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닷타 장자는 <증일아함경> 청신사품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큰 시주의 주인공’이다. 기원정사를 보시한 수닷타 장자는 교단의 성장은 물론 경전의 성립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부처님과 교단에 대한 장자의 신심은 무량하였다. 그는 깨달음을 향한 흐름의 첫 단계인 수다원과를 성취하였으나 주변 사람을 포교할 능력은 부족했던 것 같다. 가족을 포교하는데 애를 먹었고 외도를 믿어왔던 500명의 친구들을 삼보에 인도했으나 이들이 믿음을 등지자 설득에 실패했다. 반면 시주는 물론 법에 대한 이해와 이를 설명하는 능력까지 두루 빼어나 대중은 물론 스님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 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찟따 장자이다.
사원을 찾는 대중들에게 직접 법을 설하기도 하고 스님들과 깊이 토론하고 궁금한 점이 있을 때면 이해가 될 때까지 질문 외도와의 논쟁에서 승리 외도수행자의 길 걸어온 친구를 삼보로 인도하고 스님들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아 준 일화도… 삽화 견동한 부처님의 칭찬을 받은 장자 범라 스님의 책 <아난존자의 일기> 중 ‘모범을 보이는 신남 신녀’ 편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를 칭찬해 주신다. 비구 스님 중에서 칭찬받은 이는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이고, 비구니 스님 중에서 칭찬받은 이는 케마 왕비와 연화색이다. 청신녀 중에서 칭찬을 받은 여인은 곱추 쿠줏따라와 난다마따이고 청신사 중에서 칭찬을 받은 이는 찟따 장자와 하따까 왕자이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신심이 갖추어진 청신사가 좋은 발원을 할 때는 ‘찟따 장자와 알라위 나라의 하따까 왕자처럼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발원해야한다. 여래의 제자 청신사 중에 찟따 장자와 알라위 나라의 하따까 왕자가 모범이 되는 거사들이다.” 그렇다면 찟따 장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역 경전에서 ‘질다’ 혹은 ‘질다라’라고 불리는 그는 마가다 왕국에서 손꼽히는 거부 중 한 명으로 집안 대대로 ‘맛치까산따’라는 큰 마을에서 살아왔다. 그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재산 중에는 농경지도 있고, 숲도 있었으며 아버지가 역임했던 관직도 있었다. 찟따 장자의 아버지는 빔비사라 왕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신 중 한 사람이었다. 즉 찟따 장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마가다 왕국의 대신이기도 했다. 이러한 신분 때문에 그는 출가를 하지는 못했으나 대신 부처님과 스님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찟따 장자는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하셨을 때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은 다섯 비구 중 한 명인 마하나마 존자가 맛치까산따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존자로부터 법문을 듣고 아나함과를 성취하였다. 아나함과는 지금 살고 있는 생을 끝으로 다시는 윤회를 하지 않는 성인의 단계로 ‘(이 사바세계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아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한다. 이는 출가하지 않은 재가제자로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였다. 교단에 네 가지 시주를 올리다 삼보에 귀의한 후 신심이 깊어진 찟따 장자는 네 가지 공양을 올려 마하나마 존자를 시봉하였다. 네 가지 공양이란 스님들이 머물 장소와 스님들이 드실 음식, 의복, 약을 의미하며 이를 사사시주(四事施主)라고 한다. 찟따 장자가 올린 네 가지 시주 중 첫 번째인 ‘스님들이 머물 장소’는 바로 암바따까 사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암바따까 숲에 부처님과 스님들이 머물 사원을 지어 교단에 바쳤다. 맛치까산따 마을의 암바따까 사원을 방문한 교단의 스님들은 누구라도 찟따 장자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또한 암바따까 사원에 머무는 스님들이 찟따 장자 덕분에 아무런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찟따 장자가 사원을 지은 암바따까 숲은 마을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머물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또한 숲 밖으로는 찟따 장자가 소유한 농경지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었고 장자의 농경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암바따가 숲 부근에서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 마을 또한 찟따 장자가 소유한 재산 중 하나였다. 