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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 그리움 리지 11피치를 등반중인 대구 YMCA산악회 회원들 등 뒤로 검붉은 저녁 노을이 내려앉고 있다. 이 리지는 한 사내의 사랑과 절정이 빚어낸 아름다운 詩였다. |
◇ 평평하게 생긴 2봉 절벽 지대를 지나 3봉으로 향하는 일행들. 왼쪽 끝 봉우리가 3봉이다. . |
◇ 그리움리지 루트도 |
테라스부터 주변 전망이 트여 아름다운 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하는데,
지금 가야산은 초겨울과 만추의 시간적 공간대가 형성되어 위쪽은 겨울 냄새가 물씬 났고,
우리 아래쪽으로는 늦가을의 정취가, 또 그 밑에는 단풍나무숲이 붉디붉게 빛났다.
발아래 펼쳐진 숲을 바라보자,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는 이성선 시인의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시의 첫 시구가 바람결에 묻어 지나가고,
아! 지난여름 짧았지만 보랏빛 칡꽃을 피워내던 선연한 얼굴 하나를 문득 기억해냈다.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한 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외사랑으로 끝났다.
사랑은 흔적을 남기는 법. 결말은 ‘다시 도진 사랑니만큼이나 아파’, 사내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사내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하면서 여자를 철저히 잊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속에선 시시때때로 그녀의 잔상과 웃음소리가 돋아나 그를 괴롭혔고, 그는 자학적으로 술에 젖어 살았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지는 법.
잊으려 할수록 그녀의 얼굴은 또렷이 각인됐고, 그가 사랑한 깊이만큼 그는 외로웠다.
그 어느 날.
그의 오랜 기억 속에 오롯이 되살아나는 것이 있었다. 산이었다.
그가 여자에 미치기 전,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산…. 사내는 산을 찾기로 했다.
‘산에는 물, 나무, 돌 아무런 오해도 법률도 없어,’ 그녀의 흔적을 어느 정도 지울 수 있었다.
그는 한 동안 그렇게 산으로, 또 산으로 떠돌았다. 그러다가 그는 가을이 짙어가는 만추의 가야산엘 들렀다.
그는 문득 해인(海印)의 바다에 불꽃처럼 피어오른 만물상과 바로 그 옆,
하늘로 이어지는 하나의 아름다운 바위선을 보게 되었다.
아, 저 선을 이어 하늘로 오르면 자신은 그 여자로부터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개척을 결정했다. 개척 등반에는 신홍씨(39세)와 조규출씨(35세)가 함께 하기로 했다.
92년 5월, 드디어 하나의 등반선이 완성되자 사내는 그녀에 대한 그 어떤 미련이 아직도 남았는지
암릉 이름을 ‘그리움’이라 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여자로부터 떠날 수 있었다.
어느 날,
사랑은 그대 가슴에 불현듯 몰아칠 것이니…
그랬다.
그리움 리지는 한 사내의 사랑과 절망이 빗어낸 절정의 노래였다.
만약 실연의 아픔이 사무치거나, 사랑의 그리움이 메아리친다면 이 길을 올라가면 알 거다.
실연을 당한 자 이를 딛고 일어 설 것이며,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다면 사랑을 얻게 될 것이며,
서로 사랑하는 이들은 더욱 사랑이 깊어질 것이다.
그리움리지 개척의 주역은 대구 YMCA산악회 회장인 윤대환씨(38세).
그와 만나기로 한 11월 5일의 가야산(1,430m)은 막바지 단풍이 한창이었다.
이번 등반에는 같은 산악회의 윤철호(29세), 대구대산악부의 신동민씨(28세)가 참여했다.
가야면에서 만난 일행은 백운동집단시설지구에서 전날 야영을 한
대구파워클라이밍센터의 박본현(41세) 대표와 이효건(32세), 홍일점인 송은주(25세),
카라코람산악회의 조백래(30세)씨와 합류하여 무려 9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리지 등반에 나서게 되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백운동집단시설지구의 주차장에서 장비를 챙긴 일행은 상징탑이 있는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그 위의 넓은 등산로에는 포크레인이 길 정비에 한창이고, 솔숲 길엔 바람결 따라 솔향기가 흩날렸다.
