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인다. 비수기라 섬으로 들어가는 배 안은 거의 텅텅 비었다. J는 구석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통을 꾸벅거린다. 나른한 오후 햇살이 J의 몸으로 하얗게 쏟아진다. 전날 무리해서 차를 몬 탓인지 J는 배에 오르자마자 졸기 시작했다.
객실 안에는 J뿐이다. 몇 안 되는 다른 승객들은 모두 바깥으로 나가 사진을 찍거나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입을 벌린 채 구경한다. 끼룩끼룩, 몇 안 되는 갈매기가 사람들이 내미는 과자를 재빨리 낚아채 다시금 날아오른다. 그들은 그 위만 돌고 돈다. 사람들은 또다시 과자를 내민다. 햇살이 닿은 수면은 잘게 부서진 흰빛으로 반짝인다. 출렁임에 따라 그 빛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끼룩끼룩, 갈매기가 운다. J는 마루처럼 판자를 넓게 댄 객실에 몸을 눕힌다. 쪼그리고 앉은 모양 그대로 쓰러진 몸뚱이는 창고에 처박힌 쓸모없는 어떤 것처럼 남루하고 초라하다.
섬과 가까워진다. 잠시 후면, 도착하겠습니다. 낡은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가 맞은편에 선 섬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다. J는 눈을 뜬다. 무겁게 짓누르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간다. 누운 몸이 파도의 출렁임에 따라, 배의 움직임에 따라 출렁, 흔들린다. 객실 옆에선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넘쳐흐르는 햇살과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와 안내방송 모두가 J에게 아득하게 멀다. 노란 장판이 평평하게 펼쳐진 객실이 문득 아무도 없는 사막처럼 느껴진다. 바람에 실려 날아온 서걱한 모래가 닿은 듯 잠에서 막 깨어난 두 눈이 눈물이 흐를 정도로 따갑다. 뿌연 시야 너머로, 창 너머로 보인 하늘에 구름이 흩어진다. 손에 쥐면 다 녹을 듯 부드럽게 서로 몸을 떼어낸다. 바다보다 더 바다 같은 빛깔의 하늘이 또, 아득하게 높다.
계절을 구분할 수 없게 햇살은 뜨겁다. J는 언덕을 오르며 콧등에 고인 땀방울을 훔친다. 길 한 쪽으로 듬성듬성 심어진 소나무들은 수년간 해풍을 맞아온 탓인지 서걱거리며 이파리를 흔든다. J는 그 반대편으로 펼쳐진 바다를 본다. 칙칙한 바다의 색은 언덕에 오르기 전, 버리듯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아둔 자전거의 색과 비슷하다. 선착장 근처에서 빌린 낡은 자전거는 결국 섬을 반 정도도 돌지 못하고 펴져버렸다. 눌린 자전거 바퀴를 보며 J는 길가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몸도 자전거처럼 퍼져가는 걸 J는 느꼈다. 언덕은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는 듯 계속 이어져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저기에도 바다가 있다. 구름이, 느리게 헤엄치는 물고기 같은 구름이 흘러간다. 또 흩어진다.
낡아빠진 J의 마음도 저렇게 흩어졌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퍼지고 퍼져버린 몸과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 길바닥에 누워버린 자전거를 바라보며 J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뜨거운 햇살은 겨드랑이며 엉덩이며 머리칼 사이사이에까지 땀을 만들어냈다. 콘크리트바닥은 지글지글 끓었고 자전거는 그 위에서 점점 녹아내리는 듯 보였다. 흘러내린다. 흩어진다. 모든 것이 그렇게 흩어졌고 흩어진다. 저 멀리서 갈매기가 끼룩끼룩.
J는 꼭대기에 선다. 사진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건물이 등대처럼 서있다. 둥글고 하얀 모양새가 초록의 삐죽한 소나무 무리 옆에서 더 돋보인다. 건물 뒤로 펼쳐진 바다와 아득하게 멀어진 육지가 언뜻 보인다. 때를 맞춰 다시 돌아올 배는 이미 육지로 돌아갔을 것이다. 돌아가야 할 저 먼 곳이 그래서 더 멀게 느껴진다. 배는 돌아올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뜨거움을 품은 바람이 J를 훑는다. 몸이 흔들린다. 따라 초록의 이파리도 흔들린다.
손에 들린 거라곤 동정하듯 K가 던져준 누런 봉투가 전부였다. 그 안에는 만 원권 몇 장이 숨죽이고 있었다. 이제 아무도 없구나, 라고 생각했을 때 J는 술병으로 어질러진 방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제멋대로 나뒹구는 초록의 술병들만큼이나 세상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남김없이 J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았다. J는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아무도 원망하고 싶지 않다. 배신한 K와 떠나간 아내와 한 때 내 사람들이라 생각했던 그 모든 이들. 원망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구름처럼 순식간에 흩어진 시간들이었다. 벼랑 끝에 서있는 듯 시간마다 초조하고 오금이 저리던 한 세월이 지났다. 몸을 일으킨 J는 렌터카를 빌렸다. 뜨문뜨문 가로등이 켜진 한밤의 국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처럼 아득하게 이어졌다. J는 빨아 당기는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건물에서는 조개며 이런저런 것들로 만든 공예품이나 박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내부는 외부와 달리 갈색계열의 색으로 꾸며져 아늑하다. 오래전에 버려진 건물을 자신이 뜯고 고치고 칠했다며 한쪽에서 마련된 카페에서 커피를 내리던 주인장이 말했다. 쌉쌀한 커피향이 공간을 채워나간다. J는 어느 그림 앞에 선다. 제 딸이 그린 겁니다. 딸은 육지에서 미대를 다닌다고, 주인장은 뿌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잇는다.
그림 속에서 초록의 사과들이 뒹군다. 거칠게 칠해진 사과의 표면에 건물로 들어오는 햇살을 따라 잘게 부서진 그늘이 진다. 저것들은 또 어떤 무의미로 뒹구는 걸까. 작은 지하방을 채웠던 병들이 떠오른다. 초록색 병들은 구르고 굴러 저들끼리 몸을 부딪고, 거친 마찰음은 J의 마른 귀를 문질러댔다. 상처가 난 듯 아렸다.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상처는 섬처럼 어느 망망대해에 의미 없이 대뜸 솟아났다.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검은 바닷물이 출렁였다. 파도가 거칠게 일었다. 곧 섬을 내리쳐버릴 듯 크고 거친 것이었다.
J는 그림 옆에 난 창가에 선다. 열린 창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절벽 아래는 검은 바윗덩어리들로 자잘하다. 파도가 그것들과 맞닿아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부스스 포말이 부서진다. 절벽에 선 건물과 다를 바 없는 J의 삶에는 건물이 지닌 것만큼의 따스함도 흰빛도 없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서 흩어지는 구름조차 찾을 수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싶다. 흩어지는 마음을 그대로 둬야지. 어둠이 찾아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더라도 그대로 둬야지. J는 다시 아래를 바라본다. 아득하게 멀다. 커피향이 짙다. 창을 닫는다. 두고 온 자전거가 떠오른다. 걸음을 옮긴다. 문을 여니 다가오던 어둠이 발치를 서성인다. 언덕을 내려간다. 솔잎들이 들썩인다. 먼지를 털 듯 부드러운 소리가 J의 발걸음을 좇는다. 서두르지 않고 그들과 함께 걷는다. 빨아 당기는 언덕 아래의 어둠으로. 이곳으로 오기 위한 그 길에서처럼 끝을 모르는 어둠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