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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소현 마을은...
- 이 글은 2023년 2월20일 영천시 신령면 신덕1리 주민 60여명이 우리 마을을 방문하여, 이 분들과 함께 마을 도로변 담장에 새겨진 모자이크 벽화를 둘러보고, 마을 회관 2층에서 벽화 내용을 설명한 것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글이 현곡면과 우리 마을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카톡에 올립니다-
인사말씀
- 이렇게 저의 마을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우리 마을의 벽화를 소개하고자 나온 정석준입니다.
- 저는 공직생활을 마치고 퇴직 후에는 수필가로 등단하여 현재 경주문인협회에서 이사를 맡고 있으며, 지난해까지는 동리목월문학관 상주작가로써 동리목월문학을 널리 홍포하는 일을 맡아 왔고, 2년 전부터 경북연합일보에 매주1회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몇 년 전부터 경주시 노인대학, 경주전통예절원, 경주교도소 관음법회(불교 재소자 법회)에서 강사 및 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곡면과 소현리 소개
- 우리 마을은 현곡면에 소속되어 있으며, 현곡면은 형산강을 경계로 경주시 황성동, 성건동과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경주 동국대 뒷산인 와룡산(산의 모습이 마치 용이 누워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서쪽으로는 구미산, 북쪽으로는 어림산, 동쪽으로 안태봉과 삼각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21개의 자연부락과 9개의 아파트 단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소현리는 경주 도성에서 보면 마을 뒷산인 질메산이 조그맣게 보인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본디 소현은 신리 때 효자 손순(遜順)의 이름을 딴 순우정(順友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마을 이름을 ‘순우정’이라 불러 왔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현재의 소현2리인 지일을 합하여 소현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 우리 마을 앞으로 흐르는 내가 소현천입니다. 소현천은 구미산 형제봉에서 발원하여 상구 2리(자연부락 이름, 구평), 상구 1리, 하구 1리를 거쳐 흐르는 냇물과, 남사2리(자연부락 이름 종동)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남사 저수지가 있는 남사 1리, 가정 2리를 흐르는 냇물과, 나태 1리 어림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나태 2리(자연부락 이름, 곰바우), 무과리를 흐르는 냇물 모두가 소현천에서 합류하여 형상강으로 흘러들어 가므로 하천 이름을 소현천이라 이름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소현은 현곡면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가구 수는 현재 158가구로, 우리나라 농촌의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폐가가 속출하는 등, 농촌이 공동화 되어 가고 있음에도- 어떤 마을에서는 어린애 울림소리를 못들은 지가 10년도 넘었다는 소리를 TV에서 들은바가 있는데- 이 추세대로 나간다면 2~30년 후에는 농촌에 사람 구경하기 어려울 것이란 걱정이 듭니다.
- 그러나 우리 마을은 지난 30년 동안 30여 호가 늘어났으니, 매년 1년에 한집이 새로 들어선 셈입니다. 게다가 4, 5년 전 마을 앞에 2,600세대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섰고, 내년에 또 500세대, 도합 3,100세대가 입주하게 됨에 따라, 경주시에서 가장 작은 면 중의 하나였던 현곡면의 인구수가 2만 5.000여명으로 불어날 것으로 예상되며, 이에 따라 경주시 읍면동 중에서 인구수로 2, 3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면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는데, 대단위 아파트와 인접해 있는 우리 마을도 그 덕분에 집값, 땅값의 상승의 효과를 누리고 있습니다.
- 우리 마을은 2013년 경상북도 농어촌 마을가꾸기 시범마을로 선정되어, 도의 지원을 받아, 마을 입구에서부터 버스 종점까지 도로변 담장에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벽화에는 현곡면 21개 자연부락의 유래와, 현곡면에서 태어난 인물, 유적지 등을 그린 것으로, 이 조형물은 동국대 김호연 교수의 작품입니다.
- 이 벽화는 현곡면을 알 수 있는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며, 소리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데, 오늘 오신 신덕1리 주민분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 오신게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 오늘따라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저와 함께 먼저 벽화를 구경하고, 그에 대한 설명은 마을회관 2층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벽화 해설
- 벽화 구경 잘 하셨나요? 벽화를 제작할 당시, 제가 우리 마을 개발위원장을 받고 있었는데, 공사를 수주한 동국대 김호연 교수로부터 벽화의 내용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 지 좋을지 자문을 청하여, 제가 많은 조언을 드렸으며, 벽화 맨 아래쪽에 부착된 설명서는 『경주풍문지리지』 <현곡면 편>을 참고 또는 인용을 하였습니다.
