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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우리집 대소사
1. 행복한 나날
2. 펀드 반 토막
3. 종중 세향제 참석. (1) (2)
4. 계속된 해외여행
5. 혁진이 취직과 2세
6. 부엌 개조. (1)
7. 처갓집의 우환. (1) (2)
8. 집사람 강의
9. 건강검진
10. 모임 참석
11. 인터넷 바둑 중독. (1)
1. 행복한 나날
금년이 우리 집의 행복한 나날이 계속된 최고의 해인 것 같다.
나는 세계금융공황으로 주식 펀드가 반 조각이 났는데도 마음은 평온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IMF환란 때는 부채가 많아 시간이 갈수록 부채가 공배수로 늘어났었다. 환율 추이나 지켜보면서 부채도 자산이라고 위안을 하며, 부채가 계속 늘어나서 집을 팔아도 모자랄 형편이 되니 근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0년 만에 세계금융공황이 다시 닥쳐, 나는 빚을 갚고 간신히 모은 돈을, 이 공황에 또 직격탄을 맞으며 펀드가 반조각이 났다. 부채가 없으니 맘잠을 못 자던 IMF때보다는 마음이 홀가분하다. 자기돈 잃어버리고 기분 좋은 놈 어데 있건만 마음먹기에 따라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집사람은 육순이 되었는데도 심심소일로 강의를 나가 명강이라고 칭송 들으며 나름대로 즐거움을 찾고 있다. 친구들을 만나면 해외여행간 것으로 폼 잡고, 대학동창회에서는 부회장이라고 후배들 앞에서 뽐낸다. 요즈음은 카나다에서 새로 탄생할 손녀 배냇 저고리나 신생아 용품응 직접 만드냐고 즐거운 소일을 하고있다. 정성을 모아 만든 작품은 최상급이다.
혁진이는 캐나다에서 결혼하고 영주권 따고 자기가 원하는 게임회사에 프로그래머로 취직하여 주위의 선망의 대상이니 이아니 좋은가. 더구나 조금 있으면 2세도 태어나니 가장으로서 제 몫을 하는 것 같다.
혁범이는 세계일류 삼성전자에 입사하여 구라파 모스크바 아프리카까지 출장을 다니며 제몫을 하니 보기에도 좋다. 충분한 급료에, 휴일이면 죽자 살자 놀러 다니는 게 도를 넘는 것 같다.
우리 부부와 혁범이 셋이서는 작년에 여름휴가로 필리핀 세이브 프랜테이숀 베이 리조트에 가서 즐기고, 겨울휴가는 일본 하꼬네 스키장에 가서 스키를 탔다.
금년 여름휴가는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 북쪽에 있는 코타키나발루의 슈트라 하버 리조트에 가서 여름휴가를 즐겼다. 세 식구 모두 만족해하는 휴가였다.
우리 식구가 모두 분란과 근심 없어 한해를 보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우리 집에 이런 행복이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2. 펀드 반 토막
IMF 환란 때에 그 고생하며 리스료를 납부하고 살아남은 80톤 크레인을 팔고, 또 55톤 크레인을 팔고, 크레인 임대해서 조금 남은 돈을 은행에 대형 크레인 구입자금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이 자금을 몽땅 은행직원의 권유로 펀드에 가입 하였다. 돈이 필요한 시기에 며칠만 시간을 주면 해약하여 사업자금을 쓸 수 있고, 주가 연동인 펀드에 가입하면 현 주식상황으로 보아 원금은 손해 볼 리 없고, 적금보다는 훨씬 이익이 나니, 펀드에 가입하라는 권고에 따른 것이다. 가입하고 그런대로 시간이 흐르며 적금 가입하기보다 잘 했다고 생각 하였다.
혁범이 돈과 봉급의 일부까지 펀드에 들어 혁범이 돈은 1억까지 올라가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세계 경제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경제공황이 발생하여 전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 하였다.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을 하더니 GM, BOA, AIG가 구제금융을 받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전 세계 금융시장과 부동산 시장이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IMF때는 동남아에서 시작하여 한국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이때는 미국이 주도하여 개발도상국 골탕 먹이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번 금융공황은 미국의 곪은 부동산이 발단이 되어 미국의 주가가 급락을 하여 미국이 세계의 중심축에서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였다. 미국 금융권내에 있는 세계 모든 국가는 같이 춤을 추며 주가가 순식간에 급락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혼자 잘 하겠다고 덤벼보아도 되는 일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경제정책을 내 노아도 백약이 무효다.
2008년 9월 말에도 딸라 환율이 천 이하 이었는데 한달도 안 되어 1500대 1을 넘어섰다.
주가지수는 1900선을 넘던 것이 순식간에 1000선 이하로 급락 하였다. 딸라와 주가가 서로 반대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가가 1450선 일 때 팔까 하다가 이제는 더 안 떨어지겠지 하는 마음과, 주가가 단숨에 너머 많이 떨어졌으니 더 안 떨어질 것으로 보았다. 또 팔려고 했더니 손해 본 것이 너머 아까워 팔기도 서운하였다. 그러고 열흘 만에 주가가 천선으로 곤두박질을 친 것이다.
내 통장 계산을 하니 펀드해서 처음 조금 이익 본 것은 차치하고 원금에서 반 토막이 난 것이다. 이 펀드가 일년 내에 올라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땅을 치고 통곡을 할 일이다.
내 펀드만이라면 좋다. 자식 놈의 돈 까지 펀드에다 넣고 반 토막을 내었으니 내 꼴이 무엇이 되겠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IMF때엔 리스료를 딸라로 넣느냐고 빚을 얻어, 빚이 산더미 같이 올라가서, 거지로 길바닥에 주저앉을 뻔하게 고생을 하였다. 이번에는 빚이 아니고 내 돈이라 빚 걱정은 안 되어도, 억울한 한숨만 나온다.
IMF때에 당하고 이번 금융공황에 똑같은 일을 국가가 또 당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 금융인의 실력이 IMF에서 실습을 많이 하여 이런 금융공황은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금융인은 있다고 생각한 것이 나의 실수이기도 하다.
내가 똑똑 하여 펀드를 다 팔고 그 돈으로 딸라를 샀으면 양상이 달라진다. 보름 만에 50%의 이익이 나고 주가가 천 이하로 떨어졌을 때 딸라를 팔아 주식을 되 사면 보름 만에 30%가 올라 요동기의 한 달 만에 80%의 이익과 연말에 딸라로 바꾸면 20%의 추가 이익으로, 원금이 반 토막이 나는 것이 아니라, 곱쟁이 장사가 되는 것을 점쟁이가 못된 것이 한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IMF에 당한 것을 만회하고 대형 크레인을 구입하여 노후보장을 톡톡히 하는 것인데 아쉽기도 하다.
나는 꼰질이를 뽑아도 더럽게 운이 없는 놈이다. 그래서 제대 후에 죽어라 하고 복권을 사다가 지금은 로또도 안 산다.
3. 종중 세향제 참석.
살다보니 우리 형제 중에서 모두 돌아가시고 나 혼자 남아 우리 집의 좌상이 되었다.
금토동 시향(세향제)에 아버님이 열심히 참석하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고는 작은 형이 간간히 참석하더니 작은 형까지 돌아가고 나니 친척과 발이 끊긴 상태였다. 내가 오극이 형의 연락으로 세향제는 물론 종중회의에 쫓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안동 태사공 시조의 춘향제를 비롯하여, 장단 추밀공 파조의 세향제, 원당의 정간공, 음성 생극의 양촌 문충공, 금토동의 안양공, 정익공, 음성 능산리의 금년 밀례를 잡수신 승지공, 대사헌공, 용인 25세 휘심, 음성 향제리 29세 휘성언(부령부사) 세향제를 쫓아다니느라고 금년 가을은 무척 바뻣다. 물론 우리 직계 5대조까지는 매년 해오던 행사다.
세향제는 할아버지들만 참석하여 노인들의 집합장소 같다.
여러 번 쫓아다니니 직계의 친척들의 얼굴도 낯이 익어 편안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홀기와 상차림을 직계에서는 통일될 수 있도록 표준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1) 시조(始祖)
권문은 신라 말 경주김씨 행이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와 전쟁을 할 때 큰 공을 세워 왕건이 사성을 하여 김행이 권행으로 되었으며 본을 안동으로 하여 안동 권씨가 탄생하게 되었다. 서기 930년 1월 고려태조 13년이다. 현재의 안동인 고창을 식읍으로 받고 태사란 벼슬을 내려 권태사가 권문의 시조다.
권문에서 시작한 4가지가 있다. ; 기로사 전문형 족보 호당
첫째 기로사(耆老社)를 창설하였다.
기로사는 정2품 이상의 문관으로서 실직에 있던 자가 70세 이상이면 입사를 허용하여 노신들을 예우하기위한 제도다. 기로사가 관청의 서열로 으뜸이며 연세와 직위와 덕망이 가장 높은 국가원로들의 교유하는 곳이라 기로사에 드는 것을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이 기로사를 발의 주관한분이 15세 정간공이다. 기로사를 기로소 기로회라고도 한다.
둘째 전문형(典文衡)이다.
문형이란 대제학의 별칭이며 호당출신이라야만 문형에 오를 수 있고 문형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의 대사성의 벼슬을 겸한 문장가라야만 한다. 문형은 이 3관의 최고책임자로 관 학계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직이므로 더할 수 없는 영예로 여겼고 명예로는 6조판서나 3공보다 윗길로 쳤다. 이 전문형에 제일먼저 등재되신 분이 16세 양촌 권근이다.
셋째 족보의 시초다.
안동 권씨 족보가 우리나라 족보 중에서 제일먼저 작성된 성화보(成化譜)다.
성화보는 1476년 17세 지재공이 편찬한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세계의 최초족보다. 현재 규장각에 국보급으로 소장하고 있다.
넷째 호당(湖堂)에 최초로 선발
호당이란 젊고 유능한 문신을 집현전 관원 중에서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도록 한 장학기관이다. 사가독서라고 하여 문신의 영예로 여겼으며 출셋길도 빨랐다. 이 호당에 근의 아우인 우의 아들 채가 최초로 선발되었다.
파조(派祖)
시조이후 10세에 이르러 15개 파조로 나뉘게 된다.
우리는 10세 수평할아버지의 추밀공파다. 추밀공의 묘소는 민통선 안의 장단에 있다.
