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가족들과 주보지면을 통해 만나는 것이 두 달여 만의 일입니다. 8월 20일치의 주보를 발송한 후 오늘에서야 다시 주보작업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대부분의 가족들이 그간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시지만 그래도 알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써내려 갑니다.
지난 8월 18일 아침 10시 경, 저는 여느 날처럼 주보를 발송하기 위해 이천 우체국에 나갔습니다. 발송하는 우편물이 100통 가까이 되다보니 그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무게 별로 분류하고 일반 우편과 빠른 우편을 다시 분류한 후 요금별납 도장을 찍고 영수증까지 받으면 한시간 남짓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그 일이 제게는 여간 행복한 게 아닙니다. 디아스포라 가족들을 향한 저의 사랑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의 채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편물을 붙이고 잠시 PC 방에 들렀습니다. 얼마 전 비오는 날에 낙뢰를 맞아 컴퓨터 모뎀이 먹통이 된 까닭이었습니다. 홈페이지 꿈 해몽 코너를 돌아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여보, 전데요. 컴퓨터 A/S 기사가 방문하셨어요."
"무슨 소리야? 오늘 4시에 방문하겠다고 했는데!"
"어쨌든 일 끝나셨으면 빨리 들어오세요."
저는 서둘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A/S 기사는 이미 돌아간 후였고 아내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사는?"
"일 끝내고 갔어요."
"무슨 일을 했기에..."
"프로그램을 다시 깔았대요."
저는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 아내를 밀치고 컴퓨터를 켰습니다. 아뿔싸! 컴퓨터는 초기화면부터 모두 바뀌어 있었습니다. 저는 설마 하며 워드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보았습니다. 그간 제가 사용하던 프로그램은 간 곳이 없고 낮선 화면만 시야를 가득 메웠습니다. 저는 옆에 서 있던 아내에게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내는 저의 심상치 않은 태도가 의아스럽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기사가 그러는데 프로그램이 충돌이 생겨서 다시 깔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라 그랬지요."
"뭐야? 그러면 그 안에 들어있던 데이터는 어떻게 하고?"
"몰라요. 프로그램을 다시 깔면 거기로 옮겨지는 것 아니에요?"
저는 그만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한참을 넋이나간 듯 앉아 있다가 저는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야!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아? 10년 동안 쌓아 온 목회 자료가 모두 들어있단 말야. 그 동안 써 놓은 원고, 아이들과 했던 공동창작 자료, 설교 원고, 디아스포라 관계 자료들이 모조리 날아갔단 말야. 당장 그 기사 오라 그래!"
"기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내가 하라 그랬단 말이에요."
그제야 아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는 듯 했습니다.
그 간의 목회 자료야 어차피 옛날로 돌아갈 것이 아니니까 필요없다손 치더라도 당장 우편물을 보내야하는 디아스포라 가족들의 주소는 복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아내는 한참 동안을 말없이 있더니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다 날아간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인가 보죠 뭐!"
말이야 맞는 말이지요. 다 날아가 버렸으니 다시 시작하지 말라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않는 아내가 어찌나 얄미운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냅다 호통을 치며 억지를 부렸지요.
"당신이 지우라 그랬으니 무슨 수를 쓰든 당신이 복구해 놔!"
아내는 여전히 그깟 일로 그러냐는 듯 뾰루퉁 해 가지고 컴퓨터
앞을 떠났습니다.
저는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가기 무섭게 컴퓨터 전문가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차 여차 일이 진행되었는데 날아간 데이터를 살릴 수는 없느냐 뭐 그런 이야기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도중 제 내면 깊은 곳에서 슬그머니 이런 물음이 물어져 왔습니다.
"도대체 날아간 데이터를 살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더냐?"
저는 전문가들과 나누던 대화를 중단하고 교회 한 가운데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저 자신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컴퓨터 안에 넣어 두었던 그 데이터가 무엇이냐?'
'10여 년간 목회 하면서 얻어진 경험들과 그 경험을 통한 자각들을 글로 옮겨 놓은 것들이지요.'
'그럼 그 데이터라는 것은 경험과 자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로군!'
'말하자면 그렇지요.'
'그렇다면 데이터가 날아갔다고 그리 아쉬워 할 것은 없겠군!'
'예? 왜요?'
'데이터가 날아갈 때 너의 경험도 함께 날아갔는가?'
'그건 아니지요.'
'경험을 통한 배움 들도 그대로 있을 테고.'
'그렇지요.'
'그런데 왜 아쉬워하는가?'
저는 그만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얻은 것들은 다시 잊어버리게. 그거 붙잡고 있으면 그것에 갇히고 말지. 표현해 놓은 것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순간을 산다는 게 무엇인가? 쌓아둔 경험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 매 순간을 백지의 상태로 살게. 그게 판단하지 않음이고 그게 어린아이로 사는 것일세.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것이지.'
그제서야 저는 수일 전, 새벽 강변에서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것이 넉넉하다! 축적을 끝장내라!"
저는 이 말씀이 특정한 누구에게(10억 사건과 연관된) 주신 말씀인 줄 알았는데 그 말씀이 바로 저 자신을 향해 주셨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축적하는 일에 열을 올린다면 저는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는데 열을 올렸던 것이지요. 축적된 지식이 지혜가 되지 못하고 축적된 경험이 자각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한낱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저는 사실 1년 동안 디아스포라가 걸어온 가시적인 족적들을 생각하며 마음 든든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보를 받아보는 가족들이 100여명, 신앙모임에 참석하는 가족들이 60여명, 1년 동안 작성한 설교 원고가 1000여 매, 예수 어록을 해설한 묵상 자료가 1000여 매, 몇몇 출판사에서 책으로 묶자고 제안이 오고 인터넷 방송국이다, KBS 신우회다 이곳 저곳에서 오라고 하니 제가 마치 무엇이나 된 양, 무슨 대단한 일이나 하고 있는 양 우쭐거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보이지 않게 은밀히 쌓아둔 '영적 자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저의 축적이 저를 얽어매는 사슬이 되었고, 그것을 알아차린 저의 영혼은 '하드 포맷'이라고 하는 방법으로 저를 다시 자유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은 뜻밖에 일어난 갑작스런 사건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를 향해 가고자 하는 저의 영혼이 불러온 자작극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누구 때문에' 라는 말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자신들도 모르는 채 제 연극에 출연해 주신 A/S 기사와 제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지요.
아아, 축적했던 모든 것들을 깡그리 날려버리고 백지가 되었을 때의 자유로움, 그 홀가분한 느낌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기는 또 다른 이름의 축적으로 저를 얽어매는 일이 없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설사 또 다른 이름의 축적이 내 안에 생긴다 하더라도 겁낼게 없음은 그러고 있는 저 자신을 깨우쳐 주실 크신 분이 계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가 앞으로 가는 길에 생겨날 그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바울 사도께서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 새삼 알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빌 3:13-14)
이 얼마나 엄청난 고백입니까? 자신은 온갖 체험이라는 체험은 다 해보았고 삼층천(三層天)에 까지 다녀왔으나 그 경험에 매이지 않고, 다시 자신을 백지로 만들어 오직 가야할 목표만을 보고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구도자의 자세입니까? 저는 이 고백이야말로 한평생 '학생정신'으로 살았던 바울 사도의 삶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저는 바울 사도로부터 또 한 수 가르침을 듣습니다. 다음번에는 제 스스로 하드(harddisk)를 포맷(format)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아들 이삭을 잡아 바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살 때에 얻은 외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번제로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창 22:2)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듣고 이튿날 아침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해서 이삭과 두 종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사흘만에 아브라함 일행은 말씀하신 땅을 멀찍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두 종과 나귀를 남겨둔 채, 장작은 이삭의 등에 지우고 말씀하신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말씀하신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묵묵히 장작을 쌓았고 장작을 다 쌓자 곁에서 보고 있던 아들 이삭에게 달려들어 그를 단단히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들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칼을 뽑아 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번제란 제물에 각을 뜨고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이 예식을 아브라함은 지금 아들 이삭에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절박한 순간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는 다급한 하늘의 소리가 들려왔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잡아바치는 대신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으로 제물을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무슨 이유로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은 엄청난 요구를 하셨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피의 제물을 좋아하셔서? 아들을 사랑하는 아브라함에게 질투가 나서? 천만에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분이 주신 완전한 자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자유인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100살에 얻은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그 아들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그 집착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식에게 매인 자유를 박탈당한 노예와 같은 존재로 살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을 잡아 바치라'는 명령은 '네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명령은 하나님의 은총인 셈이지요.
우리가 만일 '이것만은 안돼!' '이것이 없으면 살 수 없어!'라고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고, 그 집착은 무거운 사슬이 되어 우리를 얽어매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있는 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의 조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마침내는 그것으로 인한 고통으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가족이든, 종교든, 지식이든 말입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
저는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 속에서 소중한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판단'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삭을 잡아 바치라고 하시는 지 그 명령 속에 담겨진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해 봄으로 그 말씀 속에 담겨진 의미를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저는 진리를 따르는 길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선생님의 수백 마디 가르침이 있어도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보지 않으면 그것이 진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논하고, 참과 거짓을 가리며, 진리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일에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진리를 몸으로 사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수백 마디 예수의 가르침을 알고 있으나 그것이 체험을 통해 얻어진 자각이 아니라면 그 가르침은 기름 없는 등잔이요, 소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단 한 말씀이라도 체험을 통해 자각한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요 삶을 변화시켜내는 능력인 것입니다.
어찌 작은 그릇이 큰그릇을 담을 수 있으며 학생이 선생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 예수 선생님의 학생들이라면 그분의 가르침을 몸으로 살아봅시다. 그렇게 살아본 후 얻어진 자각을 진리라고 선언합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를 버림으로 모든 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식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 모든 이를 자식으로 얻게 되어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버리라면 버려 보십시오. 맡기라면 맡겨 보십시오. 용서하라면 용서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 선생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 하셨는지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깊은 이해'-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자유며 평화로움입니다.
[기도]
주님,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사건들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한지를 알게 하시는 당신의 친절한 배려이며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순간 깨어있어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전화 통화를 하다보면 종종 '우연히 그 일이 일어났다'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예전에는 아무 느낌없이 지나쳤던 그 말인데 요즘 들어서는 '정말 우연히 그 일이 일어났느냐?'라고 되물어지게 됩니다.
