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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한글 |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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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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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 |
이런 일이 있은 뒤에 큰 군중이 우렁차게 외치는 듯한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세가 우리 하느님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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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 |
이 일이 있은 뒤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있는 큰 무리가 내는 우렁찬 음성과 같은 소리가 이렇게 울려왔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력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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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V |
After this I heard what sounded like the roar of a great multitude in heaven shouting: "Hallelujah! Salvation and glory and power belong to our God, |
자 이 의미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때가 가까워 온다는 데 대한 찬양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 때가 언제일까요? 구원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소중한 말씀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3:11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는 말은 무슨말입니까?
죄 때문에 지옥행 열차를 타야 마땅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행 열차를 타고, 죄악의 형벌에서 구원받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슬아슬하죠?
깨닥 잘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갑니다.
중간에 내려달라고 할 수도 없어요!
자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얻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시제로 따지면 과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순간 죄악의 형벌과는 전혀 관계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악의 세력은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기에 싸우고 또 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누구를 닮아 갑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화의 한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 나아가는 “현재적 구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죄라는 존재에서 완전히 해발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주님앞에서 완전히 영화로운 존재로 변형되었을 때 이루어 집니다.
즉 미래적 구원을 이룰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죄악의 형벌에 관한 한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죄악과 싸우는 우리가 죄악과 상관없는 존재로써 모든 것이 완성될 때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마지막 때” 구원이 완성되고,
“마지막 때” 온전히 하나님만을 찬양할 수 있고,
“마지막 때” 온전히 주님만을 높여 드릴 수 있으니,
어찌 기뻐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구원이 왔는 데,
구원이 가까웠은 데,
구원이 내 앞에 있는 데, 구원의 “할렐루야”를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19장 1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영광과 능력이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의 사무관으로,
1888년 한 해를 미국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월남선생은 기술문명이 발달된 강대국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강대국의 비결을 배워 조선을 힘있는 나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때 청국 공사관 관리가,
“서구문명은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고 하면서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 한 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월남 선생은 한문성경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월남 선생은 군대는 어떻게 훈련시키고,
군함을 어떻게 건조하는지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그런 교범들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몇 마리로 5천명을 먹인 것이라든가,
사람의 몸이 부활한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얘기들뿐입니다.
월남 선생은 실망하여 성서를 던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미국을 이토록 강한 나라로 만들게 한 근본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액면 그대로 읽어서는 안될 요법이 정말 이 속에 있단 말인가?’
선생은 다시 성경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도 군사육성법이나 무기 제조법 같은 비결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월남은 다시 책을 던졌습니다.
이처럼 월남 선생은 성경을 집었다 던졌다 하기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결국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성경의 진리를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옥중에서였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낙심하기도 하고 깨닫지 못하여 던져 버릴 때도 있습니다만,
끝까지 읽으면 반드시 구원을 얻는 길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어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성경은 반드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구원의 사건속에서 들어나게 됩니다.
구원이 최대의 사건이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감격과 기쁨을 잊어버리고 살기가 쉽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닌 것처럼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최대의 사건은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보다 기적의 사건은 없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예수믿는 사람이 25% 정도 된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그보다 더 큰 경이한 일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기적은 영적인 기적이라서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집회에서 앉은 뱅이가 일어났다고 하면,
큰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신유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유의 기적을 구원이라는 엄청난 기적보다도 더 강조하는 집회가 있다면,
그것은 이단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구원의 기적이 그 어떠한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구원받기 전에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예수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
그분과의 생동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습니다.
할렐루야!
왜냐하면 그분은 전능자, 그분은 창조자, 그분은 구원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도로시 리즈의 ‘질문의 7가지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유방암에 걸렸을 때, 질문을 거듭하여 새로운 치료법을 알아냈습니다.
또한 뭐 꼭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완치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질문을 통해 새로운 힘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질문의 7가지 힘“이란 책은,
상당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질문은 힘이 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질문하면 면박당하거나,
학생이 질문하면, 알밤 맞고, “진도 못나가게 방해한다”는, 소리나 듣는 풍토여서,
그런지 웬만해선 질문을 잘 하지 않고 삽니다.
물론 질문은 쉬운게 아닙니다.
잘못하면 바보되기 십상입니다. * 고문관!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허튼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엔, 중간도 위험하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기둥 뒤에만 잘 숨어 있어도, 됐어요!
안 보이면 됐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질문을 하라고 말합니다.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옵니다.
생각이 자극됩니다.
정보를 얻습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은 질문하는 자의 것입니다.
질문하는 자의 것입니다.
질문에 답변만 하다가는, 질문하는 사람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지난 제가 누구나 다 아는 무서운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할렐루야! 의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많이 나오는 데,
구약 39권 가운데 나오는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시편입니다.
시편에만 나오는 데 23번 나옵니다.
할렐루야! 의 원뜻은 무엇일까요?
“할렐”이라는 말은, “찬양하라!”입니다.
“루”는 “유르”로서 “너희들의”의 뜻을 가집니다.