15개 파중에서 추밀공파와 복야공파가 제일 번성하여 2대족으로 나뉘어 번영하였다. 다음은 인가파와 좌윤공파가 인물을 많이 냈다.
추밀공파의 13세 문정공때는 일가9봉군이 제수되었다. 당대에 9봉군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권씨의 항열은 10진법으로 되어있어 이름만 보아도 몇 대 인줄 구분할 수 있게 체계화되어있어 항열 따지기가 쉽고 계산하기 편하다.
자손(子孫)
16세 양촌 권근(1352-1409) 자손이다. 우리는 추밀공파 양촌 자손이라면 자기의 소개는 끝난다. 35세손이면 19대 양촌 자손, 36세면 20대 양촌 자손.
대제학으로 문충공 양촌은 길창군으로 삼관의 최고책임자로서 관 학계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전문형에 최초로 등재하신 분으로 조선 최고의 문장가에다 명필로 유명하다.
입학도설 양촌집 동국사략 오경천견록 상대별곡 등 문집을 저술하여 후세 유학사상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현재 만원권에 그려져 있는 별자리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국보 228호로서 양촌이 고구려의 천상도를 기초로 감독제작한 것이다.
이색의 아들 이종선이 사위고 달성 서거정은 외손이다. 셋째아들 규의 부인이 경안공주다.
양촌 묘소는 광주 오포에 있다가 1444년 세종26년 음성 생극면 방축리로 천묘를 하였다. 천묘를 할 때 묘를 파자 산위인데도 지하수가 솟아올라 문중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 노승이 묏자리에서 마주보이는 십여리 밖의 수리산 생여바위 밑에 연못을 파라고 하였다. 수리산 제2봉에 가서 연못을 파니 묘 광중에서 물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여 천묘를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560년이나 지난 현재에도 산꼭대기 해발 500m에 있는 40여 평의 연못에는 물이 넘쳐흐른다고 한다. 이 수리산 연못이 생극면 차곡 저수지의 원류가 되기도 한다.
이 묘역은 사패지로서 조선건국의 왕권확립과 국기를 세웠다는 공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받은 사패지다.
양촌 묘소 밑에 정인지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은 아들 권제와 세조원년 1등 공신이었던 손자 권람의 묘가 나란히 자리 잡아 3정승 3대묘로 유명하다. 생극에 가면 국도에 3정승 묘 입구라고 큰 표지석이 있다.
계(係)
17세 권제(1387-1445) 문경공 계다.
추밀공파 양촌자손 문경공계다.
대제학 대사헌 이판 예판을 지낸 지제 권제는 우찬성때 용비어천가를 지었으며 최초의 족보인 성화보를 제편한 문경공이다. 고려사를 편찬하였으며 총명 박학하였다. 권씨의 정점이 이 시절이다.
권제의 둘째아들 길창부원군 권람이 좌의정이고 권람의 사위가 남이장군이다.
셋째아들 안양공 권반은 경기도 관찰사와 개성유수를 지냈으며 우리의 직계다.
여섯째 영가군 권경이 경상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권경의 증손이 권철이다. 권철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으며 권철의 아들이 도원수 권율이고 권율의 사위가 이항복이다.
17세 문경공에서 18세 안양공계로 이어진다.
30세 권지용은 비인현감을 지냈으며 나에게 5대조고 혁자 항열은 6대조가 된다.
5대조에서부터 아버지까지의 묘소는 청계산 하오고개에 있다.
후손들이 선조들을 경애하는 마음이 경박해지고 있는 세태에 직계에 대한 계통도라도 일깨워주기 위하여 작성했다.
(2) 밀 례
영평현령을 지내고 좌승지로 추증된 23세 권경 할아버지의 묘소를 청계산 금토동 능안에서 음성 능산리로 밀례를 한다고 하여 참관하기로 하였다.
2008년 2월 27일, 금토동으로 8시까지는 와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내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오극이형제와 오주 형제가 도착하고 파묘작업은 시작하였다.
음성에서 올라온 노인회장은 새벽 6시 반에 올라와서 전화를 하고 작업을 빨리해야 한다고 독촉을 한 모양이다.
밀레를 하게 된 동기는 용인에서 금토동을 거쳐 서울로 오는 고속도로가 신설되어 도로에 인접되어있는 묘소를 이장하라는 공고가 있어 부득이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2천년에 할아버지산소 밑에 있는 숙부인 할머니 산소를 할아버지와 합장하였는데 또 이장을 하게 된 것이다.
9시가 되니 파묘를 하여 숙부인 시신은 수습을 하여 영구차에 싣고 나서 할아버지 관을 꺼내는데 보통일이 아니다.
관위에 석회를 두자정도 씌웠는데 강회라 굴삭기가 뿌레카로 두들겨도 꼼짝을 하지 않는다. 강회가 돌덩이같이 굳어져 있어 뿌레카로 모서리부터 뚫고 부수기를 계속하는데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뿌레카가 작업을 하는데 관 뚜껑도 보이지 않는다. 아침이고 산 위라 바람은 불고 날씨가 쌀쌀하여 밀례 참관하는 사람들이 추워서 쩔쩔맨다. 두시간만에 간신히 관 뚜껑위에 있는 석회는 걷어냈는데 관을 꺼내자면 관 옆의 또 회공구리를 걷어내야 하는데 오시에 음성에서 하관식을 한다는데 참 난감하다. 이렇게 관을 꺼내는데 시간이 걸릴 줄은 예측을 못했다.
우선 관위의 홍대를 뜯었다. 홍대를 널빤지로 차곡차곡 놓았는데 널빤지 간에 삼각 쐐기로 연결을 하여 홍대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게 만들어 요즈음에는 볼 수 없는 홍대다. 굴삭기로 홍대를 뜯어내니 홍대의 두께가 한 7~8 Cm 정도 된다. 이렇게 두꺼운 널빤지로 홍대를 쓰다니 놀라운 일이다. 홍대를 뜯고 나니 바로 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 관으로 홍대 같은 두께의 널빤지로 관이 또 하나있어 이중 관을 썼다. 굴삭기로 옆의 강회를 뜯어내고 이중관의 걷관을 부수며 한쪽으로 속관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거의 굴삭기 혼자하고 나머지 인부들은 구경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포크레인의 브레카로 석회를 부수기 시작한지 두시간반 만에 속관을 밖으로 완전히 들어내는 작업이 끝났다.
관을 밖으로 끌어 내놓고 보니 관에 옻칠을 한 것이 벗겨지지 않고 원형 그대로 있다. 관은 모서리를 각을 지게 하지 않고 유선형으로 처리 하였다. 탈관을 하여 시신만 다른 관으로 모시려고 예비 관을 준비해 왔는데 관이 원형그대로 있으니 구태여 새로운 관으로 옮기지 않고 원형 관을 그대로 옮기기로 하였다. 을미년인 1655년대의 관이 350년이 지나도록 원형 그대로 있다는 것은 관의 제작이나 석회와 옻칠의 우수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보통 관을 썼으면 다 삭아서 흔적도 없고 뼛조각도 찾기 어려워 흙만 갖고 가기도 하는데 원형대로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준비해온 예비관보다 원형관은 크기의 규모가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다. 관이 너머커서 영구차에 실을 수가 없어서 트럭에 실고가기로 하였다.
굴삭기의 브레카로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곡괭이로는 하루 종일 작업을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현군 묘를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도굴하려다 석회를 깨지 못하고 실패한 원인을 이해할만하다. 병인양요와 남현군 묘 도굴사건에 천주교 신자가 개입하였다고 하여 대원군의 천주교박대가 심하여 수천 명의 천주교인이 살해당하는 빌미가 된 도굴사건이다.
금토동 능안에서 원형 관을 트럭에다 실고 음성 능산리로 출발을 하니 12시가 다 되어간다. 음성에서는 오시인 11시에서 1시 사이에 하관을 한다고 친척이 다 모여 있을 텐데 청계산 금토동에서 음성 능산리까지의 거리는 자동차로 도저히 하관시간을 댈 수 없는 촉박한 시간이다.
사전에 밀례를 어떤 이유로 음성으로 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왔는데 이해 못할 점이 있다. 밀례를 잡숫는 할아버지의 아버지인 정익공 공조판서의 묘가 바로 옆에 있는데 이 정익공 묘소 밑에 터를 잡고 밀례를 하면 일도 편하고 부자가 같이 있어 세향도 한번에 지낼 수 있어 참으로 좋은 일을 구태여 음성까지 가서 이장을 할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이제부터 세향을 지내려면 금토동에서 지내고 음성으로 내려가 능산리에서 지내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또 비석이나 상석 촟대석등 석물은 모두 버리고 간단다. 비석이나 상석에 쓰여 있는 글이 음성묘의 좌향에 맞지 않아 다시 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석물을 가지고 가서 새로 조성한 음성 묘에 그대로 세우고 옆에다가, 금토동에서 언제 이장을 하고 금토동의 좌향과 밀례를 하는 음성 능산리의 좌향을 표시한 표석을 세우면 될 일을 효율 없이 일을 한다. 그러면 일도 편하고 비석이나 상석을 만드는 불편함도 해결되고 경비도 적게들 것을 좌향 표시하는 글자하나 때문에 비석을 버리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 같다. 더구나 금토동 비석은 오석몸체에 화강암 두개석인데 새로 만든 비석은 몸체가 화강암이다. 우리가 버릴 때 버리더라도 비석과 촛대석 둘 향대석 만이라도 가지고 가라고 트럭 기사에게 지시를 하였다. 이장 비용도 보조받은 9백8십여 만원 외에 추가로 더 비용이 들어간다고 한다.
밀례를 하면서 내가 궁금한 것은 우리 부모님은 탈관을 하여 청계산 하오고개에 모셨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친척이 모두 우리조상은 모두 탈관을 하여 모시기로 하여 지금도 모두 탈관을 하여 산소에 모시는데 몇 대조부터 탈관을 하게 되었는지 무슨 이유에서 탈관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12대인 경 할아버지가 이렇게 중후한 나무 관을 썼으니 이 이후인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승용차로 음성 능산리에 도착하니 아직 영구차가 도착하지 않아 족친의 집에서 점심을 하게 되었다. 동리에는 다 노인들만 있고 반찬은 직접농사를 지은 것이라 맛이 담백하다. 식사를 하고 곧바로 이장하는 산소로 갔는데 벌써 하관을 하여 식사 때문에 하관식을 참석 못했다.
하관을 하고 봉묘를 하는데 굴삭기가 효율적으로 일을 한다.