우연이라는 말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 어쩌다가 일어난 일을 두고 쓰는 말인 것 같은데 우리가 만일 자신의 깊은 내면(內面)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바탕 생각)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면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연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깨어서 자신의 바탕 생각을 살피고, 자신의 영혼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린다면 결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마음공부를 시작하고 난 이후로는 우연이 없음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모든 일은 마땅히 일어나야 할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가장 적당한 사람들을 통하여 가장 완벽하게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굳이 '우연'이라는 말을 쓰자면 '우연이라는 이름의 필연'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지요. 이 우연이라는 이름의 필연을 우리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로 표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만일 우리에게 일어난 뜻하지 않은 사건(우연)이 나 아닌 다른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이라면 그것을 푸는 것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해 줘야 하는 것이지만 내게 일어난 뜻하지 않은 사건이 알고 보면 나 자신이 불러온 것이라니 그것을 푸는 것도 나 자신이 되는 것이지요. 남을 움직여 문제를 푸는 것보다야 나를 움직여 문제를 푸는 것이 백 배 낳지요.
그러하기에 영성의 진보로 가는 길을 선택한 우리들은 무슨 일이 생기든 그 시선을 밖이 아닌 안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바탕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지난주간 디아스포라 홈페이지에는 'yoojinman'이라는 아이디로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늘 이 사이트를 만나게 해주신 게 분명히 주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다른 건 다 미루고 본론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던 중 제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껏 그 어떤 종파에서 전하는 메시지도 주님의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자체도 인간의 해석이 들어간 것이기에....(그래도 성경은 그대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부터 주님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기도를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다락방전도협회(얼마 전 이단으로 판정되었음)를 알게 되었고 그곳은 어느 정도 저의 생각과 맞았기에 저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역시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남아있기에....(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줄이겠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인 존재이기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과 직접적으로 교류하면서 죽어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생각을 옳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님의 완벽하신 인도하심으로 한 권의 책을 접하게 되었고, 저는 그 책 속에서 순간을 단위로 주님과 함께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님은 돌아가시며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셨고, 성경은 '성령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깨어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라'고...
저의 생명 안에서부터 나오는 기도로, 저는 정말 24시간 주님의 임재 속에서 내가 아닌 성령께서 기도하는, 정말 주님과 영적 교류 속에서 옛 성경 속 성인들이 불 속에서도, 사자굴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던 그 평안과 기쁨, 감사, 그것들을 구체적(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모호함으로서가 아닌)으로 누리며 이 세상을 살수 있을 거란 확신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제가 말하는 그것인가요? 저는 아직 이 사이트의 소개나 내용을 자세히 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강 읽었을 때 제가 생각한 것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내일이나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이 사이트를 방문할 것이고, 자세히 목사님의 글들과 깨우침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과연 목사님의 말씀들이 나의 하나님께서 요즘 저에게 주신 커다란 깨달음의 덩어리들을 구체화시켜 보여주신 거라면 그 다음 무언가를 주님께서 또 제시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 생각에 목사님의 깨달음이 제가 요즘 받고 있는 주님의 메시지와 다르다면 기분 나쁘시겠지만, 그리고 상관도 하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그냥 세상에 많이 있는 또 하나의 이단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글을 쓰면서도 제 자신과 주님께 더욱 확고히 다짐을 하고 싶어서니까요. 어쨌든 진지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굉장히 무례한 글이라는 걸 알지만 만약 제가 요즘 깨닫고자하는 그 천국의 비밀과 또 그리스도에 대해 깨달으신 분이라면 이런 저의 무례함을 다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지금 목사님의 이 사이트를 만나게 된 것이 주님의 완벽하신 계획이란 것입니다. 저는 이 사이트를 누굴 통해서 알게된 것도 아니고 그냥 게임방에 왔다가 누군가가 들어왔던 것을 우연히 무슨 사이트인지도 모르고 들어오게 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요즘 제가 생명 걸고 매달리고 있는 그 무언가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의 글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저는 그 후 정말 그가 자신이 말한 대로 시간이 나는 때에 디아스포라 홈에 들어와 글들을 읽었는지, 그리고 자신의 생각들을 확인 받았는지 그건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건 또 제 알 바도 아니고요. 다만 분명한 것은 그는 자신이 얻고자 선택한 만큼 얻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저를 통하여 얻어야 할 것들이 있다면 그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를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지나가게 되겠지요.
어떻게 되어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저야 그저 감사할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디아스포라는 '지금-여기'가 하나님 나라임을 깨닫고 그 나라를 사는 사람들(적어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아닙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그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겠지요.
그런데 그가 우연이라고 말하는 그 자리, 즉 게임방에 들어가 앉게되었던 그 자리가 과연 누가 앉았던 자리일까요?
얼마전 장인 상을 당하셨던 '건이 아빠' 김정수씨가 캐나다로 건너가고 난 후 남편으로부터 전해지는 E-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건이 엄마' 송은주씨가 두어 차례 게임방을 드나들었습니다.(사실 그 게임방은 건이 아빠가 국내에 있을 때 종종 출입하던 곳임) 송은주씨는 PC방에 간 김에 남편의 메일 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디아스포라 홈에도 들어와 본 것이고, 하필 그 자리에 'yoojinman'이라는 분이 앉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섭리입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우연'이지만 만나고자 갈망하던 것을 만났으니 이것이야말로 만날 수밖에 없는 만남, 즉 '필연'인 셈이지요.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두 가지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께로 가고자 하는 진심의 바램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길을 '길'로 알아보느냐 하는 우리의 눈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기도와 소망하는 것에 대하여 단 한가지라도 답을 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 동안 눈멀어서 아버지의 답을 답으로 알아채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방황하고 다녔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의 관심사는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어서 그것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답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지난 시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기도에는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다구요? 천만에요. 자신이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잊어버리지나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체험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선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얼마나 확고한 믿음에 기초한 것인가에 따라 이루어지는 속도가 다를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길을 찾으면 길을 발견할 것이요, 선생을 구하면 선생을 만날 것이요, 신앙의 벗을 원하면 도반(道伴)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나는 이 가르침이 신실하다는 것을 모든 디아스포라 가족들 앞에서 증언합니다. 구하지 않거나, 구하고도 무엇을 구했는지 잊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위의 사건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의 진리는 '우리는 모든 순간 알든 모르든 누군가의 길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는 매순간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있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모든 순간 속에 깨어있다면 그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있지 못할 때는 드러난 현상만을 보고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다' '누가 상처를 받았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라고 말하게 되지요. 하지만 실상은 그들 모두가 서로를 돕고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파는 것으로 그를 도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그것을 알고 행하는 사람, 그는 예수의 말씀대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모든 관계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는 결코 '상처'니 '누구 때문이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이들의 입에서는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라는 말 외에 또 무슨 말이 나오겠습니까? 이러한 관계를 일컬어 바울 사도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셨다 생각되어 집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눈감고 보면 상처요, 눈뜨고 보면 사랑입니다. 건이 엄마 송은주 씨는 누구를 돕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길이 되었던 것이지요.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그저 자신을 위해 했을 뿐, 그 과정에서 누군가가 도움을 받았다면 그 또한 자신이 한 것이 아니니 내세울 게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고전 9:16)
바울 사도가 자신을 위하여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자신을 위하여 선을 행하고, 자신을 위하여 용서하며, 자신을 위하여 베풀고, 자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자신을 위하는 것만이 진정 남을 위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는 이방인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예수께서 설명하신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고, 베드로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던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이 아버지의 섭리에 따라 만나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연이라는 이름의 필연'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고넬료는 예수를 알지 못했으나 자신이 알고 있는 길로 궁극을 향해 가고 있었고, 진리를 향한 그의 갈망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완벽한 사람 베드로를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서로의 종교와 신앙의 방식은 달랐지만 궁극의 진리를 향한 고넬료의 갈망은 종교와 의식을 뛰어넘어 진리의 동반자, 도반(道伴)으로 베드로를 만나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완벽'을 봅니다. 사건이 일어나야 할 마땅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가장 적당한 사람들을 통하여 가장 완벽하게 일어나게 하시는 그분의 섭리를 말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는 그 완벽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 결과 이처럼 아름다운 만남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디아스포라 영성가족 여러분!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필연들, 그것이 일상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든, 사람들과의 만남이든 그 어떤 것도 가벼이 여기지 마십시오. 지금 자신에게서 일어난 사건들은 자신이 알아차리든 못 알아차리든 분명 자신의 영혼이 진보를 위한 체험으로 불러온 것들이고, 그 체험들은 여러분들을 새로운 차원의 세계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오직 깨어있어 매 순간 그 필연들을 맞이하십시오.
[기도]
주님, 성경 안에 기록된 이토록 아름다운 만남을 목격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서도 일어나게 하사 종교와 교리의 벽을 넘어 영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과 만남들을 보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이야! 신난다.(11월 5일 주일 설교)
이름 : 김종률 - 관련글 메일수신 번호 : 24
게시일 : 2000/11/03 (금) AM 04:29:34 조회 : 68
본문/사도행전 10장 1-8절
지난주간 KBS 신우회에 참석했다가 모임을 마치고 한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요즘 들어 습관적인 교회 생활에서부터 벗어나 본격적인 영적 세계에 눈을 떠 가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제게 하신 고백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근자에 들어 설명할 수 없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습니다. 십 수년 간 해온 직장 생활도 그렇고 일상도 그러했습니다. 신앙생활도 재미가 없어지고 인생의 어느 한 구석 신명나는 일이라곤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목사님께서 소개하시는 영성 서적들을 접하게 되면서부터 신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영성의 자각들이 일어나기 시작되었습니다.
하루는 거울 앞에 서서 물끄러미 제 얼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저의 깊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야, 신난다!
어느새 저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료하던 일상이 신명으로 넘쳐 났고 만나는 사건과 사물들마다 신비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이런 행복을 살고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제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뛰었고 마치 그분의 행복이 나의 행복인양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한 분 한 분이 영성의 세계에 눈 떠가고, 거듭남을 경험하는 가슴 벅찬 감동의 현장에 함께 있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난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터져 나오는 탄성'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즉 '하나님이 내 안에서 자각되어질 때, 그분이 나를 통하여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 '신난다'라는 말인 것이지요.
아, 이 얘기는 그냥 하는 이야기니까 사전 찾아보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는 그런 얘기일 뿐입니다.