길은 저만치 있고, 우리는 곧 조선시대에 제법 큰 규모의 절이었던 심원사지에 닿았다.
심원사지는 서울에서 내려온 발굴조사단이 발굴한 사금파리들이 가지런히 모여져 있고,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추정되는 심원사지 3층 석탑만이 그 옛날 잠시 영화로웠던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데,
이 탑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발굴조사단 막사 뒤로 난 (심원사지 3층석탑 뒤의 왼쪽)길을 따라 본격적인 산길로 절어들었다.
길은 산죽 사이로 나있다.
40분 가량 꽤 오랜 시간 오르막을 치고 오르자 길 오른편으로 화강암벽이 보였다.
드디어 리지 출발지점에 닿자 자그마한 너럭바위에 ‘그리움’이라고 쓴 희미한 붉은 글씨와 우리가 올라야 할 등반선이 보였다.
등반은 두 팀으로 나누어 하기로 했다.
먼저 대구 YMCA산악회 쪽에서는 신동민씨가, 대구파워클라이밍센터에서는 박본현씨가 선등을 서기로 했다.
재미있어 보이는 첫 피치 크랙은 제법 각이 센 탓인지 쉬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크랙 안은 물에 젖은 흙이 있어 자칫하면 미끄러질 판이었다.
다음 2피치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슬랩이어서 쉬 올라갈 수 있었지만,
3피치 첫 슬랩 구간은 생각보다 동작이 힘들어 한참 애를 먹은 뒤 가까스로 이를 넘어갔다.
4피치 또한 만만치 않은 구간이었다.
4피치는 하켄이 박혀 있는 직벽 구간으로 인공으로 오를 경우 A0가 나오지만
자유등반할 경우 5.10b가 나오는 제법 까다로운 구간이다.
제법 경사가 느껴지는 5피치는 크랙을 레이백 자세를 했다가 언더 홀드 잡는 식으로 자세를 바꾸는 것이 등반의 포인트.
5피치 등반을 마치자 넓은 테라스가 나왔다.
등반 내용으로 보아 각 피치가 적당하게 어려워 암벽 등반의 재미를 쏠쏠히 느낄 수 있는 구간이었다.
넓은 테라스는 우리에게 간식 먹을 시간과 즐거운 여흥의 시간을 주었고.
가야산에서 느끼는 설악의 정취
테라스부터 주변 전망이 트여 아름다운 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하는데,
지금 가야산은 초겨울과 만추의 시간적 공간대가 형성되어 위쪽은 겨울 냄새가 물씬 났고,
우리 아래쪽으로는 늦가을의 정취가, 또 그 밑에는 단풍나무숲이 붉디붉게 빛났다.
발아래 펼쳐진 숲을 바라보자,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는 이성선 시인의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시의 첫 시구가 바람결에 묻어 지나가고,
아! 지난 여름 짧았지만 보랏빛 칡꽃을 피워내던 선연한 얼굴 하나를 문득 기억해냈다.
5피치 이후부터 주능선까지는 주로 세미 클라이밍 지대.
이곳은 짧은 바위지대가 많아 걸어가다가 바위를 만나면 자일을 썼다가 또 걷기를 반복했다.
주능선에 도착하여 능선길을 조금 따라 오르는데 곧 경사가 약한 슬랩이 나왔다.
그리 어려운 구간은 아니지만 오른쪽에 절벽이 있어 6피치 등반준비를 한 다음, 또 슬랩으로 이어지는 7피치를 올랐다.
7피치 등반을 마칠 때쯤 그 좋던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금 더 오르자 걸어가는 구간이 나왔다.
이때부터 그리움리지의 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방이 탁 트인 능선에 서자 제각기 가야산 정상 부근과 만 가지 형상을 한 만물상의 바위들이 수려한 풍경을 자아내었다.
우리는 마치 설악산의 암릉을 등반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어 그저 “아름답다”고 말할 뿐이었다.
단지, 흐린 날씨 때문에 이 멋진 풍경을 더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길은 평탄하게 2봉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하늘로 이어지는 바윗길과 구름 속을 오가며
가야산 풍광 속에 몸을 섞어 잠시 물아일체(物我一體) 경지에 다다른다.