- 이 책(경주풍물지리지)는 2006년 4월, 경주시와 경주문화원이 신라천년 고도 경주 각 마을의 유래, 산 · 들 · 하천의 이름, 풍속 등이 점차 사라져 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기록물로 남기고자 글밭출판사 김기문 사장에게 『경주풍물지리지』 발간을 의뢰하였으며, 김기문 사장은 각 읍면동 사람 중 책임 조사자를 선임하여 조사하게 하였는데, 현곡면 편은 제가 그 일을 맡았습니다.
- 그럼 지금부터 벽화에 대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문효사와 손순의 효
- 우리 마을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보았던 것이 신라 효자 손순의 지극한 효행을 기리기 위한 문효사(文孝寺)라는 사당입니다.
- 손순은 신라 제40대 흥덕왕 때의 사람으로 손순의 효행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손순매아(孫順埋兒) 편에는 다음과 쓰여져 있습니다.
“모량리(신라 6부촌의 하나, 무산 대수촌 또는 점량부, 모량부라고 불리웠음)의 손순과 그 아내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품 삵을 받아 노모에게 고기반찬을 해 드리면, 그 아들이 매번 빼앗아 먹었다. 이에 손순이 그 아내에게 ”아이는 또 얻을 수가 있으나 어머님은 한번 가시면 모실 수 없으니 아이를 땅에 묻어버리고 어머니의 배를 채워드립시다“하자, 아내도 쾌히 승낙을 하였다. 곧 취산으로 들어가 땅을 파다가 기이하게 석종(石鐘)을 얻었다. 손순 부부는 이는 자식의 복이라 생각하고, 아들을 묻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종을 집 대들보에 매달아 두었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 종소리가 서라벌 왕궁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신라 제42대왕)이 이 사실을 알고 손순의 효성을 높이 치하하고 집 한 채와 세미 오십 석을 내려 보냈다. 손순은 살던 집을 흥효사(興孝寺)라 칭하고, 그곳에 종을 안치하였다. 그 후 진성여왕 때에 후백제의 침입으로 종은 도난당하고 말았다.“
이 야기는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삼강행실도』 『명심보감』 등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이 사당은 1996년에 경상북도기념물 제1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손순 효자비
- 손순의 효를 널리 기리기 위한 비(유허비)입니다. 조선 말기의 학자 허전(許傳)이 적은 유허비가 있었는데, 1970년경에 파괴되어, 지금의 비석을 새로이 만들었습니다. 유허에는 수령 400년의 회화나무와 팽나무 등 고목이 바티고 서서 이와 같이 유허비를 지키고 있습니다.
- 손순의 효와 관련하여 한 말씀드리자면 공자님께서는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이 참다운 효란 부모의 몸과 입을 잘 받들어야 함은 물론이요, 부모의 마음과 뜻을 잘 받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부모에 대한 효도는 살아 계시는 동안 음식을 잘 해드리고 용돈을 넉넉히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님의 뜻을 잘 살펴서 그 뜻에 맞도록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효도의 길이라고 봅니다.
- 공자의 삼천 제자 가운데 가장 효를 철저히 잘한 분은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이라고 하는데, 증자는 어떻게 부모님께 효도를 했는가 하면 자기의 아버지가 친구를 데리고 와서 “그 음식이 남아 있느냐? 하고 물으면, “예 남아 있습니다.”하고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 민자건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계모를 얻었는데, 거기서 아들 삼형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 민자건은 아버지를 수레에 모시고 먼 길을 가는데, 그의 아버지가 아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긴 나머지, “네가 왜 그렇게 떨고 있느냐?”고 하면서 아들의 옷을 만져보니 옷 속에 솜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갈대가 들어 있었습니다. 계모가 솜 대신 갈대를 넣었기 때문에 추위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새로 얻은 부인을 내쫒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민자건은 아버지를 붙잡고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저 혼자 떨게 되지만 어머니가 집밖에 나가실 것 같으면, 이 어머니에게서 난 세 아우가 벌벌 떨게 됩니다.”라고 하면서, 계모를 내쫓지 말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민자건은 그렇게 효자였습니다.