이렇게 그분이 하신 '이야, 신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기뻐하고 있는데 저의 내면으로부터 불쑥 고개를 쳐드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너는 지금 어떠냐?"
제 가슴은 순식간에 싸- 하게 식어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요 근간에 들어 그리 감동적이지 못한 삶을 살고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두어 달 된 것 같습니다. 아내의 자그마한 말 한마디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하고 또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짜증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한 삼 년여 잃지 않았던 평상심이 순간순간 일어나는 감정에 위협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깨어있어야 한다'고 외쳤지만 깨어있는 것조차 마음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각 지역모임을 진행하는 일도 예전과 같은 감동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만일 매 순간 새로워지고 있었다면 결코 경이감을 잃지 않았을 것이며, 경이감이 살아있었다면 삶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제게서 감동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제 자신이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새로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영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말과 같은 것이겠지요.
생각해보면 저는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일년 남짓한 시간동안 매순간 새로워지는 저 자신의 삶을 영성가족들에게 고백하기보다는 한 순간 일어났던 영적 자각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를 비롯하여 우리 영성가족들이 '하늘 위의 일이나 땅 아래 일이나 그 무엇하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세상에 왔는지,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무수한 일들과 사건들은 왜 일어나는지, 죽음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죽음 후에는 어떤 세계가 전개되는지 모두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지식으로는 말입니다.
만일 이러한 우리의 '앎'이 '삶'이 되고 있었다면 우리의 삶은 결코 무료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을 통하여 깨달아지는 앎이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우리는 잘 알고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렇게 무료해지는 일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 단계로의 진보를 명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더 깊은 영성의 세계에서 손짓하여 부르시는 주님의 초청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 '뒤에 것은 잊어버렸다'고 고백하셨는데 저는 뒤에 것을 붙잡고 '예전에 내게는 이런 깨달음이 있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몇 주전 마산에서 올라오셨던 최용림, 박미경 선생님이 제게 무엇을 가르쳐주러 오셨던 천사들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주일 아침 7시 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남한강변을 함께 걷다가 최용림 선생님께서 불쑥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한 소식 하셨다고요?"
저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무슨 의미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최 선생님은 '한 깨달음' 얻은 것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뭐라고 말씀을 드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이포를 떠나시고 몇일 동안 그 말씀이 자꾸 되뇌어졌습니다. 그러다 한순간 '아, 이거구나. 이걸 알려주시려 하신 말씀이구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한 소식 하셨다고요?'라는 말은 지금이 아니라 예전에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저는 지금 매 순간을 깨달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깨달음을 가지고 지금을 연명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분이 물으셨을 때 저는 '예전의 깨달음'을 설명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이렇습니다'라고 단 한마디면 끝날 이야기를 가지고, 몇 년 전에 어쨌느니 하며 구구하게 옛이야기를 늘어놓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저를 다음 단계의 영적 세계로 몰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벼랑 끝으로 내어 몰리는 느낌이었고, 감동이 없는 일상의 경험들에서도, 미세하게 움직여 가는 의식의 흐름에서도 저는 그 때가 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두 달 전쯤의 일입니다. 하루 저녁 꿈을 꾸는데 꿈속의 저는 어떤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열 두세 명쯤 되는 것 같은데 그들은 모두 각각 다른 모임의 인도자들이라고 누군가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을 진행하시는 분이 다름이 아닌 제가 선생님으로 모시는 이현주 목사님이셨고 저는 그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찬찬히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선생님이라 불리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나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듯 예리하면서도 모든 것을 품어 안을 듯 부드럽고 그윽한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육신을 입으신 선생님으로 이현주라는 분을 마지막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서는 이현주 목사님이 선생님으로서가 아니라 선배로서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임자로서 모임을 진행하시던 이현주 목사님은 '모임을 진행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자'라고 제안하시며 저에게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주저하지 않고 짤막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제 기도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깨달음의 본질을 꿰뚫는 명쾌한 기도였습니다. 꿈에서 깨어나고 난 다음에도 제가 드렸던 기도의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으니까요.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다가 저는 그만 자리 가운데 계시는 선생님이라는 분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그분은 제가 기도하는 동안 내내 제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눈빛은 저를 삼켜버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눈빛 속으로 주체할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고 온화하게 느껴지는 그분의 미소는 저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승낙처럼 느껴졌습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제 마음에 찾아오는 첫 생각은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게 되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선생님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모시던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선생님을 다른 차원으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즉 선생님을 뵙는 저의 의식이 차원을 달리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꿈도 결국 저 자신에게 과거의 깨달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는 메시지로 이해되어 졌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이제 길을 떠나라!'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 말입니다.
지난 96년 태백에서 무작정 사흘을 걸어 제천 '배론성지'까지 갔을 때도 지금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때는 너무도 절박하여 말씀에 즉시 응하였지만 이번에는 그 소리를 듣고도 두 달 남짓을 차일피일 미루어 왔습니다. 이유는 가장(家長)이라는 책임감과 주보 발행에 대한 의무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난 두 달 동안, 아내로부터 가장 많이들은 소리는 '당신이 가장으로서 뭐 하는 일이 있느냐?' 라는 말이었고, 디아스포라 가족들로부터는 '사람들이 주보를 제대로 읽지도 않는데 그렇게 힘들여 매주 발행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 하는 일이 없으니 저야 집에서 있으나 마나한 존재이고, 주보를 제대로 읽지도 않으니 주보 발행하는 일에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는 '주저하지 말고 길을 떠나라'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어리석어 그 이야기를 그렇게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서야 생각해보니 그 이야기가 그이야기였음을 알 것 같습니다.
지난 토요일 무심코 성경을 펼쳤다가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 라마 나욧의 사무엘에게로 가자 사울왕은 사람들을 보내어 다윗을 데려오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사울왕의 심부름을 간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혀 춤을 추고 예언을 하는 예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몇 차례 사람을 보내도 소용이 없게되자 사울왕이 직접 다윗을 잡기 위해 나섰는데 사울왕도 라마에 이르러 신접(神接)하게 되었고 사울왕은 입에 거품을 물고 춤을 추며 예언을 하게 되었는데 예언을 멈출 수가
없어 꼬박 하루동안을 벌거숭이로 '힌트나베'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사울도 선지자 중의 하나더냐?'라고 말했다지요.
그런데 저는 이 글을 읽는 동안 내내 '이렇게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혀 벌거숭이가 되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출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 신명이 한없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예배시간이 임박하여 저는 교회 청소를 하기 위해 예배당에 들어서는데 벼락치듯 뇌리에 꽂히는 말씀 '두 마디'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깊이 침묵하라!'는 말씀이었고, 두 번째 말씀은 '길을 떠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더 깊은 세계로 가라'시는 주님의 명령이며 그분과 내가 정면으로 대면하는 '광야의 초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던 것을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가 된 것이지요. 아버지께서 무엇을 준비해 놓으시고 부르시는지 알 수야 없지만 이제는 그 부르심의 소리에 기꺼이 응해야겠다 생각이 되어집니다.
저는 이제 그분의 말씀대로 '깊은 침묵'에 들어갈 것이며 그분의 이끄심에 따라 길을 떠나려 합니다. 어느 날 떠날지, 얼마나 걸릴 지, 어디로 갈지는 전적으로 제 소관이 아닙니다. '오늘이다' 말씀하시면 미련 없이 떠날 것이고 '이제 됐다' 하시면 주저함 없이 되돌아 올 것입니다. 다만 바라기는 오늘 성경에서 읽은 신접(神接)한 사람들의 모습처럼 '멈출 수 없는 신명'을 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디아스포라 가족들께서도 어느 날 문득 토요일이 되었는데도 주보가 도착하지 않거든 그날이 된 줄로 아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사람들이 저를 욕하는 소리를 들어도, 가정생활에 무심하다는 아내의 핀잔을 들어도, 교회의 재정 운영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들을 들어도 그 모든 소리들이 '빨리 광야로 나아 오라'시는 아버지의 부르심으로 들립니다.
마치 그 옛날 야곱이 더 이상 집에 머물 수 없도록 만들어진 삶의 막다른 상황이 하나님의 친절한 부르심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막다른 길목은 '우리를 만나주시겠노라'는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한 것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주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
지 않겠다.」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그것을 미처 몰랐구나.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창 28:10-17)
[기도]
삶에서 경험되는 모든 막다른 상황들이 당신이 보내신 '초청장'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11월 12일 주일 설교)
이름 : 김종률 - 관련글 메일수신 번호 : 25
게시일 : 2000/11/10 (금) PM 10:50:20 조회 : 90
본문/마가복음 9장 23절
저는 이번 주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양일간을 구로지방 교육부에서 주최한 사경회에 참석해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이라는 과목을 강의했습니다. 교회 정서에 익숙지 않은 디아스포라 가족들을 위해 조금 설명을 덧붙인다면, 사경회란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들이 부족했던 선교 초기에 개교회 차원에서 할 수 없었던 성경공부를 일년에 한 차례씩 한 지역의 교회들이 연합으로 모여 일정한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성경을 배우는 그런 행사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들 아시다시피 지난 6월에 여주로 이주하고 나니 구로지방 쪽의 행사나 회의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경회 기획자가 저를 사경회 강사에서 빠뜨리게 되었고 저는 그 덕에 다른 일정과 심방계획을 잡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발견하신 사경회 기획자는 저를 특별반 강사로 편성했고 그 사실을 전화로 통보해 왔습니다.
저는 이미 양일간을 다른 스케줄로 할애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뜻밖의 상황을 만나게 되었으니...... 저는 제 신앙훈련의 첫 번째 지침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 전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고 기꺼이 응한다"는 원칙에 따라 다른 일정을 미루거나 취소하고 사경회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제 내면에서는 '분명 사경회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는 강한 느낌이 일어났습니다.
사경회 첫날 제 앞에 나타난 사람들은 50대 중반의 여자 권사 여섯 명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생활한복 차림의 낮선 목회자를 곁눈질로 흘끔 쳐다보고는 자기들이 읽고 있던 성경으로 시선을 돌린 후 다시는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는 지 졸고 있는 지야 알 수 없었지만 학생으로서 선생을 맞이하는 태도가 뭐 이따위인가 싶었습니다. 순간 열었던 가방을 다시 닫고 그냥 나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저를 그곳에 보내신 것은 아버지이시니 저야 그저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입만 빌려 드리면 그 뿐이고, 듣든 말든 그것은 그 사람들의 몫이니 내가 그 사람들의 태도에 관심을 가질 것도, 그들의 반응에 좌우될 것도 없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눈을 반쯤 감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준비한 이야기가 따로 없으니 보고 할 것도 없고 그저 말씀을 주시면 주시는 대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20분쯤 이야기를 진행했을까? 갑자기 한 분이 이야기를 중단시키셨습니다. 저는 눈을 떴고 이내 저를 뚫어져라 보고 계시는 여섯 분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신 분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가장 불손한 모습으로 '뻔한 얘기 또 하겠지' 하는 표정을 짓고 계시던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목사님 이야기를 끊어서 죄송합니다."
