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16 전남 광양 홍쌍리매화농장을 가다
전남광양의 백운산을 등산하고 축제기간중인 홍쌍리 청매실농원을 다녀오다.
이곳은 봄의 전령사 매화 축제기간이라 온통 관광차량으로 주차장은 만차로 복잡하며 관광차 구경 온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백운산 기슭에 자리 잡은 약 40만㎡ 규모의 청매실농원은구경 온 사람들의 편의시설을 비교적 잘 갖추어 놓았으며, 여장부 홍쌍리여사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온 마을의 수입원으로 자리잡았다.
푸른 청보리와 새하얀 매화꽃이 조화를 이루고, 그 곁을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이 어우러져 경치가 일품이다.
매화 사이로 그 자태를 드러내는 형형색색의 야생화들도 매화마을의 멋진 풍경에 힘을 보탠다.
매화뿐만 아니라 매실을 담은 항아리 2,500여 개가 가지런히 정렬돼 있는 모습 역시 장관이다.
40여 년 전에 청매실농원 주인 홍쌍리 여사가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화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현재 이곳 매화마을에는 60여 가구가 10만여 그루의 매화나무를 키우고 있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청매화, 발그스름한 빛깔이 고운 홍매화와 눈처럼 하얀 백매화 등 다양한 매화가 자태를 뽐내는 산책로를 걷고 있노라면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뼛속까지 진하게 스며드는 느낌이다. 밤에 보는 매화도 무척 매력적이다.
달빛을 받은 매화는 더욱 고혹적으로 빛난다.
세계속에 광양매실을 꽃피워 온 청매실농원의 여장부 홍쌍리씨가 오늘날 광양매화문화축제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70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대를 이어오면서 매실식품 제조방법을 전수 받은 홍쌍리씨는 1994년 청매실농원으로 매실전통식품 제조업 허가를 받는데 이어, 1995년 우리나라 최초로 매실전통식품 지정을 받았으며 1997년 12월에는 매실농축액으로 전통식품제조명인 제14호로 지정받았다.
200여개의 전통장독대의 풍경과 섬진강이 있고, 지난해 MBC드라마 <허준>에서 효험이 입증되면서 광양매화문화축제를 찾는 상춘객이 지난해 60만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최초 10여년 사이에 축제가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지만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봄꽃축제로 겨우내 웅크렸던 우리들의 마음을 활짝 열계하는 전국최초축제라는 의미를 두고 있어 광양매화문화축제는 대표적인 축제로도 손색이 없다.
[홍쌍리 청매실 농원 소개]
**소재 :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전화 061-772-4065)
**홍쌍리(65) : 밀양 태생으로 전통식품 제조명인 14호
**청매실 농장의 역사와 규모 : 홍쌍리명인 시아버지
울산 김오천옹이 1931년 이곳에 와서 매실을 심었다
홍쌍리 명인이 40여년간 5만여평을 개간하고 매실나무를 조성하여 지금은 맞아들 김민수와 같이 경작 운영 한다고 한다
홍쌍리 명인은 1997년 12월에 전통식품제조 허가를 받아 각종 제품을 생산하여 전국에 판매하고 있다
장독대 항아리가 20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로 인해 광양시는 1년에 3.000 여돈의 매실을 생산 80억원의 소득을 올려 전국 매실 생산량의 23%를 생산하고 해마다 3월이면 매화축제를 얼어 관광객이 50여만명이 몰려들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만발한 매화꽃 사이로 섬진강을 내려다 보는 풍경은 관광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홍쌍리 그는 "매실꽃은 딸이요 매실은 아들이다"라고 한다 매실뿐만 아니라 농장에는 뜰꽃 식품이되는 나물 등을 심어놓고 꽃피고 자라는 모습을 보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심정은 신선이 따로 없다고 한다.
