을 셀 교회가 갖고 있는 것인지 살피는 것이 이 소논문의 목적이다. 또 하나는 이런 셀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 셀 교회의 형태를 먼저 고찰한 후 그 가운데 성장 위주의 셀 교회 역사성의 정당성을 추적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셀 교회의 역사적 고찰을 더듬어보면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평가ㆍ비판하려고 한다.
2. 셀 교회 종류
셀 교회, 즉 작은 모임들은 기존 교회에 이미 존재해 있었다. 예를 들면, 구역모임, 선교회, 또는 유치부부터 시작한 장년부에 이르는 여러 작은 모임이 있었다. 그 가운데 요즈음 흥행하고 있는 셀 교회의 역사성을 보기 위해 어떤 종류의 셀 교회를 말하는지 살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리라 믿어진다.
2.1. 순수한 셀 현재 가장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셀 교회는 ‘순수 셀’(Pure Cell), 즉 순수 셀 교회이다. 한국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등 여러 국가에서 이 ‘순수 셀’의 체제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셀 교회 전문가들은 이 교회의 시작을 서울 여의도 순복음 교회로 본다. 그 철학 역시 순복음 교회에서 나온다. 현재 순복음 교회는 매주 주일 예배에 400,000명이 참석하며 지방교회에서 약 300,000명이 참석하고 있다. 거의 700,000명이 넘는 회원들이 이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원인은 22,000개의 셀 단체들을 갖고 있는 조직이라고 한다. 이 교회에 대한 조직을 가장 잘 정리한 자인 랄프 네이버(Ralph Neighbour)는 1990년에 셀 교회 구조를 정리하였다 :
셀은 교회이다. 교회는 셀이다. 셀은 ‘지역교회’라 불리는 큰 공동체의 기본적 구조이다.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이다. 도시 속에 있는 모든 구조는 반드시 셀이 되어야 하고, 셀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고, 그리고 셀의 삶을 통해 강화되어야 한다. 인간의 몸에서처럼 교회의 삶은 셀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이를 수 있는 방법 역시 셀이다.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세우심을 입는다.
이 모형을 따라 싱가포르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 침례교회’의 담임목사인 로렌스 콩(Loreance Khong)의 경우도 순복음 교회를 모방하여 급성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86년 600명의 교회로 시작했지만 1988년 셀 교회의 원리 정리자인 랄프 네이버의 도움을 받아 셀 교회로 전향한 후 오늘날 10,000명에 육박하는 교회로 급성장했다고 주장한다. 현재 그의 교회는 500개 이상의 셀 교회가 있다.
2.1.1. 공격적인 성장 순수 셀 교회의 목적은 단연코 성장, 즉 수적 성장이다. 공격적인 성장을 추구한다. 잃어버린 자들을 복음화 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전도한다는 점에서는 일반적인 복음화와 같은 점이 있겠으나 실제로는 다른 측면이 있다. 마치 어부가 그물을 쳐서 고기를 잡는 원리처럼 셀 교회도 그와 같이 행한다. 미국에서 순수 셀 교회를 실천하고 있는 래리 스톡스틸(Larry Stockstill)에 의하면 :
낚시 바늘로 물고기를 잡는 옛 방식은 이제 영혼들이 함께 모이는 목적을 위해 공동체에 들어온 신자들의 모임들로 대치된다. . . . 예수님은 복음화 원리를 설명하시기 위해 그물 물고기 잡는 법을 사용하셨다. 우리의 성장은 곧 함께 사역하는데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실제로 순복음 교회를 담임하는 조용기 목사는 낚싯줄로 고기를 잡는 방법보다 효율적인 방법인 그물로 고기를 잡는 법을 가지고, 셀 교회조직을 통해 교회를 성장한 비결을 말한다 :
우리는 50,000개의 셀 단체를 갖고 있습니다. 각 단체는 내년에 그리스도에게로 두 사람을 인도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닌 자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봉사합니다.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고, 그들이 실제로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도 합니다. . . 그러한 사랑의 헌신이 3-4개월이 지나고 나면 강퍅한 영혼이라도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서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셀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수달이 지나도 성장하지 않으면, 그 단체를 해산시키고 성장하는 단체로 병합시킨다. 그 기간은 6개월이다. 성장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이는 횟수가 거듭할수록 더 많이 나눠지게 되기 때문이다. 나눠지면 성장을 하게 된다는 단순한 논리이다. 모든 셀은 동일한 계획을 갖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 교훈은 주일 아침 목사님의 메시지이다. 주일 메시지가 셀에게 교훈을 주게 된다. 