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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껴안는 꿈과 희망의 이야기 |
평범한 사람이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가장 부러웠던 스물일곱 살의 청년,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이다.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던 그가 전 세계를 누비며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전하며 화제가 되고 있다. 자신의 신체적 장애로 인해 겪은 아픔과 절망의 나날,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어 행복을 누리고 전하기까지의 치열한 과정을 생생하게 그렸다. |
1부 절망이 희망이 되는 삶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
세르비아계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호주로 이민을 오셔서 목회를 하시던 나의 부모님은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팔다리가 없는 자식을 낳고서는 하나님의 뜻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깊은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의사는 아기를 받아서 안아 주라고 권했지만 산모는 도리질을 치며 얼씬도 못하게 했다. “저리 치우세요! 보고 싶지도, 만지고 싶지도 않아요!” 아버지는 그날 병원 측에서 어머니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 틈을 주지 않았던 걸 두고두고 서운해 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산모가 잠들자, 아버지는 신생아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병실로 돌아가서 아내에게 속삭였다. “여보, 근데, 애가 참 예뻐.”
열서너 살 무렵, 내가 태어날 때 어땠는지, 몸통뿐이라는 것을 처음 알고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캐묻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새카맣게 몰랐다. 학교에서 짓궂은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돌아온 어느 날, 어머니는 팔다리가 없어서 미칠 것 같다는 나를 끌어안고 한동안 서럽게 우셨다. 그러고는 두 분이 깨닫게 된 것이 있다고 했다. 나를 이렇게 만드신 데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으며, 언젠가는 그 전모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갓 태어났을 때 안아주기도 싫었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쳐다보기만 해도 끔찍하더라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내 기분이 어땠겠는가? 그렇지만 그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위해 해준 일들을 떠올려 보면 두 분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에 대한 사랑을 수없이 확인시켜 주었다.
자라면서 두 동생들과 사촌들은 얼마나 극성맞든지 내가 자기연민에 빠질 틈을 주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실감이 난다. 문득 외로운 느낌이 드는가? 변함없이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사랑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셨다. 인간이란 시시때때로 연약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에 단단히 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도 몸이 조금만 더 ‘정상’에 가까웠더라면 세상 살기가 한결 수월했을 거란 아쉬움을 정말 오랫동안 품고 살았다. 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한 게 있었다. 굳이 정상이 되지 않더라도 있는 그대로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서 주님의 섭리를 이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하고 싶은 일을 이루지 못했다면, 환경이 아니라 내면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놀라운 사건들 가운데 단연 으뜸은 나의 작은 왼발을 잘 쓸 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발을 써서 몸을 굴리고, 걷어차고, 밀치고, 지탱했다. 부모님과 의사들은 이 왼발이 크기는 작을지라도 쓰임새는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비록 발가락은 두 개뿐이고 그나마도 태어날 때는 달라붙어 있었지만 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의료진과 상의해서 두 발가락을 분리시키는 수술을 하기로 했다. 발가락이 따로 떨어지면 마치 손가락처럼 펜을 쥐고 책장을 넘기는 등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팔다리가 없는 내 입장에서는 왜소한 발과 발가락 두 개로 해낼 수 있는 갖가지 일들이 그야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팔다리가 없다? 절망도 없다!
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간의 영혼이 빚어내는 놀라운 일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한결같이 주인공들이 소망을 단단히 붙들고 있을 때였다. 믿음과 사랑이 그렇듯, 소망은 영성을 떠받치는 기둥 가운데 하나다. 어떤 믿음을 가졌든 소망 없이는 살 수 없다. 살면서 만나는 모든 선한 것들이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소망은 한 단계 뛰어오를 때마다 반드시 밟아야 할 뜀틀과도 같다. 성경은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사 40:31)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나는 내게 팔다리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껏 살아오면서 서너 번 소망을 놓아 버렸던 때가 있었다. 유년 시절은 대부분 행복했지만 열 살 어간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밀려와서 그야말로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창의적인 자세로 발버둥 쳐 봐도 도저히 해내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 나를 돕느라 밥 한 끼 편히 먹지 못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보면 미안하고 서글펐다. 하지만 그쯤은 약과였다. 오랜 시간 따라다니며 나를 끈질기게 괴롭힌 더 큰 문제들이 있었다. ‘내가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수 있을까? 아내와 아이들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 먹여 살리지?’소망을 잃어버리면서 마음이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망을 잃는 것은 팔다리를 잃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근심과 두려움, 분노와 상처, 혼란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렬해졌다.