“야”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할렐루야”의 뜻은 “너희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라!”입니다.
같이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둘째, 심판의 할렐루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할렐루야”라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이 할렐루야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 19장에만 나옵니다.
오늘 2,3절입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
이 세상 정치 종교 문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심판이 끝나자 할렐루야 하는 찬양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통해 자신의 참되심과 의로우심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 많은 세월속에서,
이 세상과 이 역사를 살펴 보면서,
의로써 살고자 한, 수 많은 사람들이 수 없이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 역사를 살펴 보면서, 수 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악인들이 잘되고, 잘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어찌하여 바르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수난을 받아야 합니까?”
한 어린 아이가 공자(孔子)님에게 나아와 물었습니다.
“공자님은 모르시는 게 없다면서요? 그러면 공자님, 하늘엔 별들이 몇 개나 있나요?”
아이의 뜻밖의 질문에 공자님은 난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얘, 그건 너무 먼 곳에 대한 질문이기에 모르겠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이렇게 물었답니다.
“너무 먼 곳에 대한 질문이기에 그렇다면, 공자님, 공자님 눈썹은 몇 개나 되나요?”
안다고 하지만 실상 모릅니다.
그런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생각해 왔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물어보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은 호기심이 많아 잠시도 쉬지 않고 질문을 해댔습니다.
“아버지, 왜 하늘은 파란가요?”,
“그런데 저 나무는 왜 초록색이죠?”,
“천둥이랑 번개는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죠?”
아버지는 아들의 질문에 당황해하면서 변명처럼 이말 저말을 늘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얘야,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서 잘 모르겠구나” 하고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아들은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너무 질문을 많이 해서 귀찮으셨죠?”
그러자 아버지는 대답합니다.
“아니란다. 질문을 하지 않고 어떻게 배울 수 있겠니?”
우리는 영혼과 구원의 문제,
천국과 영생의 문제, 그리고 삶과 죽음에 관한 수 많은 의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 없이 하나님께 물어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속 더욱 진지하게,
그분의 뜻을 묻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 묻고 또 물어보십시오.
그분께서 당신을 진리의 깊은 바다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심히 있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사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정오의 태양처럼 밝게 나타나는 순간,
모든 불의와 불공평과 모순이 사라지고 지상의 모든 악이 심판받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르지,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입니다.
같이 합니다!
“할렐루야!”
셋째, 성취의 할렐루야입니다.
오늘 4절을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9:4절입니다.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표준 새번역 성경입니다.
“스물네 장로와 네 생물이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아멘, 할렐루야" 하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4절의 아멘의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멘이란 무슨 뜻입니까?
신약 성경에 보면,
아멘 이란 말이 다른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입니다.
진실로 라는 말이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멘이 기도문에서 쓰이게 되면,
“진실로 이루어 지게 하옵소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아멘이라고 말하면,
“기도한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요청을 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멘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 없이 아멘 했습니다!
부흥회땐 아멘 않는 다고 혼나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고,
구원이 완성되면 이 지상에 이루어져야 할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할렐루야!
각 개인을 향한 모든 기도를 이루시고,
역사를 향한 자신의 뜻을 이루신 그 하나님께,
우리는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서 영원한 할렐루야를 외칠 것입니다.
넷째, 통치의 할렐루야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은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6절)
이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역사를 다스렸다는 데 대한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할렐루야! 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속에 할렐루야가 넘쳐나시길 바랍니다.
무조건 할렐루야를 외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목사님이 교인은 두 가지를 잘하면 복을 받는 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는 할렐루야이고, 다른 하나는 아멘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인은 나는 늘 2가지 단어를 기억하면서 살아야지 다짐 했습니다.
감사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이 일어나거나 또한 소중한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심정으로 ‘아멘’ 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할렐루야! 장로님이 계십니다.
아멘 장로님도 계셔야 하는 데, 아멘 권사님이 되십시요!
아멘 집사님이 되십시요! 아멘도 안하네!
그래서 이 교인은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는 데...
어느 날 말을 한 마리를 샀습니다.
그리고 훈련을 시키는데... 할렐루야 아멘을 접목을 시켜서...
갈 때는 할렐루야... 설때는 아멘으로 훈련을 시켰습니다.
말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됐는지... 할렐루야 하면 가고,
아멘하면..잊지도 않고 척척따라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넓은 들판을 달리게 됐습니다.
기분이 좋아 할렐루야...할렐루야... 하면서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말과 함께 신나게 달리는데... 저기 보니 낭떠러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 서야하는 데...아멘을 갑자기 잊어버린 것입니다.
큰 일이 났습니다. 서라. 스톱...해도 서지는 않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 하나님 도와 주세요...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는 순간 밀이 멈춰선 것이다.
눈을 떠보니 낭떨어지 바로 앞인지라...
이런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입버릇처럼 할렐루야! 했는데...
그 사람은 지금까지 집에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질병으로 반신불수 상태였습니다.
질병 치료를 위해 많은 돈을 빌렸으나, 이를 갚지 못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 절망적인 순간에 그는 악보를 펴놓고, 창작에 몰입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세계적인 음악가 헨델.
