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요약>
두 연인은 아마 숲속에서 푸른 침상과 같은 잔디 위에 누워 백향목과 잣나무가지가 보이는 하늘을 보면서, 서로 사랑하는 화창한 분위기에서 데이트 하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어여쁘다“라고 하시며 노래하는데, 이것은 아름다움 보다도 구속받은 사람, 곧 죄가 없는 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맑고 깨끗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될 때 주님도 우리를 향해 이렇게 부를 것입니다. ”어여쁜자야~“
술람미 여인이 비둘기 같은 눈으로 솔로몬 만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들도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정체성을 서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수선화(히, 하밧첼레트)의 번역이 다양하게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어근이 확실하지 않아 한글성경은 대부분 ”수선화“로, 영어성경은 대부분 장미꽃(the rose)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일부는 수선화인 ”narcissus), 백합화인 “a lily”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 35:1절에서도 이 단어를 ”백합화“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수선화는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에는 자생하고 있습니다. 사론평야는 지중해성 기후 지역입니다. 40도가 넘는 남부 지역과는 다르게 비도 남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이 오고, 온대기후로서 수선화가 자릴 수 있는 기후입니다. 수선화는 물이 많은 곳에 자라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 꽃을 피웁니다. 날씨가 너무 더우면 누렇게 잎을 떨구고 죽은 것처럼 됩니다.
①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사론의 수선화”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론은 샤론 평야를 의미합니다. 팔레스타인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 35:1-2절에서도 사론의 아름다움과 꽃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적절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샤론의 수선화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평원에 있는 평범한 들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들꽃은 태풍도 비바람도 추운 겨울도 지내야 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가꾸어진 그런 꽃들도 아닙니다. 그래서 자연미가 있고, 그래서 향기가 더 날리고 거친 곳에서의 돋보이는 아름다움이 있는 꽃들인 것입니다. 시골 자연과 함께 성장한 술람미 여인의 정체성과 비유하기에 적합한 이미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은 온실에서 가꾸어진 꽃과 같은 자가 아닙니다. 분재가 아닌 것입니다.
→ 요사이 이런 성도들이 많습니다. 고난과 환란을 모르고 신앙생활하는 분들이 이런 분들입니다. 종말에 환란이 다가올 때 믿음을 다 버릴 가능성이 높은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영적으로 야성미가 넘쳐야 합니다.
영적으로 비바람도 눈도 맞으면서 자라야 합니다. 때로는 들짐승들에게 밟히기도 하며 띁어 먹히기도 하는 환경입니다. 그런 곳에서 살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실제로 환란과 고난이 다가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러서 향기를 날리라” (아 4:16) 이런 술람미 여인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② 또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골짜기에 백합화”라고 노래합니다.
이번에는 골짜기입니다. 평원보다는 더 사람들의 손이 가지 않는 곳이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입니다. 그리고 더 거친 곳입니다. 역시 술람미 여인이 깊은 시골 깡촌에서 자란 이미지인 것입니다.
아가서를 보면 솔로몬은 예루살렘 딸들을 “백합화”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 2:16, 4:5, 6:2, 3)
그러므로 백합화는 술람미 여인과 같이 순전한 신부 이미지의 꽃인 것입니다. 향기나는 순결의 꽃입니다.
또 시 45편 표제를 보면, 백합화는 “사랑의 꽃”이기도 합니다.
시편 45편의 표제가 ”사랑의 노래, 소산님에 맞춘 것“인데 여기서 ”소산님“은 ”백합화들“입니다.
→ 결론적으로 수선화와 백합화는 들과 골짜기에 피어 있는 평범한 꽃으로 순결한 사랑을 나타내는 꽃인 것입니다.
이 꽃들은 술람미 여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들꽃과 같이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는 수수하고 평범한 술람미 여인 자신의 존재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들은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잘 났다고 나대면 교만입니다.
▶ 이것이 우리들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주님 앞에 내 세울 것이 없는 이런 존재들입니다.
연약한 존재요,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이런 들꽃과 같은 우리들을 생명을 드려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뺀지리보다 이런 자들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 이에 비해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입니다. 고벨화송이처럼 고상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아 5:10-16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 대하여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분이며,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 하고, 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노래하고 있는데 바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누가 비교되겠습니까?
이런 분이 들꽃과 같은 우리들을 구원하고자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앞에 잘났다고 우쭐댑니까?
백향목도 아니고, 잣나무도 아니고, 포도나무도 아니고 마치 남도 찌르고 하나님도 찌르는 가시나무와 같은 우리들인데 말입니다 (삿 9:8-15)
2절,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자신을 평원과 골짜기에 있는 평범한 들꽃인 수선화와 백합화라고 겸손하게 노래했을 때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한 단계 더 나아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도 힘든 삶인데, 솔로몬은 더 나아가 술람미 여인을 ”가시 가운데 백합화“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의 삶의 환경을 가시나무로 비유한 것입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의 삶이 결코 쉬운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흔들려 가시에 찔리고 줄기와 입과 꽃이 상하는 그런 환경입니다.