**홍쌍리여사의 삶 :그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24살 때인 1963년 겨울, 전라도 만석꾼의 며느리로 시집을 왔다.
도시에서 전기도 없는 시골농원으로 시집을 왔으니 모든게 낯이 설었다. 일도 쉬울 수는 없었다. 건어물상을 하던 친정집에 드나드시던 시아버지 눈에 들어 시집을 왔는데 시어머니는 일도 못하는 며느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매일 성화셨다. 눈에 차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녀는 시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 아버지는 동이 트면 그녀를 데리고 나가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농사를 가르쳤다.
시아버지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밤, 매실 묘목 5천 그루를 사 들여와 심었다. 이런 공로로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분이 바로 시아버지 고 김오천 옹이다. 오늘날까지 그녀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고 있고 또 오늘날의 홍씨를 있게 한 것도 시아버지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가 지금처럼 가게를 일궈오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겪어왔고 그 첫 관문이 바로 시아버지였다.
시아버지는 밤나무, 매화나무를 한국으로 들여와 심기 시작했지만 쌀의 몇 배 값을 받을 수 있었던 밤에 비해 매실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한 천덕꾸러기였다.
그녀가 처음 시집왔을 때 농원에는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매실꽃을 만난 것은 시집살이 첫 해를 보낸 다음해 봄. 도시처녀의 어려운 시집살이로 눈물도 많이 흘렸다. 힘겨울 때마다 매화나무 아래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
그런 어느날 우연히 매실열매를 손에 문지렀는데 손에 있던 흙이며 때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년 “참기름 뭍은 손도 비누칠해서 깨끗이 닦고, 고기 구운 철판도 닦아 내면서 정작 뱃속은 청소를 안하더라”면서 “아마도 제일 더러운 곳이 우리들 뱃속이 아닐까 싶어 이게 청소부로구나하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때 우리 몸에서 제일 지저분한 곳이 장이고 이것이 뱃속에 들어가면 장속의 묵은 때도 깨끗이 청소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확신이 그를 매실에 매달리게 하는 동기가 됐다.
그때부터 홍씨는 매실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젊은 며느리는 사업을 하겠다며 밤나무를 베어 내고 매실 나무를 심자고 시아버지에게 제안했다. 며느리는 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시아버지는 하루가 멀다하고 야단치고 때론 달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결단에 지쳤는지 결국 시아버지도 심은 매실은 베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매실나무를 심어 나갔다.
그때부터 농사일에도 재미가 붙었다. 장 담그고 장아찌 담그는 일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매달렸다.
매실의 정화능력을 알아내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시작한 일은 고추장에 1년, 간장에 1년, 식초에 1년씩 십여 년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지금 농원 사무실 앞에 놓여진 수천 개의 대형 장독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수십 년을 연구하며 보낸 세월이 오늘의 그녀를 만들었다.
그녀는 매실농사가 채 자리 잡기도 전인 1968부터 남양 광산에 3년간 투자했다. 하지만 일이 잘못돼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다. 당장 밥 지을 땅덩어리 한 평 없이 주저앉고 말았던 것. 만석군 집안이 거지가 됐으니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홍씨에게도 지금까지 가장 가슴아픔 기억이었다.
홍씨는 그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내 삶에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을 때가 그 때였어요. 내 몸 아픈 것 보다 자식들 굶는 꼴을 보는 게 더 가슴이 찢어지거 미어지는 일이었지요.”
처음부터 가난한 것 보다 부자로 살다 갑자기 망하는 게 더 힘든 세월이었다고 소개한다. 좋은 음식 먹고 공부만 하던 애들이 똥지게를 지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쌀 한 톨 없는 꽁보리밥을 그릇에 담아 밥상에 올릴 때면 한 공기의 눈물도 함께 담았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그리고 힘들 때는 울기도 원없이 울었다.