그리고 감옥에서 만든 작품은 이 세상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할렐루야’입니다.
또 다른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소년은 학교에 결석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체육시간이면 운동장 한편에 앉아,
친구들이 뛰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거나 책을 읽었습니다.
소년은 몸이 약한 대신 달변가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 선생님’으로 불린 이 사람의 이름은 스티븐슨 - 소설 ‘보물섬’의 작가입니다.
악성 베토벤과 발명왕 에디슨도 농아였습니다.
‘실락원’을 쓴 밀턴은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예술가들중 ‘고난의 강’을 건넌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경은 위대한 창조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역경을 넘어설 때, 우리는 할렐루야를 외칠 수 있습니다.
역경을 넘어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경을 넘어서서, 창조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1973년 9월, 당대 테니스의 여왕이었던 빌리 진 킹은,
전 윔블던 남자 챔피언인 보비 릭스의 도전을 받아들여,
‘세기의 성 대결’을 벌였습니다.
3만 관중, 5000만 TV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27세의 킹은 55세인 릭스를 3대 0으로 이겼습니다.
릭스는 티셔츠에 ‘남성 해방’이라는 슬로건을 새기고,
“여자에게 질 바에야 다리에서 뛰어내리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남성 우월주의자였습니다.
이 경기는 여성 스포츠 선수들에 대한,
사람들이 인식이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남성에 비해,
여성 선수들은 찬밥신세를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빌리 진 킹이 처음 테니스대회에 참가할 때에는,
협회에서 남성선수에게만 차비를 지급하는 등 남녀차별이 심했습니다.
그 때문에 여성 선수들은 더 강해졌고,
더 독하게 승리를 향해 뛰었습니다.
빌리 진 킹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리 진은 사회적 압박뿐만 아니라,
신체적 압박까지 극복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습니다.
빌리 진은 0.2, 0.1의 시력으로 언제나 안경을 끼고,
경기를 해야 했습니다.
한쪽 무릎을 세 번씩 여섯 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가슴 통증으로 호흡곤란과 싸운 끝에,
그는 테니스계를 제패했고 릭스와의 경기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세기의 성 대결’을 통해 빌리 진은,
1972년 제정된 교육수정법 제4장(학문 분야이든 운동경기이든 학교에서의 모든 성차별을 금지한 법)을 사람들에게 환기시켰습니다.
그 뒤 빌리 진은 여성 선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섰습니다.
그 결과 보수적인 윔블던까지도 해마다 여성의 상금을 높였고,
지금은 남녀 격차가 5%에 불과합니다.
US오픈과 호주오픈은 이미 남녀 우승자에게 같은 상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역경도 특권입니다.
빌리 진이 입버릇처럼 한 말처럼,
매 순간의 역경을 즐거운 도전으로 받아들여 역경을 이겨낸,
그는 진정한 스포츠계의 승리자입니다.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좋은 환경이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좋은 환경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역경에 처할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어 우리를 보호하시고 힘을 주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원래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심한 근시안 때문에 악보를 잘 볼 수 없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악보를 완전히 외워서 연주회에 나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 직전에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되어,
유일하게 그날 연주할 곡들을 전부 외우고 있던 그 당시 19세였던 토스카니니가,
임시 지휘자로 단상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지휘자가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약점을 악보만 암기하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무조건 노력했습니다. 그는 그 결과로 세계 최고의 명지휘자로 거듭났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소아마비였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한계와 대공황,
그리고 세계대전이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현실을 불평하기보다,
현 상황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해 역경을 헤쳐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4선을 지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약점을 비판하는 것보다 장점을 키우는데 힘쓰는 것이 필요하다. 노력만이 재능을 빛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실패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드러난 약점이 아니라 그 약점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고 있는 자기 생각입니다.
약점을 살려 더 강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그 약점은 한낱 작은 걸림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래는 준비하고 노력하는 자의 것입니다.
같이 합시다!
미래는 준비하고 노력하는 자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할렐루야를 외치며, 심판의 할렐루야를 외치며,
성취 완성의 할렐루야를 외치며, 통치의 할렐루야를 외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인 어린양 혼인 잔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완성인 어린양 혼인 잔치(요한계시록 19장 설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7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자입니다.
믿습니까?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꽤 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 지,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성경에서 밖에 찾을 수 없는 데,
그 집적적인 근거의 원인을 오늘 분문말씀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 아내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예비된 신부는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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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하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은 가시나무새에서 나오는 신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천주교 신부죠!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나오는 신부는 그와는 다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릴께요!
신부와 의사가 함께 대화를 나눈 이야기입니다.
어느 병원에서 신부와 의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신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떤 환자 옆에 서있었는데 환자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더니 진짜 괴로워 보였소."
"네에"
"그런데 제가 신의 축복으로 기도를 드리고 물러섰더니 갑자기 얼굴빛이 밝아지며 평안한 얼굴 표정으로 바뀌었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의사보다 신부의 힘이 강하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러자 의사가 먼 산을 주시하며 말했습니다.
