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6월 10일, 합정동 사무실에 앉아 쓴 글
그날 나는 빨간 티셔츠에 밝은 갈색 면바지 차림이었다. 휘경역에서 내려 모교인 외국어대학교 정문을 향하는데 길 양쪽으로 소위 닭장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검은 곤봉을 들고 짙은 남색 옷을 입은 전투경찰들의 낯빛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정문이 가까워지면서 집회를 이끄는 학생회 간부들의 목소리가 함께 가까워졌다. 경찰들이 학교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출입을 통제당하지는 않았다. 수업중인 학과는 없었다. 하기사 나는 휴학생으로 정기간행물실에 가서 현대문학, 문학사상 따위를 읽기 위해 왔으므로 수업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옷차림이 말하듯이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집회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찍 나오느라 조간신문을 읽지 못한 상태였다. 국민운동본부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과 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학교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전날 연세대학생 이한열이 수류탄 직격탄에 맞아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 나는 가방을 도서관 라커에 집어넣고 나서 운동장으로 나왔다. 저녁에 화곡본동 성당 주일학교 교사들의 평일 회합이 있는 날이었으니 수요일이었을 게다.
소위 운동권이 아닌 학생들이 나 말고도 꽤 여럿 보였다. 심지어 평상시 집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는 책상물림 단골 장학생들도 제법 보였다. 빨간 티셔츠 눈에 잘 띄어 위험할 텐데 갈아입고 오지. 걱정을 해주는 친구도 있었다.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의 구호도 이념적인 내용은 최대한 자제하는 눈치였다. 독재정권 타도하자.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종철이를 살려내라. 남학생의 우렁찬 목소리와 여학생의 앙칼진 목소리가 번갈아 가며 구호를 외치면 군중 속의 시위대가 똑같이 따라서 외쳤다. 쇠막대기와 화염병과 돌멩이, 그리고 마스크를 착용한 시위 주동자들. 시위대의 선두 풍경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날의 시위 참가자들은 이념 따위가 아닌 순수한 분노로 집결한 사람들이라는 점.
교내 시위로 그치지 않고 지하철을 이용해 서울역 광장까지 갈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범국민대회에 합류한다는 뜻이다. 돌멩이가 날고, 최루탄이 터지고, 화염병이 터지고, 쫓고 쫓기고, 분노와 최루가스가 섞인 눈물을 흘리고, 전경에 의해 끌려가는 학우를 빼앗아오기 위해 몸싸움을 하는 등 평소보다 치열한 싸움 끝에 시위대는 진압대를 뚫고 휘경역에 도착했다. 외대 정문과 휘경역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니. 암튼 이제 수월하게 서울역으로 가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전철 앞뒤 칸에 타고 있던 학우들 말이 서울역에서 내리면 길목을 차단당해 불리해진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용산역에서 내려 거기서부턴 걸어서 가기로 의견이 모였다는 연락이 왔다.
용산역의 입구 역시 차단되어 있었다. 벽을 넘읍시다. 여학생들은 못 넘잖아? 아니예요. 저희도 할 수 있어요. 잡아주면 되지. 남학생들 일부가 먼저 벽을 넘어가 여학생들을 받아주고 뒤에 있는 남학생들은 밀어주는 등 결국 남녀학생 모두가 벽을 넘어 대로로 나갔다. 그 와중에 몸집이 약간 큰 여학생 하나가 발목을 삐었다. 내가 안아들려 하자 다른 학생이 그렇게 해서는 멀리 못간다며 그 여학생더러 자기 등에 업히라고 했다. 한의원 간판이 하나 눈에 띄었다. 그 남학생은 여학생을 병원에 데려다 놓고 다시 오겠노라 했다. 시위대는 용산역 인근 대로부터 서울역까지 걸어갔다. 간헐적으로 쏘아대는 최루탄의 방해가 있었지만 서울역까지 비교적 무난하게 도착했다. 아, 그날의 서울역! 학생들뿐만 아니라 넥타이 차림의 직장인들과 아주머니들과 심지어 스님들과 수녀님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울역까지 도착하기가 수월했던 것은 시위진압대 상당수가 거기로 몰려와 있던 덕택이었음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지휘하는 사람들이 바뀜에 따라 나 역시 자연스럽게 학우들과 헤어지게 되었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함께 구호를 외치며 밀고 밀리던 중이었다. 전경이 던진 일명 사과탄이 내 눈앞 약 2 미터 앞에서 터졌다. 미처 공기 속으로 온전히 흩어지기 전인 분말이 유령의 손바닥처럼 내 얼굴을 덮었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순간 겁이 털컥 나며 제일 먼저 떠오른 낱말은 백골단, 하느님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닌, 그래, 백골단이었다. 규모가 큰 집회에만 나타나는 특수경찰들. 키가 180센티도 넘고 덩치도 엄청 다부지며 100미터를 11초 내지 12초대에 뛰고 무술의 유단자들이며 잔인하기가 그지없다는 그 악명 높은 경찰들. 무릎을 걷어차이고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질질 끌려가던 학우들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오늘 맞아죽거나 밟혀죽거나 하나이겠구나. 앞이 안 보여. 내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아이 씨, 앞이 안 보여. 그때였다. 도망을 가던 여학생이, 정확히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내 모습을 보았는지 크게 외쳤다. 형, 왼쪽으로 가면 물 나와요. 왼쪽으로! 소리는 멀어지고, 나는 눈을 감은 채 무턱대고 왼쪽으로 향했다.