- 『효경(孝經)』이라는 책에도 효자노릇 잘한 어떤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들은 날마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데, 그 아버지는 항상 아들이 돌아오는 길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들이 나무를 해오면 동구 밖에서 아들의 나무 짐을 받아서 자기가 짊어지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렇게 해야만 자기의 마음이 편하다고 했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나무 짐을 건네주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짐을 지고 아들은 그 뒤를 따라가는 광경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다 그 아들을 불효자식이라고 비난했지만 사실은 그 아들이 진짜 효자인 것입니다. 그 아들은 남의 체면이나 이목(耳目)보다는 부모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드릴 수만 있다면 자신이 비록 동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입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하겠다는 진정한 효성심(孝誠心)이 그런 효를 하게 했던 것입니다.
-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웃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경로효친(敬老孝親)사상을 윤리생활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웃나라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란 칭송을 받았으며, 공자님 같은 분은 “동방의 예의 바른 나라인 동이(東夷)에서 살고 싶다.”고까지 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미풍양속은 근세에 들어와서 물밀 듯 밀려오는 서구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관계로, 또한 우리사회가 급격히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 하는 과정에서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몇 년 전 텔레비전에서 보도된 바도 있지만 지금 전국 각지에서 노부모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고 합니다. 그중 제주도에서 유기하는 사례가 가장 많다고 하는데, 그 이유인 즉 다시는 부모가 집으로 찾아 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행동을 보며 자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부모에게 불효하면 내 자식 또한 불효(不孝)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한 치의 착오도 없는 인과(因果)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식에게 효도를 바라거든 내가 먼저 부모에게 효의 본(本)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천서씨 영경공파 서유 종택
- 손순 유허비와 담벼락을 맞이한 서편에 이천서씨 양경공파 서유의 종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종택에는 서유의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를 지내는 사당인 영당(影堂)이 있으며, 지금도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 옛날 양반들은 4대 봉제(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를 지내고, 5대부터는 묘사를 지냈는데, 나라의 큰 공을 세웠거나 이름난 문신은 자자손손 혼백함을 제실에 모시고 봄, 가을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불천위 제사라고 합니다. 이웃 동네(서당골)에 자리한 구산서원에서는 공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고 있으며, 서원 경내에는 그의 행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서유는 본관이 이천으로 조선 초의 문신입니다. 1399년(정종 1년, 중승으로 재임 중, 왕에게 사관이 강연에 입시하도록 청하여, 왕의 말과 행동 및 시정을 사관이 기록하게 함으로써 조선의 규범을 만드는데 공헌을 하였습니다.
- 1,400년 간의로 있을 때는 사병혁파에 불만을 표한 개국공신 조영무(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척살한 이방원의 심복), 이천우, 조온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이들을 유배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방원의 처남인 민무구와 민무질의 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공이 어떤 공신일지라도 처음과 달리 사욕을 취하면 과거의 사정에 얽매이지 않고 물리치는 강직한 성품을 가졌음을 보인 예입니다.
- 정종 2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일명 박포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도와 회안대군 방간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방원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 후, 1401년(태종 1년)에 익대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었습니다. 1411년 영명하였고, 선영은 경기도 여주시 신북면 후리에 있습니다.
