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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明心寶鑑)
추적(秋適 1246-1317) 고려 충렬왕 시절
- 추적(秋適 1246-1317) (고려) 양광도 양지현(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본관 추계, 자 관중(慣中), 호 노당(露堂), 려의 문신, 정치인이다. 민부 상서(民部尙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한 후 시랑(侍郞) 겸 국학 교수(國學敎授)로 재임할 때 명심보감을 집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서원(仁興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추적(秋適)이 금언(金言), 명구(名句)를 모아 놓은 책.구분 필사본, 저자 추적(秋適), 범입본 / 시대 고려(충렬왕)
1권 1책. 필사본.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장각도서. 원래 19편으로 되어 있다. 후에 어떤 학자가 증보(增補), 팔반가(八反歌), 효행(孝行), 염의(廉義), 권학(勸學) 등 5편을 더하였다. 각 편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금언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제1편은 계선편(繼善篇)이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는 공자의 말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천명(天命), 순명(順命), 효행(孝行), 정기(正己), 안분(安分), 존심(存心), 계성(戒性), 근학(勤學), 훈자(訓子), 성심(省心), 입교(立敎), 치정(治政), 치가(治家), 안의(安義), 준례(遵禮), 언어(言語), 교우(交友), 부행편(婦行篇)이 있다. 이 책은 하늘의 밝은 섭리를 설명하고, 자신을 반성하여 인간 본연의 양심을 보존함으로써 숭고한 인격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참조항목; 공자 명심보감판본[네이버 지식백과] 명심보감 [明心寶鑑] (두산백과)
명심보감(明心寶鑑)
유덕선 역해, 홍문관, 2015, P. 188.
차례
천명(天命), 순명(順命), 효행(孝行), 정기(正己), 안분(安分), 존심(存心), 계성(戒性), 근학(勤學), 훈자(訓子), 성심(省心), 입교(立敎), 치정(治政), 치가(治家), 안의(安義), 준례(遵禮), 언어(言語), 교우(交友), 부행편(婦行篇) [팔반가(八反歌), 효행(孝行), 염의(廉義), 권학(勸學)] 효행이 두 번이나 들어가 있다. 찾아볼 것...
격몽요결을 끝내고, 명심보감의 필사를 시작하다(48PLF).
명심 보감 필사를 끝내다(48TKB)
소학을 시작하다. (48TKC)
*추적은 고려조 학자인데,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유가와 도가 문구들과 시인의 글들은 넘쳐나는 데 불가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왜 일까? (48TLG)
*** 필사를 하면서, 메모로 남긴 것들이다.
제1 계선편 02 한소열제 왈, 勿以惡小而爲之 하고 勿以善小而不爲 하라(물이악소이위지 물이선소이불위) 악이 (아무리) 작다 하여도 하지 말고, 선이 작다 하더라도 아니하지 말라
아마도, 내가 어릴 때 들었던 문구 중에 기억이 깊은 남은 문구를 뽑으라면 이 문구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자의 논어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입에 익숙한 것이고.....
제5 정기편 26 자허원군의 성유심문에서 / 상임지이천감 하찰지이지지 - 상구보리 하화중생(下化衆生) 과도 같은 것일까? 도가의 입장이긴 하지만, 상층의 거울(천감 天監)과 심층으로 땅아래 지(地)지(祗, 공경할 지) 지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제6 안분편 - 에피쿠로스 학파를 연상하게 한다.
제7 존심편 -01 여섯필의 말을 부리듯이(경행록)
제7 존심편 -02 격앙시 7언절구... 19 이심전측배도 사의확즉멸공(利心專則背道 私意確則滅公) 이글에 삼성이라고 주를 달았었다.
제8 계성편 <08-6 공자가 자장 전손사(顓孫師, 전503-존447)에게 말했다고 하는 인(忍)에 관한 이글은, 내가 읽으면서 스토아 사상과 같다고 생각해서 놀랐다. 이 글을 전사하는 당시에 전호근에게 물으니 공자가 명심보감에 나오는 것과 같은 문장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참을 인, 인자할 인(仁)으로 대치해서 읽을 수 있으나 그래도 내용이 공자의 뜻과 같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심보감의 이 문장(08-06), “천자불인국공허(天子不忍國空虛) ... ”은 논어에 없는 이야기라 한다. ]
제9
제12-33 태공의 왈 양전만경 불여박예수신(良田萬頃 不如薄藝隨身) 밭이 아무리 많아도 노력의 새로운 반복만 못하다.
제12-33 행유부득 반구저기 『行有不得 反求諸己(행유부득 반구제기)』(행함에 얻지 못하면,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서 구한다)라는 말이 있다. 활에 대한 맹자의 말에도 “반구저기”가 있다.