"글쎄요? 종종 사람들이 환자 옆에서, 산소 호흡기의 호스를 밟고 있을 때가 있어서요."
재미있죠!
식사 준비하실 때 목사님이 금요 기도회때 말씀하신 것이라고 알려 주세요!
그러면 좋은 일이 있으리라! 크게 있으리라!
뉴욕에 살고 있던 신부 한 분이 맨하탄의 야경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으슥한 골목을 지나고 있는데 강도가 나타났습니다.
"몸에 지닌 건 모두다 내놔!"
주머니를 뒤져봤더니 아무것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습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지갑도 두고 왔고, 시계도 차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필요하면 가져가십시오."
담배 한 갑을 내밀었습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강도가
"신부님, 신부님은 사순절 기간에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나는 강도짓을 하지만 사순절 기간에는 술이나 담배를 먹지 않습니다."
한 불신자 예비 신랑이(교회한번 나오지 않은) 주례자를 구하다가 목사에게 찾아가 말했다.
"주례 좀 서 주십시오. 사례비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얼마면 될까요?
목사는 말했다.
"아! 알았습니다. 웃으면서 돈은 신부가 예쁜만큼 주십시오."
그러자 신랑이 목사의 손에 100원을 쥐어주고 갔다.
목사는 어이가 없었으나 이왕 약속을 했으니 주례를 보기로 했다.
결혼식이 끝나자 100원밖에 안된다는 신부의 얼굴이 궁금해서,
목사는 살짝 다가가 면사포를 들춰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신랑에게 다가가 하는 말...
"얼마 거슬러 줄까?"
제 목 : 사이버 우스개방
▼ 개들의 여름나기 수칙 ▼
①아무나 보고 짖지 않는다. 죽도록 맞고 먹힐 수도 있다.
②땅에 떨어진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는다. 미끼일 수 있다.
③복날에는 주인이라도 믿지 말고 함부로 따라가지 않는다.
④가급적 밖으로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나가더라도 영양탕
집은 멀찌감치 돌아간다.
⑤미견계를 쓸 수 있으니 예쁜 강아지라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⑥기온이 30도 이상 올라가면 동네 야산으로 도망해서 25도 이하로 떨
어진 뒤 내려온다.
⑦성이 변(便)가인 개는 특히 조심해라. 만인의 표적이다.
⑧잡히면 입에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어 미친척 한다.
⑨다른 개가 잡혀가는 것을 목격하더라도 절대 의협심을 발휘해선 안된
다. 함께 개죽음할 수 있다.
⑩이상의 수칙은 초복 10일전부터 말복 10일뒤까지 지키도록 한다.
▼ 여자가 말이 많은 이유 ▼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가 있었다. 하루는 집에 들어와 TV
를 보다가 부인에게 말했다.
“남자는 하루 평균 1천마디하고 여자는 2천마디한다는군.”
부인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자들이 남편에게 한 말을 자꾸 반복해야 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새 TV뉴스에 빠져있던 남편 왈. “뭐라구?”
▼ 신부가 좋아하는 것 ▼
제주도로 신혼여행 온 커플이 며칠동안 호텔에 틀어박혀 코빼기도 보이
지 않았다. 엿새째 되던 날 두 사람은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나타났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자 신부는 수줍은 듯 신랑을 보고 말했다.
“당신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잖아요.”
걱정스런 표정의 신랑. “물론 알지. 하지만 뭘 좀 먹어야 하잖아….”
▼ 신세대 삐삐 「약어」 들 ▼
△1404〓(당신)한 사람만 영원히 사랑해
△1212〓홀짝홀짝. 술생각이 날 때
△11010〓‘흥’(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볼 것)
△025〓뻥이요(삐삐를 잘못 쳤을 때)
△230〓이상무
△0288〓열이 펄펄
△820〓빨리와
△981〓급한일
△1200〓일이빵빵(지금 바빠요)
△1255〓이리 오오
△1759〓일찍오구
△1919〓아이구, 아이구(아플 때)
△2626〓이륙(약속장소로 간다)
△7676 착륙(약속장소 도착)
△2828〓이빨이빨(할 이야기가 있다)
△5782〓호출빨리
△8255〓빨리 오오
△8578〓바로 출발해
△12545〓이리 오세요
△79337〓친구에게 삼삼칠 박수를(친구야 힘내라)
△129129〓난 지금 몸이 아파요
△979712〓구질구질(당신이 싫어요)
△1010235〓열렬히 사모합니다
△3312042〓심심하니 영화보러 가자
△2241000045〓둘이서 만나요.
삼베 족도리
친정 어머니께서 오남매 중의 막내인 나를 부르셨다. 지금은 아버지 홀로 사용하시는 방으로 날 데리고 가시더니 언니가 출가하면서 두고 간 낡은 드렁크 문을 여셨다.
"이런 건 며느리와 딸들이 모여 점심밥 해 먹으며 준비하는 거란다."