강력한 지도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 지도자는 강력한 행정력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2.2. 메타 셀 ‘메타 셀’(Meta Cell)에 대해서는 카알 조지(Carl George)가 선구자이고 그것의 이론가이다. ‘메타 셀’에 대한 견해를 조지는 자신의 처음 책 『미래의 교회를 준비하라』(Prepare Your Church for the Future)에서 처음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언 듯 보기에 ‘순수 셀’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 미국에서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분석한 결과 그가 정의내린 형태이다. 메타 셀을 제안하면서 조지는 좋은 프로그램을 교회에 적용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교회를 분석하라고 권한다. 마치 “X-ray로 무엇인가 빠진 것이 없는지 정확하게 분석하고 밝히는 것”이 우선적인 행위라고 제안한다. ‘메타 셀’은 한 교회 안에 있는 작은 모임들을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책, 『변혁하는 교회』(The Coming Church Revolution)에서 ‘메타 셀’에 대한 조직을 자세히 설명한다.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성격과 특징에 따라 첫째, 주일학교, 선교회, 예배 준비부, 찬양부, 운동부, 노인부, 등등으로 구성된 작은 조직들이 10-16명으로 구성되어 셀의 역할을 한다. 둘째, 셀 교회를 한다고 공언하지 말고 조용히 조직을 바꿔야만 한다. 셋째, 격월로 지도자 모임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은 ‘메타 셀’을 지향하여 성장하는 미국교회들은 시카고 주변에 위치한 윌로우 크릭 컴뮤너티 처치(Willow Creek Community Church),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새들백 컴뮤너티 처치(Saddleback Community Church), 뉴 호웁 컴뮤너티 처치(New Hope Community Church), 그리고 신시네티 빈야드(Cincinnati Vinyard) 등이다. 이상의 교회들은 작은 모임들을 통해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면, 드라마부, 잔디 깎는 부, 주차장 관리부, 암 치료부, 운동부, 그리고 전쟁 참전부, 등등으로 구성된 작은 모임들을 통해 성장하는 교회들이다. 작은 특별한 모임들로 구성된 ‘메타 셀’이기 때문에 각기 다른 목적과 취지를 갖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셀들, 즉 작은 모임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크게 세 종류로 볼 수 있다. 임무를 수행하는 단체, 교제를 수행하는 단체, 그리고 훈련시키는 단체 등이다. 각 교회에 형편에 따라 이름이나 목적을 정할 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위의 형태를 벗어나지 않고 교회의 작은 모임들을 만들어 교회를 세워나간다.
2.2.1. 순수와 메타 셀의 비교 메타 셀을 채택하는 교회는 순수 셀 교회 원리를 채택하고, 순수 셀 교회를 채택하는 교회도 메타 셀의 원리를 채택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두 셀 교회는 결코 동일하지 않는 점들이 있다. 첫째, 순수 셀 교회와는 달리 메타 셀은 각자에게 필요한 교재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순수 셀은 담임목사의 설교와 가르침을 가지고 행하지만 메타 셀은 그렇지 않고 자유 재량권을 많이 소유한다. 더욱이 모이는 장소와 때는 언제든 셀 회원들의 선택과 결정에 따른다. 둘째, 순수 셀 교회는 메타 셀 교회보다 셀에 보다 우선순위를 준다. 셋째, 순수 셀은 메타 셀보다 복음적이다. 넷째, 순수 셀은 메타 셀보다 행정력이 강하다. 다섯째, 모든 형태를 인정하는 메타 셀보다 순수 셀은 목적, 즉 복음 전도에 맞는 형태만을 인정한다. 여섯째, 지도자 중심인 순수 셀과는 달리 메타 셀은 셀의 재량권이 많다. 즉 담임 목사 중심이라기보다 셀 지도자 중심이라고 여길 수 있다.
2.3. 기존교회 작은 모임 2.3.1. 세런디퍼티 ‘세런디퍼티’ (serendipity) 형태의 작은 교회, 즉 셀 교회 체제는 지난 40여 년 동안 작은 모임을 주창해온 리먼 콜만(Lyman Coleman)에 의해서다. 그는 여러 세미나와 출판을 통해 작은 모임을 주장해 왔다. “세런디퍼티 모델의 핵심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그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작은 조직을 만드는 의도를 가지는데 있다.” 그런데 세런디퍼티 모델은 위에서 언급한 작은 모임과의 차이점은 기간에서 볼 수 있다. 앞의 두 셀 교회는 짧은 기간을 주기로 본다면 세런디퍼티는 일 년을 주기로 하여 진전시켜 나가는데 있다하겠다. 그리하여 참여한 사람들이 충분히 그 작은 모임을 이해하도록 하게 한다. 둘째, 보다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교회 일원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작은 모임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순수 셀 교회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세런디퍼티 모델은 다양한 작은 모임을 증진시키는 기존의 주일학교와 같은 모임을 말한다.
