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곳의 비돔
이집트 탐사재단은 그들의 첫 번째 발굴지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노동자로 고생했던 국고 성 비돔을 택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넓은 고센 땅 중에서도 과연 비돔이라는 도시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역사적인 이집트 성지 발굴의 책임자는 스위스 출신의 에두아르 나빌(Edouard Naville)이었다. 1883년 1월 나일 강의 물이 어느 정도 줄어들어 삼각주 지역의 발굴이 가능해졌을 때 나빌은 그의 첫 번째 발굴에 나섰다. 그는 우선 고센 땅 자체가 삼각주 지방 중에서도 되도록 가나안에 가까이 있는 북동 지역임을 알아냈고 이곳에 널리 흩어져 있는 기존의 텔, 즉 유적지들을 샅샅이 조사한 끝에 텔 엘-마스쿠타(Tell el-Maskhuta)를 비돔으로 여기고 발굴을 시작했다. 원래 비돔은 이곳에서 출토된 비문에서는 고대 이집트어로 “페르-아툼 체쿠”, 즉 “체쿠에 있는 아툼의 신전”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어의 체쿠는 히브리어로는 숙곳으로 발음될 수 있고, 숙곳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출발한 장소(출 13:20)이기 때문에 그는 이곳을 비돔으로 확정짓게 된 것이다.
비돔의 아랍어 지명 텔 엘-마스쿠타는 “우상들의 언덕”이라는 뜻이고 원래 여러 종류의 석상들이 널려 있었던 유적지였다. 발굴 결과 비돔은 히브리 족장시대의 배경이 되는 이집트 제 15왕조, 즉 서기전 17-16세기에 번창했던 도시로 밝혀졌다. 이곳은 파괴된 후 계속 폐허로 남아 있다가 서기전 610년경 군사적 요새로 개발되어 로마시대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는 나일 강 하류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는데 비돔은 이 운하 변에 위치한 중요한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도 이 운하를 지속적으로 개발했고 비돔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기억 속에 고센 땅의 중요한 도시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한편 3개월간의 발굴이 끝난 후 나빌은 1885년에 “국고 성 비돔과 출애굽 경로”라는 제목의 발굴보고서를 출판하였다.
흔적만 남아있는 성터.
폐허뿐 아니라 쓰레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아직도 남아있는 돌기둥 웃고 사진을 찍을 일이 아닌듯. 관리가 너무 안되고있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