어느 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목욕을 하게 욕조에 물을 좀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욕실을 나서는 어머니에게 문을 닫아 달라고 말했다. 그러곤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장면이 머리를 스쳐갔다. 오래 계획해 왔던 일을 실행에 옮길 작정이었다. ‘하나님이 이 고통을 거둬 주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바라보고 살아야 할 목적이 없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 것이 따돌림과 외로움뿐이라면, 누구에게나 부담이 되는 존재로,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면, 지금 끝내는 편이 낫겠어.’
마침내 몸이 뒤집히면서 얼굴이 물에 잠겼다.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잠시 후 ‘이런 짓을 하면 못써!’라며 내 안의 내가 말했지만 어두운 생각들은 고집을 부렸다. ‘이 끔찍한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잖아? 이렇게 사라져 버리면 그만이야.’ 조금만 더 참으면 폐 안의 공기는 다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넷, 셋….’ 숫자를 세고 있는데, 문득 내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옆에는 남동생도 있었다. 다들 눈물을 쏟으며 더 잘해 주었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 모든 것이 자기들 탓이라며 괴로워했다. 가족들이 평생 내 죽음으로 자책감을 가지고 살게 만드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맞아, 난 나만 생각했어!’ 얼른 몸을 뒤집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날 밤 한 방에 누운 남동생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은 스물한 살쯤 자살할 작정이야.”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럭저럭 참아낼 듯했지만 그 이후에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스물한 살이 내 인생의 종착역처럼 보였다. “아빠한테 형이 그러더라고 얘기할 거야.” 동생이 대꾸했다. 나는 누구한테도 이르지 말라고 다짐한 뒤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내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아버지였다. “죽으려고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따듯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앞으로 얼마나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느냐고 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빗질해 주었다. 평소에도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쓰다듬어 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가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니? 걱정마라.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테니. 항상 네 곁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마. 넌 잘될 거야.”사랑스러운 손길과 근심어린 눈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린아이의 흔들리는 마음과 어지러운 생각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는 법이다. 내게는 다 괜찮을 거라는 확인을 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나는 잠을 잘 잤다. 이후로도 갠 날과 흐린 날이 교차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소망을 굳게 붙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닥까지 떨어졌던 이 경험 덕에 넉넉히 이길 수 있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지만 자살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사방이 캄캄하기만 했던 그날, 난 내 목숨을 건드리지 못했다. 정작 내 생명을 취하신 분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가져다가 열세 살 꼬마가 이해할 수 있는 제한된 비전보다 월등하게 큰 의미와 목적, 기쁨을 가득 담아 주셨다. 팔다리가 생기는 기적을 보여주는 대신, 나로 하여금 기적이 되게 하셨다.
인생은 믿음의 승부다
성경은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한다. 열 살 전후로 좌절의 시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신체적으로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모자라는 건 단 하나, 바로 믿음이었다. 그때는 오직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고 의지했다. 자연히 가능성보다는 한계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계와 부족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절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 무엇이든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길을 열어가라. 차질이 생기거나 비극적인 상황에 부닥친다 해도 모든 일에는 선한 뜻이 숨어 있음을 믿으라. 비극적인 사건이 커다란 기쁨으로 변할 수도 있다.