2.3.2. 언약 ‘언약 모델’(Covenant Model)은 로버타 헤스텐스(Roberta Hestenes)에 제시한 작음 모임 형태이다. 로버타가 말하는 작은 모임의 형태는 3~12명의 사람들이 공동 목적을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는 형태를 말한다. 목적은 헌신된 기독교인을 위함이다. 그래서 장기간의 공동체를 원한다. 단기간 내의 모임보다 장기간 동안 교제를 통해 성장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다. ‘언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 간에 맺어진 구약성경에 이뤄진 헌신들이나 약속들을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약한 백성들로 헌신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언약의 백성이 행해야하는 것을 신실하게 성실하게 행하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 모임은 복음화를 우선순위나 성장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나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흥미를 끌지 못하는 단체가 된다. 기계적인 성장이나 거품을 갖는 수적 성장에 관심을 가지 않는다. 질적인 성장에 관심을 갖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역사성 이 상에서 여러 종류의 셀 교회들을 한꺼번에 하나의 셀 교회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순수 셀’이라고 하는 셀 교회를 현대교회의 성장의 비결이라고 내세우면서 그 정당성을 성경과 교회사에서 찾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셀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아래의 역사성을 갖고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
3.1. 성경 이론가들은 셀 교회 역사를 먼저 구약성경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고 있다.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치리했던 모세를 향해 권면했던 그의 장인 이드로의 조언에서 그 기원을 찾고자 한다. 출애굽기 18:14-23을 보면, 모든 백성들을 판단하고 권면하는 모세의 과중함을 보고 이드로는 이렇게 권했다 :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무릇 큰 일이면 그대에게 베풀 것이고 무릇 작은 일이면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그대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그대에게 쉬우리라(출 18:21-22).
신약성경에서도 셀 교회의 모본을 찾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12제자를 삼는 것에서 유래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분의 사도들이 전도하면서 이뤄진 곳마다 셀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46-47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 모임의 성격을 가정교회, 즉 소모임이라고 한다. 그리고 복음전도에 나섰던 바울은 전도여행을 통해 셀 교회를 구축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조직교회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조직교회의 형태가 이뤄지는 형태에서는 항상 교회의 형태는 작은 모임이나 가정교회가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개척교회나 외국에서 선교할 때 시작 단계에 있는 교회는 언제든 가정교회로 시작하는 예는 허다하다. 특히 한국에서 실시하는 셀 교회는 기존교회, 즉 조직교회 내에서 한 담임목사를 중심으로 작은 모임들을 지향하고 활성화하는 것과 아직도 교회 형태를 갖추지 않은 신ㆍ구약성경의 모습을 셀 교회라고 규정짓는 것이 논리적으로 큰 무리가 있고 논리적 비약으로 믿어진다.
3.2. 초대교회 셀 교회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초대교회에서도 셀 교회의 모형을 찾고자 한다. 로마제국 황제 네로 때부터 시작된 기독교 핍박 시기에 교회는 궁궐과 같은 교회당을 짓지 않고 가정에서든 어디서든 모임을 가지고 행했다: “가정 모임의 교회 형태는 적어도 콘스탄틴 (Constantine)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보편적인 초기 기독교의 교회 모델이었다.” 그리고 건물 중심의 교회가 잘못된 것처럼 말한다. 그 이유는 성례식과 같은 예식 중심의 교회가 이뤄졌기 때문에 생명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물 중심의 교회가 부정적이라는 말은 억지주장이다. 교회건물에 지나친 투자와 사치적 치장이 문제가 되고 건물을 성전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어도 건물 자체나 건물 중심의 교회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게다가 당시에 교회 교부들은 흩어져 있는 교회가 감독 중심, 즉 장로 중심으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한 분 중심으로 구성된 교회를 주장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셀 교회가 아니라 지도자 중심의 교회로 굳건히 서려고 노력했던 교회들이었다. 환경과 시대가 핍박이었기에 조직교회의 초기단계인 가정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대적 배경을 무시한 채 하나의 단면적인 교회의 모형을 보고 셀 교회라고 규정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핍박의 시기가 마무리되면서 더욱이 교회는 점차적으로 조직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교회의 성직자들과 평신도 간에 구별을 짓기 시작했다. 게다가 국립교회로 되면서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더욱 두드러졌다. 국립교회에서는 성직자들과 평신도의 구별을 확연해져 갔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라도 밀라노 감독 암브로스(Ambrose, 339-397)는 성직자들 간의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이런 작은 모임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어거스틴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암브로스는 평신도 중심의 작은 모임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모임을 따로 만들었던 것이지 현제 셀 교회와 같이 평신도 중심으로 교회 형태 자체를 만든 것은 결코 아니다. 단순히 작은 모임이 있었다는 실례일 뿐이다.