봉분에 둘레석을 어떻게 쌓았나 궁금했는데 현장을 보니 간단하다.
맨 처음 기초 석을 둥글게 원형으로 쌓고 석주를 중간 중간 세운 후에 석주와 석주 간에 12지석을 끼운다. 지석위에 마무리 석을 올려놓고는 그 안에 흙을 메워 봉분을 하니 순식간에 봉분이 된다.
기초 석을 쌓기 전에 묘 중앙에 한자정도 파고 유물을 넣었다. 유물은 금토동에서 파묘를 할 때 나온 것으로 조그만 옛날 잔으로 사기로 되었는데 종지같이 생긴 소형이다. 이 종지를 뒤집어서 묻었다.
두개의 석관을 준비했다가 석관 하나는 반납하고 할아버지 관은 금토동에서 가지고온 원형 관을 그대로 모시고 숙부인 관은 석관을 사용하였다.
할아버지 새로 잡은 터에서 편안히 쉬십시요.
4. 계속된 해외여행
곤명, 코타키나발루, LA, 알코르왓.
해보던 장단으로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니 금년에도 큰 목적을 두지 않았는데도 해외 비행기를 네 번이나 타게 되었다. 회사에 다니며 해외출장을 가서 구경을 한다면 여행비 안 들이고 공짜로 구경을 할 터이지만, 나의 형편은 꼬박꼬박 내 돈을 주고 여행사에 끌려 다니는 관광이다.
쿤밍 ; 싸늘한 이른 봄에 봄의 도시라는 중국의 운남성 곤명(쿤밍)에 집사람과 같이 가서 구향동굴도 구경하며 보이 차와 라텍스 매트를 사 왔다. 중국의 차가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보이차가 으뜸이고 가격도 비싼데 이번에 한풀이 하듯 원 없이 충분히 사왔다.
코타키나발루 ; 여름휴가철 끝물에 집사람과 혁범이 하고 세 식구가 코타키나발루로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코타키나발루는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 북측에 있는 휴양지이다. 처음 해외여행을 다닐 때는 고급호텔에 들어가면 주밋 주밋하고 서리 맞은 병아리 같이 촌스런 티를 냈다. 지금은 세 식구 모두 자신 있게 호텔 로비를 활보하며, 호텔 샵에 들어가서도 물건을 안사도 당당하게 구경하고 나오는 폼이 이제는 호텔 분위기를 압도하고, 투숙객으로서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코타키나발루의 고급 슈트라하버 리조트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면서 우리집안의 평온한 행복을 느꼈다.
LA ; 시월에는 군 동기회에서 LA 동기생 방문을 한다고 하여 같이 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미국의 동서부관광하는 팀, 서부만 관광하는 팀에 나 홀로 LA만 가서 동기생들과 합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전에 미국의 동부 서부를 다 관광을 하였기 때문에 LA에 도착하여 해정이 처제 부부를 만나서 술 한 잔 하였다. 나는 혼자 샌디아고를 거쳐 멕시코 북부 엔세나데를 갔다 와서 LA의 동기생들과 합류하였다.
LA동기생 유동언과 송재신 중대장 집에 전 동기생부부가 숙식을 하며 샌디애고의 워너온천도 가고 샌디애고 미해병 사단도 방문하며 나의 일주일간의 방문을 마쳤다.
앙코르 ; 12월 초에는 앙코르왓을 집사람과 같이 갔다.
몇 년 전 집사람은 동네 아낙네들과 태국을 거쳐 앙코르왓 사원을 갔다 온 적이 있는데 나보고 또 가잔다. 내가 안가 봤다는 이유이지만 친구 라텍스 매트를 부탁 받은 원인이 더 크다. 앙코르왓은 크메를 제국의 세계적인 유산이라 한번 가본 사람도 또 가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다.
캄보디아의 씨엔립에 있는 앙코르톰과 안코르왓은 돌로 된 사원이다.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하게 크고 짜임새 있는 규모에 예술조각을 하여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현재의 캄보디아는 후진국으로 전락하여 다 허물어진 앙코르의 유적들을 복원도 못하고 부서진 원시상태로 전시하고 있다.
5. 혁진이 취직과 2세
혁진이가 2004년 말에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카나다에 게임개발회사에 스카웃되어 간다고 하여 반신반의하면서도 은근히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외국에 프로그래머로 회사의 지분을 갖고 취직을 하여 간다는데 잘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혁진이가 카나다에 간지 일 년 후에 집사람과 관광 겸 카나다에 가서 혁진이를 보니, 이게 아니로구나 하고 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다행히 혁진이가 소영이와 친하여 나는 소영이 부모를 만나 혁진이와 소영이 결혼을 전격적으로 결정하고 귀국하여 3개월 만에 즉시 결혼을 시킨 것이 큰 소득이었다.
혁진이가 결혼을 하고 카나다 영주권이 일년이 되도 나오지 않아, 정식으로 취직도 못하고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2007년 8월 24일 영주권이 나왔다. 일년이나 기다렸는데 카나다에서는 매우 빨리 영주권이 나온 것이란다. 영주권만 나오면 정식으로 취직이 바로 될 줄 알았는데 이게 또 일년이 가는데는 환장을 하겠다. 2008년 6월 23일 게임회사에 정식으로 취직을 하여 대망의 첫 출근을 허였다. 며느리인 조소영이 취직이 예상보다 빨리 됐다며 자기는 일년 더 있다가 될 것으로 예상 했단다. 소영이도 카나디안이 되어 느긋하게 기다린 모양이다. 빨리빨리가 몸에 밴 우리는 조급증이 나서 안달을 하였는데 카나다에서는 모든 것이 느릿느릿 여유만만인가 보다.
혁진이는 연봉 7만 불에 직장동료와도 의사소통이 불편 없이 잘 된다니 영어 회화의 실력은 소영이 덕택인 것 같다. 연봉 7만 불이면 카나다에서도 상위 급이란다.
나는 2009년 3월이면 손녀를 보게 된다. 한번 실패한 소영이는 배속의 태아를 잘 관리하여 건강하게 잘 자라 혁진이는 2세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나도 이제 손주 자랑하는 친구들 틈에 섞이게 되었다.
혁진이도 이제는 취직이 되어 근심걱정에서 벗어났고, 자식도 보게 되어 주위에서 부러운 눈으로 본다니 우리도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6. 부엌 개조
옛날집인 우리 집은 부엌이 좁다. 냉장고가 부엌을 독점하다시피 자리를 차지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궁리 끝에 다용도실의 벽을 뜯고 부엌을 확장하여 냉장고를 다용도실로 내 보냈다. 부엌이 순식간에 넓어지니 마음도 후련해졌다. 공사를 하는 김에 예전부터 사용하던 싱크대도 모두 갈아버렸다. 새로운 싱크대로 바꾸니 집사람이 매우 좋아한다. 진작 이렇게 하고 살걸. 왜 여태껏 고생했는지 모르겠다며 아주 만족한다.
바퀴벌레와 싱크대 교환
바퀴벌레 ; 우리 집은 바퀴벌레가 없다. 이번에 싱크대를 교환하는데도 바퀴벌레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우리 집사람의 붕산처방 때문에 바퀴벌레를 박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3년 전에도 마루 공사할 때 바퀴벌레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수도관이 새어 마루판을 뜯을 때 공사하는 인부가 ‘바퀴벌레공장 구경하겠군! 하여 무슨 말인가 했더니 마루판을 뜯으면 바퀴벌레가 하도 많이 나와서 마루판 밑을 바퀴벌레 생산지라고 한다. 나무 마루바닥 밑을 뜯을 리 없으니 바퀴벌레가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안전지대가 마루판 밑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 마루판을 뜯고는 바퀴벌레가 하나도 없다고 이상하다고 한다. 우리 집사람이 붕산효과라고 설명하여주었다.
붕산 처방이란 값싼 붕산을 사서 삶은 감사를 으깨어 붕산과 혼합하여 티 스픈 하나정도의 양으로 나눠 종이위에 놓고 후미진 구석이나 바퀴벌레가 있음직 한데 갖다 놓으면 된다. 이 감자가 섞인 붕산을 바퀴벌레가 먹으면 하루 이틀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름부터 일개월 내에 효과가 나타난다. 먹고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붕산을 먹고는 바퀴벌레 몸속에서 배란을 못하게 하던지 화학작용을 하여 바퀴를 박멸시키는 모양이다. 삶은 감자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고 붕산에 빵가루를 섞어서 놓아도 같은 효과이니, 바퀴벌레가 먹을 수만 있다면 어는 음식이라도 좋으니 붕산하고만 섞으면 된다. 붕산은 약방에 가면 값도 싸고 얼마든지 있다. 해충박멸하고 바퀴벌레약이라고 판매하는 것에 이 붕산의 원료가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집안에 바퀴벌레 한두 마리가 보인다 하면 보이지 않는 구석에는 바퀴가 무척 많이 서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때에 이런 간단한 붕산처방을 하면 어느새 없어 졌는지 바퀴가 말끔히 없어져 버린다.
싱크대 ; 우리 집은 강남 개발할 때 주택업자가 지은 단독주택이라 집안 구조가 구형으로 설계되었고 더욱이 부엌은 작게 설계되어 지금은 부엌을 사용하는데 비좁아서 불편하다.
이 좁은 부엌에 삼성 투도어 냉장고를 들여 놓으니 부엌이 냉장고에 압도되어 식당공간을 사용하는 게 말이 아니게 좁고 불편하다. 이 냉장고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다 발상한 것이 벽을 뜯고 냉장고를 내보내는 것이다. 부엌 옆에 다용도실로 새시로 지은 다용도실을 허물고 10Cm 판넬로 새로 다용도실을 지으면 벽을 허물어도 다용도실이 있어 부엌공간이 넓어진다. 시공업자를 불러 샤시를 넓히라고 하였더니 샤시는 다 뜯고 새로 판넬로 하는 것이 보기도 좋고 공사도 쉽단다. 공사를 하다보니 하는 길에 아주 오래된 싱크대도 집사람이 갈자고 하여 인터넷에서 싱크대 업자를 구했다.