2008년, 강연 차 하와이에 갔다가 세계적인 파도타기 선수인 베다니 해밀턴을 만났다. 서핑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2003년 타이거 상어의 공격을 받고 왼팔을 잃은 여성 서퍼를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그녀는 고작 열세 살에 불과했다. 베다니는 혈액의 70퍼센트를 잃어버릴 만큼 출혈이 심했던 참혹한 일을 겪고도 다시 파도타기 선수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은총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지금은 나처럼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믿음을 나누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녀는 그날의 사고가 여러 면에서 축복이었다고 고백한다. 시합에 나가 선전할 때마다 저절로 “인생에는 한계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녀는 끔찍한 일이 생긴다고 해도 거기서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굳게 믿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용기가 불끈 솟아서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특별한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파도타기를 배워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베다니는 두말 않고 일어서더니 하와이 와이키키 바닷가로 날 데려갔다. 너무나 흔쾌히 응해 줘서 도리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먼저 잔디밭에 보드를 놓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법부터 가르쳤다. 오랫동안 서퍼가 되는 꿈을 꾸었고 수영으로 단련된 몸이라 물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제아무리 노련한 전문가가 도와준다지만 과연 보드를 타고 파도 꼭대기에 올라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이었다. 베다니가 물속까지 들어와서 격려해 주었지만, 시작부터 실수연발이었다. 파도에 몸을 싣고 일어서려고 할 때마다 보드에서 굴러 떨어졌다. 여섯 번 시도했는데 여섯 번 모두 물을 먹었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 와이키키에서 파도타기 대회가 열리는 날이어서 구경꾼은 점점 더 늘어났다. 수없이 많은 카메라들이 돌아가고 있었다. ‘발가락 두 개로 파도를 타는 장애인’ 따위의 제목이 달린 유튜브 동영상의 주인공이 되려는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마침내 일곱 번째 시도에서 큰 파도를 타고 내려오면서 보드에서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얼마나 짜릿했는지 얘기하지 않겠다. 다만 거대한 물결 꼭대기에 서서 마치 초등학생처럼 비명을 질렀다는 말밖에는…. 두 시간 동안 파도를 타고 또 탔다. 한 스무 번쯤은 서핑을 즐겼던 것 같다. 서핑 대회를 취재하러 온 사진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덕분에 서핑 전문지 《서퍼(Surfer)》의 표지모델이 되는 행운을 누렸다. 갓 서핑을 배운 초보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해 나는 콜롬비아, 우크라이나, 세르비아를 거쳐 루마니아까지, 그리고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열다섯 개 나라를 도는 선교 여행을 계획했다.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 팀 멤버들이 계획을 세우고 예산을 산출했다. 경비는 모금을 통해서 충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금액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나는 당초 계획했던 대로 밀고 나가자고 주장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자 우리 모임의 이사인 바타 삼촌이 실무적인 차원에서 처음 계획했던 경유지 가운데 주요한 도시 두 군데를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자금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정세가 불안해서 여행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삼촌은 대단히 지혜로운 분이었으므로 이러니저러니 토를 달지 않고 그냥 삼촌을 믿겠다고만 했다.
그리고 강연을 하러 곧장 플로리다 주로 날아갔다. 자원봉사자만 450명에 이르는 커다란 집회였다. 사람들을 격려하고 기운을 내게 하려는 취지로 마련된 모임이었는데 오히려 청중들이 내게 열정을 심어 주었다. 한편으로는 지금 계획하고 있는 선교 여행 기간 동안 줄곧 그처럼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또 구했다. 자금이 부족하고 치안이 불안하다 하더라도 꼭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렬해졌다. 주리고 목마른 영혼들을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왔다.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한 주만 더 기다려보자.” 참을성 많은 삼촌이 말했다. 선교 여행에 필요한 자금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없는 돈을 미리 당겨쓰지도 않았다. 그저 기도하며 해결 방법을 모색했다. 아직까지는 문이 닫혀 있지만 언젠가 또 다른 기회가 열릴 거라고 판단했다. 찾고 또 찾으면 길이 보이게 마련이다. 며칠이 지났을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플로리다 집회에서 메시지를 들었다는 브라이언 하트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재단에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다음에는 인도네시아 집회 관계자가 연락을 해왔다. 홍콩에 스타디움 두 군데를 빌려놨다면서 거기서 강연을 해주면 인도네시아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충분히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는 캘리포니아 주의 어느 자선단체에서 여행 경비를 대고도 남을 만큼 큰돈을 지원하겠다고 알려왔다. 불과 며칠 사이에 경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방문하려고 하는 지역의 치안 상태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 역시 하나님께 맡기면 그만이었다.
