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10길
2012년 3월 2일 길람
제주 올레 길을 다녀와서 한 열흘 올레길이 맛있게 익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봄, 초록 바닷길의 선물 상자를 천천히 열어봅니다. 찌푸린 회색 하늘을 밀고 노랗게 피어오른 유채꽃과 하얀 모래언덕, 그 언덕배기에서 맴돌다가 흩어지는 샛바람까지 소복이 담겨있습니다.
화순에서 모슬포까지 올레10길은 17Km입니다. 화순 해수욕장에서 바닷길로 삼방산 밑을 돌아서 사계 모래언덕을 넘는 길에는 이월 영동 바람이 불고, 붉은 깃발 끝에 만선의 꿈이 펄럭입니다. 나지막이 엎드린 잡목들은 바람을 피해 한쪽으로만 기울어지고 산을 향해 육지로, 육지로 손을 뻗습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사이로 천 개가 넘는 태양이 하늘을 하나씩 열고 있습니다. 그 하늘 중 하나는 나의 하늘이고 함께 걷기를 선택한 고등학교에 입학할 조카의 하늘입니다. 천 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하늘로 비상하는 바닷길에서 어린 조카는 살아갈 날들의 신기루를 보았습니다. 기다리는 날들의 아스라한 그림자가 길게 따라오는 한낮 바다는 고등학교 3년은 펄펄 끓어오르는 도가니 속에서 녹여나는 쇳물과 같다고 넌지시 일러줍니다. 어떤 모양으로 재생산될 것인지 모르는 체, 묵묵히 무정형의 시간을 용광로 속에 던져 넣고 침묵 속에서 수행하는 시간이라 합니다. 작은 어깨 위에 놓인 무거운 가방끈이 안타깝고 힘겹게 버티는 두 다리는 가냘파서 위태롭기만 합니다. 사계 사구의 곳곳에는 모래가 밀물과 바람에 휩쓸려가지 못하도록 나무로 결구(結構)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조카의 3년, 그 여정이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튼튼한 결구(結構)를 만들어 주려는 것이 여행에 함께한 목적입니다. 처음으로 걷는 올레길, 목이 마르고 바람은 차갑고 햇살이 성가셔도 비취색 바다 빛에 취하고 두런두런 함께 걸어가는 새로운 이웃들과 만나서 “안녕하세요.” “전 제주에 처음 왔어요.” “어디서 오셨나요?” 부담 없이 인사를 합니다. 아직은 어린 소녀에 불과 하지만, 연금술의 3년 세월을 보내고 나면 하나의 형상으로 완전 탈바꿈할 미래를 미리 가슴으로 담아보는 시간입니다.
다리가 아파서 못 걷을 것 같다는 불평 한마디 없이 송악산을 돌아서 가파도를 옆구리에 펼쳐두고 걷다 보면 모슬포 항이 튼튼하고 하얀 모스크의 성벽처럼 바라보입니다. 그곳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의 땅이 기다릴 것 같습니다. 오늘치의 늦은 점심을 해결할 곳입니다. 모슬포 밀면 집의 보말 칼국수가 오늘의 메뉴입니다. 보말은 제주말로 바다고동입니다. 까만 바다고동이 둥둥 떠는 따끈한 칼국수 한 그릇을 위해 무려 6시간을 걸었습니다. 오금이 당기고 발이 결리는 오후 3시, 두 다리를 쭉 뻗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정작 삶에서 필요한 것은 잠시의 휴식과 따끈따끈한 칼국수 한 그릇입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싶다는 무한대의 욕망 앞에서 늘 꼴찌가 되는 육지에서의 삶과는 전혀 다른 꿈을 준 곳이 제주입니다. 제주에 오면 스멀스멀 제 맘대로 성장하던 욕심이 줄어듭니다. 왼 종일 걸어서 도착한 곳의 한 그릇의 식사에 삶의 무게를 훌쩍 던져버립니다. 삶의 무게란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정해가는 것이란 걸 배우게 됩니다.
늦은 시간 탓인지 식당 안은 조용합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잘 데워진 식당 안은 고향 집 안방에라도 앉은 듯이 포근합니다. 커다란 그릇에 담겨온 칼국수의 양을 보고 조카는 입이 ‘쩍’ 벌어지고 아침부터 거르고 걸었던 긴 시간을 지워갑니다. 감사가 넘치는 시간입니다.
첫날의 휴식처는 산방산 탄산 온천 게스트 하우스(=영빈관, =방문자 숙소)입니다. 온천욕이 공짜라는 특혜가 붙는 도미 토리를 숙소로 정해놓고 많은 여행객과 한 공간에서 잠을 자는 일을 시도해 보기로 합니다. 도착과 동시에 딱딱한 나무 침대에 짐을 풀고 그 자리에서 잠이라는 블랙홀 속으로 푹 빠져 버립니다. 6시 50분 첫 비행기를 타고 출발하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고 6시간을 걸어서 움직인 덕분에 오후 4시, 도미 토리에 안착하는 것까지가 오늘의 한계입니다.
미끌미끌한 유황온천과 달리 탄산온천은 독특합니다. 쓴 물맛이 특이할 뿐 아니라, 작은 기포들이 온몸을 감싸고 톡톡 터지는 느낌도 각별합니다. 하루의 피로가 물속에서 해초처럼 흐느적거리는 동안 작은 거품들을 타고 바깥으로 탈출을 시도합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책을 세 권이나 뽑아들고 나무침대에 다리를 걸치고 앉았습니다. 올레 10길의 흔적이 짙었나 봅니다. 이 층으로 쌓아올린 좁은 나무상자 안에는 움직임이 없습니다. 책장을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스르르’ 수마가 밀물져 제주의 밤을 어둠과 침묵 속으로 ‘풍덩’ 던져 놓습니다.
길을 걷는 일은 단순하고 손쉬운 활동입니다. 구질구질 잡다한 사실들과 불쾌한 가스로 가득 찬 뱃속을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 아래 까들까들 말리는 일입니다. 산처럼 무겁고 체증같이 답답한 인간사도 지나가는 갈매기의 인사처럼 신선한 일상이 되게 합니다. 비취 빛 바다와 하늘이 수평선에 줄 하나를 길게 긋고 서로 비비고 살듯이 사실과 사실들이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각진 어깨를 비비면서 둥글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지금 내가 선 소박한 자리, 욕심이 비켜난 자리가 행복인 줄 아는 것은 올레가 준 선물입니다.
샛바람의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