그렇지만 마냥 머물 수도 없었다. 울음을 닦고는 다시 힘들어 싫다는 아들들을 데리고 비탈진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심고 거름을 주고 땅을 다졌다. 힘들고 가슴 아파 몇 번이고 주저 앉고 싶을 때마다 그녀는 산등성이 바위에 앉아 노래와 시를 읊었다. 그녀는 불평하기 보다는 울면서도 시를 읊었던 것이다.
이렇게 낮에는 억척같이 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쓴 것이 지금 상당수가 모였다. 그는 모은 시를 조만간 책으로 출간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현재 그녀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 역시 어려웠을 당시 함께 고생했던 자식들이다. 장남과 며느리는 청매실농원을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에 알리고 있고, 둘째 아들과 며느리는 조용한 후원자가 되어주고 있다.
그녀는 매실을 수확해 무언가 판로를 열어야 했다. 열매를 이용, 수년을 연구해 개발한 장아찌를 ‘식품’으로 등록, 본격적으로 판매를 시작하기 위해 허가를 내려하자 ‘집에서 만든 반찬이 무슨 상품이 되느냐’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누구도 하지 못한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러나 여기서 좌절하지 않았다. 직접 관계자를 만나서 설명을 하고, 또 싸우고 때론 밀어붙여야 일이 진행됐다. 이런 일들이 일상처럼 이어져 갔다.
홍씨는 그렇게 어려운 고비를 한 고개, 두 고개를 넘었다. 지금 청매실농원에서는 장아찌 등 절임류와 매실액기스, 매실환, 매실된장과 고추장, 매실캔디, 매실씨앗배게 등 다양하게 가공 판매하고 있다.
청매실농원은 일본, 덴마크, 독일의 정원식 농원을 벤치마킹해 순수한 우리의 꽃들과 자그맣게 자라고 있는 채소들로 채웠다. 수천 개의 장독과 어우러져 있는 파란 풀들과 색색의 꽃은 관광명소로 손색이 없으며, 최근에는 취화선 등의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해 졌다.
또 매년 봄 광양매화꽃축제 때면 이곳 청매실농원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축제기간 뿐만아니라 매화가 피는 3월 한달 내내 섬진강변 왕복 2차선도로가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일주일여 축제기간만 해도 60만여명이 다녀간다.
그리고 농원 한 켠은 마을 주민들에게 개방했다. 주로 노인들이지만 주위에서 뜯은 쑥 등 봄나물과 애써 키워 수확한 콩 등 각종 농산물도 팔고 있다. 모두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청매실농원은 매화 뿐만아니라 다른 꽃들도 함께 선보인다. 1만 1300그루의 매화나무 아래 상사화 2천여송이를 심었고 구절초와 초롱꽃, 금낭화 등 야생화도 수천송이를 심어 공개할 예정이다.
이렇게 그녀는 80세까지 농사군의 길을 묵묵히 갈 계획이다.
★좋은 말 한마디 :
**인생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실상 살아간다는 것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맹목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자신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제대로 살고 있어야만 합니다.
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엔가 쫓기듯
불안하고, 허무해지며, 지나치게 우울해
져서 삶을 포기하고 싶기도 합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내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소중한 내 인생을 느낄 때 우리는 건강한 정신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사실 멀쩡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고 있는 우리는 치료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할 정신질환이 있는 셈입니다.
세상이 바쁘다고 무작정 달려만 가는 우리는 정작 소중한 것을 잃고 살아갑니다. 혼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세상인데도 우리는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기 보다는 혼자 살아남는 법만 생각합니다.
백성이 없는 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혼자만이
존재하는 세상,혼자만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쩌면 흘러나오는 문제들은 해결할 생각도 없이
이미 흘러 나와버린 문제들에만 매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과거에만 집착하는 사람,
과거를 후회만 하고 있는 사람, 과거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은 자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자랑하거나 이미 지나간 일들에
아쉬움만 갖는 사람은 늘 실패자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내가 어떠하든 과거에 대한 집착보다는 미래를 믿으며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면서 사는 지혜를 가졌으면 합니다.
<좋은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