그의 태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공손해 져 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주체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뭔가를 말하려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예, 권사님! 말씀하시지요?"
"목사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제 속에 감춰 두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려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제 온 몸을 휩싸고 도는 듯 했습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하게 느껴지는지 정신이 혼미할 지경입니다."
저는 웃으면서 그 분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감춰두고 계셨는데요? 편하게 말씀해 보셔요."
권사님은 조금 머뭇거리는 듯 싶더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많이 아픕니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심장이 떨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도 병명조차 나오지를 않고 원인도 알 수가 없습니다. 남들에게는 말도 못하고 혼자 속을 태우며 이것 때문에 수도 없이 작정기도도 했고 기도도 받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때나 그렇게 떨리고 후들거립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 성가대나 여선교회 일로 봉사할 때 주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게 심할 때는 찬양을 하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그런 날은 집에 가는 동안 내내 떨리고 후들거려서 잠깐이면 갈 거리를 수도 없이 쉬어야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성가대도 사임하고 교회의 모든 일도 내놓아야 할 형편입니다. 막상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니 너무나 허무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어 괜한 원망과 울분만 쌓여갑니다. 그렇다고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할 수도 없고 속만 태우고 있었는데 오늘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제 속에 누군가가 빨리 말하라고 충동질이나 하는 듯 저를 주체할 수 없어 이렇게 말씀드리게 됐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저 좀 고쳐주세요."
"그래요? 잘 말씀하셨어요. 이따 강의 끝나고 기도해 드릴께요."
"아닙니다. 목사님! 지금 해 주세요."
권사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분들의 얼굴을 봤지요. 그런데 다들 재미난 구경거리 하나 생겼다는 그런 표정이 아닌 자기들도 충분히 이해한다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못해 비장한 기운마저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께서 벌이시려는 일이 이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의를 중단하고 그 분과 마주앉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함께 기도할 태세를 갖추고 그 권사님 둘레로 둘러앉았습니다. 강의하다 말고 이렇게 하기는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다리를 죽 펴고 앉아 보세요. 지금도 심장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립니까?"
"아니요. 지금은 괜찮아요."
저는 천천히 그분의 다리를 주무르며 그 분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일이 권사님께 왜 찾아온 것 같습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럼 이 일을 통해서 배운 것이나 깨우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그저 이놈의 몸이 왜 이렇게 속을 썩이나 하는 원망스런 마음뿐이지요."
"모든 경험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도 분명 하나님께서 권사님께 깨우쳐 주시려는 것이 있어 찾아 온 경험입니다. 그러니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 경험을 통해 제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기도하세요.
오늘 저녁 그렇게 기도하시고 주무시면 분명히 알려주실 것입니다. 배워야 할 것을 배우면 아픈 것은 지나갑니다."
"예, 알겠습니다. 목사님이 시키시는 대로 할께요."
"그럼 이제 다리에다 손을 얹어 보세요. 그리고 다리가 뭐라고 말하는 지 들어보세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귀로 들으려 하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이번에는 심장에다 손을 대 보세요. 그리고 심장이 뭐라 말하는가 들어보세요."
"........ "
"아무 소리도 못 듣는다고 무안해 하실 것 없습니다. 듣는 법을 훈련하지 않았으니까요. 오늘 저녁부터 일주일간만 밤에 주무시기 전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루에 두 번씩 다리와 심장에 손을 얹고 이야기를 나눠 보십시오.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사랑의 느낌으로 물어보고 그들이 하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어보세요."
"뭔 말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시키는 대로 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해 보시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권사님께 아무 대가도 없이 평생동안 일을 시키고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왜 그 모양이냐고 원망과 불평만 일삼는다면 권사님 그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런 배은망덕한 놈! 그렇게 말하고 당장 일을 그만두겠지요."
"심장과 다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장박동이 멈추지 않아서 권사님이 살아있었고, 다리가 부지런히 걸어 주어서 온 사방을 다닐 수 있었지요. 권사님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 한 번 한적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네요."
"권사님이 심장보고 뛰라고 해서 뛰는 것 아니고 다리보고 그렇게 생기라고 해서 그렇게 생긴것 아닙니다. 다시 말해 심장도 다리도 권사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빌려온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하기에 권사님이 살아 있도록 쉬지 않고 일하는 심장과 다리에게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부터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씩 가슴과 다리를 어루만지며 사랑의 느낌을 전해 주십시오. 그 동안의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 주십시오. 모든 치유는 사랑에서 이루어집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께요."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것은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지체가 제 기능을 못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신호요 사랑을 요청하는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면 그 지체는 아주 기능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몸은 언제나 영혼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기 위해 고통이라는 언어로 찾아오지요.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실 것을 믿고 그 메시지가 무엇인지 여쭈어보면, 즉 무엇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떨리고 후들거리는 증상을 나타나게 하셨는지 여쭈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답해 주십니다. 내일 그 답을 찾아오시면 권사님이 원하는 대로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날 강의는 다들 묻고 싶었던 숨겨둔 물음들을 묻고 거기에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2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습니다. 뒤 시간 강의가 없었기에 다행이었지요.
이튿날은 권사님들이 아예 작정을 하고 온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한 그간의 의문들을 아예 뿌리째 뽑겠다는 그런 태도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시작 기도를 드리고 어제 그 권사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떨리고 후들거리는 경험을 주셨는지 알려주시던가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벽에 꿈을 하나 꾸었습니다. 그런데 개꿈 같아요."
"그렇게 판단하지 말고 말씀해 보셔요. 꿈이 주는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하면 모두다 개꿈이고, 메시지를 알아들으면 개꿈도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저는 꿈을 잘 안 꾸는 편인데 새벽에 꾼 꿈은 너무나 선명했어요. 꿈에 한 선생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제가 여고생 때 무지 좋아했던 분인데 그분이 저희 집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을 만나려고 문을 열고 나서는데 아무리 찾아도 제게 맞는 신발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옷차림을 보니까 허름하기 짝이 없는데 그 모습으로는 도저히 선생님을 만날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을 대문 앞에 세워둔 채 현관문을 붙잡고 안타까워 하다가 꿈에서 깼습니다."
꿈이 이쯤 되고 보니 디아스포라 가족들은 무슨 뜻인지 이미 알아차리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지요.
"권사님은 형식을 갖추는 일에 마음을 뺏겨 정작 중요한 내용을 만나지 못하고 있군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권사님, 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맡아 이런 저런 활동들을 하고 계시지요?"
"예, 그런 편입니다. 성가대, 여선교회 회장, 도속장.... "
"그거 왜 그렇게 많이 하십니까?"
"봉사를 많이 해야 주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지요."
"권사님은 많은 일을 해서 실적을 쌓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자격조건이라고 생각하는군요. 그것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중심에서 비껴난 것이기에 권사님이 관심 가지셔야 할 것은 봉사라는 이름의 그런 잡다한 일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꿈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권사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은 채 하는 모든 일들은 자기 자랑거리를 만드는 자기 욕심일 뿐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일이 설교든, 봉사든, 구제든, 헌금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나면 그를 통해서 되어지는 일들은 모두 주님이 일이 됩니다. 그 일이 청소든, 빨래든, 밥하는 일이든, 애 키우는 일이든, 하다 못해 먹고 싸는 일마저 주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거듭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 세상의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주님의 일요,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모든 이이 자기의 일 일뿐입니다."
저는 그에게 자신의 손을 무릎에 얹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권사님의 손으로 안수하십시오. 그러면 나을 것입니다."
"웬걸요. 목사님! 목사님이 안수해 주셔야 낫지 제가 안수한다고 됩니까? 저는 능력이 없는 걸요."
"권사님 손에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찾아보십시오."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찾아 함께 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보십시오. 권사님. 권사님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권사님의 손은 권사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으니 지금 나를 통해 살아 계신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안수하시는데도 능력이 없단 말입니까?"
"말씀은 이해가 되는데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권사님은 능력이 없으나 권사님을 통해 살아 계신 그분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 모습이 바로 권사님의 진짜 모습,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알아차리며 사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믿음 대로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고 참 자아(영혼의 자아, 자신을 통해 살아 계신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을 계획하든, 무슨 일을 하든 생각대로 현실이 창조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뜻이 분리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이 있으나 그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사용하는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능력 없는 육신의 존재를 벗고 능력 있는 영혼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막 9:23)
믿는 자란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 맡긴 사람이기에 자기가 온전히 비워진 사람을 의미하며 자기가 비워진 사람이란 자신을 통해 살아 계신 분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자각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거듭난 사람, 영혼의 존재로서 자아를 자각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며 그 상태로 사는 것을 구원이요, 영생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자각에 이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을 요한복음의 기록에 따라 바구어 표현하면 이런 말이 되는 것이지요.
"자신을 통해 살아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자기의 본래 모습임을 깨닫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말하며 무엇을 구하든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버지가 자신 안에 있고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도 강의는 11시 40분에 시작해 오후 3시에 끝났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우거지 국도 한 그릇 얻어먹게 됐지요.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의 통로로 쓰이고 밥도 얻어먹으니 이게 바로 공짜로 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람 어떻게 됐냐구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요. 말씀대로 했으면 나았을 것이고 말씀대로 하지 않았으면 떨리고 후들거리는 채 그대로 살고 있겠지요. 이상 사경회 얘기 끝!