평평한 곳에서 다시 모인 일행들 배낭에서 점심거리가 나오고, 먹는 즐거움 역시 등반중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었으리.
한가로운 휴식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평탄해 보이는 2봉 정수리를 지나 3봉으로 접어든다.
3봉 등반 역시 설악산의 암릉 비슷한 암질과 풍광을 선사하는데 이 봉우리 또한 자일 쓰기가 매우 애매했다.
등반 안전을 기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안자일렌하면서 쉬운 8피치를 올라 9피치에 닿았다.
형형색색의 즐거움, 만물상
9피치는 약 10m의 짧은 바위가 서있는데 이 바위를 등반할 경우 5.10b가 나와 특히 키가 작은 사람은 매우 등반하기 어려웠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뒤에 있던 다른 일행들은 바위 왼쪽으로 나있는 개구멍 밑을 기어 우회를 했다.
이어 3봉 아래 10피치에 도착한 박본현씨 일행이 왼쪽 크랙에 박힌 하켄을 지나 슬랩을 올랐고,
취재진은 왼쪽 우회로를 돌아 3봉 꼭대기에 섰다. 3봉에서의 전망 또한 미적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구름에 가렸던 가야산 정상과 만물상의 바위군이 일순간 보이면서 우리를 아름다운 미학의 숲으로 인도했다.
한편 3봉을 먼저 출발한
대구 YMCA산악회의 윤두환 회장과 회원들이 25m 하강을 마친 뒤 마지막 4봉인 ‘해탈봉’ 슬랩 등반에 나섰다.
아주 짧은 시간, 그들 등 뒤로 빛깔 고운 저녁노을이 내려앉고, 한동안 우리는 그 노을 속에 황홀히 잠겨 있었다.
11피치 등반을 마친 이들이 해탈봉에서의 10m 하강을 마치면서 그리움리지 등반은 끝났다.
하강지점에서 헤드랜턴을 준비한 일행이 짧지만 양옆이 낭떠러지인 짧은 바위지대와 촛대바위를 지나
주능선 상의 등산로에 들어섰을 즈음, 어둠은 우리 어깨 위로 한없이 밀려들었다.
하산을 서둘렀다. 가야산 정상과 심원골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러 심원골로 내려섰다.
어느새 밤이 깊었는지 심원골엔 보름달빛이 가득 찼고, 어느덧 계곡엔 물소리가 시끄러웠다.
계곡물을 몇 번 건너 심원사지에 도착하자 3층 석탑이 달빛 속에서 해탈을 서두르고 있었고,
앞서 간 한 사내의 머리 위로 그가 사랑했던 한 여자의 모습이 실루엣 져 있었다.
그리움리지 길잡이
가야산에서 설악 암릉의 기쁨을 맛본다
최고 난이도 5.10b…총 11피치 235m의 중·고급자 코스
가야산 그리움리지는 설악산의 여느 리지만큼 수려한 풍경을 지니고 있는 데다,
대구광역시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에 대구의 산꾼들이 즐겨 찾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등반 난이도도 적당하게 어려워 중급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이라면 짭짤한 리지 등반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리지 초입으로 가려면 백운동집단시설지구의 주차장에서 왼쪽에 보이는 군화합공원의 상징탑 쪽으로 가야 한다.
이어 넓은 길을 따라 오르면 발굴조사중인 심원사지가 나온다. 심원사지 3층 석탑과 조사단 막사 뒤쪽으로 난 길을 따른다.
한 사람이 다닐 정도의 산죽밭 사이로 난 길을 오르다가 희미한 묘 2기가 있는 곳에서 왼쪽 길로 접어든 뒤,
얕은 개울 바닥 위로 난 길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들어선다.
이후 희미한 길을 따라 가다보면 길 오른쪽으로 화강암벽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약간 더 올라가 작은 너럭바위에 이르러 등반준비하면 된다.
1피치는 약 70도의 우향 레이백 크랙으로 생각보다 짠 편이다.
크랙을 올라 왼쪽으로 꺾이는 곳에 있는 작은 소나무를 조금 지나 왼쪽으로 이어지는 수평 크랙을 오르면 된다.