3.3. 수도원 운동 기독교가 자유를 얻으면서 또 다른 교회의 모습이 나타났는데 수도원 운동이었다. 이것은 사도들이 아닌 평신도들로서 신앙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은자로 시작하여 광야에서 작은 단체들이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도원 운동을 정확하게 고려하려고 하면, 먼저 앤터니(St. Anthony, ca. 251-ca. 356)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최초의 사막의 수도사로 여겨진다. 그는 부유한 부모로부터 이집트 나일(Nile) 근교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앤터니와 어린 여동생에게 유산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재산을 포기하고 동생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부자청년의 말씀(마19:21)처럼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동생을 위해 조금의 것을 남겨 두었다. 마태복음 6:34를 읽고 여동생을 교회의 보호아래 두었다. 그는 이제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막에서 수도원적 삶을 지내면서 각종 유혹을 받았지만 금식과 같은 엄격한 기강을 행했다. 어떤 때는 공동묘지에서 지내기도 하며, 타인들이 건네주는 음식으로 생을 살기도 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귀신들의 환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35세에 이르러 더 나은 금욕적 삶을 위해 사막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러 수도사들은 그로부터 배우기를 원하면서 제자들이 형성되었다. 그는 로마제국 황제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 284-395)의 핍박이 있는 동안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였으나 순교를 당하지는 않았다. 후에 다시 아리안 논쟁 때에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다. 개인적으로 아리안들을 후원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다음 형태로 수도원 운동의 기원을 볼 때,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틴이 전 로마제국을 장악하면서 교회의 세속화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은자들의 삶은 더욱 인기를 얻었다. 사막은 그 어떤 장소보다 은자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그 곳에서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도시들에 살면서 권력과 특권을 즐겼던 사제주의로부터 멀리할 수 있는 좋은 길 이었다. 하지만 어떤 수도사들도 자신의 뜻에 반대하여 수임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수도사들은 스스로 영적인 우월성이나 엘리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 자신들이 무지하게 되는 경향과 광신주의(fanaticism)로 나아가게 했고, 교회 지도자들의 도구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광신주의적 실례를 시몬 스틸라이트(Simon Stylites, ca. 390-459)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35년 동안 60피트나 되는 장대 꼭대기에 살았다. 그 다음 형태의 수도원 운동은 파코미우스와 수도원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고독적인 수도원 운동은 수도원적 삶의 형태로 발전하면서 헬라어의 “공동체 삶”이란 의미를 가진 케노바이틱(cenobitic)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대표자로서 파코미우스(Pachomius, ca. 286-346)는 그 최종적 형태를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 자이다. 어린 나이에 그는 집을 떠나 군인이 되었다. 기독교인들로부터 큰 위로를 받은 그는 군인의 일을 끝내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 것이라는 것을 맹세했다. 결국 그 약속에 따라 기독교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세례를 받아다. 후에 사막으로 가서 자신을 가르칠 수 있는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7년 후 그는 한 피난처를 짓고 동생이 그와 함께 지냈다. 마침내 그로 말미암아 수도원적 삶의 성격은 남을 봉사하는 형태로 바뀌어졌다. 자신과 동생은 보다 큰 집을 짓고 다른 수도사들이 가입토록 했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선배들에게 절대 복종할 것을 약속해야만 했고, 손으로 일하며, 서로를 위해 봉사할 것을 약속했다. 그의 삶 동안 9개의 공동체들을 짓고 각 공동체에 약 100여 명의 수도사들이 거했다. 후에 자신의 여동생 메리는 여성들을 위해 유사한 공동체들을 세웠다. 일상생활은 노동과 헌신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모델로서 제시되었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암송하거나 주어진 일들을 수행함을 명하는 것이다. 청빈은 은자들처럼 극단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나 나그네들에게 나누어 준다. 성직제도는 “수도원장”이라 불리는 각 단체의 우수한 자나 수도원의 우수한 자로 말할 수 있다. 파코미우스에서 유래된 각 수도원장은 자신의 후계자의 이름을 명한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은 점점 형태를 갖추어 지금 형태의 수도원 제도의 기틀을 만든 사람은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ct of Nursia, ca. 480-ca. 547)였다. 