[기도]
당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언제나 할 수 없다고 뒤로 물러서기만 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셨으니 가르침대로 해 보게 하옵소서. 그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나를 찾아 떠난 여행·1
[너희 믿음대로 되라]
본문/마태복음 9장 27-31절
사랑하는 디아스포라 영성가족 여러분! 여러분들은 미옥(美玉)나무를 알고 계십니까?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라 정장한 자태로 무리 지어 서 있는 미옥 나무, 그 나무숲을 가까이 지나노라면 오와 열을 맞춰 도열해 있는 훈련 잘 된 병사들의 사열식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의 미옥나무 숲을 보셨습니까? 여름 내내 소나무인양 바늘모양의 잎으로 그 푸르름을 자랑하다가 가을이면 노랗게 자신의 잎을 물들여 온통 산자락을 유채꽃밭처럼 만들어 놓는 미옥나무,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이름마저 미옥(美玉)이라 붙여진 가을 단풍의 절정인 그 나무를 아십니까?
요즘 저의 우주 속에는 아름다운 미옥 나무가 무리지어 자라고 있습니다.
하라는 설교는 안하고 서두부터 웬 뜬금 없는 미옥 나무 타령이냐구요? 하하, 이제부터 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얘기하지 않게 됐는가.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는 도식 속에 사로잡혀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절대적인 잣대로 삼아 사물을 보려했던 제게 얼마나 강렬한 충격이었으면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까?
지난 11일 태백지역 디아스포라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서면서 저는 그 순간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길을 떠나는 시점'임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용하던 승용차를 두고 양평역에서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많은 날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짐은 줄일 수 있는 만큼 줄였고, 옷차림도 예배를 위해 입는 예복이 아니라 생활한복에 간편한 티셔츠를 받쳐입었습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의 기차였는데도 기차 안은 소풍날의 분위기처럼 온통 들떠있었습니다. 저는 정해진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간 시간을 핑계로 읽지 못하고 있던 책 한 권을 꺼내 서문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을 덮고 말았습니다. 이유인 즉슨 책의 내용보다 제 맞은편 좌석에 앉은 아주머니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게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때늦은 단풍 여행을 떠난 듯 싶었는데 정동진에 들렀다가 태백산 등반까지 할거라고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떠들어댔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가고 있는데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탄성을 질러 댔습니다.
"우와! 저 곧게 자란 나무들 좀 봐! 단풍이 노랑물감을 부어놓은 것 같아!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까?"
그러자 사람들은 일제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거기에는 한 무더기의 낙엽송이 늦가을 바람에 잎을 날리며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내 '저까짓 흔해 빠진 풍경을 가지고 뭘 그리 감탄을 하느냐'는 태도로 시선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주머니는 지칠 줄 모르고 감탄사를 뿜어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세상에 처음 와 모든 만물 속에서 신비를 체험하는 외계의 존재와도 같았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을 황홀경에 빠진 듯 하더니 마침내 호기심에 가득 찬 어린아이처럼 옆에 앉은 친구들을 쿡쿡 찌르며 말을 걸었습니다.
"얘들아! 저 아름다운 나무 이름이 뭐야?"
곁에 앉은 친구들은 마침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 정말 저 나무 이름이 뭔지 몰라서 묻는 거야?"
"그래, 알면 왜 물어보냐!"
그러자 곁에 있던 한 친구가 장난기가 발동한 듯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런! 바보. 자기 이름하고 같은 나무 이름을 묻다니.... 저 나무가 바로 '미옥 나무' 아니냐?"
"에이, 설마. 내 이름하고 같을 라고.... 장난하지 말고 저 나무 진짜 이름이 뭐야?"
그러자 또 한 친구가 거들고 나섰습니다.
"진짜 이름이 미옥 나무라니까. 아름다울 미(美) 구슬 옥(玉), 구슬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미옥 나무라고 부른다고. 자기 이름하고 똑같은 나무 이름을 여태 몰랐다니, 미심쩍으면 집에 가서 식물도감 찾아봐!"
드디어 한 순진한 아주머니를 다같이 놀려먹기로 작정한 것 같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내내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마침내 뒷좌석에 앉은 한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저 나무 이름이 뭐예요?"
그러자 아저씨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습니다.
"저게 미옥 나무 아닙니까? 저 흔한 미옥 나무도 아직 모르셨다니... 아주머니 혹시 간첩 아닙니까?"
아저씨는 아예 한 술 더 떠서 아주머니를 놀렸습니다. 아주머니는 마침내 낙엽송의 이름을 '미옥 나무'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 상황이었더라도 그리 되었을 것 같았습니다.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이 원숙한 연기자들처럼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해냈으니까요.
"아주머니, 저 미옥 나무에 얽힌 슬픈 전설을 모르십니까?"
아주머니를 완벽하게 놀려먹기로 작정을 한 듯 이번에는 아저씨가 말을 걸고 나섰습니다. 모든 시선이 뒷좌석에 앉은 아저씨 쪽으로 모아졌습니다.
"옛날 어느 대가 댁에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삼대 독자였는데 나이가 차서 혼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혼인한 지 3년이 지나도 태기가 없자 마침내 시어른들은 며느리를 집에서 쫓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며느리는 갈 곳이 없어 집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며느리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집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몇 날 며칠을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끝내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며느리가 죽고 나자 그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가 솟아올랐는데 그 나무는 순식간에 새끼를 치고 또 새끼를 쳐서 산자락이 금새 그 나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못한 며느리의 한이 나무가 되어 그 한을 풀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며느리의 이름을 따서 나무 이름을 '미옥 나무'라고 부르게 됐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였습니다. 삐리리~ "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박수를 치며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리고는 과연 순진한 아주머니가 어떻게 반응을 할까 자못 궁금했던지 이번에는 시선이 아주머니에게로 모아졌습니다. 아주머니는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는 듯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잠시 후 볼멘 소리로 한마디 내 뱉었습니다.
"애 못 낳는 게 무슨 여자 죈가? 사내가 부실해서 그럴 수도 있지. 여자가 애를 얼마나 잘 낳을 수 있는지 나무가 되어 증명하잖아."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들이 키득거리며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순진한 아주머니는 여행을 하는 동안 내내 낙엽송을 보기만 하면 탄성을 질러댔습니다.
"이야! 미옥 나무다."
태백선을 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낙엽송 밭이 오죽이나 많습니까? 아주머니는 지치지도 않는 지 쉬지 않고 미옥 나무를 외쳐 댔습니다. 그때마다 객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기차는 제천을 지나 영월을 목전에 두게 되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다가 아무래도 이 아주머니에게 그 나무가 낙엽송임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데 난데없는 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그 나무가 왜 낙엽송이냐? 미옥 나무지!"
저는 대뜸 대꾸를 했습니다.
"아니, 낙엽송은 낙엽송이지 낙엽송이 왜 미옥 나무입니까?"
"그건 너의 우주에서 부르는 이름일 뿐이다. 그녀의 우주에서는 미옥 나무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 각자는 자기 우주의 중심이다. 네 우주에서 그 나무를 낙엽송이라 부른다고 모두가 그렇게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너희 모두는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각각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너희 각자는 자기 우주의 창조자다."
그 순간 제 머리 속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시원하게 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장실 가는 것도 잊고 다시 자리에 앉아 접어 두었던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책에 바로 이런 글이 쓰여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한 인격체로 성장하여 사회에 편입될 때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개성과 자신이 선택한 가족의 상황에 적응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미 자신의 내면에 인류의 모든 것, 인류의 모든 국면을 통합해 나가는 겁니다. 당신들의 겉 사람은 사실 당신들의 속 사람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직 어린아이일 때 당신들은 인류의 집단의식에 첫발을 내 딛게 되고, 그리하여 점차 당신들의 문화와 국가와 인종에 공통되는 신념체계 속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신념체계는 국가마다, 지방마다 서로 다릅니다. 공통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들이 별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속 사람마저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성인이 될 무렵에는 그 의식이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기가 그렇게도 고통스럽고, 그래서 당신 자신의 겉 거죽에 다 그러한 판단을 투사시켜 버립니다.
진실로 알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수백만, 수천만, 수억, 수십억의 인간 얼굴이 있지만, 당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의 얼굴은 없습니다. 희생자였던 적도 있고, 가해자였던 적도 있습니다. 당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당신 자신임
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본래 위대하고 강력한 에너지입니다. 창조주이신 아버지와 하나인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참다운 능력을 모르고, 또 자신이 얼마나 경이롭고, 창조적이며 다차원의 존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제 당신들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위대한 변화의 시기입니다. 지구에 주기적인 변화가 있듯이, 인류의 의식 또한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에 가득 찬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알아두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의 현실을 창조한 것은 당신들이니, 당신들 자신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변화를 창조할 수도 있고, 사랑으로 변화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변화를 창조한다면, 여러분은 지구의 황폐와 파멸을 보게 될 것입니다. 현실을 창조하는 건 바로 자신이고, 멋진 낙원을 창조하는 것도 바로 자신임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용기와 사랑을 지닌 채 나아간다면, 그땐 진정으로 파멸을 맞지 않게 될 것이고, 그 어떤 것도 정해진 것은 없음을 진정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다차원 적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은 아마도 다른 시간대 따위로 이해하려 드실 지 모르지만, 당신들이 의식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지구 차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구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삶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정 불변의 상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은 존재하는 사람들만큼 많은 차원이 있고, 여러분 각자는 여러분 우주의 중심 태양입니다.
당신들 각자가 당신들 자신의 우주를 창조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당신들이 당신들의 삶에 끌어들인 모든 사람들과 공동 창조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지구는 풍요롭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져 있습니다. 당신들이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어떻게 이런 마술 같은 일이 가능하냐고 의아해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이런 마술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 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당신들은 매일 그 마술을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풍요로움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기쁨을 창조할 수 있고, 경이로운 웃음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 열쇠는 바로 당신들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또 한가지 여러분이 이해해야 할 사실은 이 지구에는 두 가지 표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표현과 두려움의 표현. 사랑과 거기에 따르는 온갖 경이로움의 표현이 아닌 모든 것은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당신들은 언제나 이 두 갈래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합니다. 무슨 일이 닥치든 사랑의 길을 선택할 수도, 두려움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음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가슴이 노래 부르게 하라」中에서)
아아, 각각 다른 차원의 우주! 저는 책을 덮고 눈을 감았습니다. 사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고 모르던 사실도 아니었으나 저는 이제 수십 억 개의 우주와 수십 억 개의 차원이 존재함을 확연히 알 것 같았습니다. 각각의 우주와 차원의 중심인 각 개인은 자신의 창조 법칙에 따라 자신의 우주를 작동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두려움의 창조방식으로 자신의 우주를 움직여 가는 사람은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사랑의 창조 방식으로 자신의 우주를 움직여 가는 사람은 사랑과 기쁨과 행복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겠지요.