당목
- 소현마을 동쪽 마을 어귀에는 수령이 400년을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와, 땅버들 나무 한 거루가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당목으로 매년 정월 보름이면 지금도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 전국 어느 마을 없이 마을 입구에 당목이 있고, 예전에는 마을 마다 당목 앞에서 마을의 무사태평과 동민의 화합을 위해서 동제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제를 지내는 마을이 흔치 않으며, 우리 마을은 2018년까지 동제를 지내왔는데, 2019년 코로나 대유행 이후 동제를 잠시 중단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 왜 우리 조상들은 천신(태양신), 지신, 산신도 아닌, 목신(당목) 앞에서 동제를 지내 왔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고대인들은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모두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늘, 해와 달, 높은 산, 큰 바위, 망망한 대해 고목, 사나운 짐승, 천둥, 번개 등 어느 것 하나 공포의 대상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그러한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을 모두 신으로 생각하고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 인지(人智)가 점점 발달하자 사람들은 자연물이나 자연 현상 속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늘에는 천신(태양신), 땅에는 지신, 산에는 산신, 나무에는 목신, 바다에 해신, 천둥에는 뇌성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숭배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정령신앙(精靈信仰, Animism)인데, 3천년 전의 인도인은 소위 『리그베다(Rg Veda)』라는 종교 문헌을 가지고 있었거니와, 여기에 나타난 신은 무려 2,333신이나 됩니다. 고대 중국인들도 그랬고, 이집트, 희랍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이러한 다신신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들 상호간의 위치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힘이 약한 신은 점점 도태되어 마침내는 하나의 신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일신(唯一神)입니다. 그리고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신이 소수신화(小數神化)하여 가면 갈수록 상대적으로 신의 역할과 위력은 커져서 마침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으로 되었습니다.
- 그리고 고대인들은 신이 노하면 인간에게 재앙과 고통을 안겨준다고 생각하고, 여기에서 벗어나고자 조상신 특히 시조신을 숭배하였는데, 그들은 영혼불멸을 믿어 죽은 조상의 영혼들이 후손들을 보호하여 준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씨족이나 부족의 토템인 동ㆍ식물을 숭배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토템신앙(Totemism)이며, 또 무당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주문과 제사에 의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소원을 성취해 준다고 믿었는데, 이를 샤마니즘(Shamanism, 무격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조상신 숭배, 정령신앙, 토탬신앙, 샤마니즘의 잔재는 아직도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컨데, 우리의 제사의식은 고대인들의 조상숭배 사상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정초에 마을의 대표들이 당목에 음식을 차려놓고 마을의 무사ㆍ태평을 비는 것은 정령신앙과 토템신앙의 영향입니다.
-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告解聖事)라는 것이 있는데, 자기가 지은 죄를 신부님께 고하면, 신부님이 그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면 죄가 사해 진다는 것입니다. 무당이나 사제 모두 신에게 소원을 빌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무당의 굿은 미신이고, 사제의 미사는 성스러운 종교의식이라고 한다면, 이는 분명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오늘날 유일신을 믿고 있는 유태인들도 원래 다신교를 믿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에게서 받았다는 십계명의 첫 번째가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서 두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유대인들이 여호와만이 아니라 여러 신을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태봉
- 소현마을의 동쪽에 있는 안태봉은 현곡면의 소현리와 나원리, 안강읍의 접경에 있는 높이 338.1 미터의 산으로 이 산의 정상에는 신라 역대왕의 안태를 묻었다는 안태총과 봉수대가 있습니다.
- 지금부터 60년 전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정월 대보름날이면 오후 3~4시 경이면 몇 명씩 무리를 지어 안태봉 정상에 올라가서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고 달맞이 행사를 했는데, 달을 먼저 본 사람은 소원을 성취한다는 속설이 있어서 서로 달을 먼저 보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해인가 우리 동내 어느 부자집에 머슴을 사는 총각이 제일 먼저 ‘달이다’하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정말 구름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 총각은 정말 그해 늦가을 장가를 갔습니다.
진덕여왕릉
- 안태봉 등대를 타고 내려오면 산 정상이 삼각처럼 생겼다고 하여 삼각산이라는 나오고, 삼각산 기슭을 따라 내려가면 진덕여왕의 능이 나옵니다. 진덕여왕릉은 병풍모양으로 다듬은 판석으로 무덤보호석을 마련하였고, 판석의 사이사이에 12개의 탱석에 12지신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 제28대 임금이며, 마지막 성골 출신의 왕입니다. 성은 김씨 이름은 승만, 진평왕의 친 아우인 국반갈문왕의 딸이며, 선덕여왕의 사촌여동생입니다. 삼국사기는 그녀의 외모에 대해,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7자[210 cm] 장신이며,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아래까지 닿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진덕여왕[647-654년]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라 7년간 재위 기간에 관료와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김유신을 내세워 고구려 · 백제의 침입을 막아내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진덕여왕이 죽자 사량부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2010년, 벌써 10년이 훨씬 자났네요? 경상북도 김관용 지사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것이 『신라사 대계』(총32권) 편찬이었습니다. 도에서는 신라의 역사, 문화, 종교, 제도 등 각 분야의 전문가와 교수들로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3년에 걸쳐 작업을 하였는데, 발간에 앞서 혹시 빠진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분야별로 현대호텔에서 세미나를 개최한바 있었습니다.