13-5 性理書 5교(五敎) 3강(三綱) 3강5륜은 언제 만들어진 용어일까?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거유(巨儒) 동중서(董仲舒 전176-전104)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어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윤리 도덕이다]
왕촉(王蠋)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왕촉(王燭) - 연(燕)나라의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정벌하였을 때, 제나라의 화읍(畵邑)에 왕촉이라는 현자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사기(史記)》의 〈전단열전(田單列傳)〉 충신불사이군 [忠臣不仕二君]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
13-15
*武王이 曰 願悉聞之하나이다 太公이 曰 養男不敎訓이 爲一錯이요 嬰孩 不訓이 爲二誤요 初迎新婦不行嚴訓이 爲三痴요 未語先笑 爲四失이요 不養父母이 爲五逆이요 夜起赤身이 爲六不祥이요 好挽他弓이 爲七奴요 愛騎他馬이 爲八賤이요 喫他酒勸他人이 爲九愚요 喫他飯命朋友이 爲十强이니다. 武王이 曰 甚美誠哉라 是言也이여.
-.무왕이 말하기를, “그 내용을 듣기를 원합니다. ”태공이 대답하기를 , “아들을 기르며 가르치지 않는 것이 첫째의 잘못이요, 어린 아이를 훈도하지 않는 것이 둘째의 그름이요, 새 아들을 맞아들여서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 것이 세째의 어리석음이요, 말하기 전에 웃기부터 먼저 하는 것이 네째의 과실이요,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것이 다섯째의 거스름이요, 밤에 알몸으로 일어나는 것이 여섯째의 상서롭지 못함이요, 남의 활을 당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일곱째의 상서러움이요, 남의 말을 타기를 좋아하는 것이 여덟째의 천함이요, 남의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아홉째의 어리석음이요, 남의 밥을 먹으면서 벗에게 주는 것이 열째의 뻔뻔함이 되는 것입니다”고 하셨다. 무왕이 말하기를, “아아! 심히 아름답고 진실하도다. 그 말씀이여”라고 하셨다.
[여섯 가지는 개인과 가족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라면, 일곱째부터는 [타인] 다르다.]
남의 활을 당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일곱째 노비 같은 짓(七奴)이요,
남의 말을 타기를 좋아하는 것이 여덟째 천함(八賤)이요,
남의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것이 아홉째 어리석음(九愚)이요,
남의 밥을 먹으면서 벗에게 먹기를 명하는 것이 열째 뻔뻔함 혹은 강요(十强)이다.
(48TLH)
20 부행편
익지서(益智書) 송나라 때 간행된 책인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20-01 익지서에서는 여성의 덕목을 4가지로 했다. 부덕, 부용, 부언, 부공은 격몽요결의 구용보다 간단하며 그 설명은 길다.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제삼(第三) 지신장(持身章), “수렴신심 막절어구용 진학익지 막절어구사 소위구용자”(收斂身心 莫切於九容 進學益智 莫切於九思 所謂九容者):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방법은 구용보다 더 친절한 것이 없고, 배움을 진보시키고 지혜를 더하는 방법은 구사(九思)보다 더 친절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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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포의 활쏘기(布射)와 임공자의 낚시(任釣)는 대구가 아니었다. 천자문(千字文)에서는 여덟 명의 다재다능한 재사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에 첫째가 활, 마지막이 낚시였다. 8언 대구에서 활로 시작하여 낚시로 끝나니, 비슷하게 느꼈던 모양이다. 즉 활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여포, 낚시에는 장자가 인용했다고 전하는 임공자이며, 첫째와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었다. 추억에 추억이 덮여지면 기억도 희미해진다. ㅋ ㅋ.(48R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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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
추적(秋適 1246-1317)이 쓴 명심보감(明心寶鑑, 1303)의 “省心篇上(성심편상): 18장”에는 이런 글이 있다. 여기서 활쏘기와 낚시의 대구(對句)가 나온다.
▣ 原文 (원문)
諷諫(풍간)에 云(운)
水底魚天邊雁(수저어천변안)은 高可射兮低可釣(고가사혜저가조)어니와
惟有人心咫尺間(유유인심지척간)에 咫尺人心不可料(지척인심불가료)니라.
▣ 解釋 (해석)
풍간에 이르기를,
물 속 바닥에 있는 고기와 하늘 높이 떠다니는 기러기는
쏘고 낚을 수 있거니와, 사람의 마음은 바로 지척간에 있음에도
이 지척간에 있는 마음을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 出典 (출전)
諷諫(풍간)이란 "풍자하여 諫한다"는 뜻이다.
한(漢)나라 때 韋孟(위맹)이 지은 풍간시(諷諫詩)를 이른다.