2피치 슬랩 구간은 쉬 오를 수 있으며, 3피치는 첫 출발지점의 슬랩이 매우 어렵긴 해도 이곳만 벗어나면 그 다음은 매우 쉬워진다.
4피치는 바위를 조금 걸어 오르다가 직벽 위쪽의 하켄에 걸린 슬링을 잡은 뒤, 왼쪽 방향의 바위 턱을 잡으면 이후 길은 쉬워진다.
하지만 이것을 잡지 않고 등반할 경우 5.10b가 된다.
5피치 출발지점에서 조금 직상하다 우향 레이백 크랙을 오르다가 언더 홀드 잡는 식으로 왼쪽으로 이동하면 넓은 테라스가 나온다.
5피치 이후 주능선에 이르는 곳은 전반적인 세미 클라이밍 지대로 상황에 따라 자일을 쓸 것인지, 안 쓸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
초보자와 함께 간다면 반드시 써야 한다.
먼저 5피치 테라스에서 그 위로 조금 세미 클라이밍하면 걸어가는 구간이 나온다.
그 다음 큰 소나무가 있는 쪽으로 가면 5.9 정도의 짧은 좌향 레이백 크랙이 나오는데 상당히 위험한 구간이므로
반드시 하켄에 퀵드로를 설치하고 넘어가야 한다.
쉽게 가려면 소나무 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우회한다.
이어 조금 내려가면 바로 짧은 바위지대가 나오는데 이곳 역시 세미 클라이밍 지대다.
이후에도 자잘한 세미 클라이밍 지대가 나오긴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쉽게 넘어설 수 있다.
그 뒤 작은 바위를 지나면 바로 주능선에 도착한 후 능선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오르면 쉽고 긴 슬랩이 나온다.
6피치인 이곳은 비교적 쉬운 구간이긴 하지만 오른쪽에 절벽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로프를 써야 하며, 7피치도 로프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7피치를 지나 좀 더 올라가면 전반적으로 평평하여 2봉까지 걸어갈 수 있다.
2봉을 지나면 조금 내려섰다가 바로 오르면 작은 바위를 우회하는 길이 있다.
이어 조금 내려가면 곧 3봉으로 바윗길이 이어지며 8피치를 오르면 된다. 그리 어렵지 않으나 고도감이 상당한 8피치는 쉬운 바위 사면을 조금 오르다가 발밑으로 약간 갈라진 곳에서 위쪽 홀드를 잡고 약간 왼쪽으로 올라간다. 이어 계단식의 짧은 직벽이 나오는데 홀드가 크고 좋아 쉽게 오를 수 있다.
8피치를 오른 뒤, 약간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으로 진입한다.
그 뒤 안자일렌하면서 세미 클라이밍으로 올라서 약 10m의 작은 봉우리 쪽으로 간다.
9피치 난이도는 5.10b로, 비교적 동작이 어려운 편이다. 바위 오른쪽의 개구멍으로 우회 가능.
이어 조금 걸어가면 약 30m의 벽이 가로막고 있다.
10피치는 왼쪽 크랙에 하켄 하나가 있는 곳을
좌향 레이백 자세로 오르다가 볼트 두 개가 박힌 오른쪽 오른쪽 크랙으로 진입하여 암각에 확보한다.
3봉 정상 오른쪽 바위 사이로 난 길을 세미 클라이밍하며 내려가면 곧 걸어가는 구간이 나오고, 이어 약 25m 하강지점이 나온다.
하강한 뒤 조금 걷다가 오른쪽의 4봉으로 가서 11피치 슬랩 등반에 임한다.
볼트 한 개를 지나 슬랩을 오르면 곧 하켄 2개가 박혀있는 4봉 정상에서 10m 하강하면 그리움 리지 등반을 마칠 수 있다.
만약 시간이 늦어 4봉으로 가지 않으려면 4봉 가기 전 왼쪽으로 우회하면 4봉 하강지점에 닿는다.
하강지점에서 조금 내려가면 바위 틈새가 벌어진 곳을 건너뛰어야 하는데 그 양옆은 절벽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어 왼쪽으로 빠져 나가면 짧은 암릉지대가 끝나고 가야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일반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
등산로 상의 촛대바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넓은 너럭바위가 나오고
약간의 오르내리막을 조금 반복하다보면 가야산 정상으로 가는 길과 심원골로 빠지는 삼거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는 소나무에 붉은 표지기가 메어져 있다.