커다란 삼베로 싼 보따리 두 뭉치를 꺼내시며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을 또 하셨다.
"네 아버지와 엄마가 마지막으로 입고 갈 옷들이야."
수의...
보자기를 열어서 시신을 쌀 덮개부터 차곡차곡 펼쳐 좋으시며 한가지씩 설명해 주셨다. 삼베 저고리, 삼베 치마, 삼베 속바지, 버선, 손싸개...족도리까지. 이 마지막 옷들을 어머니 당신 손으로 장만하시면서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하니 목이 메이고 눈물이 자꾸 나와 몇번이고 삼키면서 어머니께 눈물이 자꾸 나와 몇번이고 삼키면서 어머니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진정했다. 일에 굵어진 어머니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면서 예쁜 꽃을 삼베로 만들어 모자처럼 붙인 족도리를 내손에 건네 주신다. 심각한 분위기에 울음이 터져 버릴 것같아,
"이상하네, 왜 족도리까지 만드셨대요?"
"예수님 앞에 신부가 되어서 가는데 족도리도 안쓰고 가면 되겠니?"
어머니께선 육신을 벗어야 할 고통과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내 슬픔을 에수님께 향한 신앙으로 훌륭하게 승화시키셨다. 지나치다 못해 내 가슴을 멍들게 하던 검소함과 알뜰살뜰히 절약하시던 모습은 어머니께 향한 정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기차역에서 밤 늦게 만난 고아나 걸인들을 목욕시켜 재우시고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보내시던 모습.
주님을 그대로 닮으신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은 예수님의 가장 아름다운 신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신부된 교회를 예비시키는 일에, 중점을 두고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참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교회의 중요성을 종종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안목에서 보면,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도 중요하지만, 한 교회 한 교회도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여러 교파로 분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 속한 모든 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보십니다.(오늘 점심식사하면서 그런 말을 나누었습니다. 예장은 교파가 230여개나 된답니다. 그 많은 교파가 언제나 합해질까? 예수님 재림때나 합해지지 않을 까? 생각합니다)
한 교회 한 교회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21-23절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렇습니다.
맨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교회가 있고,
그 아래에 만물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교회를 통해서, 만물을 섭리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교회를 통한다는 말은 곧 성도들을 통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통해 역사 속에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개개인을 쓰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자신의 뜻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여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주님은 가장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교회를 준비시키십니다.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여러 사건과 여러 경험들을 통해서,
교회에 속한 개개인인 우리 성도들을 끊임없이 정화시키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깨끗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점점 더 쓰임받고,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다가 마침내는 이 세상에서 그분의 뜻을 이룰 뿐 아니라,
모든 과정에서 우리를 다루시는 그 손길을 통해서,
주님 앞에 온전한 자로 예비될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 신랑되신 주님은,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지적인 아름다움, 곧 인격적인 거룩함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오늘 7,8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7,8절)
마지막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보고 싶어하시는 것은 바로 의(義)입니다.
우리가 얼마를 벌었고,
우리가 얼마나 명예를 얻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랑되신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주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이 우리의 삶 속에 얼마만큼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정결해졌을 때 비로소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거행되게 됩니다.
옛날 유대의 결혼에는 세 단계의 절차가 있었습니다.
우선 정혼식이 있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는 정혼식이 결혼식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 일치감치 배필감을 정해 버립니다.
그렇게 정해지면 그만이기 때문에 정혼식은 결혼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혼할 때 반드시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 지참금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기다림의 때를 거친 뒤에,
때가 다 차면 일단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다시 신랑 집으로 옵니다.
그때 신랑 집에서 잔치가 열리는데,
본문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바로 그 단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우리에게도 적용해 봅시다.
언제 우리가 주님과 정혼을 했습니까?
에베소서 1장 4절을 보면,
우리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을,
주님의 영원한 신부로 삼을 계획을 창세 이전부터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혼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상에서 보혈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 흘리신 피가 바로 지참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재림까지의 시간이 기다림의 때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때에 신부는,
신랑의 기대에 합당하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약혼후에,
신랑 신부가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결혼 때까지 상대방을 위해,
정성껏 준비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님 재림 때까지 하나님 앞에 점점 더 합당한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에베소서에서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나 살펴봅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엡 5:25-33)
결혼식장에서 “신부 예쁘다”는 말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당사자인 신부가 아니라 신랑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아하수에로 - 바사나라)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도 교회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신부로 설 수 있도록,
손수 화장품을 제공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도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여,
점점 성화되어 그 성화가 완성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가문의 선비 서해가 장가를 들어 첫날밤을 맞이했다. 그런데 신부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도대체 얼굴을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부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서해는 신부의 얼굴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신부의 눈이 좀 이상한 듯했다. 신부는 앞을 잘 불 수 없었던 것이다. 중매인이 '좀 멀어서 탈' 이라고 하기에 길이 멀다는 줄 알았지. 눈이 잘 안 보일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비님, 용서하십시오. 평생 저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부모님 때문에 선비님을 속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을 마친 신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털썩 주저앉은 서해는 만약 자신이 여기서 파혼을 한다면 신부가 목숨을 끊을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해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미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되었으니 나는 기쁘게 당신을 맞이하겠소. 그러니 당신도 우리 집안을 잘 꾸려가 주기 바라오."