풍간(諷諫)은 한나라 때 위맹(韋孟)이 초나라의 왕무(王茂)가 음탕하므로 이 시를 지어 풍간(풍자하여 간언)했다는 풍간시(諷諫詩)를 말한다. [위맹(韋孟 생몰불명)[200?-140?]은 서한의 팽성출신(西漢彭城人)으로 초왕의 스승이었다. 그는 3대에 걸쳐 초나라 왕을 섬겼다. 유교(劉交, ?-전178), 류영객(刘郢客?-전174), 류무(劉戊, ?-전154). 유무가 음탕하여 풍간(諷諫)풍을 지어 왕을 교정하려 하였다.
∙참조 2 **************
종요(鍾繇, 151-230)의 천자문(千字文)
115. 布射僚丸 嵇琴阮嘯(포사료환 혜금완소)
여포는 활을 잘 쏘았고 웅의료는 공을 잘 놀렸으며, 혜강은 거문고를 잘 타고 완적은 휘파람을 잘 불었다.
116. 恬筆倫紙 鈞巧任釣(념필륜지 균교임조)
몽염은 붓을 만들고 채륜은 종이를 만들었고, 마균은 기술이 뛰어났고 임공자는 낚싯대를 만들었다. ***
(48RKI)
** 인명록 및 고유명사들:
[<내용은 좀 부실해도 등장하는 인명은 다 뽑은 셈이다. 찾아가기는 몇 가지 관심에만 적용했을 뿐이다. 더 보충해야 할 것이다. / 이 명부는 가나순도 연대순도 아니고, 단지 책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그대로 나열한 것이다. (48TLI)>]
추적(秋適 1246-1317) (고려) 양광도 양지현(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자는 관중(慣中), 호는 노당(露堂), 본관은 추계이다. 민부 상서(民部尙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한 후 시랑(侍郞) 겸 국학 교수(國學敎授)로 재임할 때 명심보감을 집필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서원(仁興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동악성제(東岳聖帝)는 도교에서 받들어 모시는 신선으로 태산부군이라고도 한다. 동악은 오악의 하나로 태산(泰山)을 말한다. 태산부군은 태산의 장관이란 뜻으로 사후의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이다. / 봉선과 같은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조정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그 권위가 더욱 증대되었다. 당나라 현종은 봉선을 행하면서 천제왕이라고 칭했으며 송나라 진종은 인성천제왕이라고 칭했다. 청나라에 와서는 천제인성대제라고 봉호를 더해 주었다. 동악성제는 이른 새벽에 사당을 나와 수레를 타고 시종백관을 거느리고 돌아다니면서 인간계의 선악을 시찰하고 부정을 바로잡아 준다고 한다. <01-9,
강상(姜尙 1211? 1140-1072)(139세) (68세) 호는 비웅(飛熊) 제(齊)나라의 창시자, 강상(姜尙: 벼슬 후 여(呂)에 봉해졌다해 呂尙이라고도 함) 또는 태공망(太公望: 서백 조부가 무척 기다렸다고 해서 붙여진 호)이다. <01-4, <12-32, 33,
공구(孔丘), 공자(孔子 전551-전479) 중국 노[魯] 사상가 중국 춘추시대의 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 유교의 개조(開祖). 공부자(孔夫子)라고도 한다. 본명은 공구(孔丘). 자는 중니(仲尼). 그의 철학은 동아시아 전 문명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11-10, <12-14, <13-01 <17-01, 02 <19-01
-공자(孔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나라 추읍에서 태어난 사상가이다. 어머니가 니구산에서 빌어서 낳아 이름이 구(丘)이며 자는 중니(仲尼)이다. 중(仲)이란 형제 사이의 서열을 나타내는 말로 ‘둘째'라는 뜻이다. / 공자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부친이 세상을 떠나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공자는 청소년기를 다른 사람의 식량을 관리하기도 하고 가축을 기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하며 보냈다. 성년이 된 후에 후학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점차 이름이 알려졌다. /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치를 펼칠 기회를 얻으려 했지만 51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노나라의 중도재, 사공, 사구 등의 직책을 차례로 담당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당시의 집권자들과 정치적 견해가 서로 맞지 않아 사직하고 제자들을 이끌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상적인 정치를 가르쳤다. 생활난으로 정처없이 떠둘아 다녀 사람들로부터 ‘상가집의 개'라고 불리기도 했다. / 68세에 이르러 그는 10여 년의 유랑생활을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전력을 다하는 한편 예(禮), 악(樂),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 등의 옛 문헌들을 정리하였다.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3세였다. / 그의 가르침은 ‘인(仁)' 한 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나중에 제자들이 그의 언행 등을 기록하여 [논어(論語)]를 정리하였다. 우리가 성인이라고 알고 있는 공자가 자신을 다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내용이 [논어] 술이(述而)에 실려 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초나라의 대부인 섭공이 공자의 제자인 자로에게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어보았다. 자로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공자가 그 일을 알고 자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너는 이렇게 말하지 그랬느냐. 그 사람은 모르면 열심히 분발하여 먹는 것도 잊고 배우며, 알고 나면 즐거워서 근심도 잊고 부지런히 힘쓰고 살아가며, 늙음이 오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지 그랬느냐.”