- 당시 저도 그 세미나에 그 세미나에 참석하였는데, 신라의 골품제도 중 성골과 진골의 설명 부분에, 시조 혁거세부터 제28대 진덕여왕 까지는 성골이고, 29대 무열왕부터는 진골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성골과 진골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였더니, 세미나 좌장이 답변하기를 “성골은 부계, 모계 모두가 왕족이고, 진골은 부 . 모 중, 한사람만이 왕족”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를 아버지로, 제26대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를 어머니로하여 태어났으므로 혈연적으로 김춘추는 순수한 왕족임이 틀림없는데, 왜 성골이 되지 못하였을까요?라고 질문하였더니 그 좌장이 답변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래서 제가 “용수의 아버지, 그러니까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ㅔ25대 진지왕은 정치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된 왕이며, 『삼국유사』 왕력편 진지왕조를 보면 ‘진지왕묘는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했는데, 능(陵)이라 하지 않고 묘(墓)라고 한 것은 진지왕이 폐위되고 왕의 신분도 박탈되었으므로, 그 아들 용수 . 용춘 . 손자인 춘추의 신분도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다고 보아지므로, 이러한 내용을 추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좋은 지적을 해 주어서 고맙다”는 답변을 들었는데, 그 내용이 『신라사 대계』 수록되어 있는지 확인은 못해 보았습니다.
나원리 오층석탑
- 삼각산 넘어 동편 계곡에는 나원리 오층석탑(慶州 羅原里 五層石塔)이 우뚝 서있습니다. 이 석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구성하였으며 탑신부 윗부분에 장식되었던 상륜부는 노반과 찰주 일부만이 남아 있습니다.
- 이 석탑은 경주에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 각 부의 구조도 정연하고 비례도 아름다우며 높은 위치에 세워 주위를 압도하는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 이 석탑은 세운 당시의 절 이름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신라 석탑 중에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인 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 탑은 경주 팔괴의 하나인 '나원백탑'(羅原白塔)이라 불릴 정도로, 신기하게도 탑신에 이끼가 끼지 않으며, 탑의 빛깔이 유난히 하얗습니다. 1963년 12월 20일 국보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해체 복원 때 사리장치가 발견되었습니다.
오류리 등나무
- 진덕여왕릉 아랫마을, 오류리에는 두 그루의 등나무가 팽나무를 감싸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이곳을 용의 숲이라는 뜻으로 용림이라 불렀으며, 등나무를 용등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 나무의 꽃을 말려 베게 밑에 넣어두면 부부의 금슬이 좋아진다고 하여 꽃을 말려 두었다가 시집갈 때 가져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 이 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전설이 얽혀 있습니다. 옛날 이 마을에 의좋은 자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 자매는 마을의 한 총각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밀은 마음속으로만 새겨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그 총각이 전쟁터로 떠날 때, 떠나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보기 위해 마을 밖으로 나간 자매는 비로소 한 남자를 둘이서 사모하고 있는 줄 았습니다. 남달리 다정했던 자매였으므로 언니는 동생에게, 동생은 언니에게 서로 양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그런지 얼마 후 총각이 전사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자매는 언제나 자주 가던 연못가에 나가 얼싸안고 울다가 그만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연못가에는 두 그루의 등나무가 자매의 넋인 양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죽은 줄만 알았던 그 총각은 훌륭한 낭도가 되어 돌아왔고, 자기를 생각하며 세상을 등진 자매의 애닮은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스스로 연못에 몸을 던지니, 팽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고 합니다.