필요한 비용이 마련되었으므로 우리는 일정을 다시 조절해 처음 계획보다 일주일 빨리 인도를 방문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 일정 변경이 팀 가족들과 내 목숨을 구했다. 행사를 마치고 뭄바이를 떠난 지 고작 이틀 뒤에 우리가 방문했던 지역 세 곳이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았다. 타지 호텔과 공항, 뭄바이 남부 기차역에서 폭발이 일어나서 180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원래 스케줄대로라면 사건이 발생한 시각에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2부 생각이 현실이 되는 삶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
어린 시절에는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제한적이고 지나치리만치 자기중심적이어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처지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열다섯 살 때, 요한복음에서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들어왔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내 스스로 묻고 또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 이 비유는 가혹한 현실에 좌절하던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예수님은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앞을 보지 못하던 이를 고쳐 주셨다. 난 지금도 장애를 안고 있다. 하지만 때가 이르면 나를 통해 성취하기로 예비해 두신 주님의 뜻을 드러내실 것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마음가짐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자신을 생긴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누가 사랑해 주겠는가? 남미를 여행하면서 콜롬비아의 마약중독자 재활센터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다. 청중들은 중독 증세에 시달리고 있거나 그런 경험을 가진 이들이었다. 너나없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서 약물에 빠진 채 삶이 망가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제아무리 오랫동안 마약에 취해 살았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통역의 입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되자 청중들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하늘 아버지가 죄를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태도를 바꾸면 인생도 바뀐다
전문강사로 나선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비행기가 결항이 되거나 연결편이 순조롭게 이어지지 않으면 짜증과 실망을 주체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여행이 잦을수록 더 자주 비슷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는 스케줄이 뒤엉키는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잡는 능력이 생겼다. 낙천적인 태도를 가지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그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을 수정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이른바 ‘발상의 전환’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일단 몸에 배면 그 다음부터는 거의 반사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올해 마흔 살에 들어선 척이라는 친구는 스무 살 때 앓았던 암이 재발해서 작년부터 투병중이다. 이번에는 종양이 중요한 장기들 한복판에 들어앉아서 방사선 치료가 불가능했다. 형편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척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며 밝은 미래에 초점을 맞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사선 치료가 불가능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음이 드러났다. 때마침 척이 다니는 세인트루이스 병원의 담당의사는 방사선 치료를 할 수 없는 암 환자에게 사용할 약물을 시험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척의 종양은 전통적인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실험적인 치료법을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담당의사는 척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보고 신약을 투여해도 좋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정맥에 연결된 튜브로 항암제를 투입하는 동안에도 척은 자리에 눕지 않았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아령을 들어 올리는 등 운동을 계속했다. 암 병동 직원들은 정말 그가 암환자인지 미심쩍어하며 이야기하곤 했다. “얼굴이나 행동이 전혀 환자 같지 않아서요.”신약을 투여한 지 몇 주가 지난 뒤에 척은 진찰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놀랍고도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고 했다. “종양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요. 다 사라졌습니다.” 의사는 종양을 이겨낸 것이 실험중인 항암제 덕인지, 척의 태도 때문인지, 기적인지, 아니면 그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지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척이 암을 이기고 두 발로 병원을 걸어 나와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결론만 말해 두겠다.
난관을 돌파하는 네 가지 태도(감사하는 태도, 행동하는 태도, 공감하는 태도, 용서하는 태도)를 선택하라. 내가 공감의 진수를 배운 건 2009년 오스트레일리아에 갔을 때 파티에 참석한 친구의 어린 딸을 통해서였다. 꼬맹이는 그맘때 아이들답게 요모조모 나를 살피면서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갈 때쯤 그 꼬마에게 아저씨를 한 번만 안아 달라고 하자,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조심스레 걸어와 멈춰 섰다. 그러더니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슬그머니 뒷짐을 지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걸치고 목을 교차시켰다. 내가 다른 이들과 포옹하는 방식 그대로였다. 방안에 있던 이들은 나를 배려하는 꼬마의 모습을 보며 다들 깜짝 놀랐다.
