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권 범죄 시효 조정하자
고 최종길 교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법원이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은 오랜 가뭄 끝의 단비같이 반가운 소식이다. 이런 일도 있어야 힘없는 사람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내일을 기약하는 힘을 얻게 된다. 법 규정에 얽매어 세상이 다 아는 일을 옳게 판단하지 않으면 사회정의를 온전히 지탱해 갈 수가 없다.
서울고법 민사5부가 내린 이번 판결은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한 1심 재판을 뒤집은 것이어서 더욱 의미 있는 재판이 되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신의성실(信義誠實)의 원칙(신의칙)을 강조했다. 시효가 지나 손해배상을 해줄 수 없다는 국가의 주장이 이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실정법 뛰어넘어 사회정의 세우려는 의지
시효가 지났지만 신의칙에 따라 배상을 해주는 것이 옳다는 판결취지는 실정법 규정을 뛰어넘어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의지로 평가받을 만 하다. 지금까지 법원이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시효를 엄격히 해석해온 추세에 비추어 보면, 더욱 주목할 판결이다. 재판부는 국가가 명백한 위법행위의 책임을 면하려고 시효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용납 받을 수 없는 방어방식”이라고, 적극적으로 국가의 부도덕성을 질책하였다.
재판부는 시효의 완성으로 원고의 청구권은 소멸되었지만,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정이 있거나, 소멸시효 인정이 현저히 부당하고 불공평한 사정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위원회의 발표 때까지 유가족이 사건의 진실에 접할 수 없었고, 1998년 검찰에 진정을 했지만 형식적인 조사에 그친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엄혹한 유신독재 시대와 신군부 쿠데타 정권 시대에 국가의 불법행위를 따질 수 있었겠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저을 사람이 있을까. 모든 정보를 독점한 국가가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상황에서 ‘불법행위를 안 날’로부터 3년 안에 소송을 제기해야한다는 규정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재심의 기회가 없는 사건에서 시효를 이유로 민사소송의 길을 막는 것은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의 유일한 통로를 봉쇄하는 행위”라는 재판부의 지적도 귀담아 들을 만 하다. 고 최종길 교수는 1973년 서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이라는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재판을 받아본 일이 없어 재심을 청구해볼 수도 없는 사건의 피해자였다.
법원이 신의칙을 내세워 국가범죄 피해자 유족에게 배상판결을 내린 것은 2003년 8월 수지 김 사건에 이어 두 번째다. 30년이 넘은 사건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배상을 명한 이번 판결은, 지금 법원에 계류돼 있는 유사사건 판결에도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또 아직 법에 호소하지 않고 있는 국가범죄 피해자들에게도 용기를 주어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계기가 되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반인권적인 범죄에 대한 소멸시효 연장 및 배제 논의에 다시 불을 붙였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8·15 경축사를 통해 국가의 권력남용 범죄에 대한 시효의 적용을 배제하거나, 조정하는 법률 제정을 제안하였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그 직후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권고안 초안을 통해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 입법을 제안했다.
공소시효란 국가의 부당한 형벌권 행사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정립된 제도다. 그러므로 국가기관에 적용하는 것은 제도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견해도 있다.
비현실적 시효제도가 약자 명예회복 등 제약해서는 안돼
유엔은 1968년 총회결의를 통해 “반인도적 범죄와 전쟁범죄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바 있다. 독일은 1965년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한해 공소시효를 연장했으며, 나치전범에 대해서는 시효제도를 아예 배제해 버렸다. 지금도 종종 숨어살던 전범들이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고 있다.
공소와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 배제와 연장에 관해서는 법률상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현실적인 시효제도가 약자의 명예회복과 배상청구권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번 재판을 계기로 합리적으로 조정되기를 기대한다.
출 처 : 내일신문, 문창재 객원 논설위원
*** 공소시효(公訴時效) : 검사가 일정한 기간 동안 공소를 제기하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에 국가의 소추권(및 형벌권)을 소멸시키는 제도이다. 공소시효는 형의 시효와 구별된다. 형의 시효가 확정된 형벌권을 소멸시키는 제도임에 반하여, 공소시효는 국가의 소추권(실체법설에 의하면 확정되지 않은 형벌권도)을 소멸시킨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공소시효가 완성된 때에는 면소의 판결을 해야 함에 대하여, 형의 시효가 완성된 때에는 형의 집행이 면제될 따름이다. 형의 시효는 형법에서(형법 제77조 내지 제80조), 공소시효에 관하여는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하고 있다(형소법 제249조 이하).
