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6월 25일 아침
인왕산 밑으로 옥류동(玉流洞) 물길을 찾아 나섰고
그 답사기 올립니다.
청계천 발원지 백운동 물길에 관하여는 따로 글을 올리겠고,
이번은 백운동 물이 금청교를 지나기 전 아우르는 옥류동(玉流洞)
물길에 대해서 입니다.
그러나 연결을 위하여 백운동 부분을 간단히 요약하고 넘어 갑니다.
별로 길지 않은 글이니 텍스트 뿐이라면 한번에 실어도 되나,
사진이 여러 장으로 글 한 꼭지에 올릴 수 있는 용량을 넘기는 지라
세편 정도로 나눕니다. 이하 서술의 편의를 위하여 경어체(敬語體)에서
평문(平文)으로 바꿉니다.
옥류동(玉流洞) 물길을 찾아서 (1) 백운동(白雲洞)편
근 사십여 년 어두운 땅속에 묻혀 있던 청계천은 작년부터 햇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류(本流)만 그러할 뿐, 흘러 들어오는 수많은
지류(支流) 즉 상류(上流)는 아직도 두꺼운 콘크리트 아래 어둠에 묻혀
역한 냄새마저 풍기고 있다. 심각한 강북의 교통난을 무릅쓰고
그 많은 물길의 복개판을 당장 걷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상상이야 어떠랴 !.
물길이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흐르다가 지금 어디에 있는 지를
생각하는 것은 별달리 힘도, 돈도 들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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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開川) 발원지(發源地) 백운동(白雲洞)
무릇 개울에는 열의 열골 물이 다 모이는 것이니, 개천(開川-청계천의
옛이름)도 도성(都城)을 에워 싼 내사산(內四山) - 북악(北岳), 인왕(仁王),
낙산(駱山), 남산(南山)의 골짜기 골짜기 물이 모두 합쳐 이루어졌다..
그 중 어느 골짜기 물이 가장 길고 양이 많은 지를 밝히기는 쉽지 않지만
옛날 사람들이 생각한 개천(開川) 의 발원지(發源地)는 인왕산과 북악이
만나는 지점-자하문 아랫마을 백운동(白雲洞) 이었다.
이번 답사지 옥류동(玉流洞) 에서 백운동(白雲洞)이라 해 보아야
얼마 안되지만 날이 워낙 더운데다가, 골목 골목 누비다 보니
지쳐서 미처 가질 못했다.
대신 옛날 백운동 일대를 그린 겸재의 ‘창의문’ 그림 올린다.
겸재의 작품 중 ‘백운동’ 이라 이름 붙은 그림도 있으나,
지세를 보기에는 ‘창의문’ 쪽이 나을 것 같다.
창의문 (彰義門),
영조31년 (1755) 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 x 33.0cm
<<장동팔경첩>>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수선전도 (首善全圖) 중 해당 부분을 들여다 본다.
수선전도 (首善全圖) :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1840 년 경
만들었다고 전하는 80.3 x 65.0 cm의 목판본 서울지도.
물줄기 하나가 창의문 (彰義門) 아래에서 나오고, 옆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적혀 있다. 이어 물은 바로 아래 청풍계(淸風溪) 라고 쓴 곳을 지나니
청풍계(淸風溪)는 오늘 날 청운초등학교 어름 이다.
청운동(靑雲洞)은 옛 백운동(白雲洞)과 청풍계(淸風溪)를 합친 이름이다.
따라서 맑을 청(淸)짜를 써야 하나, 일제시대 동서기들이 푸를 청짜 청운동(靑雲洞) 으로
정해 버렸다. 지인(知人)중 청운초교를 나온 이의 말에 의하면 옛날 자하문 아래에서
나온 물길은 경기상고와 청운초교 앞을 지날 때 청운초교 쪽 즉 현재 ‘자하문길’ 의
서쪽 부분을 따라 흘렀다고 한다.
청풍계(淸風溪)를 지난 물줄기는 신교(新橋)에 이르니, 10.26 때 김재규가
궁정동 안가에서 박통을 쏘고 이어 부하들이 확인사살하는 총소리를
가장 먼저 신고 받은 신교동 파출소 앞이다.
신교동은 신교(新橋)에서 이름이 왔다..