그의 규율(Rule)은 청빈, 순결, 그리고 복종에 대한 맹세를 각 수도사들에게 명했다. 그 규율은 매일의 시간마다 조심스럽게 기도, 노동, 그리고 연구로 가득 찼다. 수도원제도는 전 중세시기 동안 개혁들과 변화를 겪었다. 10세기의 클루니(Cluny)와 12세기의 시토(Cistercians) 개혁은 수도원의 영적 지속력을 강화시켰으며 교회 개혁에도 공헌했다. 13세기 프란시스칸들(Franciscans)과 도미닉칸들(Dominicans)의 탁발 수도회들은 도시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그들 가운데 나아갔고 그들의 자국으로 선포했다. 이러한 수도회들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수도원 공동체에서 살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도우면서 그들의 영적 소명을 가시화 해 나갔다. 사람들은 수도사들을 가리켜 진정으로 교회개혁을 원하는 자들이었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전도와 선교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예로서 영국의 켈틱 선교를 시작했던 563년의 콜롬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2명의 제자와 함께 스코틀랜드 이오나로 가서 선교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작은 모임을 가진 선교사들은 유럽을 복음화 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이 교회를 설립하면 또 다른 유럽 지역으로 떠났다. 왜냐하면 이들의 복음 모임의 목적은 땅 끝까지 수도원 공동체를 설립하는데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사 속에 나오는 수도원 운동이 셀 교회와는 무관하다. 수도원 운동은 도피처이거나 개혁운동의 선봉가들이었지 교회는 아니었다. 수도원이 로마 카톨릭 교황청의 인준을 받아 부속되는 경우가 있었고 점차적으로 큰 단체로 성장했다. 그래서 ‘수도회’(Order)를 만들고 급기야 교황직에 오르거나 고위 성직을 맡으므로 부정적인 영향을 교회에 끼쳤다. 더욱이 그야말로 수도사들로 구성된 것으로 외부인들은 철저하게 제외된 단체였다. 은신처로서 신앙을 재점검하는 곳이지 교제를 위한 장소나 영적 충만을 위한 단체가 아니었다. 셀 교회와 유사하다고 하는 것은 규모적인 면이나 제도면에서도 전혀 같은 면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유사하지도 않다.
3.4. 전 종교개혁시대 중세시대에도 작은 모임들로 인해 교회 개혁 운동에 나섰던 것은 고중세를 지났을 때부터 시작된 속칭 이단들의 발생이었다. 피터 왈도를 따르는 왈도파들, 위클리프를 따르는 롤라드들, 존 후스를 따르는 후사이트들, 그리고 공동체 형제단과 같은 단체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앞으로 마틴 루터가 주장하게 되는 “만인제사장직을, 성경의 권위, 그리고 거룩한 삶을” 염원했다. 그 가운데 게랄드 흐루트 (Gerard Groote, 1340-1384)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평신도로서 성 레벤 대리자의 집에서 12명의 제자들을 가끔 모아 평신도적 수도원 삶을 살았다. “이렇게 헌신적으로 따르는 열정적 단체들-즉, 플로렌티우스 라데윈스(Florentius Radewyns)와 같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말미암아 형제단이 탄생하게 된다.” 이 “형제단은 로마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민중들의 시도를 의미한다. 그들은 분파주의자들이 아니었고 각 개인들이 퇴폐적인 제도들의 증세들인 악습, 무지, 그리고 비도덕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교회와 교회의 신학에 대해 정면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고 기독교 내부에 있는 본질적인 기독교를 증진시키기 위한 길을 찾고자 했다.” 이 형제단은 시작한 흐루트는 “소년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은 「데보치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즉, 형제단의 헌신을 위한 지침서-가 북 유럽의 르네상스 방향을 결정하도록 했다.” 1475년에 이르러 이 공동체 형제단은 100가정으로 성장했다. 명실 공히 중세말기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형제단은 어느 누구도 각자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나눔과 헌신으로 서로 봉사했다. 그야말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체 교회를 실천했던 것이다. 책들을 복사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성경 말씀을 묵상했다. 이러한 그들의 삶의 결정체는 흐루트의 제자였던 토머스 아 켐피스의 작품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영향을 마틴 루터도 받았음에는 틀림없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있었던 작은 모임을 주도하며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단체는 재세례파였다고 한다. 실제로 재세례파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개혁하던 츠빙글리가 만든 ‘예언적 모임’(Prophecy Meetings)에서 나온 단체였다 :
이 모임은 기독교 신앙의 성격에 관한 츠빙글리의 주장과 확신을 반영하기 시작했던 젊은이들의 선택된 모임이었다. 그들은 하나씩 그의 제자가 되었고 성경을 열심히 배우는 학생들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성경은 그 모임의 주요 교과서가 되었다. 그들을 라틴어로 읽고 헬라어로 점검하였으며, 1522년부터는 히브리어로 점검했다. 주해(glosses)와 평주(scholia)를 철저하게 점검하면서 종합된 뜻을 따라 정확한 주석을 시도했다.
