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국악예술원 소리뫼(문화재 7-3호 이준용류보존회)
 
 
 
카페 게시글
명인열전 스크랩 [인물과약력] 조통달 명창
소리뫼 추천 0 조회 131 09.09.24 16: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본명: 조동규(趙東奎)
출생: 1945년 음력 4월 26일 전북 익산시 황등면 태생
가족: 가수 조관우의 부친, 박초월(작은이모이자 양어머니인)
 
판소리 영재 유태평양을 길러낸 명창
 
흥보와 놀보 역의 달인 조통달 명창

조통달 명창은 우선 좋은 목을 타고 났다. 그리고 여러 유능한 판소리 대가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초인적인 독공 수련으로 득음(得音)을 했다.
남자 명창이 극히 드문 요즘 이렇듯 명창으로서 갖추어야 할 거의 모든 조건을 두루 겸비한 조통달의 존재는 참으로 값지다.
더욱이 무대에 서면 달덩이 같이 훤한 인물과 웅장한 체격으로 관중을 휘어잡고 국악계에서 선후배들에게 자상하고 인정있고 금전 비리 없는 인품 좋은 국악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스승들한테서 일찍이 여자를 멀리 해야 목이 상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단단히 받고 스스로도 극도로 조심한 바 여자 문제도 깨끗한 명창이다.

늘 국악이 끊이지 않았던 명창 박초월의 집과 학원에서 성장한 조통달은 그런 환경 속에서 자연스레 네 살 때부터 스스로 북을 쳤고 다섯 살부터는 판소리도 귀에 젖어서 곧잘 부르곤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조통달의 작은이모이자 양어머니인 박초월은 조통달이 어려서 어깨 넘어로 익힌 소리를 자작하는 걸 목격하고 매를 들며 국악 하는 것을 강력 반대하였다. 국악의 길이 너무나 힘들고 국악인에 대한 사회적인 괄세 또한 어린 조통달에게 박초월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날 그런 장면을 옆에서 지켜 보던 거문고산조 인간문화재 신쾌동이 재주가 있는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시켜 보라고 권유했다. 박초월은 결국 그런 조통달의 재능과 열정을 막지 못하고 나중엔 허락하고 판소리를 직접 가르쳤다. 그리고 이왕 하는 거 무슨 음악이든 막힘 없이 사통팔달(四通八達) 하라며 예명을 조통달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리하여 조통달은 박초월에게 단가와 판소리 다섯바탕을 배웠고 임방울한테는 단가와 수궁가, 적벽가를 익히고 정응민 문하에서 심청가를, 또 인간문화재 김연수와 김동준에게 김연수제 춘향가를 사사했다.
그리고 신쾌동한테 거문고산조를, 한영숙에게 전통무용을, 김윤덕과 성금연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아쟁은 자득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산조 가락을 짰다. 이밖에 정철호, 서용석, 박귀희, 이진순에게도 국악 등을 익히고 남민에게 연기 지도를 받았다.

조통달은 1959년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주최한 제2회 전국국악경연대회 성악부에서 쟁쟁한 선배들을 재치고 열네 살의 나이에 일등을 수상했다. 1972년에는 인간문화재 전수평가발표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다섯 살 무렵부터 신동 소리 듣고 기가 막히게 좋은 목 타고 나고 훌륭한 선생님들 소리 많이 물려받고 일찍이 각종 판소리대회의 일등 상들을 석권한 그였지만 그 상태에 자만하고 머물지 않았다. 입산하여 독공하고 무수히 고민하고 노력하여 마침내 삼십대의 나이에 득음의 꿀맛을 보았다.
열네 살 변성기에 목이 변질되어 좌절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차츰 목이 제자리를 잡았으나 공력 부족으로 그 좋은 목 가지고 그거 밖에 못하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임방울 명창이 꿈에 나타나 득음을 도와주기도 했다. 온몸이 퉁퉁 부을 만큼 온종일 소리에 매달렸다.
천하 명창 임방울도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으 찬자리에~” 같은 부분에서 ‘저어응윽--막‘ 하는 실성이 안나오면 소리하기 참으로 힘들다고 하는 것인데 조통달이 대구의 앞산 동굴에서 백일공부 막바지 무렵 어느날 죽기 살기로 소리를 지르다 보니 이상한 액이 목에서 분비되면서 그 가는 성음 ‘실성’이 잔뜩 쉰 목소리를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그날 내리 8~9시간을 그 실성에다가 살을 붙이고 공력을 들였다. 이때 조통달은 풍부한 성량과 수리상성을 얻었고 이후 소리가 자유자재로 되었다. 수 십년 동안 득음을 위해 달린,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결실이었다.