예수께서 이 법칙을 '네 믿음대로 되라'는 한 말씀으로 정리해 주셨던 것입니다. 곧 모든 세상은 자기 믿음의 신념체계에 따라 창조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상대방을 배려해서 한 말이 그에게는 욕으로 들리고, 위로한다고 한 말이 그에게는 비난처럼 들려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각자는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곧 자기 우주를 작동시켜는 자기 법칙에 따라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상대방을 고려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곧 모든 선택의 순간에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이 무엇이냐' 만 물으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을 하는 것이 자신의 영적 진보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이 좋게 반응해 주면 기뻐하고 상대방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분노하는, 그런 상태는 바로 상대방에게 자신을 맡겨놓은 자기 우주의 창조자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상태인 것입니다. 멜로 신부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상대방에게 조종당하는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을 일컬어 '기꺼이 주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네가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든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 나는 그저 내가 표현 할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을 하겠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더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자기의 영적 성장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계속)
[기도]
우리가 믿는 대로 우리의 세계가 창조된다는 사실을 친히 알려 주신 주님! 매순간 우리 자신의 영적 진보를 위한 최상의 사랑을 믿음으로 선택하게 하옵소서. 주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나를 찾아 떠난 여행 2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본문/창세기 1장 1-31절
지난 한 주일 동안 눈병이 난 덕분에 컴퓨터 모니터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 지난 주 주보를 발행하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때아닌 휴가를 즐길 수 있었고 그간 제대로 듣지 못하던 음악도 맘껏 들을 수 있었습니다. 눈 덕분에 귀가 호강을 좀 했지요.
그 전(前)주에 이야기하다 중단한 여행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 된 태백 디아스포라 모임은 주일 아침까지 계속 되었는데 주일 아침 저는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한 변화라니까 무슨 거창한 신비 체험을 연상하시나본데 그런 게 아니라 화장실 들락거리는 배변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면 먹고 배설하는 일만큼 신비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간 그 신비를 실감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주일 이른 아침, 화장실에서 부르는 통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저는 그 부름에 따라 화장실엘 들어갔지요. 한차례 기분 좋게 배설을 하고 세면을 한 후 욕실에서 나왔는데 한 30분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신호가 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또 들어갔지요. 그랬더니 마치 기상 후 첫 배설인양 먼저 만큼의 분량으로 다시 변이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속으로 '거, 참 이상하다. 이 작은 배에(사실은 배가 조금 나왔으니 작은 배는 아니지요- 으악! 신체의 치명적인 부분을 이렇게 쉽게 공개하다니...) 저장된 양이 뭐 이리 많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을 다 보고 다시 욕실에서 나와 자리에 앉았는데 으, 이게 웬일입니까? 화장실에서 또다시 호출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들어가 한 무더기 배설을 하고 또 나오고, 나오면 다시 불러 또 들어가 다시 배설을 하고.... 설사를 하는 것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배변을 하는데 그날 아침 화장실에 불려간 수가 자그마치 일곱 번이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생애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배설물들이 어디 숨어있었기에 그렇게도 많이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체중계가 그곳에 있어 몸무게를 달아보았더라면 한 1킬로그램은 족히 빠졌을 것 같았습니다.
몸 안에 더 이상 어떤 축적물도 남겨두지 않고 모두 비워냈을 때의 그 홀가분함, 그것은 배변의 기쁨 그 이상이었었습니다.
모두 비워내고 나면 이토록 홀가분하고 자유로운데 우리의 의식은 늘 무엇인가를 붙잡아 두려고 그토록 기를 쓰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아무 것도 붙잡아 두려 하지 않는다면 소유로부터 자유로와 질 것이요, 소유로부터 자유로와 진다함은 단순히 물질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지켜야 할 자아가 더 이상 없어진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을 맨 처음 경험하는 상황처럼 아무 편견이나 판단 없이 경험을 경험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되겠지요.
예를 들어 경제적인 넉넉함 속에 살던 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그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조건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부류의 사람이 행복해 질 방법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D 멜로 신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신병원을 방문한 한 사람이 보니, 환자 하나가 안락의자에 앉아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룰루, 룰루....."
"이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 룰루라는 여자가 이 사람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지요."
계속해서 병동을 둘러보고 있는데, 또 한 환자가 벽에 머리를 박으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룰루, 룰루....."
"이 사람은 또 왜 룰루입니까? 이 사람도 룰루에게 버림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은 다시 룰루와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이 두 가지 때문에 생겨납니다.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원하는 것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얻어지는 것도 아니요, 가진 것을 지키려 할 때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자각을 통해서만 얻어집니다. 그 자각이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얻어야 할 것이나 지켜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자각은 비로소 모든 경험을 경험 그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어려운 일은 어려운 일로서 즐기게 하고, 쉬운 일은 쉬운 일로서 즐기게 하며, 만남은 만남으로서 즐기게 하고, 헤어짐은 헤어짐으로서 즐기게 하며, 혼자이면 혼자임을 즐기게 하고, 여럿이면 함께 함을 즐기게 합니다.
행복한 일과 불행한 일이 따로 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불행이라고 믿는 것을 밀어내려 애쓰게 되고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끌어당기려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판단을 내려놓아 보십시오. 판단은 자기 안에 축적된 지식으로 인하여 생겨나며 그 지식은 자기를 가두는 틀이 되어 밀어 낼 것과 끌어당길 것을 판단하는 잣대를 만들게 됩니다. 우리 안에 그 잣대가 존재하는 한 즐길 수 있는 것과 즐길 수 없는 것이 분명히 구별되게 됩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건들은 자신이 어느 만큼 자유로와 졌는가를 측정하는 저울추와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로와 졌다함은 즐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때 아무 것도 거절할 것이 없게 되고, 그 때에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유로 가는 관문이 바로 축적한 것을 비워내는 것, 즉 판단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삶은 우리 영성의 깊이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좋고 나쁜 게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거룩한 것입니다. 그 체험은 '나'라는 몸을 통한 '하나님'의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를 판단 없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때 우리의 욕망이, 삶의 긴장이, 온갖 불만이 사라질 것입니다.
'비판단!'
이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까닭 없이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째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숙변을 제거하듯 묶은 삶의 찌꺼기를 일곱 번씩 화장실을 드나들며 비워낼 수 있었습니다. 알량한 지식이 만들어 낸 판단을 내려놓고 비로소 다시 태어나는 '한 살 인생'이 된 것입니다.
"똥 한 번 푸지게 누고 거 되게 거창하게 떠드네!"라고 누군가 흉을 본다해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사로운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일곱 번 화장실 드나들고 '한 살 인생'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저는 하루 종일이라도 화장실 드나드는 일을 즐거워하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일곱 번 화장실을 드나드는 사건을 통해 이 한 말씀을 듣습니다.
『네 몸에 쌓인 숙변을 제거하듯 네 의식의 묶은 찌꺼기들을 깨끗이 비워내라!』
이렇게 저는 한없이 가벼워 진 몸과 마음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오후 3시경 태백을 출발하여 발 닫는 대로 방향을 잡은 것이 강릉 쪽이었습니다. 가다가 숨이 차면 길가에 퍼져 쉬고, 다시 다리에 힘이 오르면 또 걸었습니다.
문득 수 삼년 전 태백산을 넘어 제천까지 갔던 첫 구도행(求道行)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심경은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답답함이었는데 지금 심경은 한없는 자유 그 자체였습니다. 마치 중 고등학교 시절, 차비가 없어 20리 길을 걸어서 귀가하던 제가 온 몸 두둑이 돈 다발을 지니고 차도 마다하고 산책을 즐기기 위해 그 길을 다시 걷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러고 보니 몇 해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 스스로도 단 몇 해 만에 이토록 행복해 질 수 있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자신이 행복해 지는(성숙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라고 말할 것입니다. 짧은 시간 아이를 키워보면서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실감했었습니다. 그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누가 일찍 들어 오라 말하지 않아도 일찍 들어오고, 그 좋아하던 음악도 취미생활도 마다하고 그저 아이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습니다. 그러니 무슨 다른 오락이 필요했겠습니까?
나는 이 재미가 바로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뒤집고, 기고, 걷고, 말 배우며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즐거웠는데 하물며 자신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영성에 눈을 뜨고 자기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해 가는 사람들이 다른 인위적인 즐거움을 그만두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신이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감동이 없다는 것은 성장이 멈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고 짜증이 난다면 알아차리십시오. 자신의 영혼이 더 이상 진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으로 삼수령(피재)를 넘었습니다.
가야할 목적지가 없으니 서두를 것이 없고 해야만 되는 의무가 따로 없으니 중압감이 없고 지켜야 할 규율 따위가 없으니 아무 것도 나를 제약할 수 없는, 바람이 불면 바람을 즐기고 숨이 차면 가쁜 호흡을 즐기고 쉴 자리가 나오면 안식을 즐기는 말 그대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해야할 마땅한 일이 따로 없기에 주어진 모든 상황을 기꺼이 즐길 줄 아는 그런 사람입니다.
문득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뇌리를 치고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0-37)
사마리아 사람이 제사장, 레위 사람과 달랐던 것은 사마리아 사람은 따로 해야할 의무 같은 것이 없었던 나그네였고 제사장, 레위 사람은 자기들이 해야 할 마땅한 의무가 있는 사명감 투철한 사람이었다는 것!
아아, 이렇게 의무에 사로잡히니 누구를 위한 의무인지를 잊어버리고, 일에 매이니 무엇 때문에 일해야하는 망각하게 되는구나!
사람들은 바쁜 것은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바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라고.
바쁘면 일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일의 노예가 되기 십상이고, 일을 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사명감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니.... 그래서 옛 지혜자들과 우리의 선생님이신 예수께서는 '나그네'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게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봉화에 계시는 전우익 선생님 댁에 갔다가 농사일이 바쁘신 것 같아 좀 도와 드릴까요 했더니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남의 즐거움을 뺏으려고 해? 필요 없어. 나는 내가 즐길 수 있을 만큼만 농사를 지어. 욕심부리며 많이 지으려 애쓸 거 뭐 있어?"