부엌 자체는 좁지만 요즈음 격식에 맞는 싱크대를 골라 설치를 하였다. 완공 후에는 집사람이 싱크대를 보고 그렇게 만족했는지 자기가 선택한 싱크대를 보고는 감탄을 넘어 감격해 하고 있다. 싱크대의 효과는 200%다. 싱크대를 못 갈을 형편은 아니었지만 집의 구조상 싱크대는 싱크대지 이런 부엌에서 무슨 효과가 있으랴 싶었는데 냉장고를 내보내고 신식 싱크대를 설치하니 부엌이 훤해지고 집사람이 그렇게 좋아한다. 집사람이 처제한테 부엌 자랑을 하니 처제가 벽지를 들고 뛰어온다.
창틀만큼 벽을 허물고 보니 옛날집이라 벽 가운데 보온으로 스티로폼을 넣지 않고 비닐 한 장이 스티로폼대신 들어갔다. 겨울에 방이 웃풍이 세고 집이 겨울에 추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다. 옛날 집은 다 그렇단다. 공사기간은 이런저런 관계로 7/4일부터 7/15일까지 보름이나 걸렸고 패널공사비는 2,600,000원 싱크대는 2,900,000원으로 일반적인 공사 가격보다 3분의 1정도 저렴하게 하였다. 공사업자 모두 우리가 만족하게 전문가답게 일을 하여 기분이 좋았다.
7. 처갓집의 우환
금년 한해는 처갓집 일로 신경을 쓰다 마무리를 하는 것 같다.
10원 1일. 식물인간으로 4년여 끌어오던 처형이 국립의료원에서 일생을 다 하였다.
땡전 한 푼 없는 형진이 아빠는 남편으로서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는 정열을 부인 간호하는데 썼다. 장례식에 손님도 많이 오고 성의껏 치러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
처형이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누워있는데 남편인 형진이 아빠가 ‘나는 더 이상 못하니 처갓집에서 환자를 알아서 하라’ 하고 내 팽겨 쳤다면 처갓집은 알알이 부서졌을 것이다. 이런 때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 가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 진다.
유성이 아빠 덕분에 처형은 장례식도 잘 치르고, 성북동 길상사에서 49제를 올렸다. 1제에서 7제까지 빠짐없이 제를 올려주니 처형은 죽어서도 행복할거다.
장모님 돌아가시고, 해룡이 대형 교통사고가 나고, 사촌처남 해수가 급사하고, 처형이 장기 투병 끝에 저세상 사람이 된 것이 2년 안에 이루어진 일들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처갓집 집안이 화합의 길을 가나 싶더니 해룡이가 교통사고가 나면서부터 집안의 우환에서 시작하여 분란으로 이어졌다.
해룡이와 동거하던 박경미가 해룡이가 교통사고가 난 후에 보험금 문제가 나타나 주해룡이와 헤어지게 되었다. 경미가 남편인 해룡이가 죽으면 생명보험을 많이 오직 자기만 탈 수 있게 만들어 해룡이가 빨리 죽기만을 기다린 여인이 되었다. 해룡이 수술 후에 식사도 제대로 안 먹여 집에서 보양식을 만들어간 식구들이 아연하여 눈에 쌍심지를 켜고 감시하는 입장이 되었다. 경미는 생명보험은 자기 것이니 보험금만 타고 해룡이와 헤어지겠다고 선언하고 일산 백병원에서부터 발길을 끊어 지금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경미가 조금만 참고 환자를 돌보았다면 생명보험 외에 자동차 보험 운전자보험등 모두 타가지고 줄행랑을 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줄행랑을 안치더라도 경미가 해룡이를 간호하다 해룡이가 죽으면 간호하느냐고 고생했다며 치하를 받고, 보험금은 모두 챙겨 호화롭게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일생동안 이런 여인을 같은 집안 식구로 보듬싸며 살아야 하는 처갓집은 썩은 사과를 입에 물고 사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경미문제가 일단락되고 잠잠하다 싶더니 엉뚜당치 않게 해명이가 튀어나왔다.
얼마 되지도 않은 해룡이 운전자 보험금을 수령하여 멋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6천5백을 수령하여 4천7백이 남았는데 접대술값과 컴미숀으로 천2백을 순식간에 써 버렸다는 것이다. 남은 돈을 삼남매가 삼등분하여 자기 것을 갖겠다고 하니 해경이 입에서 ‘오빠 그 돈은 오빠 것이 아니고 우리 것도 아니고 해룡이 것이야’ 라는 말이 나온다.
해룡이가 삼육재활병원으로 옮기고는 누구보다도 병원에 열심이던 해명이 부부는 병원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해명이가 하자는 대로 보험회사와 합의하여 자동차보험금을 수령했다면 해명이 주머니에서 돈이 녹아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나중에 동생인 해룡이는 천덕꾸러기로 버림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조금 나온 운전자 보험 때문에 해명이의 속셈이 들통이 나서 자동차 보험은 살아있게 되었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현재상태의 1급 장애인 해룡이는 보험사와 합의해서는 안 된단다. 어떻게 살던 해룡이의 일생을 지켜줄 돈줄은 필요한 것이다.
돈이 보이면 형제도 부모도 안 보이는 세태가 되어 버렸으니 망조다.
(1) 사라진 처남댁
총각인 처남이 두 자식을 낳고 이혼한 년상의 여인과 동거를 하다 대형 교통사고가 나니 병원에서 사라진 막내 처남댁 경미문제다.
처갓집은 2남4녀에 이번에 대형 교통사고가 난 해룡이는 막내처남이다. 내가 결혼할 때 해룡이는 초등학교 다니는 코흘리개 였다. 이 막내처남 주해룡이가 많이 커서 나이가 마흔이 되어 대형 교통사고가 났다.
중 고등학교를 다닐 때 보면 옷이나 다려서 입고 멋 내기나 좋아하며 공부는 하지 않아 집안의 근심거리가 될 공산이 크다고 생각하였다. 공부를 하지 않아 대학교를 포기하고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다가 회사에 취직을 하였으나 얼마 안가 회사를 옮기고 제밥거리도 못하는지 개인 빚을 지고 장모님의 주머니 돈까지 뜯어갔다. 해룡이 나이가 삼십이 된 십여 년 전에 중기운전을 배우겠다고 나한테 왔다. 장사장을 소개시켜 주어 장사장 중기의 운전 보조로 시작하여 면허증을 따고 삼십이 넘어 지하철 현장에서 앵글 크레인을 운전하여 경제적 시간적 안정을 갖게 되었다.
크레인 기사를 하기 전에 강원도 고성 아가씨와 약혼까지 하고 파한 이력이 있다.
이런 막내처남 해룡이가 광주 송정역 현장에서 일을 하다 만난여인이 박경미다. 해룡이보다 2년 연상이며 해룡이와 동거를 시작하였다. 전남 화순여인인데 광주에서 일을 하다 함바집에서 만난 여인 같다.
나는 2002년 10월초 상월곡동 집 매매할 당시 박경미가 상경을 하여 상월곡동 집에 장모님과 같이 있는 것을 집사람과 같이 처음 보았다. 첫 인상이 섬뜩하여 해룡이가 하고많은 여자 중에 이런 여자를 선택했을가 하고 실망하였다. 처갓집 일에, 좋다고 데려온 여자를 이렇궁 저렇궁 이야기할 일이 아니었다.
박경미는 전 남편과 이혼한 여인으로 두 자식이 있다. 금년에 대학에 갔다고 했으니 십대에 어린아이를 낳았다는 소리다. 모든 게 다 좋다. 둘이만 일생동안 잘 살 으면 되지 무슨 일이 있겠는가. 2003년 10월에 여수로 여행가는 길에 집사람과 같이 광주에 들려 송정역 현장에서 해룡이 얼굴을 보니 무척 반가워하고 마음의 안정도 찾은 것 같았다.
해룡이와 경미가 동거를 시작하고 몇 년이 흘렀는데도 결혼식을 안 올린다. 이런저런 말이 있었지만 작년 봄에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미루지 말고 결혼식을 올려주자고 하였다. 다른 집에서 미온적이면 우리 집이 주동이 되어 펜숀이라도 빌려서 조촐하게 식구끼리 모여 결혼식이나 올려주자고 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경미가 결혼식을 나중에 하자고 한다. 예상하지 않은 답변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나 꼬치꼬치 캐 물을 수도 없고 해룡이는 왜 결혼식을 미루는지 이유도 설명을 안 하니 내막을 알 수가 없다. 둘은 인천 박촌역 앞에 빌라의 반지하를 구입하여 잘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막내처남 해룡이가 대형교통사고가 나서 의식 불명이 되니 사람들의 본심이 나타나고 보험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였다.
처남댁 경미는 의식불명이 된 해룡이를 열심히 잘 돌보았다. 일산병원에서 8시간의 뇌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을 해 있는데 면회는 점심 저녁 한 시간씩 두 차례밖에 안 되는 데도 병원에서 자며 열심히 환자를 돌보았다. 장기적으로 보아야 되니 집에 가서 자고 면회시간에만 오면 된다고 집에 가서 쉬라고 하여도, 집에 가서 할일도 없고 남편인데 잘 보살펴야 된다고 하루에 두 시간 면회를 보기 위하여 병원에서 산다. 집사람이나 해명이 부부 해경이등, 식구들도 열심히 면회시간에 맞추어 일산병원을 드나들었지만 경미가 언제나 주역이었다. 여기까지가 처남댁의 상종가다.
삼 개월이 지나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기니 중환자실에서는 간호사가 24시간 환자를 돌보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24시간 환자를 간병해야하는 일이 생겼다. 간병인을 두겠다고 하여 당연히 간병인을 두고 처남댁은 별도로 남편인 환자를 보살펴야 된다고 하였다. 간병인을 데리고 왔는데 도저히 간병하는 타입이 아니라 모두 간병인을 교체하라고 하는데도 처남댁은 고집을 부리고 갈지 않는다. 삼개월동안 의식불명의 환자는 그 뚱뚱한 먹보가 음식을 못 먹어 훌쭉해졌다. 일반병동으로 와서 음식을 잘 먹어야 몸에 힘이 나고 빨리 회복이 될 거다. 형제식구들이 각각 집에서 보양식을 만들어 병원으로 날르는데 이 음식을 간병인이나 경미나 해룡이 한태 열심히 먹이려 들지 않는다.
경미는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병원에서 살더니 일반병동으로 옮겨 진짜 간호를 해야 할 때는 거꾸로 집에 간다. 식구들이 병원에 가서 경미 어디 있느냐고 하면 간병인은 아침에 병원에 왔다 집에 갔다고 거짓말을 한다.