장자는 이 마을에서 수확한 곡식으로 스님들이 드실 음식을 바쳤고 그 외에 스님들이 입을 의복과 아프고 병든 스님을 위해 필요한 약을 항상 구비하여 보시하였다. 암바따까 사원의 창건주인 찟따 장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는 이들에게 법을 가르쳐 주는 ‘법사(法師)’이기도 했다. 그는 법을 이해하고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법의 성품에 대하여 스님들과 깊이 의논하고 이를 대중에게 설명할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찟따 장자와 수닷타 장자의 다른 점 중 하나이다. 수닷타 장자는 가족과 친구 등 많은 이들을 삼보로 인도하였으나 이들을 직접 포교하지는 못했고, 이들에게 법을 설명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수닷타 장자의 친구들은 부처님이 기원정사를 떠나 다른 곳에서 안거를 보내시는 동안 마음을 바꿔 외도 수행자를 섬기기도 했다. 이때 수닷타 장자는 친구들을 설득하지는 못했으나 부처님께서 그들의 근기에 맞게 법을 설하시자 수다원과를 성취하였고 그때서야 삼보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대승경전 속 유마거사 모델 반면 찟따 장자는 500명의 재가 신도들을 이끌고 있었고 사원을 찾는 대중들에게 직접 법을 설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스님들과도 법에 대하여 깊이 토론하였고, 궁금한 점이 있을 때면 명쾌하게 이해가 될 때까지 질문을 하였다. 경전에서는 찟따 장자가 스님들과 법에 대하여 토론을 하고, 스님들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아 주는 일화들이 등장한다. 또한 그는 외도와의 논쟁에서 승리하고 오랜 세월 외도 수행자의 길을 걸어온 친구를 삼보로 인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였을까. 부처님께서는 찟따 장자에 대하여 ‘재가법사 중 첫째가는 이’라고 말씀하셨다. 재가법사로서 일반 신도들과 제자들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울 만큼 출중했던 찟따 장자의 이러한 행적은 훗날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유마거사’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특히 임종을 앞둔 찟따 장자가 자신을 병문안 온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법문을 남긴 행적은 <유마경>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아픈 유마거사에게 병문안을 갔다가 법문을 듣는 장면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수담마 존자와의 갈등 어느 날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 존자, 아나율 존자와 라훌라 존자, 아난 존자 등 열 한 분의 스님들이 맛치까산따 마을에 가게 되었다. 스님들은 찟따 장자가 보시한 암바따까 사원으로 향했다. 라자가하에 가는 일이 드물었던 찟따 장자는 평소에 뵙기 어려운, 덕이 높은 여러 스님들이 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자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스님들을 찾아가 예배를 올린 뒤 다음 날 자신의 집에서 공양을 올리고 싶다고 청했다. 스님들은 미소로 장자의 공양 초대를 허락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손님으로 온 여러 스님들을 공양에 초대하면서 암바따까 사원의 주지 스님으로 있던 수담마 존자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행을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스님들이 암바따까 사원에 들리는 경우는 전에도 많았다. 그때마다 찟따 장자는 수담마 존자에게 먼저 허락을 구한 뒤 객스님들을 공양에 초대하였고, 수담마 존자에게 함께 참석해 달라고 청하곤 했다. 하지만 사리불 존자를 비롯한 여러 스님들을 뵙게 되자 가슴이 벅찬 나머지 수담마 존자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찟따 장자는 수담마 존자를 찾아가 그를 공양에 초대하였다. 하지만 찟따 장자가 사리불 존자 등보다 자신을 나중에 초대한 것을 안 수담마 장자는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찟따 장자는 거듭하여 세 번이나 수담마 존자를 초대하였으니 이미 기분이 상한 수담마 존자는 끝내 거절하였다. 수담마 존자는 찟따 장자가 주지인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는 자신은 스님이요, 찟따 장자는 신도에 불과하다는 수담마 존자의 교만함이었다. 또한 주지라는 이유로 암바따까 사원에서만큼은 자신이 사리불 존자 등보다 우위에 있다는 유치한 자격지심도 있었다. [불교신문3295호/2017년5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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