▶ 우리 주님은 신부되는 우리들의 삶이 가시나무 가운데서의 살고 있는 것처럼 힘들게 사는 것을 아십니다. 거친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어려운 형편을 아시는 것입니다(창 310장)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거친 그런 곳에서 사는 한송이의 백합화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가시나무와 백합화는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극과 극의 모습입니다.
이런 곳에서 백합화와 같이 아름답고 향기를 풍기는 꽃으로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더 향기로운 것입니다.
온실속의 백합화도 물론 아름답고 향기가 나지만 이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백합화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 마 10:16)라고 했습니다. 이리 가운데 양와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사단의 위가 있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버거모 교회의 영적 환경과 같은 것입니다 (계 2:13) 그런 가시나무 속으로 우리 주님은 당신의 손을 내밀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 가시관이 씌어졌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힌 것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세상, 이리가 득실거리는 세상 속에서 아름다움과 순결을 지키고 향기를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산 것입니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 양 떼를 먹이는도다“ (아 2:16, 6:2,3)
”여자들 중에“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평원과 골짜기에 피어 있는 백합화 같은 술람미 여인은 다른 여자들에 비하여 환경이 더 거칠게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부들은 이런 가시들이 주어집니다. 믿음 생활은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더구나 신부가 되고자 하면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바울도 그에게 가시가 있었습니다(고후 12:7). 이것도 그를 성숙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어둠 가운데 빛이 더 돋보입니다. 악 가운데 선은 더 뚜렷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온실속의 회초로 자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북풍과 남풍을 함께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향기를 날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 4:16)
3절,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이제는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향해 노래합니다. 솔로몬을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수풀 (히, 야아르)은 숲, 산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보통의 평범한 남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가운데 사과나무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뚜렷한 솔로몬의 모습인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과 비교할 자 없습니다.
[이사야 40: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이사야 46:5]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② 또 사과나무의 사과는 사랑을 뜻하는 대표적인 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과는 입에 답니다. 사과는 달콤한 사랑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3b절). 신부를 사랑하는 우리 예수님의 속성이 사과와 같습니다.
③ 그리고 아 2:5절을 보니까 사과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합니다. 시원하게 한다는 것은 ”새롭게 하다, 회복하다“는 뜻입니다 (NIV,NKJV, Refresh).
그러므로 생명을 불어넣는 과일인 것입니다.
아 7:8절에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아 7:8b)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술람미 여인에게서 예수님을 닮아 사과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콧김은 생명의 호흡입니다. 냄새는 ”레아흐“로 ”루아흐“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루아흐는 기운, 바람, 호흡,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의 콧김은 생명을 불어넣는 사랑의 기운, 사랑의 향기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 닮은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소생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창 2:7)
마치 생기가 사방에서 불어오니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과 같습니다(겔 37:9)
그래서 아 8:5절에서는 ”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깨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아 8:5)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바람이 코에서, 입에서 불어서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통하여 신부로서 여성으로서 잠자던 정체성이 일깨워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깨어나는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사과나무는 달콤한 사랑의 열매를 맺어 먹는 자마다 살아나는 생명의 나무인 것입니다.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나무인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이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미국 애플사의 대표적인 마크가 사과를 한쪽 베어먹은 모습입니다 (bite).
다양한 로고에 대한 설이 있습니다. 제가 그 의미로 한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저는 애플 로고를 볼 때에 하와가 먹은 생명나무 과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는 이 로고를 볼 때마다 인간이 죄인임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로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사악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 심히 기뻐하였고“
1:7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정오에 쉬게 하는 곳을 말하라”라고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쉬는 곳은 그늘 되신 솔로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기진맥진한 그녀가 드디어 쉴 곳을 찾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쉼을 제공하는 그늘이 되십니다. 다른 곳에서 헤메지 마시고 우리 주님께 오시면 쉴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중동지역 40도를 넘나드는 곳에는 반드시 쉴 곳이 필요합니다. 이런 영적 환경에서 주님께서 쉴 수 있는 그늘을 제공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시 구름기둥으로 낮의 햇빛을 가려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임재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안식처입니다. 다른 어떤 것들도 그런 안식은 줄 수 없습니다.
그늘은 보호처(히, 첼)이기도 합니다. 가시나무 속에 있는 술람미입니다.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과나무 같은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에게 심히 큰 기쁨이 된 것입니다.
주변에 많은 수풀, 다른 나무와 같은 것들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사과나무와 같은 솔로몬 만이 있으면 됩니다. 만족합니다. 안식됩니다.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사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바람으로 주어지는 생명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술람미 여인의 입에 꿀처럼 단 것입니다 (삿 14:14,18), 또한 솔로몬의 사랑의 말씀은 그녀에게 달게 다가옵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단 것처럼 말입니다. (겔 3:3, 잠 16:24),
[잠언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