환자는 중환자실에 있을 때 보다 더 영양실조에 걸리는 것 같다. 식구들의 불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식구가 열심히 만들어 오는 보양식을 환자에게 잘 먹이지를 않으니 일차적인 불만이 튀어나왔다. 환자는 음식을 혼자 먹지도 못하며 잘 삼키지도 못하고 죽을 한 그릇 먹는데 한 시간이 걸리니 답답하기도 하다. 남편인 환자에게 왜 식사를 열심히 먹이지 않는지 의심을 하기 시작하였다. 중환자실에서 나와서는 열심히 식사를 하여 몸에 기운을 얻어 빨리 회복해야 하는데 이런 기회를 잃어버리고 몸은 더욱 쇠약하여 지니 다시 회복하는데 는 더욱 시간이 많이 걸릴 수 밖에 없다.
해룡이 봉급통장으로 매월 2백7십만 원씩 입금이 됐는데 잔고는 없다. 같이 입원해 있는 옆 사람에게는 해룡이가 빚이 많아 자기가 여태껏 생활하여 살고 있단다. 월급 타서는 술값으로 나간다고 한다.
해룡이는 현장으로 새벽에 집에서 나가 밤에 들어오고, 술은 먹어도 현장에서 술값을 지불하는데 처남댁이 말하는 게 조리가 맞지 않는다. 해룡이가 여지껏 7년 동안 받은 봉급이 어디로 갔는지 의심의 여지가 남는다. 천오백만원에 반 지하빌라를 구입한 것 외에는 들은 말이 없고, 반 지하빌라를 구입하여 명의도 경미 앞으로 하여주었다. 지금현재 해룡이 앞으로는 땡전 한 푼 없다. 여태껏 받은 봉급은 다 어디에 썼는지 이해가 안 간다.
자동차보험이라도 들어 놓아서, 지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살기위하여 노력이라도 하지 보험이 없었으면 벌써 두 손 놓고 말았을 인생이다. 별도로 운전자 생명보험을 들었는데 해룡이가 사고를 당하면 수혜자가 해룡이가 아니고 경미다. 경미 외에는 누구도 보험금을 타갈수 없단다. 무슨 보험계약을 이렇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 둘이서 계약한 보험일 텐데 어처구니가 없다.
집사람은 논현동에서 해명이댁은 정능에서 해경이는 평촌에서 일산병원까지 그 먼 거리를 열심히 해룡이 보러 다니는데 경미의 행동이 눈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일산병원에서는 퇴원을 하라고 한다. 집사람이 과장에게 부탁하여 환자의 상태가 이러니 더 있다 퇴원해야 되지 않느냐고 애원을 하여 더 입원해 있기로 하였다.
다음날인 3월말일 경미가 느닷없이 해룡이를 일산병원에서 퇴원하여 일산 백병원으로 입원시켰단다. 열심히 빌어 더 있기로 했는데 상의도 없이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겼으니 놀라고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화들짝 놀란 해명이댁과 집사람이 일산으로 쫓아갔다.
여태껏 나는 해명이 댁을 남에게 거슬리는 말을 하지 않고 웃으며 상대방 기분 좋게만 이야기하는 참한 여인으로만 알고 왔는데 여기서 해명이 댁의 다른 면을 분수 있었다. 도저히 나의 상상으로는 해명이댁이 그렇게 행동하였으리라고는 추측도 못했다.
해명이댁이 아랫동서인 경미를 데리고 갔다.
‘내가 웃 동서이니 이제부터는 말을 놓겠다. 너 왜 상의도 없이 병원을 옮겼어?
경미가 ‘커피 뽑아 올까요? 하고 이야기하며 커피를 들자고 하니
‘이 쌍년아 너 왜 수작을 부릴라고 해? 잠자코 내말만 듣고 있어!
여지껏 얌전히만 이야기 하고 하대를 하지도 않던 해명이 댁이 쌍소리로 거세게 나오니 경미가 아연히 대답도 못하고 있다. 경미도 말이라면 한수하는데 돌발적인 일격을 당하고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네가 사랑하는 남편이라며 사랑한다는 남편을 굴며 죽여서 보험금이나 더 받아 처먹으려고 하는 거 아냐?
경미는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병실로 올라오니 집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집사람이 불러다 또 하고 싶은 말을 하였다.
나중에 경미와 해명이 댁이 만났을 때 경미가 그런 쌍말을 했다고 하니 해명이 댁이 ‘내가 언제 그랬어, 증거를 대봐’ 하니 또 한번 경미가 기가 차서 말을 잊지 못한다.
경미는 병실에서 자기 짐을 싸고는 일산병원에서 사실을 확인하고 온다고 일산백병원 병실을 나가서는 끝이다.
다음날부터는 전화도 안받고 남편 보러 병원에도 안 오고 연락도 안하고 서로 기 싸움이 시작 되었다.
자기가 말하는 사랑하는 남편을 병원에 두고 간병할 생각은 안하고 연락 두절하여 나타나지 않으니, 남편을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소리다. 큰 동서에게 욕을 먹었다 하더라도 남편을 병원에 놓고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보험회사 직원이 요즈음은 남편을 병원에 두고 사라지는 여인이 부지기수란다.
보험금 몇 억이 나왔으니 자식 생각하여 같이 살라고 하여도 자기인생 자기가 산다고 보험금 포기하고 이혼하는 여인네가 있는가 하면, 보험금을 타고 나서 남편을 버리고 돈만 챙겨 도주하는 여인네도 많다고 하니 일부종사나 조강지처란 말은 사라지는 단어 같다.
처남댁 박경미가 사라지고 나니 온 집안 식구가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해룡이 주소지를 박촌동에서 형 집인 정능으로 옮기고 주민등록증을 갱신하고, 은행통장을 동결하고 보험회사를 방문하여 조회하는데 꼭 본인이 있어야 된다고 하여 해룡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확인시켜주러 다녔다.
변호사를 선임하니 해룡이를 금치산자로 만들기 위하여 대리인으로 형인 해명이를 선임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될 일을 경미의 행동 때문에 변호사비까지 들게 되었으니 분통터지는 일이다. 경미가 보험회사와 합의하여 보험금을 혼자 타가지고 줄행랑을 치는 일이 생긴다면 저 중환자를 누가 보며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망막할 뿐이다.
해룡이 주소를 옮기자마자 박촌동에서 경미가 해룡이 인감증명서를 발급하였다는 통지가 오고 백지 위임장 여러 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와 보험금을 타려고 행동하고 있다고 누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장애증명서를 첨부해야 하는데 발급을 정지시켜 놓았으니 자동차 보험금 타는 일은 정지가 되었을 것이다. 운전자보험도 제대로 타갔는지 모르겠다. 경미가 사라진지 2개월 반이나 지났는데 가해자나 해룡이 친구를 동원하여 해룡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경미가 알아 내려고 하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되지 않아 경미가 조바심을 하고 있는 것이 여실히 나타난다.
우리나라 병원법이 어떻게 됐는지 이런 재활 환자를 한 병원에서 1개월 이상 있지 못하게 하여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기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고 병원에서는 서로 안 받으려고 애쓰니 입원하려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환자인 해룡이는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똥오줌도 못 가리니 언제 나을지도 모르고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도망간 처남댁이 오히려 현명한지도 모르겠다. 내 추측엔 보험금에 미련이 있어 처남댁이 틀림없이 해룡이와 접촉할 것으로 예상한다.
보험회사라는 게 어떤 곳인가? 보험을 들라고 할 때는 별의 별 소리를 다해도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가 발생하여 보험금을 타려고 하면 이핑게 저핑게 대며 상대방을 녹초 시키는 게 보험회사다. 더구나 큰 교통사고로 보험금이 나갈 때는 이런 서류를 해 와라 저런 서류가 필요하다며 자료제출을 요구하는데 보험금을 놓고 형제간이나 친척간 분쟁이 있다는 눈치만 채도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오라고 하며, 갖이고 오기 힘든 서류만 요구하여 계약자를 피말리게 하는 곳이 보험회사다. 어떻하면 보험금을 적게 주던지 늦게 주려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며, 계약자 집안의 분란이 일어났다면 제일먼저 알아차리고 갖은 조건을 내세우는 게 보험회사다. 처남댁은 환자를 놓고 도망갔다는 사실을 보험회사가 아는데 보험회사에서 호락호락 처남댁이 달라는 대로 보험금을 줄리 만무하다.
그러나 저러나 이런 일을 어찌한다?! 환자는 똥오줌 못 가리고 걷지도 못하지, 정신도 없어 어리버리하지, 동거녀인지 여편네인지는 도망갔으니, 이런 인생을 어찌해야 할지 가늠이 안 선다. 친척 형제들이 돌봐준다고 하여도 하루 이틀이지 평생을 쫓아 다닐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나마 보험금이 나온다니 이 상태로 버팅기고 있는데, 젊은 나이에 식물인간이 되어가는 처남이 불쌍하기만 하다.
(2) 처남의 꿍심
큰 처남 해명이 건이다.
처남이 둘 있는데 작은처남은 병원에 반병신으로 누워 잇고 큰처남은 너머 약삭빨라서 문제다. 큰 처남 해명이가 학창시절에는 학교도 제대로 안 다녀 집안 식구들의 근심거리였다. 어른이 되서 40줄에는 동생인 해경이 집을 담보로 하여 6천을 빌려가고는 갚지 않아 남매간에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싸움질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해경이 남편이고, 나에게는 동서인 노서방하고 처남인 해명이 하고는 이 문제로 철천지원수같이 말도 안했는데, 이 모든 문제가 자세히 돌이켜 보면 처남 때문이다.
이 때에 우리 집은 집사람이 처제인 해경이 편을 든다고 처남은 우리가 해경 이와 한 통속이라고 나의 전화도 받지를 않았다. 나는 중간에 광희를 끼어 처남과 셋이서 술 한 잔 하며 처가 집안의 화해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였으나 처남이 전화를 안받는 대엔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아 몇 년을 지나게 되었다. 장모님이 미국에서 돌아가시는 시점에 처갓집 식구가 다 모여 화해의 길이 터졌다.
장모님이 처남 빚을 갚아 주었지만 그 돈은 결국 우리 집에서 나간 것이다. 해명이 집에 대한 근저당도 해경이 남편인 노서방이 풀어 주었지만, 처남인 해명이의 미안하다는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상태다. 돈을 다 받았으면 되었지 무슨 잔말이 많으냐는 철면피한 행위다.
천주교 발상지인 천진암을 확장하기 위하여 천진암 근처의 마을을 아래쪽으로 옮기는 공사를 하던 건설사가 부도를 내어 내가 손해를 보던 때이다. 해명이는 젊은 시절 놀 때다.