개혁을 위해 시의회에서 1524년 1월 3차 논쟁에서 츠빙글리의 제자들은 “그에게 자신들에게 가르쳤던 원리와 고수했던 주장들을 실천하라고 했다. 츠빙글리가 취리히에서 막 시작했던 종교개혁은 심한 상처를 받게 될 우려가 있었다―결과는 확연히 드러났다. 츠빙글리는 승자가 되었고, 츠빙글리가 ‘재세례파’ (Wiedertäufer)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들은 졌다.” 츠빙글리에게 실망한 그들은 21일 서로들에게 “최초의 세례가 시행되면서 스위스 형제단의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재세례파가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
재세례파들은 종교개혁자들과 함께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신약성경에서만 교회와 기독교인의 삶을 위한 지침서를 찾았다; 구약성경은 그들이 반(sub)기독교인이라 생각했던 국가교회들과 이단자들의 핍박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 . . 새 제자는 새로운 탄생으로 열매 맺는 변화 즉, 새로운 삶을 명시하게 되어있다. 그런 후 주님의 성찬은 헌신된 제자들의 교제의 사인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단번의 희생을 기념을 의미하는 사인이 되었다. . . . 재세례파의 본질을 단 하나의 개념-신약성경의 권위, 세례, 제자도, 두 세계간의 긴장, 교회-으로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학자들간에 늘 논쟁이 되어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착상들은 재세례파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어느 하나도 소외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마지막 요소인 교회 개념은 그 운동의 유일한 특성인 동시에 권위적 종교개혁과 급진적 종교개혁 내에 있는 다른 단체들로부터 그 운동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교회(ecclesiastical in ecclesia), 즉 형식적 교회의 큰 범주 내에 있는, 개인적으로 헌신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꿈꾸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변했다. 더 이상 가정에서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모인 작은 교회가 기도하고, 읽고, 성례를 베풀고,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사역을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이유는 스스로 진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은 교회가 새로운 교회를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작은 모임이 성경적임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는 가정에서 작은 모임을 중심으로 교회 개혁을 실시했다. 그 이유는 작은 모임만이 초대교회와 초기교회들에 가장 충실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모임을 이끌었고, 그들과 함께 교리, 성례, 기독교인의 행실, 그리고 회개 등을 서로 나눴다. 그리하여 영적 성장을 도모하였다. 평신도 중심의 모임이라고 보기보다는 단순히 교회 내에 있는 작은 모임이라고 볼 수 있다. 셀 교회에서 말하는 그러한 셀은 아니라는 것이다.
3.5. 경건주의 종교개혁 이후에 작은 모임의 역사는 루터란에서 시작된 경건주의였다고 한다. 경건주의는 루터가 애초에 꿈꾸었고 포기했던 ‘작은 교회’를 이루고자 했다. 1-2세기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경건주의의 등장은 정통 목회에 큰 수치를 의미했다. 만일 교회가 효과적이었다면, 비밀집회와 같은 현상이 있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리 잘 운영한다고 하더라도 비밀집회와 같은 것이 일어났다는 자체가 기존 정통에 수치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정통시대를 접어들면서 교회는 형식화 되었고 무미건조해져 갔다. 경건주의는 필립 슈페너 (Philip Jacob Spener, 1635-1705)에 의해서 1666년 시작되었다. 요한 아른트가 쓴 『진정한 기독교』(True Christianity)를 통해 도전을 받은 슈페너는 “열정적인 젊은이들을 주위로 불러 작은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을 ‘경건한 무리’(collegia pietatis)라 불렀다.” 이 모음을 통해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리고 교제를 가졌다. 그 목적은 제자도와 거룩이었다. 그리고 경건해지기를 바라는 목회자들에게 6가지 지침을 제안하기도 했다. 슈페너가 루터를 동경하고 따르기도 했지만 루터의 교리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했다. 경건주의자들은 교리 해석을 지양하고 율법적인 자세로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면이 분리주의자적인 모습으로 당시에 보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경건주의자들이 작은 모임에 참석하고 공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고, 성찬에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슈페너에 의해 이뤄진 경건주의는 점차적으로 확대되어갔다. 할레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경건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백작 니콜라스 진젠도르프 (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는 합스부르그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로부터 온 독일어를 사용하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 피할 곳을 제공하면서 ‘헤른후트’(Herrnhut)를 세워 보다 경건한 삶을 이루기를 원했다. 슈페너처럼 이 공동체를 ‘작은 교회’로 이끌기를 그는 원했다. 이들의 목적은 “종교를 보다 즐거운 삶으로 바꾸기를 원했으므로 경건주의를 예수님의 고난, 수난과 보혈을 구원의 확신으로 강조하면서 보다 감성적이고 정서적인 신앙을 성공적으로 바꾸어 나갔다.” 이 일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고 개인의 간증을 나눴다. 그리고 지도자의 지침에 따라다. 선교와 찬양에 큰 몫을 담당했지만 이러한 모습은 점점 쇠퇴해져서 그 단체만을 위한 모임으로 바뀌어 갔다. 더욱이 개인 신앙의 감성과 경험을 강조하고 객관적 진리를 무시했던 경건주의는 결국 현대 신학 자유주의자인 쉴라이어마허를 탄생시키고 말았다. 이에 대해 브라운 박사는 다음과 같이 경건주의를 평하고 있다.