공감은 대단한 재능이며 선물이다. 베푸는 쪽만 아니라 받는 편에서도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뿌리 깊은 가난과 엄청난 고통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을 여행할 때마다 그곳 주민들의 대응 방식을 보며 크게 감탄하곤 한다. 그들은 남자나 여자, 어린아이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다녀온 캄보디아에서도 그랬다. 하루종일 집회를 인도하고 났을 때 나는 거의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주최 측 인사가 웬 꼬마가 나를 만나려고 여태까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나가보니 나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아이가 흙바닥에 홀로 앉아 있었다. 파리들이 달라붙어서 마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았다. 머리에는 상처가 나 있었고 살갗은 터져서 벌어진 채로 벌겋게 부은 상태였다. 몸에선 쓰레기 썩는 냄새가 났고 두 눈은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 눈망울에는 나를 향한 동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꼬마는 내 휠체어로 다가오더니 아픔을 어루만져 주려는 듯 내 뺨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얼마나 힘들지 그려보고 깊은 공감을 표현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아빠엄마를 잃고 몹시 힘들게 사는 아이였다.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캄보디아 쪽 관계자에게 아이에게 뭐든지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먹고 자고 보호받을 만한 시설을 찾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그 꼬마가 어떤 역경을 헤쳐 나왔으며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대단히 고상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처지를 돌아보고 불쌍히 여긴다는 건 보통 능력이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따듯하게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3부 실패가 기회가 되는 삶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넘어져도 좋다
나는 강연하는 도중에 일부러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서 얼마간 그 자세로 이야기를 계속할 때가 있다. 실패에 관한 내 철학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퍼포먼스다. 팔다리가 없으니까 제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청중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부터 바닥에서 일어서는 법을 스스로 익혔다. 몇 년 전 휴스턴에서 열린 모금 행사에서였다. 플로리다 주지사를 지낸 젭 부시 내외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큰 모임이었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여느 때처럼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집회장이 조용해졌다. 그것도 여느 때와 똑같았다. 나는 쓰러진 채로 계속 이야기를 했다.
“너나없이 가끔은 이렇게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한, 넘어짐은 실패가 아닙니다. 절대로 꿈을 잃지 마십시오.” 청중들은 깊이 빠져들었다. 그런데 다시 일어설 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기 직전에 강당 뒤편에서 처음 보는 여성이 종종걸음을 치며 달려 나왔다.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이것도 강연의 일부거든요.” “정 그러시다면….” 그제야 여인은 자리로 돌아갔다. 모르긴 해도 지켜보는 이들로서는 내가 몸을 일으키는 것만큼이나 그 아주머니가 제자리에 앉기를 목매어 기다렸을 것이다. 어떤 절차를 거쳐서 바닥에서 일어서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청중들은 가슴이 뭉클해진다. 다들 나만큼이나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예전에 내가 고통하며 넘어졌던 경험들 하나하나가 다 감사하고 소중하다. 이제껏 맞부딪혔던 온갖 어려움들이 내게 참을성과 끈기를 길러 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실패는 겸손한 성품을 길러 주기도 한다. 고교 시절, 회계학 시험에 떨어진 적이 있다. 참으로 창피스러운 경험이었다. 다행히 담당 선생님이 용기를 북돋아 주며 개인 교습까지 해주었다. 그래서 다음 해에는 회계학과 재무 계획 두 과목에서 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잘 알려진 문필가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겸손한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은 그 무엇도, 심지어 자신까지도 겁내지 않는다. 온전히 겸손하다는 건 곧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자신감을 갖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권세도 의미가 없으며 그 무엇도 장애가 될 수 없다.”
마음을 활짝 열고 변화를 환영하라
열두 살 때, 우리 가족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이민은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일생일대의 변화였다. 미국에 들어간 직후 나는 여러 가지 문화충격을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편히 쉴 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자리를 잡기까지 당분간은 삼촌네에 얹혀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바빠서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었다. 정신적, 정서적, 신체적으로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거북이처럼 내 세계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거절당하고 놀림 받는 것이 싫어서 친구들을 피하기도 했다. 그러다 서서히, 아주 조금씩 새로운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사촌들이 있어서 좋았다. 뿐만 아니라 바다와 산, 사막이 모두 가까이에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도 썩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기가 무섭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간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성장해서 대학을 마치고 난 뒤에 결국 캘리포니아로 되돌아왔으며 이제는 두 번째 고향으로 여길 만큼 친숙한 곳이 되었다.