내가 광주 우산리 16채의 신축가옥 주채권자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처남인 해명이와 장족카인 혁성이를 우산리로 해결하여 오라고 보냈더니 이것이 구설수에 올랐다. 모든 문제는 내가 해명이 한태 지시하고 보고를 들었는데, 처갓집에서는 반대로 내가 혁성이에게 모든 문제를 맡기고 해명이는 허깨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늦게야 이런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고 무슨 이유로 해명이가 이런 이야기를 흘렸는지 알 수가 없다. 자기는 처남이고 혁성이는 친 조카이니 처갓집에서 들으면 당연히 그렇다고 볼 수 있는 일이다. 당시에 충분한 보수는 주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조카사위 박 서방에게 뒤늦게 받은 2백으로 해명이와 혁성이에게 백만 원씩 준 적이 있다.
이 때가 나의 일생동안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노치는 치명적인 손해를 볼 때다.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하자.
해명이가 여의도에 나가며 불법 미국 비자를 건드리는 시절이다. 해명이가 사무실에서 어음을 받았다고 할인해 달라고 하여 해명 이에게 천만 원짜리 어음을 할인해 주었는데 부도가 나서 한 푼도 못 받았다. 당연히 해명이가 나에게 할인해준 돈을 돌려주어야 되는 일이다.
내 돈만 날아갔는데 처갓집에서는 내가 돈을 떼어먹고 해명이에게 돈을 안준다는 것이다. 내가 돈을 받아야 되는데 주어야 된다고 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일은 해명이 외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일이다.
나는 처갓집에 설명을 하러 끌려가야만 했다. 처갓집 식구가 다 모인 자리에서 당시의 어음과 법원의 소장까지 가지고 가서 해명을 하였다. 내가 입으로만 변명을 할줄 알았는데 증빙서류를 가지고 가서 구체적으로 해명을 하니 처남인 해명이는 한마디도 못했다. 왜 해명이가 이런 일을 꾸며야 되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긴다. 해명이 말에 집사람도 동의했던 모양인데 생각할수록 더욱 부화가 끌어 오른다. 나의 해명이 다 끝나고 처제인 해경이가 ‘오빠가 받을게 아니라 오빠가 형부에게 돈을 주어야 되는 거네’ 하였다. 해명이는 어떻게 이런 거꾸로 된 일을 서슴없이 꾸며놓고 온 집안 식구가 모이게 하여 내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었으면 궁지에 몰려 처갓집 식구가 다 모인 자리에서 톡톡히 망신을 당할 번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명이는 나에게 돈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이번에 처남 때문에 처갓집이 또 분란을 맞이했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어리벙벙한 막내처남 해룡이 보험금 문제에서 발단하였다.
해룡이 교통사고가 나고는 처갓집 식구들이 한 통속이 되어 해룡이 문제에 협조가 잘되고 명절이나 제사에도 다 참예하였다. 장모님 돌아가신 후부터 언제 식구들이 분란이 있었느냐는 듯 옛날일은 다 잊어버리고 분위기는 화기롭게 변했다.
처남댁이 해룡이 처 몰아내는데 큰 몫을 하고 해룡이의 근원적인 보험금을 방어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공로자다.
보험은 생명보험 자동차 보험 운전자 보험 등 여러 가지가 걸려있다. 생명보험은 해룡이 댁 차지로 보고, 제일 비중이 큰 자동차 보험은 해룡이의 일생동안의 생활비로 보고, 예상치도 않은 운전자 보험에서 문제가 시작 되었다.
해룡이 사고가 난 후에서부터 지금까지 해룡이 일에 적극적으로 도와서 해명이 부부와 해경이 처제 집사람이 혼연 일체가 되어 병간호에서부터 보험사에 관련된 것 까지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그래도 장자라 해명이를 가족 대표로 선임까지 하였다. 처남인 해명이는 눈치가 빠르고 순간적인 언변이 뛰어나 보험사와 상대하기엔 적격으로 보았다. 집안에서는 해룡이의 모든 행정문제를 해명이에게 맡겼다.
해명이가 우리를 만날 때마다 운전자 보험을 4천인데 6천으로 올릴 수 있으며 보험사 직원과 식사도 하여야 된다면 연막을 치기 시작 하였다. 보험 감정사에게 술값도 4백이나 들었고 평가액을 2천 올리는데 천만 원을 주었다는 헛소리 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보험금 6천5백을 인수하여 지금 4천 7백 남았단다. 깜작 놀라 4천7백 남은 통장이라도 내어 놓으라고 하니 자기 몫인 3분의 일은 못주겠단다.
처제가 ‘그 돈은 오빠 것이 아니고 우리 것도 아니고 해룡이 것이야’ 하니, 자기는 형의 몫을 하겠단다. 큰 동서인 형진이 아빠가 처남한테 3천이라도 받으면 잘된 일이니 그나마도 없어지기 전에 빨리 받아 오란다. 해명이의 수법을 익히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비밀 접선하듯 지하철역에서 집사람과 처제가 해명이 댁한테 통장을 받았는데 다행히 4천 7백이 살아 있었다. 해명이 댁은 병원에 간호하러 다니며 그렇게 식구들과 친하게 대화를 하더니 지하철역에서 말 한마디 없이 통장만 주고 억울하다는 듯 사라졌다고 한다.
해룡이 가해자인 덤프트럭 운전기사가 형사처벌 면한다고 합의하자고 2천을 제시하니 6천은 받아야 된다고 해명이가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명이가 보험을 타려면 합의금을 받으면 보험금을 못 탄다고 그냥 합의해 주었단다. 피해자 합의금과 보험금은 아무 연관성이 없는데 합의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데, 합의금은 꿀 먹은 벙어리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생은 아랑곳 하지 않고 동생의 피해를 이용하여 자기 잇속을 채우려는 해명이의 행동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패륜아의 짓이다.
지하철역에서 통장을 주고난 후부터는 처남댁 부부는 해룡이 병실에 근처에도 오지 않는다.
뻔질나게 하던 전화도 안하고, 가족대표도 안하겠다며 서류도 넘겨주지 않고 메일로 통보한다.
자의건 타의건 집사람이 해룡이의 법정 대리인이 되어 일생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해룡이 입원한 병원에는 집사람과 처제인 해경이 둘이만 열심히 쫓아다닌다. 장자인 해명이 집과는 서로 전화도 없이 형제간에 남남처럼 냉랭하게 집 담보로 남매간 싸우던 때로 돌아갔다.
교통사고가 나고 해룡이댁 박경미 때문에 급기야 변호사를 선임하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해명이의 등살에 재산관리 변호사를 또 선임하여 변호사 비용을 또 지불하는 일이 겹쳐 눈뜨고 변호사 비용만 나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4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처형이 국립의료원에서 사망하였다. 몇 년간 돈 한 푼 없는 유성이 아빠가 뒷바라지 하는 것을 보면 감히 범인이 하지 못할 만큼 잘 하여 그 실력은 인정할 만 하다.
처형 장례식에 해명이가 접수를 보며 뒤처리를 열심히 잘하여 칭찬할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유성이 아빠가 수고했다고 해명이에게 백만 원을 주었단다. 집안 식구 장례식을 보아 주는데 수고비를 주었다는 말도 처음 듣거니와 전에 큰동서 부모 때도 일을 보아 수고비를 백만 원씩 해명이가 받았다는데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돈을 주는 사람이나 자기 누이 장례식을 치르면서 덜컥 매형한테 받는 사람이나 일반 상식으로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처형 장례식에서 부조금 봉투가 빈다는 것이다. 접수를 본 해명이는 펄쩍 뛰어 현재 미궁으로 끝났다. 형진이 아빠는 이것으로 끝이고 참자고 한다. 처형 장례식 때에 여러 사람 고생했다고 형진이 아빠가 강남에서 저녁식사 대접 중에 모든 말들이 오고 갔다. 이날을 분기점으로 해명이 와는 결별 상태다. 해경이 남편 노서방은 치를 떤다.
창피한 처남의 일면이다. 똑똑함을 잘 쓰면 충신이고 잘못 쓰면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8. 집사람 강의
집사람이 강의를 나간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요양보호사 강의인데 수강생은 한 달 동안 강의를 받으면 정부에서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시험도 안보고 주는 것이다. 노령인구가 급등하여 정부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시책이다. 수강생은 30명으로 주로 간병인이고 중년이후의 여인들이다. 60만원의 수강료를 내고 온 간병인들은 요양소를 내어 노인들을 간병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오는 모양이다.
우후죽순같이 생겨난 요양보호사 학원은 지금은 정원도 못 채우는 형편인데 집사람이 나가는 학원은 현재까지 만원이란다. 동창회장인 선배가 낸 학원은 입소문으로 집사람 강의가 명 강의라고 이름이 나서 계속 몰리는 모양이다.
임상의학에 대해서는 집사람의 실무경험이 풍부하고 대학 강의를 해본 경험이 있어 자유자재인 모양이다. 인생경험에, 수강생의 눈높이에 맞추고, 살아가는 일상생활의 모형을 들어가며, 강의를 하면 오후시간이라도 조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다.
9. 건강검진
나는 큰 병원에서 세밀한 건강검진은 한번도 받아 본적이 없다. 동네 의원에서 건강 보험에서 나오는 검진표로 기본적인 검사를 받는 것으로 끝였다.
연말에 폭탄주로 위에 통증이 잠잘 때에 거북할 정도로 온다. 안되겠다 싶어 건강검진표를 들고 제일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는 미래병원을 찾아갔다.
키가 군대갈 때 164Cm이었는데 160Cm로 4Cm나 줄어들었다. 몸무게는 3Kg이 늘어 63Kg, 시력은 1.2와 1.5였는데 0.7과 0.8로 떨어졌다. 위 내시경을 보고 염증이 있다고 약을 처방해 준다. 보험 외에 일부 부담을 하여 위암과 장암을 보았다. 모든 판정이 괜찮다고 한다.
집사람도 빨리 가서 유방검사까지 다 해보라고 하였다. 집사람도 괜찮다고 한다. 판정표가 온 것을 보니 두 사람 다 죽을병에 걸려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인후에 혹이 있으니 이비인후과에 가보라고 하여 학동 네거리 김이비인후과에 갔다.