수돗물 소리가 났다. 소리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 나는 쪽을 손으로 더듬거려 잡으니 마당에 있는 수돗가였다. 쏟아지는 물에 무작정 머리를 박았다. 농약이 묻은 과일은 흐르는 물에 씻는 거지. 그러니까…. 흐르는 물에 과일을 씻어 농약을 씻어내듯 쏟아지는 물에 눈을 가져다 대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마침내 눈이 떠졌다. 내가 와 있는 곳은 무슨 목공소나 철공소 같았다. 이런, 내가 지금 고립된 거구나. 이어 화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내 나이 또래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하나가 내 쪽으로 뛰어와 나를 잠시 보더니 문짝을 뜯어내듯이 열고 달아났다. 그래, 나는 지금 쫓기고 있는 거야. 그런데 눈이 이래서야. 순간 내가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티셔츠를 벗어 빨래판과 비누상자 틈에 처박았다. 바짓단을 걷고 운동화를 꺾어 신었다. 이걸로도 부족하다. 바닥의 흙을 손에 묻혀 바지와 러닝셔츠에 문질렀다. 이젠 될 대로 되라지. 다시 쏟아지는 수돗물 아래 머리를 박았다. 투다닥! 방금 전 대학생의 것과는 그 강도부터 전혀 다른 세찬 발걸음 소리였다. 얼굴을 돌리기조차 겁이 났다. 나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손에 비누까지 묻혔다. 발걸음이 내 옆에서 멈추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백골단 한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방독면의 덮개를 떼어낸 채 눈코입만 가린 얼굴이 마치 스타워즈에 나오는 외계인 같았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 백골단은 어지간해선 방독면도 쓰지 않고 시위를 진압한다고) 나는 손을 세숫대야에 담근 채 물끄러미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몇 초밖에 되지 않았을 그 시간이 어찌 그리 길게 느껴지던지. 잠시 후 외계인은 나를 외면하고 문짝을 몇 번 걷어차더니 다시 돌아와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피휴, 안도의 한숨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시위대의 시위는 계속되었지만 나의 시위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눈을 온전히 뜰 수 있게 되어 바깥을 내어다 보니 시위대는 모조리 다른 쪽으로 향했고 광장 일대에는 군데군데 경찰차와 경찰들이 있었다. 주섬주섬 옷을 바르게 입고 주택과 건물들이 있는 동네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 주머니에 1만원이 있었다. 위기에서 벗어나자 제일 먼저 식욕부터 살아났다. 반지하에 있는 식당엘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자 곧바로 재채기 소리가 났다. 오죽했을까. 최루탄을 분말째로 뒤집어썼으니. 미안해서 그냥 나가려고 하는데 손님으로 오신 아저씨 한분이 날더러 그냥 거기 앉으라 했다. 아줌마, 이 학생 밥값 제가 낼 테니 밥 줘요. 아니, 그러실 필요 없... 저 돈... 아, 됐네. 데모하느라 애썼을 텐데. 데모 이야기가 나오자 더 이상 할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자리에 앉았다. 물컵을 전해주며 식당 아주머니가 묻는다. 뭘로 드실까, 학생? 그냥 백반이요. 내가 자리에 앉아 물을 마시자 내 밥값을 내주겠다는 아저씨가 얼굴을 반쯤 내 쪽으로 향한 채 말씀을 꺼냈다.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야. 학생들 마음 나도 알아. 나도 옛날 4.19 때 운운. 그날 그분께 막걸리도 한 사발 받아 마셨던 것 같다.
동네를 가로질러 역 광장의 반대편으로 나오자 택시를 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택시를 타자 이번엔 기사분이 기침을 한다. 뭐라 싫은 소리를 할만도 한데 아저씨는 그냥 유리창을 내리며, 어디로 갈까요, 하고 묻는다. 미안하기도 하고 차비도 아낄 겸해서, 신촌 연대 앞으로 가 주세요, 하고 대답했다. 연대 앞에는 화곡동으로 가는 버스가 선다. 주일학교 교사회합이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내 머릿속에 든 것이다. 기침 무진장들 하겠구만.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갈까. 귀찮아서 그냥 갔다. 얼른 가서 그날 있었던 무용담(?)을 들려주고 싶기도 했고.
20년이 흘렀다. 이제껏 그날의 일을 글로 써보기는 처음이다. 오늘 날씨탓인가. 그날과 너무나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유월 초여름의 날씨. 공연히 두 눈이 따끔거리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