급경사길을 한참 내려서면 길은 조금씩 평탄해진다.
샘터 한 곳을 지나 작은 개울을 한 번 건넌 뒤, 주 계곡물을 3번 건너면 심원사지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이 근방에 이르면 국립공원공단 측에서 ‘가야산 정상 3.6km’라고 쓴 표지판이 나오고 곧 심원사지에 닿게 된다.
등반은 3인1조가 이상적이며, 반드시 중급 이상의 바위를 선등할 줄 아는 이가 있어야 한다.
프렌드 1조와 긴 슬링 5∼6개, 로프 5∼60m 한 동이면 세 명이 등반 가능한데, 6·7피치 빼고 거의 피치가 짧기 때문이다.
6·7피치는 등반 거리가 길긴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선등자가 자일을 고정시키면 세컨드는 프루지크매듭으로 오르면 된다.
3인1조 기준, 주차장∼심원사지∼그리움리지∼주차장까지의 총 등반 시간은 5∼6시간 걸린다.
야영은 백운동집단시설지구의 주차장에서 야영을 한 뒤, 아침 일찍 철수하면 된다.
식수는 간이급수대나 주차장 오른쪽에 있는 화장실 물을 이용하면 된다.
또는 상징탑 위의 골짜기 물을 쓸 수 있다.
숙박시설을 이용하려면 백운동집단시설지구에서 가까운 백운동에서 구한다.
먼저 주차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북두산장(054-931-5487)이며,
백운동에는 송백장모텔(054-931-2336), 솔밭장(054-931-2131) 등 많은 숙박시설이 있다.
2인1실 25,000∼30,000원선.
대구서부시외버스터미널(053-656-2824∼5)에서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8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해인사행 시외버스를 타고 가야면에서 하차.
가야면까지 2,900원. 소요시간 1시간 30분.
백운동까지 들어가는 버스가 없으므로 가야면에 있는 가야개인택시(055-932-7609)를 이용하여 백운동집단시설지구에서 내린다.
요금은 7,000원. 소요시간 약 10분.
88올림픽고속도로를 타고 해인사 인터체인지로 나온다.
이후 1033번 도로를 따라 야천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59번 국도를 가다가 가산재를 넘어 내려조금 가면 작은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올라가면 백운동집단시설지구 주차장이다.
대구에서 주차장까지 약 1시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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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만물상 능선 - 만물의 형상 띤 ‘자연의 교향악’
▲ 가야산 국립공원 가천분소 변정수 분소장(맨왼쪽)과 김지연씨가 가야산과 만물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마당바위
☞ 월간 산지에서는 '마당바위'라고 작성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제단바위'라고 알고 있슴 -탄주-
비바람에 깎이고 씻긴 기암괴석들은 억겁의 세월을 대변하고 있다.
그 긴 세월 동안 각각의 바위들은 마치 ‘자연의 교향곡’이라도 연주하는 듯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모습으로 거듭났다. 스스로 ‘교향악’이라 불러달라는 듯했다.
만물상 능선의 백미는 그 능선 끝 지점에 있는 상아덤까지 계속된다.
상아덤에 올라서면 만물상의 모든 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한참을 이리저리 뜯어본다. 이쪽, 저쪽으로 방향을 돌아가며 살펴본다.
카메라 셔터를 아무리 눌러도 지겹지 않다. 그런 만 가지 형상을 한 만물상이다.
▲ 돌고래바위
가야산은 원래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천재 고운 최치원 선생의 산이었고,
예로부터 오대산, 소대산과 더불어 삼재(三災, 화재·수재·풍재)를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귀중한 유산 팔만대장경도 가야산 첩첩산중 깊은 곳에 보관했던 것이다.
또 <여지승람> 권30에 옛 기록을 빌어 ‘가야산의 모양새는 천하에 으뜸이요,
지덕이 또한 비길 데 없다(古記云伽倻山形絶於天下之德雙於海東)’고 기록하고 있다.
예로부터 명산으로 꼽힌 기록은 곳곳에 나온다.