- 양력 4월이면 두 그루의 등나무는 탐스러운 꽃을 터트리며 그윽한 향기를 뿜어, 팽나무를 한층 힘차게 얼싸안는 듯이 보입니다. 이 등나무는 1962년 12월3일 천연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용담정
- 우리 마을 서편에 구미산(龜尾山)이 길게 늘어 서 있는데, 산 정상의 높이가 594m로, 산 아래에는 상구2리(구평), 상구 1리, 하구1리, 하구2리(고천) 가정2리(마룡골) 등, 5깨 마을이 자리하고 잡고 있을 정도로 큰 산입니다. 마룡골 골짜기에는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사사장철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있는데, 이곳에 용담정이 있습니다. 이 용담정은 최제우 대신사가 득도를 하고 동학(천도교)를 창시한 곳이므로 구미산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현곡면 가정1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수운이 태어난 당시의 국내외 사정은 극도의 혼란과 불안 속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 대한 열강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기만 했고, 국내사정 또한 마찬가지로 혼란에 빠져 헤어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세도정치의 폐해가 날로 심해져 정치는 문란할 대로 문란해 졌고, 거기에다 계속된 흉년에다 괴질마저 창궐하니, 민란은 3남(三南) 지방에서부터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 이러한 혼란에 부채질을 가한 것은 사상의 혼란이었습니다. 즉 서교(西敎)라고도 불리는 천주교의 유행과 그 교도들에 대한 관(官)의 지나친 탄압이 그것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우리들의 사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천주교의 포교와 교세의 확충은 확실히 하나의 충격이며 동요의 요인이 될 만 했습니다. 수운은 이러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모순, 그리고 사상적인 이질감으로 인하여 사회가 극도로 동요하던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 아버지로부터 경서(經書)를 배웠지만, 서자로 태어났으므로 그 재능을 펼 길이 없었습니다. 갖가지 장사도 하고,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청년 시절을 어렵게 보냈습니다. 그의 나이 30세쯤 되자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당면한 인류 문명의 총체적 붕괴에서 오는 것이라 믿고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인간을 두루 구할 수 있는(輔國安民 廣濟蒼生)’ 길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주유(周遊)하는 동안 어떤 알 수 없는 승려로부터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이서(異書)를 받고 3일 만에 터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 수운은 전통 종교인 유ㆍ불ㆍ선이 이제 기운을 다 해 새로운 시대에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없고, 서학인 천주교도 그 공격성이나 흑백논리로 보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도가 못 된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이 붕괴되는 선천문화를 개벽할 수 있는 새로운 도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전국을 두루 다니고 다시 고향 경주의 구미산 밑 용담으로 돌아와 원하는 대도를 얻기까지는 그 산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하고 구도에 정진, 마침내 1860년 4월5일, 37세 되던 해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합니다. 갑자기 마음이 차고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지면서 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두려워 말고 저어하지 말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라 이르나니,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하고, 이어서 “너를 세간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나니 의심치 말고 의심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한울님과의 문답 『강화(降話)』가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때 이른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받습니다.
- 득도(得道) 다음 해 6월, 포덕(布德)을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다닐 필요도 없이 그의 득도에 대한 소문이 퍼져 찾아오는 사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울님을 소개하고 인간이 다 같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으므로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수운은 자기 집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노비 중에 하나를 딸로 삼고 다른 하나는 며느리로 삼는 등 신분차별 폐지의 평등주의를 몸소 실천하였음). 양반ㆍ상인(常人)의 계급과 서열이 엄격하던 사회에서 이런 가르침은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 동학의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3남지방에서 신속히 전파되었습니다. 포교를 시작한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ㆍ충청도ㆍ전라도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사교(邪敎)라고 단정하고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체포되어,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참수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때 수운의 나이 41세였습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글을 모아서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엮었습니다.
- 교조 최제우가 20여 년 간의 구도 끝에 얻은 교리, 즉 한울님의 말씀은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사상의 하나는 후천개벽론(後天開闢論)입니다. 선천시대는 존비귀천(尊卑貴賤)의 계급주의이지만, 후천시대는 평등주의를 원칙으로 하며, 이에 따라 정치ㆍ사회의 제도까지 바뀌어져 국기(國基)가 바로 서고, 모든 사회의 불안이 제거되는 지상극락의 이상사회가 이룩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혼란한 시대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종말론(終末論)을 주창하면서도, 다가오는 새 시대야말로 이상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종말론을 주창했습니다.