1982년에 금추(錦秋) 이남호(李南浩) 화백은 전주대사습놀이 판소리대회에서 조통달이 장원을 수상할 당시 소리를 듣고 임방울이 또 탄생했다고 감탄하며 조통달에게 우방(又芳)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2005년 9월 24일 국립중앙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조통달 명창이 흥보가 완창.
그의 일생을 통틀어 25번째 판소리 완창 공연을 함.
그런데 조통달은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임방울-박초월제 수궁가 예능보유자 후보로 인정받았기에 지금까지 주로 수궁가를 공연해 왔다. 무형문화재 법규상 그는 수궁가 명창으로 지정되어 있고 그래서 주로 수궁가에 대한 활동을 해왔으나 그는 창극 무대에서 흥보와 놀보 역의 달인으로 통하고 특히 놀보 배역을 본인 스스로 가장 재밌어 한다.
그렇듯 흥보가와 궁합이 잘 맞는 조통달이 1984년 12월과 1987년 6월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흥보가를 완창한 후 무려 18년만에 흥보가를 공연.

1968년부터 20여년간 국립창극단에 소속되어 여러 창극 무대에서 각종 주연을 맡으며 쌓은 그의 발림, 연기 실력이 흥보와 놀보의 상황을 보다 실감나게끔 인도.
<호남가>, <편시춘>과 같은 임방울제 단가로 목을 풀고 나서 흥보가 초입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 그리고 요즘은 잘 안불리는 <놀보 박타령>도 이어 부르고 ‘어질더질’ 하는 소리로 마무리짓는 끝부분까지 완창.
이 흥보가는 조통달이 박초월한테 배운 것인데 초입부터 <제비 후리러 나가는 데>까지 박초월에게 배웠고 이후 <놀보 박타령>~끝부분은 조통달이 다른 소리를 참고하고 스스로 짜넣고 해서 완성하였다. 박초월은 비교적 짧은 <놀보 박타령>(박 두통)~끝부분을 부를 줄 알았었고 <놀보 제비노정기>는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박초월은 스승 송만갑, 김정문, 오수암, 임방울의 소리를 두루 섞어서 흥보가를 짠 것으로 보이며 어쩌면 박중근(송만갑제), 박동실(김채만제), 정광수(김창환제)의 흥보가도 일부 참고했을지 모른다. 조통달의 말에 따르면 이 흥보가의 주된 골격은 김창환-오수암제 소리이고 서편제의 특성이 강하다고 한다.

조통달은 본인의 흥보가 가운데 눈대목으로 <흥보 매 맞는 데>, <흥보 제비노정기>, <흥보 밥 먹는 데>, <화초장타령>을 꼽았는데 조통달은 호인이고 후덕한 명창이지만 <흥보 매 맞는 데>와 같이 놀보가 흥보 괴롭히는 게 연극적인 요소로는 재밌는 구성이라고 했다.
김창환제 소리로 널리 알려져 있는 <흥보 제비노정기>는 흥보의 은혜를 입은 제비가 보은표 박씨를 입에 물고 흥보집으로 날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리로서 음악적인 완성도가 매우 높은 흥보가 최고의 눈대목이다.
<흥보 밥 먹는 데>는 굶주렸던 흥보가 허겁지겁 밥을 집어 삼키는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으로서 웃음을 선사하는 재담소리라 할 수 있다. <화초장타령> 역시 익살스러운 소리인데 욕심 많은 놀보의 언행을 과장하여 나타내는 대목이다.

이처럼 흥보가는 무척 해학적인 판소리이고 조통달 명창이 이런 대중적이고 웃음을 주는 만담 같은 소리들을 대체로 눈대목으로 내세운 것은 조통달 명창의 낙천적이고 순수한 감성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발췌:[월간 미르 2005년 9월호 통권 189호](서울:국립극장) 22~24쪽에 실린 글의 초고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