이명이 있다니 귀도 보고, 아르레기 검사도 하고, 코를 CT촬영도 하였다. 밤에 잘 때 입이 마르고 코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샘구멍 6개가 막혔고 코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해야 한단다. 며칠동안 이비인후과에 다니며 보험인데도 쏠쏠히 검사비용이 나갔는데 코 수술비가 2백이라니 제법 비싸다. 수술일자를 잡으려다가 수술비를 구체적으로 의사에게 물어보려고 연기하였다. 수술을 안 해서 살아가는데 불편하긴 하여도 이 나이에 참으며 살아도 된다.
10. 모임참석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친구들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는 스타일이다.
젊었을 때부터 각종 모임에 자주 얼굴을 들이 밀었다.
지금 나이가 들어도 나가던 모임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젊은 지성들이 북적거리는 MBA나 개성 있게 떠드는 군 동기회나 주로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대학 동창이나 격의 없는 고등학교 동창회나 마음 놓고 반말하는 초등학교 모임까지 잘도 나간다.
집사람은 나하고 약간 다르다. 싫은 사람이 있으면 잘 가려고 안한다. 부부동반이라도 혼자 가란다. 보이지 않게 사람 가리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성질도 누구 트려야 되는데 집사람은 성질이 아직도 다 죽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보다는 각종 클럽활동에 더 열심이었다. 보이스카웃 JRC등 크럽 활동한다고 뛰어 다니다 보면 자연히 공부를 등한히 하게 된다.
제대하고 봉급쟁이 하면서는 생활이 궁핍하고 시간에 쪼들리고 서울서 판교까지 시외버스로 회사를 출퇴근하다 보니 심신이 피곤하여 녹초가 되었다. 경영대학원 등록을 한 학기는 더욱 시간이 없었다. 지금같이 자가용이나 전철이 있었다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판교 집에서 강서나 영등포 회사까지 또 안암동 고대까지 서울 끝에서 끝까지 대 삼각형으로 만원 버스를 타면 하루를 버스에서 시간을 다 뺐기고 코에서 코피가 날때도 있다.
이렇게 피곤할때도 초등학교 서울팀을 결성하였으니 모임에는 주특기가 있는 모양이다. 모든 모임이 초창기에는 주모자가 무척 힘든 것이다.
고등학교 동창을 보면 젊은 시절에는 지지궁상으로 모임이 초라하였다. 간신히 체면 유지할 정도가 되니 자식들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동창회 나오지도 않던 친구들이 한번에 몰려 성황을 이루더니 결혼을 시키고는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다시 정년퇴직을 하고 환갑이 지나니 집안에서 할일이 없어서 그런지 잘 모인다. 이제는 어데 가자고 하면 버스 한차씩 모이니 인력 동원에는 옛날같이 고생을 안 해도 된다.
11. 인터넷 바둑 중독.
바둑판을 놓고 얼굴을 맞대고 둘이서 두려면 꼭 상대가 있어야 된다. 상대가 한정되어 있어 인원 폭이 넓지 않다.
인터넷 바둑은 인원한정에 무제한이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고 인원도 전국 각지의 인터넷 연결만 되면 바둑 상대가 가능하다. 자기의 급수대로 얼마든지 둘 수가 있어 바둑에 재미를 붙이면 밤새는 줄 모른다. 바둑을 두며 전화를 받으면 정신이 딴 곳에 있어 전화를 끊고 무슨 말을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내가 이 인터넷 바둑에 중독 상태다. 이제는 조금씩 바둑을 줄여 책을 잡고 독서량을 증가 해야겠다. 그렇게 하면 집사람의 짜증도 안 듣고 좋으련만 고집으로 바둑에 매달린다.
바둑 장기 마작 그리고 우리 집
바둑
바둑알 ; 단추와 십전동전
바둑판 ; 통 마루판
돈벼락 ; 18급
인터넷 바둑 ; 중독
우리나라 바둑왕 ; 조남철
장기 ; 아버지의 취미, 척사대회 송아지
장기알 ; 명품 음각, 체증
장기판 ; 철선
우리집 ; 2층 곡간 정자
화투 ; 동네타짜
마작 ; 마짱족보
내가 요즈음 인터넷 바둑에 빠져있어 거의 중독 상태다.
우리 집 잡기를 살펴보면 아버지의 장기, 작은형의 화투와 마작, 그리고 나의 바둑이 일반적인 상태를 벗어난 중독 상태다. 그래서 아버지 형 나의 3인에 대한 취미를 보며 우리 집을 살펴본다.
바둑
우리 집은 판교 신도시 하산운리 102번지로 아랫 뫼루니 윗말이다. 선산이 있는 청계산 운중동의 아랫마을이다. 서울서 학교 다니다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 친구들과 놀기 위하여 장기에서 바둑으로 발전하였다.
바둑판 ;
바둑판이 없어 옛날 우리 집 고옥에서 뜯어낸 통나무 마루판을 2개를 이어서 바둑판을 만드니 두껍고 튼튼하고 훌륭하였다. 친구들은 우리 집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마루판으로 바둑판을 만드는 것을 보고, 괜찮으냐. 야단맞지 않느냐고 근심을 하였는데 나는 담담하게 바둑판을 만들었다. 마루판은 6.25때 불에 탄 안채의 두칸 마루에서 뜯어낸 사각의 통판마루로 옛날 마루라 두껍고 무겁다. 6.25때 사랑채에 불이 붙고 동리에는 모두 피난을 가고 남은 사람이 별로 없어 불을 끄지 못하고 사랑채에서 안채로 번지는데 피난을 못간 어머니가 안채의 마루장을 뜯어 낸 것으로 새로 집을 크게 지으면 사용하려고 지금껏 보관하고 있던 통판 마루다. 통판 마루를 이어 부쳐 대패질하고 사인펜으로 19로의 줄을 그으니 시골에서 놀기엔 더없이 훌륭한 바둑판이 되었다.
바둑알 ;
흑 백의 바둑알은 360개 만드는 것도 간단하지는 않다. 집의 구석구석을 찾으니 옛날에 바둑돌로 사용하던 조개껍질로 만든 흰 알은 몇 십 개 나왔는데 턱도 없는 숫자다. 궁측통이라 작업복 단추를 한 깡통 모아놓은 것이 나타났다. 청록색이지만 흑색 바둑알로 쓰기엔 안성맞춤이다. 백돌은 일정시에 사용하던 10전짜리 하얀 동전이 수백 개나 나왔다. 지금 환전을 해도 돈이 제법 될 것 같은데 당시엔 못쓰는 돈으로 간주하고 흰 바둑돌로 대체되었다. 왜 이렇게 많은 돈이 집에 사장되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10전짜리 닉켈 은색 동전으로 바둑판에 흰 돌을 놓으니 크기는 되었는데 동전이 바둑판에 붙어 들어낼 때 불편한 점은 있으나 바둑 두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
돈벼락
동네에는 우리또래의 친구들이 유난히 많다. 방학 때 내려가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자주 몰려온다. 우리 집에 오면 장기바둑으로 소일하기에 십상이다.
바둑을 잘 두는 친구는 하나도 없다. 네모반듯하게 하여 하나 잡아먹는 수준이니 기초 18급이고 오목 수준이다. 줄바둑이라도 자주 두니 나름대로 실력의 차이가 나게 되어 있다. 한웅이와 학균이가 대작을 하는데 뭘 잘못했다고 발끈한 성미의 한웅이가 참지를 못하고 흰 돌로 쓰는 동전을 한 움큼 들어 학균이에게 던진다. 바둑판은 흐트러지고 개판이 되었다. 내가 한마디 했다. ‘돈 벼락을 맞았네. 다시 두라고 했지만 한웅이 성미에 ‘안 둬’ 하고 만다.
군대 중대장 할 때다. 간신히 길 갈줄 아는 바둑으로 바둑을 두니 항상 하수가 되어, 누가 5급을 둔다하면 아휴 하고 3급하면 아예 나와는 상관없는 먼 세계의 사람같이 생각하였다. 7급 정도만 되도 잘 두는 바둑으로 통한다.
전역하고 샐러리맨 생활을 시작하니 몇 십년간 바둑과는 거리가 멀었다. 바둑 두는 사람은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등한시 했으니, 바둑에 대한 묘미를 알지 못하고 바둑 두는 사람을 보고 한심하다고만 생각하였다.
시간만 낭비한다고 생각한 바둑을 중장비하며 대지사무실에서 김영훈사장과 하루 종일 바둑상대를 하였다. 몇 날 며칠을 두었으나 둘 다 실력은 늘지를 않고 항상 그 타령이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의 진척이 나가지 않는다. 5급이라고 헛바람 치나 실질적으로 7급 정도의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또닥거리며 깊은 생각 없이 빨리 두는 바둑이라 바둑의 묘미를 느낄 상태는 못 된다.
인터넷 바둑
환갑이 지나 삼원 사무실로 와서는 쉬엄쉬엄 두다가 작년서부터 인터넷 바둑으로 붙어 시간 나는 대로 주야장창 바둑에 매달리니 인터넷바둑에 중독이 걸린 듯 하다. 늙어서 바둑도 안 는다고 하나 원체 많이 두니 약간 향상하여 3급에서 6급까지 오락가락한다. 컴퓨터로 인터넷 바둑은 유니텔 바둑에서 엠 게임으로 옮겨 다니다 지금은 넷마블에서 인수한 네오스톤에 죽자 살자 매달린다.
일생동안 2만판은 두었을 거다. 나의 바둑실력은 조시가 좋을 때는 1급도 올라가나 즉시 2급 3급으로 추락하는 것을 보면, 6급은 최강 5급 최강 4급 강 3급 약 2급 최약으로 보면 현재실력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6급과 2급의 차이는 신중하게 생각을 하고 욕심 없이 두면 2급까지 승급하고 6급은 실력을 믿고 조급히 두면 6급에서도 패하는 확률이 많다. 아직도 수양이 덜 되었다는 징조다. 지금까지 내기 바둑은 한판도 두어보지 않아 큰돈을 놓고 둔다면 내 마음이 얼마나 안정된 상태로 바둑을 둘지 가늠이 안 된다.
집에 가서도 시도 때도 없이 인터넷 바둑에 매달리니 집사람의 짜증이 더해가고 영양가 없이 밤도 새면 몸도 축가고 머리도 띵하다. 친척 애경사에 가서 바둑을 밤새도록 둔다고 집사람이 나를 핀잔하면, 경희 댁은 얘 아빠는 마작을 토요일 날 퇴근하여 컴퓨터 잡으면 토요일 일요일 이틀 밤을 꼬박새우고 월요일 새벽에 그냥 출근한다며 한술 더 뜬다.