가야산의 대표적 인물인 최치원은
당나라 과거시험에 합격한 뒤 반란을 일으킨 황소를 글로써 격퇴한
‘토황소격문’으로 신라에서보다 당나라에서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고향이 그리워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한 고운 선생이
6두품 집안 출신으로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의 신분장벽에 막혀 더 이상 오르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이곳저곳 떠돌다 마지막 입산한 곳이 바로 가야산 홍류동계곡이었다.
홍류동계곡 주위엔 지금도 그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깊었으니 당연히 삼재를 피할 수 있었던 산이기도 했다.
코끼리바위·기도바위·돌고래바위 등 다양
고운 선생이 가야산의 깊은 계곡과 흐르는 물을 노래한 시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 가야산 독서당에서)’가 있다.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미친 듯이 포효하는 물이 층층 바위돌을 치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아주 가까운 곳의 사람의 말소리조차 구별키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시비 가리는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일부러 흐르는 물더러 온 산을 돌게 하였네
그러나 세월은 흘러 깊은 계곡과 산은 허리가 잘려 동강나고,
다리와 팔은 찢겨져, 그 옛날 심산유곡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산허리까지 차가 올라가고 여러 등산로는 사람들의 발길을 받아들이고 있다. 안타깝지만 이 또한 현실이다.
▲ 솟구치는 돌고래바위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개방하지 않았던 만물상 등산로도 38년 만에 처음으로 속살을 드러냈다.
그동안 뭘 감추고 있었으며, 과연 어떤 모습일까 ?
지난 7월 7일 가야산 국립공원 가천분소 변정수 분소장과 김지연씨의 안내로 만물상 코스를 답사했다.
변 분소장은 “만물상 코스 개방은 이번에 했지만 그동안 불법적으로 다닌 등산객이 제법 있었다”며
“이들을 정상 등산로로 유도하고, 예상치 못한 사고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등산로를 정비하고 안전하게 등산객들이 다닐 수 있도록 개방했다”고 소개했다.
▲ (왼쪽부터)기도바위(부처, 불상바위) / 코끼리바위
이들과 함께 만물상 코스로 출발했다.
가천분소 탐방지원센터에서 기존에 다니던 용기골 등산로 방향은 오른쪽이고,
왼쪽으로 정비된 돌계단이 만물상 등산로라고 안내하고 있다. 바로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직원 김지연씨는 “1㎞ 남짓 계속 오르막길이라 조금 힘들지만 그 이후부터는 무난할 겁니다”라고 안내했다.
시작부터 가파른 길이 계속됐다.
개방한 지 불과 한 달 남짓밖에 되지 않은 등산로가 제법 오랜 시간 사람이 다닌 길 같아 보였다.
변 소장은 “옛날에 있었던 길이고, 그동안 불법적으로 다닌 등산객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르막길이지만 우거진 숲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대부분 참나무 종류의 활엽수라 햇살을 빠짐없이 잘 막았다.
변 분소장은 “옛 문헌에 의하면 백운동 지역은 잣나무로 유명하다고 했는데,
지금 잣나무는 간혹 눈에 띄는 정도이고, 대부분 활엽수여서 가을에 특히 단풍이 좋다”고 자랑했다.
▲ (왼쪽부터)주름바위 / 쌍둥이바위
해발 550m쯤 되는 탐방지원센터에서 계속 오르다
해발 954m 지점에서 사방이 확 트인 조망처를 처음 만났다.
서쪽으로는 완만한 능선의 가야산이지만 오르고 있는 북쪽과
동쪽은 바위산이 우뚝 우뚝 솟아 마치 키 경쟁이라도 하는 듯했다.
방향에 따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만물상 코스도 출발부터 1㎞ 남짓까지는 숲속길이지만
그 뒤부터 각종 암벽 사이로 난 길로 가야만 한다.
위험한 구간은 나무데크로 정비가 잘돼 있었다.
암벽 능선 아래로는 완전 낭떠러지다.
사진작가들이 만물상의 아름다운 기암 모습을 담기 위해
간혹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변 분소장이 귀띔했다.
만물상 끝 지점이 가야산 전설 지닌 상아덤
등산로 바로 옆 바위와 바위를 조그만 돌들이 연결하고 있었다. 가야산성이었다.