변화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성장통은 키가 자라고 몸이 커지고 있다는 증표다. 그 과정을 통과해야만 난관을 타개하고 더 나은 날들을 맞을 수 있는 법이다. 2008년에 인도를 여행하면서 뭄바이의 홍등가에서 성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소망의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을 돕는 단체인 BTC의 데바라지 목사는 나를 데리고 본격적인 가정방문에 나섰다. 거기서 만난 마흔 살은 족히 돼 보이는 여성은 시골에서 열 살 때 팔려 와서 줄곧 성매매를 하며 살았다고 하는데, 실제 나이는 스무 살이라고 했다. “아이도 두 명 낳았는데 그중 하나는 죽었어요. 이틀 전에는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우리는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사창가에서 나가서 BTC가 제공하는 쉼터에 머물며 에이즈 클리닉에서 진료를 받자고 했다. 눈을 뜨고 더 따듯한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을 본 여인은 기꺼이 변화의 길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믿음까지 받아들였다. 눈망울에 평안과 소망이 깃드는 걸 보는 순간, 숨이 막히도록 감격스러웠다. 그 여인은 믿음을 통해 한없이 아름다운 소녀로 돌아갔다. 나는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한다”(신 32:30)는 성경 말씀을 참 좋아한다. 이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변화를 받아들이고 이어서 다른 이들의 인생까지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는 일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4부 한계가 비전이 되는 삶
작은 나눔이 세상을 바꾼다
이제 나는 내 존재의 이유가 역경을 재료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들의 기운을 북돋는 가르침을 빚어내는 것임을 안다. 주님은 내게 복을 주셔서 다른 이들에게 은혜를 전하게 하셨다. 자신이 가진 축복을 열심히 나누라. 그러면 수백, 수천 배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몸뚱이뿐인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겠지만 영적으로 보면 나의 간증과 삶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위로와 격려를 얻고 주님을 섬기고 있다.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그 선물을 서로 나누게 하신 일을 돌아보면 기쁘고 감격스러울 뿐이다.
현재 내가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단체 ‘사지 없는 삶’(Life Without Limbs)은 휠체어를 수리해서 필요한 이들에게 공급하는 일도 돕고 있다.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남을 도울 수 있다. 테니스를 좋아한다면 자선단체를 후원하는 테니스 대회를 조직하라. 자전거를 탈 때 날아가는 기분이라면 불우 청소년들을 모아서 자전거 동호회를 만들라. 춤추는 걸 즐긴다면 댄스파티를 열어서 옷 바자회 같은 것을 열어보라. 최근에 한 기업은 스마트폰이나 웹브라우저를 이용해서 자투리 시간에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기회와 방법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내놓았다. 하루 종일 봉사활동에 매달릴 수 없는 이들을 위해서 틈날 때마다 휴대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조금씩 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Kinded.com에 실린 포스트에 따르면, 루베츠키는 뜻밖의 친절한 행동으로 누군가를 놀라게 하고 격려하는 ‘친절 운동’을 창안했다. 관심이 있는 이들은 웹사이트를 방문해서 친절 카드를 출력해서 가지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면서 함께 넘겨준다. 카드를 받은 이는 또 다른 이에게 친절을 베풀고 카드를 전달한다. 카드에는 코드가 찍혀 있어서 언제든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선행의 파급 효과를 관찰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단체에서도 청소년들을 위한 온라인 쉼터, 또는 셀프 카운슬링 센터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다. 저마다 상처를 입고 치유를 받았던 경험들을 올리고 거기에 관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정서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더 성숙하도록 돕는 시스템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것이 목표인데 목표 치고는 참으로 소박하다. 작은 사랑이라도 날마다 실천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힘이 생기고 자신의 상처와 좌절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이다.
남을 섬기려는 열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놀라운 선물일지도 모른다. 친절이나 베풂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상상 이상으로 강력한 힘이 있다. 그 이면에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놀림을 받고 풀이 죽은 내게 다가와 “넌 참 괜찮은 아이야”라고 이야기해 주었던 여학생은 상처 입은 나의 감정을 다독여 주는 차원을 넘어 내 열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지금 내가 세계 곳곳의 수많은 이들을 섬기는 일을 소명으로 감당하도록 이끌어 준 셈이다.