이 말씀은 오랫동안 제 귓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서 농사를 즐기는 진정한 농사꾼의 모습을 보았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가까이 에서 그 분을 뵈었었으나 단 한번도 그분이 조급해 하거나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늘 나그네임을 자각하며 사셨기에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잃지 말아야 할 것은 나그네 의식입니다. 나그네야말로 다가오는 어떤 상황도 마다하지 않으며 그렇게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로 그 사건들이 주는 참된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누리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나그네 의식이란 일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일의 노예가 되지 말란 말이며 바쁘지 말란 말이 아니라 일이 주는 즐거움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피재에서부터 산길로 접어들어 몇 구비를 돌아 나오니 한강이 시작되는 창죽 마을이 나왔습니다. 길에서부터 한강 발원지인 검룡소 까지는 7킬로! 태백에 머무는 동안 자주 드나들던 곳이기에 굳이 들러보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넘나드는 드넓은 한강도 그 시작은 작은 샘에 불과했으니, 그 이치를 생각하면 장차 드러날 디아스포라의 모습도 한 눈에 그려질 것 같습니다. 디아스포라가 처음 시작될 무렵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지금도 생생한 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가면 길이 되리라!"
저는 이 말씀을 믿고 서슴없이 길을 나섰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아스포라는 새로운 기독교 신앙의 흐름을 여는 '영성의 샘'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새 날은 어두워졌고 기온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억겁의 세월동안 몸에 배인 습성인지 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종종걸음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추며 '네가 가야할 목적지가 따로 있느냐? 가다가 몸을 누이면 거기가 목적지인걸!' 이렇게 수도 없이 되뇌였습니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 이름 모를 한 다리 위를 건너는 데 갑자기 온 사방이 환하게 밝아왔습니다. 보름달이 동산 위로 떠 오른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표현할 수 없는 희열에 휩싸이게 되었고 입에서는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다' 태고의 노랫가락이 터져 나오며 온 몸은 그 노랫가락을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등에 지고있던 배낭과 두텁게 껴입었던 외투를 벗어 던지고 깊은 내면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신명을 따라 봄날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녔습니다. 여기엔 박자도 기교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표현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기쁨 속에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날 아버지의 기쁨이 어떠하셨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아니 겅중~겅중 뛰어다니시며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저의 몸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지금 내 집 뜰이 얼마나 넓은지, 내 집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두 발과 두 눈으로 똑똑히 체험하고 있다!"
그 말이 제 말이었는지, 제 입을 통한 아버지의 말씀이었는지 저는 지금도 분간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가 서정적으로 쓰고, 시적으로 말하며, 사랑스럽게 웃고, 노래 부르거
나 춤출 때면, 나는 나타나지 않기가 힘들다."(신과 나누는 우정 中)(계속)
[기도]
아버지께서 지으신 이토록 아름다운 세계를 우리의 몸을 통하여 체험하시니 고맙습니다. 매순간 우리의 체험이 곧 아버지의 체험임을 잊지않게 하옵소서. 주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나를 찾아 떠난 여행·3
[들음이 있으면 들음대로 행하라!]
본문/마태복음 21장 28-32절
그날 밤 9시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하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마중을 나온 후배 목사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하루 밤 머물기로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조금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비록 알이 배인 다리가 고통을 호소해 와 반쯤은 끌다시피 하며 걸음을 걸었지만 상쾌한 기분만은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볕이 좋은 곳에 이르면 배낭을 내려놓고 도로변에 설치 된 가드레일에 기대 볕을 즐겼고 볕을 즐기다 졸음이 오면 졸음을 즐겼습니다. 이처럼 다가오는 어떠한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맞아들여 그것을 즐기니 그 어떤 것이 저의 이 행복을 방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처럼 한 번 얻고 나면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는 행복, 이것이 바로 우리의 선생님 예수께서 주시는 행복임을 더 깊이 실감하게 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그렇습니다. 저는 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 곧 깨지지 않는 행복을 만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몇 해 전 어느 날인가 꿈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를 찾아오신 분이 그분이심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제 머릿속에서는 재빠르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던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저하지 않고 베드로 사도께서 고백하셨던 대로 답변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
그랬더니 주님은 손을 내 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베드로 얘기고, 베드로 얘기 말고 너의 얘기! 너에게 나는 누구냔 말이다."
저는 한 참 동안을 답변할 말을 찾지 못해 진땀을 흘리다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때의 기분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제가 딱히 주님이 누구 시라고 고백할 말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그분을 체험한 적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저의 관심사를 종교에서 영성으로, 율법에서 은혜로 옮겨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고백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왜 각각 달랐는지 이해가 되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성의 깊이에 따라 하나님을 다르게 체험했던 것이지요. 두려움의 영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체험할 때 '두려운 분, 진노하시는 분, 질투하시는 분, 복수하시는 분'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사랑의 영성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 그 자체이신 분, 인자하신 분, 용서하시는 분'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의 영적 상태가 달랐던 것임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두려움으로서든, 사랑으로서든 하나님을 체험한 적이 없었기에 그분을 향한 고백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남이 한 고백만 열심히 외우고 주석을 붙이고 설명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처럼 허망하고 참담한 심정을 가졌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남이 설명했던 예수를 앵무새처럼 떠들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직 제가 만나고 직접 경험한 예수만을 말하기로 작심(作心)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부터 설교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자랑거리인양 짊어지고 다니던 책 보따리를 쓰레기처럼 던져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매순간 저를 찾아오신 예수를 만나고자 귀를 열게 되었고 그 결과 작은 경험을 통해서도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날마다 체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저는 점점 더 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되었고 그 자각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으로 제 삶을 변화시켜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너무나 행복해 져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의 깊은 내면에서는 이 행복이 누구 덕분인지를 묻게 되었고 그 답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제가 예수를 만난 덕분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를 만난 덕분에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는 행복을 얻게 되었고, 더 이상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살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흉내를 내지 않고 내가 나로서 사는 삶, 억지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처럼 사는 삶, 그런 삶이 제 앞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때에 제 입에서는 이런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을 만난 덕분에 저는 행복해 졌고, 당신을 만난 덕분에 사는 것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살고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 진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비로소 주님의 물음에 답변할 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예, 주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임계로 향하는 도로 변에는 검룡소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실개천이 되어 흐르고 있었고 저도 그 흐름을 따라 물처럼 흘렀습니다.
그렇게 어느 만큼인가 가다 보니 개울을 가로지른 그림 같은 징검다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개울가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넌 후 밭둑으로 난 작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길은 비탈 밭을 지나 낙엽송 숲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스팔트를 걸을 때와는 또 다른 정취였으며 걷기도 한결 쉬웠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이와 같은 것이라 여겨집니다. 길은 언제나 열려져 있고 그 중에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체험은 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현실을 바꾸고자 한다면 선택을 바꾸십시오. 자신의 삶이 이렇게 된 것은 나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다른 상황이 자신을 몰아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자신이 허용하지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일 징검다리를 보고 '음, 저런 길도 있군' 하고 지나쳤다면 유리알 같은 개울물도, 한가로이 몰려다니는 송사리 떼도, 밭둑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경험도, 아름다운 낙엽송 숲에서 느끼는 고요도 분명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의 길을 선택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랑을 체험할 사건과 상황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의 길을 선택해 보십시오. 그러면 싸움과 분노와 미움을 경험할 사건과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 자신의 선택에 걸맞는 체험과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보니 오른쪽 다리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지할 만한 무엇인가가 있을까 싶어 두리번거리는데 낙엽송 숲이 끝나는 지점에 지팡이 감으로 안성맞춤인 물푸레나무 한 토막이 놓여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느 촌로(村老)가 도끼 자루나 괭이 자루로 쓸 요량으로 물푸레나무를 베었다가 미쳐 줍지 못하고 지나갔지 싶었습니다.
물푸레나무 가지를 지팡이로 쓰고자 주워드는 순간 묻어두었던 제 유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살아왔습니다.
해마다 가을이 오면 아버지는 언제나 유년의 제 손목 굵기 만한 물푸레나무를 한아름 베어서 귀틀집 처마 밑과 천장 사이의 작은 공간에 넣어두셨습니다. 해가 바뀌면 그것들은 괭이 자루나 도끼자루 따위로 쓰여질 것들이었습니다.
화전민들에게 겨울은 길고 지루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들은 간간이 서로 어울려 아랫목에 묻어둔 밀주를 마시거나 토끼몰이로 소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집은 마을에서부터도 4킬로 남짓 산길을 따라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여간해서 마을 분들이 마실을 오는 일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정보와 문명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평생을 보내신 아버지에게는 유일하게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가 3일과 8일에 서는 5일장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무슨 볼일이 있어 장에 가셨던 것은 아니었지 싶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이른 새벽진지를 드시고 길을 나서셨습니다. 부산한 소리에 잠을 깨어보면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빠르게 숫가락을 움직이거나 양말을 고쳐 신고 계셨습니다. 대화 장까지는 10여 킬로. 아버지는 늘 설레임으로 길을 나서셨고 저와 형제들은 구멍난 내복바람으로 봉당에 서서 아버지를 배웅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술 드시지 말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아버지의 뒤를 주춤주춤 따라가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면 아침을 먹기 무섭게 우리들은 아버지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어머니와 누이는 집안 청소와 봉당, 부엌청소를 맡았고 형과 저는 투박하게 묶은 싸리비로 마당부터 시작해 물긷는 개울가를 지나 돌배나무 한 그루 우뚝 솟은 고샅길까지 '인절미를 굴려도 흙이 묻지 않을 만큼' 말끔하게 쓸어놓았습니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가장 만만한 점심끼니는 수제비였습니다. 가래나무로 만든 두레반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가족들의 표정에는 언제나 기다림과 두려움이 겹쳐서 지나갔습니다.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지 않고 오시는 날이면 그나마 눈깔사탕이나 껌 따위를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술이 취해서 돌아오시는 날이면 눈깔사탕은커녕 밤새도록 아버지의 술 주정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한 번은 누에고치를 팔러 가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좋은 값에 누에고치를 파신 아버지는 자식들 주겠노라고 사탕 한 봉지를 사셨는데 그만 술이 만취하셔서 사탕봉지에 구멍이 난 줄도 모르고 비틀거리며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마중을 나간 자식들 앞에 자랑스레 사탕봉지를 꺼냈지만 사탕봉지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시고 '어떤 놈이 내 사탕 훔쳐갔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셨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눈짓을 하시면서 '당장 가서 그놈 잡아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우리는 땅거미가 지는 고샅길을 오르내리며 눈에 불을 켜고 사탕수색을 해야했습니다.