산성이 둘러싸고 있는 내부 계곡은 도저히 사람이 기거할 만한 장소가 못 돼 보였다.
그런데 어찌 이런 곳에 산성이 있을까 ? 아직 축성 시기와 목적이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석축 주위 1만5935척(4,828m), 높이 5척(15m)인데 반은 퇴락했다.
성내에는 계곡 6개소와 10개의 샘이 있으며, 평탄하고 험한 것이 반반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래부터 평탄하지 않은 지형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 <성주목읍지>와 <성산지>에 따르면
‘1594년(선조 27)에 여러 지역 의병장들이 이 성에 의지해 적의 침입에 대비했고,
제찰사 이원익이 조정에 건의해 승장 신열을 시켜
가야산성을 다시 고쳐 쌓게 하여 주민들이 병란을 피하게 했다.
이 때 신열이 이 성의 남문을 건립했는데,
후일 이항복이 문루에 액부초(扼?醮)라는 현판을 만들어 붙였다’고 전한다.
▲ 비석바위
산성은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외곽으로는 도저히 적이 침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등산로 옆 산성에서 밖을 내려다보면 수백 미터 낭떠러지다. 한마디로 완전 철옹성이다.
하지만 내부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성 안에는 용기사, 백운암, 일요암 등의 터전이 남아 있으나 전부 조그만 절이다.
그런 산성을 따라 등산로는 계속됐다.
만물상이 자태를 서서히 드러냈다.
하나 둘씩 드러낸 암벽은 수천, 수만 년의 풍상을 견딘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서로 뽐내는 듯했다.
평일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면서 전부 감탄을 절로 자아냈다.
‘자연의 교향악’ 앞에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기암의 향연에 등산객들은 발길을 멈춰 산행 속도는 더욱 늦어졌다.
늦어진들 어떠리. 흔치 않은 기암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다들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향연을 즐겼다.
만물상의 끝은 상아덤이다.
상아덤에 올라서면 만물상이 시원스레 늘어서 펼쳐진다.
두루마리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형상들이다.
발 아래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만물상의 험난한 코스를 어떻게 지나왔을까 싶다.
실제로 그리 위험한 길은 아닌데도 말이다.
▲ 38년 만에 개방된 가야산 만물상 등산로를 등산객들이 오르고 있다.
상아덤은 바로 가야산의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가야산 여신(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와 하늘신(천신) ‘이비하(夷毗訶)’가 노닐었다는 전설이다.
성스런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에 사는 백성들이 우러러 받드는 여신이었다.
여신은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닦을 큰 힘을 얻기 위해 밤낮으로 하늘에 소원을 빌었다.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긴 하늘신 이비하가 오색구름 수레를 타고 상아덤에 내려왔다.
천신과 산신의 만남이었다.
천신과 산신은 성스러운 땅 가야산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옥동자 둘을 낳았다.
형은 아버지 천신을 닮아 얼굴이 해와 같이 둥그스름하면서 불그레했고,
아우는 어머니 여신을 닮아 얼굴이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
형은 대가야의 첫 왕인 ‘이진아시왕’이 됐고, 동생은 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이 됐다.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釋順應傳)>과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대략의 줄거리다.
최치원과 이항복, 가야산에서 시 남겨
상아는 여신을 일컫는 옛말이고, 덤은 바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상아덤은 하늘의 여신이 사는 바위란 뜻이다. 그 바위 위에 올라섰다.
천신과 산신이 만난 그곳이며, 가야산 정기가 서린 곳이다.
괜히 숙연한 마음이 든다. 어디로 내려왔으며, 어디서 만났을까, 요리조리 살펴봤다.
신들의 흔적이 인간의 눈에 보일 리 없겠지만.
사방이 내려다보인다. GPS 고도상으로 1,160m였다.
물론 동북쪽으로 가야산 정상 상왕봉(일명 우두봉 1,430m)과 바로 그 옆 최고봉 칠불봉(1,433m)이
더 높은 봉우리지만 별로 높아 보이지도 않았다.
상아덤은 따로 떨어진 독립 봉우리로,
신이 내린 정기를 받아 기암괴석의 만물상 형상을 다스리고 있는 듯했다.