이러한 소송시효제도는 시간의 경과로 인해서 범죄의 사회적 영향이 미약화되었다는 실체법상의 의미에서, 동시에 시간의 경과로 인하여 유죄 또는 무죄의 증거가 산일됨으로써 공정한 재판을 기하기 곤란하다는 점에서 그 존재이유가 있다.
공소시효의 기간은 범죄의 경중에 의하여 장단의 차이가 있다. 현행법상 공소시효의 최장기간은 15년이며, 최단기간은 1년이다(형소법 제249조제①항). 즉 (I)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는 15년, (ii)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해당하는 범죄에는 10년, (iii) 장기 10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범죄에는 7년, (iv) 장기 10년 미만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범죄에는 5년, (v) 장기 5년 미만의 징역 또는 금고, 장기 10년 이상의 자격정지 또는 다액 1만 원이상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에는 3년, (vi) 장기 5년 미만의 자격정지, 다액 1만원 미만의 벌금·구류·과료 또는 몰수에 해당하는 범죄에는 1년이 공소시효의 기간이다(형소법 제249조제①항). 두 개 이상의 형을 병과하거나(병과형), 두 개 이상의 형에서 한 개를 과할(선택형) 범죄에는 중한 형이 시효기간의 기준으로 된다(형소법 제250조). 형법에 의하여 형을 가중 또는 감경하는 경우에는 가중 또는 감경하지 아니한 형이 시효기간의 기준으로 된다(형소법 제251조). 공소시효는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로부터 진행된다(형소법 제252조제①항).
*** 소멸시효(消滅時效) : 권리자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기간(시효기간)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경우 그의 권리를 소멸시켜버리는 제도를 말한다. 이러한 소멸시효제도를 인정하는 것은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권리 위에 잠자고 있던 자는 법률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다]는 사고와, 일정한 사실 상태가 장기간 계속되면 그것이 진실한 권리관계에 의한 것이라는 개연성이 대단히 높고, 따라서 증거보전의 어려움이 극복될 수 있다는 고려에서이다.
소멸시효의 목적이 되는 권리는 재산권에 한하는데, 단지 소유권, 소유권에 기한 물권적 청구권 및 기타의 물권에 기한 물권적 청구권, 점유권·상린권과 같이 일정한 법률관계에 의존하는 권리, 담보물권·신분권이나 인격권과 같은 비재산권은 소멸시효에 걸리지 않는다.
소멸시효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하는데(민법 제166조제①항), 사실장의 장해(예 : 권리자가 그 권리의 존재나 행사 가능성을 알지 못하거나 권리행사자가 의무자나 제3자에 의해 방해되고 있는 경우)는 시효의 기산점에 영향을 주지 못하며, 단지 법률상의 장해만이 시효의 진행을 방해한다. 시기부 권리의 경우에는 기한이 도래한 때로부터 소멸시효가 진행되며,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채권의 소멸시효의 기산점은 채권이 발생한 때이고, 채무불이행에 의한 손해배상청구권에 있어서는 본래의 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때이다.
물권의 경우 일반적으로 권리가 발생한 때를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보고 있으며, 청구 또는 해지통고를 한 후 일정기간이나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에 청구할 수 있는 권리에 있어서는 청구나 해지통고를 할 수 있는 때로부터 소정의 유예기간이 경과한 때로부터 시효의 진행이 시작된다고 해석하고 있다. 할부급 채권의 경우에 1회의 불이행으로 잔액 전부에 관한 시효는 1회의 불이행시부터 진행하기 시작한다. 정지조건부 권리는 조건이 성취된 때로부터 시효의 진행이 시작되며, 부작위채권의 경우에는 위반행위를 한 때로부터 소멸시효가 진행된다(민법 제166조제②항). 보통의 채권의 소멸기간이 10년이며(민법 제162조제①항), 상행위로 생긴 채권의 소멸기간은 5년이다(상법 제64조). 민법 제164조에는 단기소멸시효에 걸리는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또 판결에 의해 확정된 채권은 단기의 소멸시효에 해당한 것이라도 10년의 소멸시효기간이 인정되고 있다(민법 제165조). 그러나 이는 판결이 확정될 당시에 아직 변제기가 도래하지 않은 채권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민법 제165조제③항). 채권과 소유권을 제외한 그 밖의 재산권의 소멸시효기간은 20년이다(민법 제162조제②항).