어쨌든 아버지께서 장에 가셨다가 맨 정신으로 돌아오시는 날은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술이 취하신 아버지는 아득하게 집이 보일 즈음부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다 나와! 이놈의 종자들, 다리 몽생이를 분질러버린다."
온 가족은 언제쯤 그 소리가 들릴까 안절부절하며 아버지를 바래다가 꼬부라진 아버지의 고함이 들릴라치면 쏜살같이 아버지에게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추스리지도 못하는 몸으로 점호라도 취하듯 가족들을 일일이 확인했고, 가족들이 모두 있음을 확인하시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머니에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낮에 어떤 놈이 다녀갔어. 어떤 놈팽이하고 놀아 난 거야? 다 들었으니까 바른 대로 불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히고도 웃으면서 대꾸했습니다.
"이 산골짜기에 누가 왔다고 그래요. 애들 있는데 추태부리지 말고 빨리 들어가요."
"이것들이 누굴 술 취한 놈으로 몰아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들어? 내가 핫바지인 줄 알아? 어떤 놈이야! 대!"
이렇게 술 주정이 시작되면 온 가족은 한숨도 못 잔 채 술이 깨시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온 가족이 없는 잘못도 있다고 용서를 빌며 사정사정해 겨우 잠자리에 드시게 하면 아버지는 얼마간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골며 잠에 빠졌다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또 주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이불을 박차고는 문지방에 올라서서 다락을 더듬었습니다. 거기는 아버지께서 해 두신 물푸레나무 도끼자루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끼 자루는 쉬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취중인데다 163의 자그마한 키로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얼마동안을 까치발로 서서 다락을 뒤지다 보면 때로는 벌렁~ 뒤로 자빠지기도 하시고 때로는 몸을 가누지 못해 문지방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여간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나 감히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렇게 안간힘을 써서 도끼자루를 찾아내시고 나면 아버지는 그 도끼자루로 구들장을 내리치며 위협을 하셨습니다.
"바른 대로 대! 어떤 놈팽이하고 놀아 난 거야?"
철부지 어린 시절 그렇게 물푸레나무 도끼자루를 어머니 목덜미까지 들이미는 아버지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차라리 아버지가 멀리 떠나셨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수 없이 되뇌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술에서 깨어나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착하디 착한 가장으로 되돌아가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대화를 나누시다가 마을 사람 가운데 가정에 불화가 생긴 집 이야기가 나오면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봐! 그러게 여자와 북어는 사흘도리로 패야 한다 잖아!"
그러면 어머니는 발끈 하셔서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고 따지듯 묻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술자리에 가면 남자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고 조금도 거침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요즘에서야 아버지의 그 행동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잘 한 행동이란 이야기가 아니라 왜 그렇게 밖에 행동하실 수 없었는지를 알 것 같단 이야기입니다.
무학(無學)이신 아버지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가정을 다스리고 가장의 권위를 세우는 방법을 술자리의 이야기로밖에 배우시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자리가 술자리뿐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술자리에서 들은 지식을 '진리'로 믿었고 그 '진리'를 따라 한평생을 사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진리를 맨 정신으로는 실천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기에 가누지도 못하는 술기운을 빌어 당신의 '앎'을 '행동'으로 옮기셨지 싶습니다.
몇 해전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 저는 그분을 '부끄러운 부요를 거절하고 떳떳한 가난으로 살다 가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분을 지칭하는 다른 수식어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를 알아도 아는 것을 몸으로 사신 분!"
제가 생각해도 아버지의 삶에 대한 최상의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요즘 사람들과 만나다 보면 1년 전 했던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해서 해야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머리로는 아나 아는 것을 행해 보지 않으니 그 가르침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과 맛을 아무리 설명해도 먹어보지 않고는 그 맛을 이해할 수 없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몸소 행해보지 않고서 어찌 그 가르침이 담고 있는 참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한마디로 오늘의 이야기를 접습니다.
"들음이 있으면 들음대로 행하라!"(계속)
[기도]
아버지, 길을 알 수 없을 때 당신께 길을 구하고, 구할 때마다
답을 듣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들음에서 끝나지 않
고 들음대로 행하게 하옵소서. 주님 이름으로 빕니다.(아멘)
제자가 된다는 것(엔소니 드 멜로의 글)
누가 내게로 오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제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루가 14, 26
세상을 한번 살펴보고, 당신 주위와 내부의 불행을 바라보세요. 그 불행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아마 고독이나, 억압, 전쟁 또는 증오, 무신론 등에서 온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불행의 원인은 오직 하나, 바로 당신 머리 속에 있는 그릇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너무도 널리 퍼져 있고, 모든 사람이 믿고 있는 것이어서 감히 의심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릇된 믿음은 세상과 자신을 왜곡하여 이해하게 합니다. 당신의 틀은 너무도 견고하고 사회의 압력은 너무도 강해서, 문자 그대로, 세상을 왜곡하여 파악하는 덫에 걸린 것입니다. 당신의 이해력은 왜곡되고, 사고는 오류에 빠져 있으며, 자신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으므로 덫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두려움도 없고, 위험도 없으며, 근심, 긴장, 걱정이 전혀 없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몇 만 명 중에 하나라도 찾아볼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당신과 그들이 모두 다 따르고 있는 그 틀과 믿음이라는 것을 의심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당신 역시 전통, 문화, 사회, 종교가 당신에게 부어넣은 가정들에 의혹을 품거나 의심하지 않고 오로지 그것을 믿기만 하도록 틀에 맞추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당신의 틀이나 문화, 전해져 내려오는 사고방식이나 믿음을 탓하기보다는 자신을 탓하도록 훈련받아 왔습니다. 더 나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도 세뇌를 당한 나머지, 꿈속에 있는 사람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가로막는 이 그릇된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들일까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당신이 추구하고 값지게 여기는 물건을 소유하기 전에는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틀렸습니다. 당신의 일생 중에 단 한 순간도 행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지 못했던 때는 없습니다. 이 점을 잠시만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에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에 생각을 모으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또 다른 그릇된 믿음은 "행복은 미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옳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행복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믿음과 왜곡된 이해 때문에, 두려움, 근심, 집착, 갈등, 죄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이겨야 한다고 정해 놓은 엄청난 경쟁에 말려들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다면 자신이 행복하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그릇된 믿음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게도 세상을 재정리하기 위해 엄청난 힘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생의 사명이라면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당신이 행복해지리라는 착각은 버리세요.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세상이나 주위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머리 속에 있는 "생각"입니다.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바다 한가운데서 독수리 둥지를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대머리를 치료하거나, 매력적인 몸매를 가꾸거나, 주거지나 직업, 소속 단체나 생활 양식, 심지어 자신의 성격까지도 바꾸기 위해 힘을 낭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것들 모두를 바꾼다고 해도, 아무리 마음에 드는 환경에서 산다고 해도 여전히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당신은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여전히 힘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그릇된 믿음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욕망이 충족되면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긴장, 좌절, 신경과민, 불안, 두려움을 주는 것이 바로 욕망과 집착입니다. 당신이 집착하고 욕망하는 것들을 적어 놓고 그 하나하나에게 다음과 간이 말해 보세요.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알고 있다, 너를 성취한 후에도 행복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말이 지닌 진리를 깊이 되새겨 보세요. 욕망의 성취는 기껏해야 반짝하는 순간의 쾌락이나 흥분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행복을 위해 이러한 것들을 취하는 실수를 범하지 마시지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며 아무도 설명해 줄 수 없습니다. 행복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던 사람에게 빛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꿈속에 있는 사람에게 현실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어둠을 이해하게 되면 그 어둠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빛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악몽을 꾸게 되는지를 알게 되면 그 악몽은 멈추게 될 것이고,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릇된 믿음을 이해하게 되면 그 믿음은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고, 행복의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도 행복을 갈망하면서 사람들은 왜 자신의 그릇된 믿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이 그릇된 믿음이 결코 그릇된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믿음이라고도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릇된 믿음을 사실이나 현실로 여기며, 거기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둘째 이유는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 즉 욕망, 집착, 두려움, 사회적 압력, 긴장, 야망, 걱정, 죄의식의 세계와, 이러한 것들이 주는 순간적인 쾌락과 위로와 자극을 잃게 될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인 악몽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사람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바로 그 모습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행복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면 아버지와 어머니, 심지어 자신의 삶까지도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모든 소유물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무엇일까요? 관계를 끊거나 소유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 그 방법은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포기하면 영원히 거기에 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 모든 것을 악몽을 바라보듯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 소유하든 그렇지 않든 당신을 얽매고 있던 사슬은 사라지고, 당신에게 상처를 입히던 힘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서 깨어나, 어둠과 두려움과 불행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때때로 한 손에는 흥분과 쾌락을 주는 악몽을 들고, 다른 손에는 걱정, 불안, 긴장, 근심, 두려움, 불행을 들고, 당신이 집착하는 이것들이 과연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버지와 어머니는 악몽입니다. 부인과 자녀, 형제 자매도 모두 악몽입니다. 소유한 모든 것 역시 악몽입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삶도 악몽입니다. 집착하는 모든 것 하나하나도, 또 그것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믿는 모든 것도 악몽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어머니, 부인과 자녀, 형제 자매, 자신의 삶까지도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유한 모든 것을 어려움 없이 떠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집착을 멈추고, 그 모든 것들이 지닌 상처를 주는 힘을 부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묘사하거나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상태, 행복과 평화가 머무는 상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 자매,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 토지와 집 등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들이 수백배의 보상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어떻게 사실일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축
성 탄
우리 안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빌어 그분이 사시고자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소년이 되고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듯이
우리 안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가
마침내 장성한 존재로 자라나
우리의 주인이 되시어 마음껏 일하시도록
그분께 우리의 중심(中心)을 내어 드립시다.
우리 안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언제까지 젖먹이로 두시렵니까?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깨어 정진합시다.
자신 안에 살아 계신 참 존재가
진정 누구 신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성탄은 없습니다.
성탄은 바로 그리스도 의식으로의 깨어남이기 때문입니다.
님들 안에 깨어나신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립니다.
^_^ 빛과 사랑의 포옹으로~ NAMASTE!
*금주는 성탄과 겨울 정진모임 관계로
성탄 메시지를 설교로 올립니다.
이렇게 짧은 설교를 올리는 재미도 쏠쏠하군요.
가끔 이런 설교를 올려도 괜찮을 것 같지요? ^^
짧은 글의 긴 여백을 읽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