▲ 새로 개방된 가야산 만물상 등산로는
평일에도 수백 명의 등산객이 찾을 정도로 인기 있는 코스로 떠오르고 있다.
가야산은 고운 최치원 선생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도 인연이 깊다.
그도 가야산을 보고 ‘伽倻山中作(가야산중작, 가야산 속에서 짓다)’이란 시를 남겼다.
蒼然暮色來霜藤(창연모색래상등) 창연한 저문 빛은 서리 낀 등나무에 내리고
新月出林西日下(신월출림서일하) 초승달은 숲에서 나오고 서산의 해가 진다
問爾山中老樹精(문이산중로수정) 묻노니 너 산중의 늙은 나무 정령아
今宵應見孤雲過(금소응견고운과) 오늘 밤 응당히 최 고운이 지나는 것을 보았지 않으냐
최치원과 이항복, 시대는 다르지만 그 시대 최고의 천재들로,
가야산을 배경으로 수백 년을 뛰어넘는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 가야산이 만물상을 지나는 산객들에게 다시 한번 최치원과 이항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가야산 정상은 어디일까?… 정상은 상왕봉, 최고봉은 칠불봉 ‘혼란’
가야산 정상 논쟁을 수년째 벌이고 있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가야산 최정상은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해발 1,433m의 칠불봉이다.
논쟁 발단 전까지는 우두봉(상왕봉)이 최고 높으며, 당연히 정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바로 그 옆 칠불봉이 누가 보더라도 조금 더 높게 보인다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자
국토지리정보원에서 GPS로 실측했다.
실측 결과 실제로 정상이라고 알려진 상왕봉은 1,430m로 나왔고, 그 옆 칠불봉은 1,433m로 나왔다.
당연히 정상이 칠불봉으로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아직 정상은 상왕봉으로 인정하고 있다.
행정상으로 정상은 상왕봉, 실제 등산객들 사이에서는 칠불봉으로 혼돈되고 있는 상황이다.
▲ 상아덤에 오르기 직전의 만물상 코스 마지막 구간을
등산객들이 뒤돌아서 주변을 조망하며 오르고 있다.
이는 기존 정상을 고수하려는 행정구역의 문제에 국토지리정보원의 우유부단함과 애매한 발표 때문이다.
우선 기존의 상왕봉은 행정구역이 경남 합천이다.
합천은 가야산 국립공원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해인사와 남산제일봉, 상왕봉, 최치원이 묵었다는 청량사, 홍류동계곡 등 주요 유적도 합천에 있다.
그러나 실측 결과 최정상으로 나온 칠불봉은 경북 성주 관할이다.
성주는 가야산 정상이 당연히 칠불봉이라고 발표한다.
정상이 바뀌면 행정구역의 상징성이 있기 때문에 전체 산의 관할도 달라질 수도 있다.
합천은 당연히 정상이 상왕봉이라고 발표한다. 두 개의 정상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산과 지도와 관련된 행정기관인 국토지리정보원도 애매한 발표를 했다.
“하나의 산에는 여러 봉우리가 있으며,
그 중에 제일 높은 봉우리라 해도 정상이 아니며
전체의 봉우리 중에 제일 중심이 되는 봉우리가 그 산의 정상이다.”
▲ 가야산 용기계곡의 모습.
이에 따라서 가야산 정상은 제일 높은 칠불봉이 아니라 중심이 되는 상왕봉이라는 것이다.
모든 공식 지도표기엔 가야산 정상은 상왕봉으로 나온다.
상식적인 판단은 당연히 칠불봉이 가야산 정상이지만
애매한 기준과 행정구역의 관할 때문에 현재 가야산 정상은 상왕봉이다.
교통
경북 고령에서 백운동 주차장행 버스는 하루 3회(8:20, 14:45, 19:30),
고령 시외버스터미널(1666-4455)에서 출발한다.
맛집
백운동 주변엔 가야산 관광호텔(054-931-3500)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있다.
주변에 식당 몇 곳이 있다.
가야산 관광호텔은 온천도 있어 등산객들이 하산 후 사우나와 샤워를 즐길 수 있다.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차로 10여 분 거리에 오리고기 전문점인
살다보면식당(054-956-1947 또는 010-3809-1942)도 찾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