소멸시효의 진행은 청구(재판상의 청구, 파산절차참가, 지급명령 화해를 위한 소환, 임의출석, 최고)·압류·가압류·가처분 및 승인 등의 사유에 의해 중단된다. 시효의 중단이 생기면 이미 경과한 시효기간의 효력이 소멸되어 그 때까지의 시효기간은 산입되지 않으며 시효가 중단된 후에 그 시효의 기초가 되는 사실상태가 다시 계속되면 그 때부터 새로이 시효기간이 진행된다(민법 제178조제①항 후단). 즉 재판이 확정된 때, 압류·가압류·가처분의 절차가 끝났을 때, 승인이 상대방에게 도달한 때로부터 새로운 시효기간이 계산된다.
시효의 장해로서는 시효의 중단 외에 시효의 정지가 있다. 소멸시기의 정지라 함은 일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 시효기간의 진행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고, 그 사유가 제거되었을 때 다시 나머지 기간을 진행시키는 제도로서, 이미 경과한 기간이 무로 돌아가지 않고 정지사유가 그친 뒤 일정한 유예기간이 경과하면 시효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시효의 중단과 구별된다.
민법에 규정된 정지사유로서는 (I)무능력자의 경우에 있어 소멸시효의 기간 만료 전 6월내에 무능력자의 법정대리인이 없는 때에는, 그가 능력자가 되거나 또는 법정대리인이 취입한 때로부터 6월내에는 시효가 완성하지 않으며(민법 제179조), 재산을 관리하는 부·모 또는 후견인에 대한 무능력자의 권리는, 그가 능력자가 되거나 또는 후임의 법정대리인이 취임한 때로부터 6월내에는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민법 제180조제①항). (ii)혼인관계에 있어 부부의 일방의 타방에 대한 권리는 혼인관계가 종료한 때로부터 6월내에는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민법 제180조제②항) (iii)상속재산에 있어 상속재산에 속하는 권리나 상속재산에 대한 권리는, 상속인의 확정, 관리인의 선임 또는 파산선고가 있는 때로부터 6월내에는 소멸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민법 제181조). (iv)그밖에 천재 기타 사변으로 말미암아 소멸시효를 중단할 수 없을 때에는, 그 사유가 종료한 때로부터 1월 내에는 시효가 완성하지 않는다(민법 제182조). 소멸시효 완성의 효과에 대해 학설은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권리가 당연히 소멸한다는 견해(절대적 소멸설)와, 권리가 당연히 소멸하지 않고 단지 시효의 이익을 받을 자에게 권리의 소멸을 주장할 권리, 즉 원용권 만이 생길 뿐이라는 견해(상대적 소멸설)가 대립되고 있는데, 전자가 판례와 다수설의 입장이다.
소멸시효는 그 기산일에 소급하여 효력이 생기나(민법 제167조), 소멸시효로 채무를 면하게 되는 자는 기산일 이후의 이자를 지급할 필요가 없으며, 시효로 소멸되는 채권이 소멸시효의 완성 전에 상계할 수 있었던 것이면 채권자는 상계할 수 있다(민법 제495조). 소멸시효의 이익은 시효기간이 완성되기 전에 미리 포기할 수 없으나(민법 제184조제①항), 소멸시효가 완성된 후에는 포기할 수 있다. 소멸시효는 법률행위에 의해 배제·연장 또는 가중될 수 없으나, 시효기간을 단축하거나 시효요건을 경감하는 특약은 유효하다(민 법 제184조제②항). 주된 권리에 대한 소멸시효의 완성은 종된 권리에도 그 효력을 미친다(민법 제183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