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렉트 콜/정호순
집 전화 벨이 울린다. 받으니까 여자의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콜렉트 콜입니다. 통화를 하고 싶으면 상대방을 확인하시고 숫자 버튼 중 아무
버튼이나 눌르십시오'
이런 콜렉트 콜 전화를 종종 받는다. 유선전화만 있을 때는 전화요금이라야 그저
몇 만원이었지만 식구가 다섯, 저마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보니까 한 달 전화요
금도 무시를 못한다.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려고 아이들 핸드폰을
학생요금으로 해 놓았더니 얼마 못가 수신만 할 수 있고 송신을 할 수 없기에 이
런 전화가 오는 것이다.
음성을 들으니 방금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둘째 딸이다. 나한테 전화를 좀 하
란다. 지금 버스 정류장인데 버스카드에 돈이 없다고 한다.
둘째는 지금 고삼인데 수능이 끝나고 호텔에서 알바를 하는 중이다. 교통비를 준
지 며칠 안된 것 같은데 학교에 갔다가 시내에 알바하러 가느라고 교통비가 더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돈이 떨어지면 미리 확인을 해서 가지고 나가면 좋을 것을 둘 째는 중.
고등학교 6년동안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참고로 대학생인 큰딸은 이런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아침부터 아빠를 호출하는 둘째가 그래도 밉지 않는 것은 언제나 인사성 밝고 사
근사근하면서 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뿐일까.
지금은 없어졌지만 큰딸 아이가 둘째와 같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툭 하
면 아빠는 푸름이(동생)를 편애한다고 했었다.
내 마음 진정 그렇지 않았기에 아니라고 항변을 하면 아내 또한 아무리 아니라고
변병을 해도 표시가 나고 눈에 드러난다고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을 해 보면 아이들 셋을 키우면서 유독 이 둘째에게 약한면을 보
이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식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첫째와 둘째는 2년 차이고 둘
째와 막내는 5년 차이가 나다보니까 그 사이 둘째에게 사랑이 더 집중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즈음은 출산율이 낮아서 예전처럼 목욕탕에서 아기들을 많이 볼 수 없는데 우리
아이 키울때만 해도 남탕에도 여자아기를 데려오는 아빠들이 꽤 있었다.
나도 그 중에 한 아빠였는데 첫째와 둘째가 거의 두돌이 될 때까지는 내가 데려가
서 목욕을 시켰던 것 같다.
둘째를 데리고 목욕탕에 간 어느 날이었다. 탕안에 서서 공을 가지고 놀던 둘째가
갑자기 아빠, 쉬 한다. 그럼 밖에 나와서 눠 했더니 탕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엉거
주춤 있더니 '쌌어' 하는 바람에 사리분별이 없는 아기의 행동이라 어이없어 하면
서 웃었던 적도 있었다.
서너살이 될 때까지 발음이 잘 안돼 선생님을 선상님으로 부르는가 하면 아이들이
어릴 때 자전거 앞에다 의자를 얹혀놓고 태우고 다녔는데 춥냐고 물어보면 '아니'
라는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아-이' 하고 장음으로 대답을 하던 둘째였었다.
그 발음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이어져 아내가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지만 혓바
닥 밑이 붙어서 그렇다고 병원에 가서 좀 따주라고 했다가 의사한테 한소리 듣고
온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아빠인 나보다 엄마를 덜 좋아했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아이
들이 통상 그러하듯 둘째도 아빠인 나보다 엄마를 훨씬 더 좋아했었다. 그 한 일
례로 방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집에서 아내가 방귀를 소리나게 뀌면 재미삼아 애들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둘째는
엄마가 뀐 줄을 뻔히 알면서도 아빠가 뀌었다고 했다.
엄마 바로 옆에 앉아 있어서 소리의 방향이 어디에서 나온 줄 알면서도 눈 하나 안
감고 시치미를 뚝 떼는데 그 모습이 재밌어서 아빠가 아니고 엄마라고 하면은 앞으
로 허리를 숙여 얼굴을 쭈욱 내밀며 눈을 감고 '아빠야' 라면 바락바락 우기면서 엄
마를 바라보던 아이였다.
그런 방귀에 대한 이야기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무렵에야 묵비권으로 바뀌었
는데 그때는 무조건 아빠라고 하던 말에서 슬그머니 후퇴하여 그런 상황이 벌어지
면 겸연쩍게 그냥 웃기만 했지 그래도 엄마가 그랬다고 결코 말하는 법이 없었다.
이런 거 하나하나 뿐 아니라 툭 하면 과제물을 가지고 가지를 않아서 학교까지 갔
다 주라고 하지를 않나, 오늘처럼 이렇게 버스정류장으로 나오라고 하지를 않나, 이
래저래 잘 챙기지 못해서 귀찮게 해도 둘째는 여전히 이쁘게만 보였다.
그 이뻐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그 아이의 언어씀씀이에도 있는데 작은 거 하나라
도 소홀이 하지 않고 기대에 못 미치는 용돈을 주어도 감사하다고 하고 가게에서
2층 집으로 올라가도 꼭 올라간다고 말을 하고 올라간다. 학교갈 때에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서는 큰딸과 달리 아무리 마음이 언잖고 서운
해도 다녀오겠다는 말을 꼭 남기고 집을 나선다.
그런 소소한 감사하다는 말들이 다른 것들을 엇셈하고도 남는지 침착하지 못해서
준비성이 부족한 것도 좀 덜렁대는 것도 그저 귀엽고 이쁘게만 보이고 버스정류장
에서 기다리는 아이가 학교에 늦을까봐 먼저 염려가 되는 것을 보면은 나도 모르
게 편애가 가기는 가는 모양이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몇 백미터정도,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 삼만원을 건네
주니까 '아빠, 나온 김에 학교까지 태워다 주면 안돼" 한다.
버스로는 서너정거장밖에 안되지만 학교까지는 언덕도 있고 해서 작은 오토바이로
는 무리가 따르지만 도서관에 갔다가 밤에 차가 끊기면 종종 데리고 오곤 했었고
또 아이가 애교스럽게 부탁을 하는데 어느 아빠가 매정하게 거절을 하겠는가.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오는데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날씨가 조금 쌀쌀하여
갔다오니까 얼굴도 차고 손도 얼얼하다.
디카가 없던 시절, 필름 카메라에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첫돌때까지 한 달에 한 번
씩 필름 1통씩 12통을 찍어서 12개월동안의 모습을 앨범에 담아 두었다.
뒷바라지를 풍족하게 해주지 못해 늘 미안하지만 아기 때 사진이 담겨있는 그 앨
범 첫머리에 아이들에 대한 나의 바램을 이렇게 써 놓았었다.
"밝고 맑고 건강하게"
나의 바램의 이 글귀처럼 둘째는 물론 아이들 셋 다 그렇게 밝게 맑게 건강하게 자
라주어서 고맙기만 하다.
- 07.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