그러자 첫날밤 소박을 두려워하던 신부와 밖에서 숨죽이고 엿보던 신부의 식구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밤을 새워 신방을 향해 '잘 살아라' 하고 빌었던 신부 할머니의 소원대로 화목했다.
바로 이 신부가 조선 시대 3대 현모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약봉 서성의 어머니이다.
남편인 서해를 저 세상으로 일찍 떠나 보낸 이씨 부인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한양으로 올라와 오늘날 중림동이 된 '약현'에 자리를 잡았고,
여기서 약현밥, 약현과. 약현술을 만들어 팔면서 집안을 일으켰다.
오늘날의 약밥, 약과, 약주는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는 서해가 첫날밤 눈이 잘 안보이는 신부를 버리지 않은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같이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
당신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기다려집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주님 곁에서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몹시도 기다려지겠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사람을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9절)고 했습니다.
조지 베브리 쉐아(Georage B. Shea)라는 복음 성가 가수의 간증입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은 방송을 통해 전 미국 국민에게 울려 퍼졌고,
노래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에게 끝없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갑자기 그는 유명 스타가 되었고 여러 방송사에서 끊임없는 계약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그의 인생은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왠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밀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 숙여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하던 바로 시간에 그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조그마한 쪽지를 주었습니다.
종이에는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성시를 조용히 읽다가 감동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멜로디를 종이에 써내려갔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1983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이 찬양을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엄청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박수가 끝난 후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모든 사람들을 숙연케 했습니다.
같이 찬양 부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마지막을 의미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순간이,
찾아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에 할 일은 “할렐루야”를,
외치는 길 밖에 없습니다.
다시오실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9장 11-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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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한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하늘 문이 닫혔습니다.
더 이상 인간은, 마음대로 그 문을 드나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께서는,
이 지상에서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거나,
고통에 직면할 때,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종종 하늘 문을 열어, 하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와,
깊은 고통과 절망과 낙심 속에 빠져 있던,
에스겔 선지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하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에스겔 1:1 |
개역한글 |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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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개정 |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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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번역 |
삼십년 되던 사월 오일이었다. 그 때 나는 그발 강 가에서 포로들 속에 끼여 있다가 하늘이 열리며 나타나는 신비스런 광경의 발현을 보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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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 |
때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오일이었다. 그 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 가에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 환상을 보았다. |
이방 나라에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비전을 본 에스겔 선지자는 얼마나 가슴이 뜨거웠겠습니까?
신약 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 순교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이 나옵니다.
스데반이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기 직전에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문이 열리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그리스도가 서 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영광스런 주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은(요한계시록 19장 11절이하),
이 땅의 역사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열리는 하늘 문 광경을,
사도 요한이 목격하는 장면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서 드디어 다시 오실 주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19:11-21절
“ ”
그리스도의 재림은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이 런던 집회를 할 때 기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금세기 역사에서 어떤 사건이 가장 위대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빌리 그래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야말로 최후의 뉴스, 최대의 뉴스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초림이 사실이었듯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림을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그 시기와 그 방법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에서 성경 기자는 재림하시는 그분이,
어떤 모습으로 오시며 또한 누구신가,
그리고 그분은 왜 오시는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그러면, 다시 오실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째 / 승리자이십니다.
주님은 역사의 마지막 승리자로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늘 11절에 보면 승리자로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어떤 모습으로 상징되어 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로마 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은,
언제나 흰 말을 타고 돌아왔습니다.(전쟁에서 귀환할때)
그래서 흰 말은 승리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가 승리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금 이 땅에 나타나는 순간, 세상끝날 심판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날엔 이미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 시대는 복음이 쇠퇴하는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참된 복음이 쇠퇴하고,
신문이나 뉴스에서 종교 인구가 줄어든다는 보도를 대할 때,
우리는 자연히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때에,
반드시 최후의 승리자로 역사 속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 날을 향해 우리는 넘어질 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부둥켜 않고, 목표점을 향해, 골인지점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둘째 / 왕입니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12절)
면류관은 승리자의 이미지가 될 수 있지만, 왕의 이미지도 됩니다.
왜냐하면 왕들이 면류관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면류관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한 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을 마침내 다스리고 통치하실 왕이심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오늘 16절에서 주님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그 옷과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세상에서는 많은 주인들이 있었습니다.(세상을 호령하던)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가 하루는 거지를 만나서,
“친구여,오늘도 안녕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거지가 대답하기를,
“난 하루도 안녕하지 않은 날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타울러가 말하기를,
“여보시오, 그러면 행복하시기를” 하자,
거지의 대답이 “난 불행해본 적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타울러는 놀라서, “그것은 무슨 뜻이죠?”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거지는,
“날이 좋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비가 와도 감사하고,
먹을 것이 넉넉하면 감사하고, 배 고파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나, 나를 기쁘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내가 불행하지 않을 때, 불행하다고 말해야 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타울러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고, “당신은 누구시오”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왕이오”라고 그 거지는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신의 나라는 어디 있소”라고 물으니까?