경건주의는 어떤 면으로 보나 결코 이단은 아니었지만 개인적 경험과 종교적 정서를 강조하므로 이단에 이르는 많은 장애물들을 옮겨다 놓았다. 뢰숴[Valentin Ernst Löscher, 1673-1749]는 경건주의를 가리켜 진리 위에 경건을 둔다고 비난하였다. 정통 루터란주의는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믿음의 확신을 약속하였다; 경건주의는 신자들에게 영적 실행으로 말미암는 주관적 확신을 찾아야만 할 것을 권하였다. 그래서 때때로 새로운 율법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띠기도 했다. 특별히 프랑케 이후부터 경건주의는 완전주의(perfectionism)-참 신자는 현 생활에서 모든 죄를 피해야만 하고 피할 수 있다는 교리-의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뢰숴는 경건주의자들을 비난하기를 전 종교개혁 신비주의자들과 종교개혁시대의 영성파들에게 루터를 넘겨주고 있다고 했다. 본질적으로 경건주의는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회심의 분명한 체험을 가지게 하므로 활력 있게, 행복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신앙생활하기를 원했다. 이 일을 위해 프로테스탄트 정통의 진리를 미리 전제하였지만 진리보다 삶에 보다 강조하게 되므로 점점 추종자들은 경건한 삶을 이루는 교리적 기본을 잃고 말았다. 개인적 종교적 체험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기에 그러한 체험을 보장해주고 뒷받침해주는 객관적 기준도 상실하고 말았다. 잔혹한 논쟁의 세월이 한 세기 반이 흘러서야 비로소 신학적 논쟁에 마지못해 참여하게 되었으나 교의들을 변호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반신반의하였다.
진젠도르프의 경건주의는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체험하도록 했다. 그리고 경건주의 작은 모임을 현실화 시켜 나갔다. 작은 모임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고, 이 모임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을 선별했다. 그리고 각 모임에서 일주일에 일 페니씩 헌금토록 했고, 찬송으로 모임을 시작하면서 개인의 간증을 실시했다. 각자의 은사를 강조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웨슬리는 작은 모임을 세 가지로 나눴다. 하나는 집회(society), 밴드(band), 그리고 속회(class) 등이다. 집회는 “신도회로도 불리는 소사이어티는 오늘날의 개교회의 회중에 해당하는 조직”이고, 밴드는 “효과적인 교제와 훈련을 위해 이 모임을 나이, 성별, 결혼 여부로 분류해 클래스(class)”라고 불렀고, 그리고 속회는 “교회의 최소 기본 단위로서 축소형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현재의 셀 교회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계몽주의를 직면했던 유럽의 기독교는 웨슬리안 운동을 통해 응답했으나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
루터란 경건주의자들은 루터란 가운데서도 가장 감성적이었고 진젠도르프와 그의 모라비안들은 경건주의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감성적이었다. 그들은 행동과 감성을 결합했으며, 그들이 웨슬리안주의, 즉 경건주의적 기원에서 시작하여 성장한 운동인 웨슬리안주의에게 전달해 준 것은 감성보다는 적극적인 행동주의이다. 웨슬리안 감리교파는 경건주의처럼 삶을 중심으로 하고 교리를 경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다름 아닌 정통이 단순히 아무런 영적 삶이 없이 바른 공식적 교리들만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반드시 요구되었고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식들이 대체로 더 이상 바르지 못하고, 아니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교리나 교리의 의미들을 강조하지 않고 열정과 그 효과만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가 계시된 진리에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는 면에서 볼 때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겠다.