(신교(新橋)는 우리말로 ‘새다리’ 쯤으로 불리지 않았는지 ?)
신교동 네거리 사진
사진 우측 중앙 붉은 벽돌집이 신교동 파출소가 있는 건물이다.
사진 중앙에 맨홀이 있는 데 신교(新橋) 위치가 그쯤 아닐까 ?
물은 다시 자수교((慈壽橋 : 정식이름은 자수궁교((慈壽宮橋)를 지나니
오늘 날 ‘자교교회’ 부근 네거리다.
자수궁교((慈壽宮橋)의 옛날 사진 한장 싣는다.
자수궁교는 자수궁(慈壽宮) 앞에 있다고 붙은 이름이다.
자수궁((慈壽宮)은 출처마다 조금씩 다른 소리를 하고 있으나,
본래 조선 태조의 7번째 아들인 무안대군의 저택이었다가,
후에 역대 임금의 사후 (死後) 자식이 없는 후궁 중 비구니가 된 이들이
여생을 보내던 곳 즉 니원(尼院) 이었다는 설이 그럴 듯 하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도 한 때 자수궁((慈壽宮)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 날 ‘자교교회’ 부근 네거리 사진
노란 버스 앞쪽으로 자수궁교가 걸려 있은 듯 하다.
위 자수궁교 옛날 사진의 북악산이 같은 각도로 보이게끔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자교교회
자교교회 홈페이지에는 ‘자하교’ 에서 교회 이름을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자수궁교((慈壽宮橋)를 착각한 듯 하다. 처음의 오류를 그 뒤 교회에서
그다지 관심 없어 방치한 듯.
자교교회는 종교교회에서 갈려 나왔다고 하는 데, 두 교회 모두
배화여고 재단에 공이 큰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세웠다고 한다.
자수교((慈壽橋)를 지난 물은 옥류동(玉流洞) 누각동(樓閣洞) 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친 후 금교(禁橋)로 간다.
금교(禁橋)는 곧 금청교(禁淸橋)로 자하문길 금청교 시장 앞이다.
금청교 시장
필자는 이 일대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어 이전 기억이 있는 데
옛날 같은 활기야 없지만 시장은 아직 남아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금청교 시장은 금청교(禁淸橋) 다리에서 이름이 붙었다.
금청교(禁淸橋) 옛 사진
금청교는 고려 충숙왕 때 만들었다 하니 아직 남아 있으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태조실록에는 금천교(錦川橋)로 기록되어 있다.
금청교(禁淸橋) 추정지점 사진
사진 우하(右下)에 그랜져 한대 서 있는 곳이 금청교 시장 입구다.
수선전도상 다리의 위치는 그 골목 앞인 듯 하다.
그랜저에서 10시 방향에 대신증권 간판이 보이고 그 뒤 모서리가 둥근
건물 위로 희미하게 십자가가 보이니 종교교회로 물길은 금청교를 지나
그리로 간다.
여기까지를 구글에서 나타 내 본다.
금청교(禁淸橋)를 지난 물은 수선전도에 나오지 않는 종침교(琮沈橋)로 가니,
종침교는 현 종교교회 앞에 있던 다리다.
종교교회는 Religion -종교(宗敎)가 아니라, 옛 종침교(琮沈橋)에서
이름을 땄으니, 한자로 종교교회(宗橋敎會) 다.
백운동 물은 종침교를 지나서 사직동에서 오는 물을 아우른 뒤
세종문화회관 뒤쪽으로 흘러 세종로 네거리 서쪽 송기교를 지나,
지금 청계광장 부근에서 삼청동에서 동십자각과 중학동을 거쳐 오는
물길을 아우른 다음 청계천 본류를 시작한다.
- 옥류동(玉流洞) 물길을 찾아서 1부 끝 -
첫댓글 나중에 책한권 써도 되겟어요 ^^ 차곡차곡 모아 보시죠 ^^
#무척 바쁘신중에도친을위해 좋은 자료 올려주시는 오대댁 손자님 감사하구요^^*
수고하시네요...기다려지고...미래가. 기대되네요... 그리고... 김정호..의옛날지도에...함양과...함양의주변...운봉..거창산청이..남원이...어떻게..표시되었는지가..궁금하고...사적지추적에..중요할것같아서...지도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