바둑 두는 것을 보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하나 유단자 근처에도 못가며 바둑중독 소리를 듣는다면 한심하게 느껴진다. 바둑을 두며 전화를 받던지 다른 일을 하면 건성으로 대답하기가 쉬어 정신집중이 안 돼 자기가 한말이 무엇인지 까먹기가 십상이다.
그래도 동네바둑이긴 하지만 고교동창 바둑대회에 가서 작년과 금년에 2등상 3등상을 타왔으면 급한 체면은 세운편이다.
아들놈은 인터넷 게임에 반 중독 됐으니 아들놈에게 인터넷 게임 스타크래프트나 배워 젊은이들 같이 이제는 게임도 한번 시작해 보려고 한다.
우리나라 바둑왕
우리나라는 해방 후에 불모지나 다름없는 바둑이었으나 일본에서 배워온 조남철 국수가 우리나라 바둑을 일으킨 바둑중흥의 수훈 갑이다. 대를 이어 김인 조훈현 이창호 9단으로 이어져 온다. 지금은 이세돌이 나타나 바둑왕의 바통을 이어가나 요즈음은 10대의 신성들이 대거로 나타나 군웅활거의 시대로 접어들고 우리나라가 세계의 바둑 최강국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세계의 바둑은 한중일 3국으로 대만을 제외한 여타국은 기초수준이다. 바둑의 발생은 중국이라고 하나 일본이 수백 년간 종주국으로 독주해왔다. 일본바둑이 조훈현시대에 슬슬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이창호시대에는 일본을 앞지르기 시작하여 이세돌시대까지 우리가 동양3국의 종주국으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10대의 신성들이 많이 자라고 있지만 중국의 추격이 무섭게 뒤쫓아 오고 있다.
장기
우리 아버님의 장기는 알아준다. 아버님 취미는 장기다. 젊어서나 늙어서 장기로 소일한 시간이 매우 많다. 내가 어릴 때의 일이다. 아버님이 친구와 장기를 두면 사 나흘 밤을 꼬박세우며 장기를 둔다.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상에 야식까지 하며 밤새워 두고 장기가 끝나고 변소에 가실 때에는 비실비실 걷는다.
노인들이라 내기 장기도 지금으로 치면 한판에 천 원 정도도 안 된다. 아버님이 밤새워 장기를 두시는데 어머님이나 자식들 누구도 불만을 말하는 식구가 없다. 아버님이 어떤 일을 하시든 식구들은 다 순응한다. 판돈이 작아 아버님이 내기장기로 따신 돈이 밥 한그릇 값도 안 될 거다. 친구 분은 밥도 해준다고 며느리 잘 두었다고 한다. 이런 아버님이 광주군 대항 장기대회에 낙생면에서 뽑혀 갔다 오시더니 ‘젊은 사람들이 잘둬’ 하시었다. 나는 아버님이 장기에는 1인자라 큰상을 타서 오실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우물 안 개구리인 모양이다.
그래도 아버님은 판교 척사대회에서 송아지를 타 오신 경력이 있다. 온 동네 사람이 1등상 송아지 끌고 판교에서 괭가리 치며 동네까지 와서 동리에서 1등 축하연으로 잔치를 하였는데, 축하연으로 나간 돈이 송아지 값보다 더 들었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송아지에다 꽃으로 장식하고 온 동네 사람이 끌고 오는데 장관이었단다.
장기알 ;
우리 집 장기 알은 명품이다. 초 한 장군이 어른 주먹만 하게 크며 글자도 참 잘 썼고 음각의 글자도 조각을 정밀하게 잘하여 장기짝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장기 알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정 육면체의 장기 알이 이렇게 초 한 왕이 큰 것은 지금까지 어디를 가서라도 본적이 없다. 장졸인 차포마상이 지금 유통되고 있는 장기 알의 초한장군보다도 훨씬 크다. 박달나무로 만들었다는 장기 알이 이렇게 멋있고 크게 참 잘 만들어 지금 봐도 탐이 난다. 한 일세기 전에 만들었을 이 장기 알이 장기를 하도 많이 두어, 길이 들어서 황갈색의 윤택이 난다. 장기 알에 손때가 묻어 가무잡잡하기도 하며 윤이 난다.
이런 장기 알을 금토리 친척이 위에 오래된 체증에 고생을 하는데 오랜 손때가 묻은 장기 알을 삶아먹으면 체증이 떨어진다고 아버님한테 장기 알을 삶아 먹겠다고 빌려달란다. 친척이 병이 낫겠다고 장기 알을 빌려달라는데 야박하게 안 줄 수가 없어 빌려주었더니, 얼마나 솥에서 삶아댔는지 다시 가지고 온 장기 알이 허연빛이 나며 뽀송뽀송하다. 윤기 나는 장기짝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형은 살아있어 이 장기짝으로 장이야 멍이야 하고 또 장기를 둔다.
장기판 ;
장기판은 장기알 같이 명품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장기판의 모양은 사각나무 상자 밑에 다리가 있고 나무상자 안에는 철사 줄을 넣어 장기를 둘 때에 장기짝을 내려치면 철사 줄이 울리는 퉁하는 소리가 나게 만들었다. 양쪽에 장기알 담는 서랍을 두개 만들어 보관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이런 장기판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계속 장기를 두다 서울에 와서 판자로 만든 장기판을 두니 장기 두는 소리가 둔탁하게 송판 두드리는 소리가나니 흥취가 나지 않고 삭막한 감이 든다. 장기 알은 나무로 만들어 나오더니 플라스틱으로 찍어내 장기의 행마는 매한가지이나 장기 두는 흥취와 멋을 느낄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한국콘도 처음 생겼을 때 설악콘도에서 이벤트로 장기대회를 열어 준우승으로 장식용 대형 빗을 상으로 받은 적이 있다.
우리 집
우리 집은 대지 2백평에 뒷밭 3백 평이다. 집은 안채가 ㄱ자 사랑채가 ㄴ자로 전형적인 시골집이고 바깥마당 밑에 곡간 겸 정자로 2층 양철지붕 곡간이 있었다. 이 양철지붕 2층 곡간이 일정시대에 지은 것 같다. 바닥기소는 시멘트로 하였고 1층은 커다란 곡간이 둘이고 안 계단으로 올라가 2층이 있는데 2층은 아버님 정자용이라 커다란 마루방 하나다. 어렸을 때의 경험으로 2층은 여름에 양철지붕이라 무척 더웠다. 양철지붕으로 한 것은 일식집의 영향인 것 같다. 당시에 신식으로 이렇게 2층을 지은 집은 낙생 인근에 우리 집밖에 없다. 집 지을 때 지경을 다라서 기소를 할 시절에 시멘트로 기소를 했다는 것은 여염집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 2층에 장기판이 있고 아버님 친구들의 마실 장소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고는 하나 아버지는 순 농사꾼이 못되고 날라리 농부다. 놀기 좋아하는 아버지는 돌마장에 사물놀이패가 왔다고 비가 오는데 순내개울을 넘어 돌마장으로 구경을 가신분이다. 돌마가 지금 분당이고 순내개울이 탄천, 낙생이 지금의 판교다.
6 .25때 안채 사랑채 모두 불타 없어지고 피란 갔다 와서 사랑채자리에 움막을 짓고 임시거처로 삼았다. 내 초등학교 때 움막지은 사랑채자리에 아랫말 이목수가 사랑채를 먼저 짓고 안채는 여유가 있을 때 멋있게 짓자고 한 것이 지어보지도 못하고 사랑채마저도 2천 년도에 판교신도시 개발에 헐리고 말았다.
화투
화투는 우리 작은형이 동네 타자다. 작은형은 화투나 마짱 트럼프 등 잡기에 능하고, 운동은 권투 축구 배구 등이 선수급이고 주먹으로도 알아준다. 내가 군대에서 전역하고 집에 오니 화투도 기초는 알아야 한다고 육백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엔 고 스톱은 없었고 육백이 한참 인기를 끌 때다. 섰다나 짓고땡에 민화투밖에 모르던 시절에 육백이라는 신종이 등장한 것이다.
삼형제중에 큰형이나 나나 화투는 만져보지 못하는데 작은형은 아예 화투놀이로 지샌다. 그냥 취미나 오락을 넘어 동네 노름꾼으로 변하고 있었다. 집안의 쌀독이나 뒤주에 쌀이 줄었다 하면 영락없는 작은형 짓이다. 노름은 곧잘 해도 잃기도 많이 하는 모양이다. 장가를 가서도 화투를 놓지 않으니 집안 꼴이 잘 될 리가 없다. 작은형은 온실을 한다 개간을 한다 과일 중간도매를 한다 트럭으로 모래장사를 한다하며 주위사람에게 피해만 주고 득 되는 일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마작
마작도 작은형의 주특기다. 큰 매형 먼애 매형도 마작을 할줄 알아 세 명이나 네 명이 할 수 있는 마작에 우리 집에서만도 팀이 짜인다. 전역하고 집에서 쉴 때 작은형이 마작의 일칭 족보를 써주어 나도 족보를 외며 마작을 배웠다. 족하인 경희 봉규도 덩달아 배웠다. 작은형이 주축이 되어 동네 청년들도 마작을 배워 명절 때가 되면 마작 팀을 쫓아 놀러 다녔다. 마작을 하다보면 고 스톱은 재미가 없어 마짱판에 붙게 된다. 마작은 족보가 복잡하여 오래 하다보면 관록과 머리 좋은 친구가 따게 되어있다. 화투는 재미로 많이 하는데 마작을 하는 사람은 거의 돈을 걸고 한다. 쉬지 않고 하면 재산이 축나게 되어있다.
작은형은 놀면서 마작이나 하고 먹고 살겠단다. 그런 상태이니 형수가 좋아할 리가 없다. 마짱하러 오는 친구들한테 아주머니가 싫은 소리를 해도 모두 마이동풍이다. 아주머니도 만성이 되서 한편으로 제켜 논다. 그러던 형 내외도 지금은 저세상 사람이 되었고 자식들은 서로 의좋게 잘들 살고 있다. 이 자식들은 의외로 화투나 마작 등 잡기에 하나도 물들어 있지 않다.
중국에는 마작이 성행하나 우리나라는 마작이 아직까지도 많이 보급 되어있지 않다.
취미생활도 좋지만 도가 넘으면 과하여 해가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