4. 나가는 글
셀 교회를 주창하는 자들이나 목회자들은 그 교회가 사도적 역사성을 지니고 있고, 종교개혁과 같은 새로운 혁신적 교회구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적 고찰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먼저, 셀 교회는 교회사에서 역사성을 찾을 수 없다. 단지 유사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역사적 고찰에 있어 잘못하면 ‘잘못된 추론’ 이고 ‘궤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 근거를 찾는 사람들이 큰 오류를 범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유추의 궤변이다. 예를 들면, “A가 X라는 특성을 가진 면에서 B가 닮고 있다. 또 A가 Y라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B가 A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추론한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 AX : BX :: AY : BY.” 셀 교회의 모형을 성경에서 찾는다든지 역사에서 찾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유사성만을 갖고 있는 면만 보고 근거를 찾는다면 그것에 대한 비판적 근거를 제시하는데도 유사성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유사성만을 갖고 역사성을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둘째, 역사성에는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 사슬, 즉 고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역사적 어떤 모습이 셀 교회와 같은 형태를 가졌다면, 다음 세대의 교회가 셀 교회의 형태를 가질 때 그 전 셀 교회에서 어떤 특성을 근거하고 있다는 역사적 근거를 제시해야만 한다. 그래야 연속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셀 교회는 유사성에만 치우치다보니 역사적 사슬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현대 셀 교회의 기원을 한국의 순복음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용기로 본다. 순복음교회는 제 3의 물결의 영향 속에 시작된 교회였다. 그리고 그 형태를 실천신학자들이 셀 교회라 명명한 것이다. 제 3의 물결이 말하는 운동과 셀 교회의 역사를 더듬는 것의 형태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제 3의 물결은 1901년 미국 캔자스 주 Topeka에서 아그네스 오즈먼(Agnes Ozman)이 성령의 세례를 받고 방언을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전 미국교회에 거룩(Holiness)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은사 운동은 1906년 미국 아주사 거리(Azusa Street in Los Angeles)에서도 일어났다. 이 두 운동을 가리켜 고전(Classic), 옛 오순절주의(Old Pentecostalism), 또는 ‘제 1 물결’(First Wave)이라 부른다. 이 물결에 이은 두 번째 물결, 즉 ‘제 2의 물결’은 ‘신 오순절주의’(New Pentecostalism) 또는 ‘카리스마 갱생’(Charismatic Renewal)이라 불리는 것으로, 1960년 4월 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판 누이즈(Van Nuys)에서 현대 카리스마 운동이 데니스 베넷(Dennis J. Bennett)이 시무하는 성공회에 속하는 세인트 마가(St. Mark)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그는 “아침 9시”(Nine O’clock in the Morning)이라는 책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의 책에 의하면, 16년 동안 메마른 목회에 교회의 성장을 갈망하며 바쁜 일정 가운데 지냈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이 심령은 메말라만 갔다. 그러면서 신약성경에 나타난 240여 군데나 나타나는 성령의 언급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사도행전의 사람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은사, 즉 방언의 은사가 나에게는 없는가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가운데 그 날 방언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치유의 은사가 행해지면서 각종 병들이 낫게 되었다. 10년 만에 폐쇄 위기에 빠졌던 시애틀(Seattle)의 세인트 마가 교회는 2,00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매주 금요일마다 75-200여명의 십대들이 경배와 찬양을 드리면서 수천 명이 성령세례를 체험하게 되었다. 방언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장로교와 루터교에도 영향을 끼쳤기에 Time와 Newsweek에 실릴 정도도 큰 뉴스감이 되었다. 1983년 Fuller 신학교의 교회 성장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물결?”(The Wave?)이라는 제목으로 잡지 Pastoral Renewal (July-August 1983): 1-5에서 “나는 오순절자들(Pentecostals)과 카리스마주의자들(charismatics)이 경험했던 성령의 초자연적 사역이 복음주의자들과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임한 것을 보고 80년대 ‘제 3 물결’이라고 말한다. 이제 새로운 물결을 보게 되었다.” 이 ‘제 3의 물결’이 강조하는 Signs와 Wonders 운동에서 방언을 강조한다. 하지만 방언 은사는 오순절운동과 카리스마 운동에서처럼 그렇게 많이 강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강조하는 것은 예언 은사와 신유 은사이다. 그런데 싱가포르에서 셀 교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로렌스 콩목사는 이 책을 통해 ‘성령세례’에 대한 갈망을, 즉 방언을 가지기를 원했고, 그리고 실제로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회 경험을 이야기 하면서 말하기를 “1991년 우리는 싱가포르에 온 빈야드 기독교 단체 (Vineyard Christian Fellowship)의 존 윔버와 목회 팀을 양육했다.” 이렇게 보면, 셀 교회는 그들이 말했던 ‘작은 모임’의 성격과는 다른 것이다. 역사성도 없는 것이다. 단순히 작은 모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역사를 도용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형태만 작은 모임으로 만들었을 뿐 실제는 은사운동이며 제 3의 물결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빈 야드 계열은 이미 예장 통합에서 1996년 81차 총회에서 도입금지와 그 집회에 참여를 삼가라고 했으며 그 현상은 비성경적이고 무질서한 예배라고 규정한 바 있다. 기독교 성결교회 총회에서도 1998년 53회에서 사이비성이 있다고 발표하고 공문을 보냈다. 예수교 장로회 고신측 역시 1996년 46차 총회에서 성도들에게 그러한 집회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혼탁한 정신을 가진 셀 교회를 한국 장로교회가 채택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장로교회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면 장로교회가 무엇임을 모른다는 것밖에 아니다. 작은 모임이란 단순히 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구역 모임’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구역을 활성화한다는 것은 긍정적인 표현이지만 마치 기존교회 구조가 초대교회나 사도적 교회의 작은 교회의 모습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교회를 찾아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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