- 이러한 후천개벽론은 현실사회를 부정하고 후천개벽ㆍ지상천국을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감록(鄭鑑錄)」과 같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회운동의 일면, 즉 혁명성의 일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금장대
- 현곡면 앞으로는 형산강이 흐르고 있는데, 형산강은 경주남산의 기린천과 경주국립박물관 앞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남천과 합류하여 서천을 이루다가 경주보문단지에서 내려오는 북천(알천)과 만나 형상강으로 흐르는 곳에 예기소(또는 예기청소)가 있고, 그 앞 작은 산봉우리에 금장대가 있습니다. 금장대는 날아가는 기러기도 쉬어간다고 하여 금장낙안을 신라의 3기 8괴 중 8괴의 하나로 손꼽고 있습니다.
< 3기>
- 금척은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하늘의 천신에게서 받은 금으로 만들어진 자입니다. 금척으로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살아나는 신비한 자였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당나라 황제가 금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금자를 보자고 하므로, 신라에는 여러 개의 고분을 만들어 그 속에 숨겨 버렸다고 하는데, 저 구미산 너머에 있는 금척리에는 지금도 마을 앞에 수십기의 고분이 있습니다.
- 옥적(또는 만파식적)은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해룡으로부터 받은 피리인데, 이 피리를 불면 가뭄이나 홍수, 적군들이 쳐들어오거나 병도 모두 해소되었다고 전합니다.
- 화주는 선덕여왕이 가지고 있었던 구슬인데 광선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었다고 전합니다. 지금의 돋보기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 8괴>
-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남산부석,
- 남천의 물이 맑고 모래가 가늘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문천도사’,
- 움이 트면서 붉은 색을 띄는 ‘계림황엽’,
- 날아가는 기러기들도 반드시 쉬어 가는 ‘금장낙안’,
- 소나무를 베어도 순이 돋는다는 ‘백률송순’,
- 뿌리 없이 풀이 자란다는 ‘압지부평’,
- 천년이 지나도 이끼가 끼지 않고 순백의 빛깔을 간직한다는 ‘나원백탑’,
- 석가탑의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다는 ‘불국영지’
- 금장대에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금장낙안’의 풍광 속에서 신라의 흥망을 생각하며, 자연의 영원함과 인간 삶의 부질없음, 그리고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며 시를 읊조리던 공간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선비 매계 조위는 금장대에서 다음과 같이 읇었습니다.
험준한 끊어진 벼랑에서 강을 굽어보나니
흥이 일어 올라가 저 먼 곳을 바라본다
고가는 연이어 이어졌고, 석수는 세워져 있는데
은은한 푸른 산에 금오(금오산, 남산) 가 솟구쳐 있네
폐한 동산에 연기와 꽃이 어지러이 날리니 마음은 아프고
눈 아래 빈 성에는 탑묘만이 높구나
천지는 무정하지만, 어제와 같은데
인간은 하루살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매계 조위 문집)
- 금장대는 풍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최초의 기록이자 예술작품인 암각화가 있습니다. 사람과 동물 발자국 모양, 태양을 상징하는 문양들로 청동기 시대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 금장대는 신라 제20대 자비왕 때, 을화라는 기생이 왕과 연회를 즐기다가 실수로 예기소에 빠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 오는 곳이기도 하고, 예기소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는데, 해마다 한 두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 예기소는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김동리의 ‘무녀도’는 전통적인 무속 신앙과 외래 종교인 기독교 사이의 충돌로 인해 모자가 맞는 비극적 파탄을 액자 구성을 통해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당인 모화와 기독교 신자인 그녀의 아들 욱이 와의 대립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하나의 사상적 갈등을 응축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화에게 욱이는 자신의 세계에 침입하여 그것을 파괴하려는 적대적인 인물로 비춰지는데, 여기에서 혈연의 정은 용납되지 않으며 서로 파멸의 길을 향해 치닫습니다.
- 서양귀신에 씌여 돌아온 아들 욱이와 모화와의 이어지는 갈등, 그리고 결국 욱이는 모화가 휘두른 칼에 숨을 거두는데, 달포 후 고운 치마 자락을 연꽃잎처럼 펼치고 예기청소로 들어가는 모화의 마지막 장면을 ‘무녀도’를 읽은 사람은 기억할 것입니다. 금장대 앞 청소가 바로 그 예기소입니다.
끝으로...
- 이상 우리 마을 담장에 새겨진 벽화 중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소개 말씀을 드렸는데, 혹시 이해가 잘 되는 것이 있거나 문의사항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지금까지 장시간 저의 말씀을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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