그 거지는 “내 마음속에…” 라고 조용히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제일 빨리 왕이 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왕!"
예수님은 모든 주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으신 주인이시오!
역사상 가장 유일하신 통치자, 만물의 궁극적인 지배자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셋째 / 충신과 진실입니다.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11절)
충실과 진실은 같은 성격을 가진 단어입니다.
충실과 진실은 성경에 주로 언약과 관련되어 등장하는 단어들입니다.
약속과 관련된 말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이 “충신과 진실”로 오시는 데,
예수님은 약속에 충실한 자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약속이란 재림의 약속을 말합니다.
성경에 많은 약속들이 나오지만,
가장 많이 나오는 약속은 재림에 대한 약속입니다.
신약 성경에만 무려 260장에 걸쳐서 318회나 나옵니다.
약 25구절마다 한 구절씩 재림에 대한 언급이 있는 셈입니다.
주께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318회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새빨간 거짓말을 하신 분이시든지,
정신 병자든가 줄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약속한 그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부활에 대한 약속도 여러 번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재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사건이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사건인 것입니다.
넷째 /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절)
주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를 절대로 용납 할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심판하십니다.
재림 사건은 예수님의 의의 심판의 사건입니다.
바다 밑 모래 바닥에서 조개가 숨을 쉴 때,
잘못하여 모래알이 조개의 몸 속에 박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약한 살 속에 거칠고 딱딱한 모래알이 박히면,
그 조개는 살을 가르는 통증을 없애려고,
자기 몸의 진액을 짜내어 끊임없이 모래 알을 에워싸고 또 에워싸고,
인고의 세월을 보냅니다.
이렇게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이기고 나면,
그 조개 속의 모래는 영롱한 색채를 내는 아름다운 진주가 됩니다.
그러나 조개의 몸 속에 들어온 모든 모래가, 진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는 모래알 때문에 생긴 모진 고통을 이기지 못해,
죽는 조개도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비판받는 일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은,
“비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아무 것도 아닌 인물이 되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비판을 통해 성숙해지고 비판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역사를 체험하며, 모래를 진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다섯째 / 정복자입니다.
“또 그가 그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13절)
성경에 피에 대한 언급이 있으면,
무조건 보혈만을 연상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피 뿌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정복자의 이미지입니다.
주님의 옷에 원수들의 피가 묻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옛날 로마의 군인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올 때,
종종 피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적들을 이기고 승리자로 돌아온다는 명예의 상징이었습니다.
주님의 승리에 관한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계시록 19장 15절입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칼이 나오는데, 그는 그것으로 모든 민족을 치실 것입니다. 그는 친히 쇠지팡이를 가지고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하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입니다.”(15절)
이러한 주님의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승리입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13절)
다시 오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표현은 요한복음 1장 1절에도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표현입니다.
제 말이 제 생각과 뜻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씀이신 주님도 그 무엇인가를 나타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나타내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다음 말씀에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이시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으로써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계시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의 이론 속에서도 하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골에서 산다 해도 예수님을 믿는 할머니의 마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대화하고 사랑하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때때로 경험은 논리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체험은 없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가 모처럼 야구 구경을 갔습니다.
몸에 감기 기운이 있어 잘 아는 의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오렌지 쥬스를 많이 마시고 집에서 쉬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으로 식사를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 사람은 돌아와 그대로 했는데, 며칠 후 그 의사에게서 계산서가 날아왔습니다.
집에서 혼자 조치를 했는데,
계산서를 보낼 수 있느냐 하며 화가 나서 잘 아는 변호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처방은 의사가 했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마땅하다는 말을 듣고,
결국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 얼마 있다가 또 계산서가 날아왔습니다.
그것은 변호사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전화로 상담을 했으니 그 값을 지불해야 했던 것입니다.
모든 문제와 일은 돈으로만 해결되는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씀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재림하실 때 그분은 더 이상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심판자, 정복자, 승리자의 영광스럽게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승리를 선언하는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약속을 성취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의를 통해서,
심판이 이루어지는 사건이며 하나님의 마지막 영광이 계시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는 왜 오시는가?(요한계시록 19:19-21)
‘여기 결혼을 앞둔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가 있습니다.’
동화는 보통 이 시점에서 시작하여,
‘그 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간단히 끝납니다.
백설공주, 백마탄 왕자! = 등장!
동화는 언제나 결혼을 연애의 로맨스 뒤에 이어지는 종착지로 봅니다.
그러나 결혼식은 종착지가 아닌 모험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둘이 사랑해서 결혼은 했지만,
서로 다른 성장배경 성격 취미 가치관 등이 결혼생활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출산 자녀양육 가정경제, 의사소통에 협력과 조화가 없다면,
무수한 삶의 도전들은 결혼생활을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로 안내할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 파경을 맞은 대부분의 부부는,
‘만약 내게 맞는 사람을 만났다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을 텐데…’라고 후회를 합니다.