성경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려운 이웃에게 손을 내밀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다. 대가를 바라고 베풀어서는 안 되지만, 선한 행위에는 놀라운 상급이 따르게 마련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서너 번 소망을 놓아 버렸던 때가 있었다. 유년 시절은 대부분 행복했지만 열 살 어간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밀려와서 그야말로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창의적인 자세로 발버둥 쳐 봐도 도저히 해내지 못할 일들이 있었다. 나를 돕느라 밥 한 끼 편히 먹지 못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보면 미안하고 서글펐다.
하지만 그쯤은 약과였다. 오랜 시간 따라다니며 나를 끈질기게 괴롭힌 더 큰 문제들이 있었다. ‘내가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수 있을까? 아내와 아이들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 먹여 살리지? 위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가족들을 지켜내지?’ 자존감과 자아상이 정립되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근심과 두려움의 습격을 받았다. 소망을 잃어버리면서 마음이 심각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망을 잃는 것은 팔다리를 잃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분노와 상처, 혼란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렬해졌다.
어느 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목욕을 하게 욕조에 물을 좀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욕실을 나서는 어머니에게 문을 닫아 달라고 말했다. 그러곤 물속으로 들어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장면이 머리를 스쳐갔다. 오래 계획해 왔던 일을 실행에 옮길 작정이었다. ‘하나님이 이 고통을 거둬 주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바라보고 살아야 할 목적이 없다면, 앞으로 만나게 될 것이 따돌림과 외로움뿐이라면, 누구에게나 부담이 되는 존재로,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면… 지금 끝내는 편이 낫겠어.’
마침내 몸이 뒤집히면서 얼굴이 물에 잠겼다.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잠시 후 ‘이런 짓을 하면 못써!’라며 내 안의 내가 말했지만 어두운 생각들은 고집을 부렸다. ‘이 끔찍한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잖아? 이렇게 사라져 버리면 그만이야.’ 조금만 더 참으면 폐 안의 공기는 다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넷, 셋…’
숫자를 세고 있는데, 문득 내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옆에는 남동생도 있었다. 다들 눈물을 쏟으며 더 잘해 주었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고, 모든 것이 자기들 탓이라며 괴로워했다. 가족들이 평생 내 죽음으로 자책감을 가지고 살게 만드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맞아, 난 나만 생각했어!’ 얼른 몸을 뒤집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날 밤 한 방에 누운 남동생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형은 스물한 살쯤 자살할 작정이야.”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그럭저럭 참아낼 듯했지만 그 이후에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남들처럼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스물한 살이 내 인생의 종착역처럼 보였다. “아빠한테 형이 그러더라고 얘기할 거야.” 동생이 대꾸했다. 나는 누구한테도 이르지 말라고 다짐한 뒤에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내 침대 귀퉁이에 걸터앉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아버지였다.
“죽으려고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따듯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앞으로 너에게 얼마나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느냐고 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빗질해 주었다. 평소에도 나는 아버지가 그렇게 쓰다듬어 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우리가 있는데 뭘 그렇게 걱정하니? 걱정마라.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테니. 항상 네 곁을 지키겠다고 약속하마. 넌 잘될 거야.”
사랑스러운 손길과 근심어린 눈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린아이의 흔들리는 마음과 어지러운 생각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는 법이다. 내게는 다 괜찮을 거라는 확인을 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나는 마음 놓고 기댈 든든한 기둥을 얻었다. 아이에게 아빠의 확인만큼 확실한 게 또 있을까? 아버지는 너그럽게 자식을 사랑하고 지지하며 그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분이었다. 여전히 앞날은 불투명했지만 아버지가 다 잘될 거라고 했으니 당연히 그러리라고 믿었다.
그날 나는 잠을 잘 잤다. 이후로도 갠 날과 흐린 날이 교차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소망을 굳게 붙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바닥까지 떨어졌던 이 경험 덕에 넉넉히 이길 수 있었다. 여느 사람들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지만 자살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사방이 캄캄하기만 했던 그날, 난 내 목숨을 건드리지 못했다. 정작 내 생명을 취하신 분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가져다가 열세 살 꼬마가 이해할 수 있는 제한된 비전보다 월등하게 큰 의미와 목적, 기쁨을 가득 담아 주셨다. 팔다리가 생기는 기적을 보여주는 대신, 나로 하여금 기적이 되게 하셨다.
- 『닉 부이치치의 허그』 중에서
(닉 부이치치 지음 / 두란노 / 318쪽 / 1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