부부 갈등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동화 속의 왕자와 공주처럼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던,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비의 결혼생활을 보면, 비극으로 끝이 났습니다.
성장배경의 차이,
치유받지 못한 내면의 상처 등으로 숱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재 작년에 찰스 왕세자는 카밀라 파커볼스와 ‘세기의 재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네버엔딩 스토리입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 예쁘다”는 말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당사자인 신부가 아니라 신랑입니다.
신부는 신랑의 자랑이기 때문입니다.(아하수에로 - 바사나라)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도 교회가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신부로 설 수 있도록,
손수 만드신 화장품을 제공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도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말씀으로 자신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여,
점점 성화되어 그 성화가 완성될 때,
교회는 비로소 그리스도와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가문의 선비 서해가 장가를 들어 첫날밤을 맞이했다. 그런데 신부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도대체 얼굴을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신부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서해는 신부의 얼굴을 들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신부의 눈이 좀 이상한 듯했다. 신부는 앞을 잘 불 수 없었던 것이다. 중매인이 '좀 멀어서 탈' 이라고 하기에 길이 멀다는 줄 알았지. 눈이 잘 안 보일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비님, 용서하십시오. 평생 저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부모님 때문에 선비님을 속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을 마친 신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너무 놀라 털썩 주저앉은 서해는 만약 자신이 여기서 파혼을 한다면 신부가 목숨을 끊을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해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미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되었으니 나는 기쁘게 당신을 맞이하겠소. 그러니 당신도 우리 집안을 잘 꾸려가 주기 바라오."
그러자 첫날밤 소박을 두려워하던 신부와 밖에서 숨죽이고 엿보던 신부의 식구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밤을 새워 신방을 향해 '잘 살아라' 하고 빌었던 신부 할머니의 소원대로 화목했다.
바로 이 신부가 조선 시대 3대 현모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약봉 서성의 어머니이다.
남편인 서해를 저 세상으로 일찍 떠나 보낸 이씨 부인은,
아들의 교육을 위해 한양으로 올라와 오늘날 중림동이 된 '약현'에 자리를 잡았고,
여기서 약현밥, 약현과. 약현술을 만들어 팔면서 집안을 일으켰다.
오늘날의 약밥, 약과, 약주는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며,
이는 서해가 첫날밤 눈이 잘 안보이는 신부를 버리지 않은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같이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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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기다려집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주님 곁에서 그분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몹시도 기다려지겠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러한 사람을 이해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9절)고 했습니다.
조지 베브리 쉐아(Georage B. Shea)라는 복음 성가 가수의 간증입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은 방송을 통해 전 미국 국민에게 울려 퍼졌고,
노래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에게 끝없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갑자기 그는 유명 스타가 되었고 여러 방송사에서 끊임없는 계약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그의 인생은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의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왠지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밀려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머리 숙여 기도했습니다.
그가 기도하던 바로 시간에 그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조그마한 쪽지를 주었습니다.
종이에는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 부인의, 성시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성시를 조용히 읽다가 감동을 받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멜로디를 종이에 써내려갔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1983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그가 이 찬양을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엄청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박수가 끝난 후 그가 남긴 한 마디는 모든 사람들을 숙연케 했습니다.
같이 찬양 부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때가 왔다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마지막을 의미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영원히 교제를 나눌 순간이,
찾아온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때에 할 일은 “할렐루야”를,
외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구원을 완성시키려고 오십니다.
신랑과 신부가 혼인식을 치르고 한 가족을 이루는 것처럼,
주님이 오심으로써 그분과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완성되는 것,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러나 이 불신앙의 세상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심판을 하시러, 다시 오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는, 심판의 두 대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입니다.
특별히 짐승은 정치적인 적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종교적인 적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말세가 되면, 사단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세계에도 깊이 관여하여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세력을, 주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심판의 마무리는,
“이 둘이 산 채로 유황 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20절)라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지방에 흉년이 들어, 먹고 살 길이 막연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이러다간 큰일나겠다 싶어서,
외아들과 머슴을 불러 놓고,
“내가 아무래도 다른데 가서 장사를 해 가지고 먹고 살것을 마련해 와야겠다.
내가 내년 단풍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꼭 돌아오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면서,
자기 아들보다 나이가 많은 머슴에게 집안을 잘 부탁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이 지나도 주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머슴이 자기도 먹고 살기 위해서,
그 집안에 남아 있던 양식들을 가로채고,
오히려 주인의 아들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서 단풍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한순간 단풍드는 모습을 보자,
이 머슴은 안절부절하고 초췌해지면서 말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머슴에게 학대받던 그 집 아들은,
똑같은 현상을 보면서 마냥 희망에 부풀어,
“아빠 빨리 돌아와요”라며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구원의 마지막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기업을 상속받기 위하여 변해 가는 이 시대를 향해,
이렇게 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같이 하겠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