<01-1, 10, 02-1, <09-01
장주(莊周), 장자(莊子 전369-전289경) 중국 고대 도가(道家)의 사상가. 이름은 주(周). 송(宋)에서 태어나 맹자와 동시대에 노자를 계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실재성은 의심스럽다. 전국시대 말기, 도가의 사상가들이 원본 『장자』(莊子)를 편찬할 때, 이것을 장주(莊周)에게 가탁(假託)하여 『장자』라 명명한 것인 듯하다.
- 장자(莊子)는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도가(道家)의 대표적 인물이다. 전란의 중심지였던 송나라 출신으로 이름은 주이고 자는 자휴이다. 맹자와 동시대에 살았으며 노자(老子)의 학설에 근본을 두고 유가(儒家)를 비판했다. [사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초나라 위왕이 장자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신에게 많은 예물을 들려 장자를 재상으로 초빙해 오도록 하였다. 장자는 웃으면서 사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천금은 많은 돈이고 재상은 높은 지위입니다. 그렇지만 그대는 교제를 지낼 때 희생으로 올리는 소를 보지 못했습니까? 몇 년을 잘 먹여 기른 다음에는 비단옷을 입혀 태묘로 끌고 갑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한 마리 더러운 돼지가 되고자 한들 그럴 수 있습니까? 그대는 어서 돌아가시고 나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노닐며 즐겁게 살아가지 나라에 얽매인 몸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뜻대로 살겠습니다.” / 장자는 도(道)를 우주의 본체로 보아 도만이 절대적이고 기타 만물은 모두 상대적이라고 주장하여 빈부, 귀천, 선악, 시비가 구별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모든 희노애락에서 초월해야 한다고 하였다. 현실도피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그의 학설은 인간 정신의 절대 자유를 추구하였다. 저서로 [장자] 33편이 전하는데 [내편(內篇)] 7편, 외편[(外篇)] 15편, [잡편(雜篇)] 11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편]은 장자 자신의 저작이지만 나머지는 후대 사람들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움과 추함도 상대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글이 [내편]의 두 번째 편인 [제물론(齊物論)]에 나온다. / “모장이나 여희를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한다. 그러나 물고기가 그녀를 보면 물 속에 숨고 새가 그녀를 보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사슴이 그녀를 보면 있는 힘껏 달아난다. 사람과 물고기와 새와 사슴 가운데 누가 진짜 아름다움을 알고 있을까?” <01-3, 8, <16-02
마원(馬援 전14-후49)은 중국 후한 때의 무장·정치가(B.C.14~A.D.49). 자는 문연(文淵). 광무제 때 강족(羌族)을 평정하였으며, 교지(交趾)의 난을 진압하고 흉노족을 쳐서 공을 세웠다. 후에 남방의 무릉만(武陵蠻) 토벌 중 병사하였다. <01-5,
유비(劉備, 161-223) 자는 현덕(玄德), 시호(諡號)는 소열제(昭烈帝)이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위(曹魏)가 한실(漢室)의 대통(大統-임금의 계통)을 계승한 정통 황조(皇朝-황제의 조정)라 보았으므로 유비를 황제(皇帝)로서 존칭(尊稱)하지 않고 선주(先主)라고 불렀다. 진서(晉書) 열전에서 유비의 묘호(廟號-황제나 왕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호)를 열조(烈祖)라고 칭한 바가 있으나 이것은 그의 정식 묘호가 아닌, 후세사가들이 추봉(追封)[1] 한 묘호이다. <01-2,
경행록(景行錄) 송나라 때의 저작으로 '착한 행실을 기록한 책'이라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도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01-7, 07-1,16 08-1 <11-01, 12. 15, 23 <12-07 ,13-02
사마광(司馬光 1019-1086,) 중국 북송의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 중국 후난 성[湖南省] 샤현[夏縣]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편찬했다. 그는 고결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다. 유교경전을 공부했으며, 과거에 합격한 후 고속 승진했다. 1069-85년에는 개혁가 왕안석(王安石)의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는 당파인 구법당(舊法黨)을 이끌었다.
- 사마온공(司馬溫公)은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로 이름은 광이고, 자는 군실이다. 시호는 문정이다.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온공'(溫公)이라 불렸다. 심주 하현 속수향 출신이라 속수(迂叟)선생이라고도 불린다. / 왕안석의 신법에 극력 반대하다가 실각하여 영흥군, 지금의 섬서성 서안의 지사로 물러났다가 낙양에 머물며 [자치통감]을 지었다. / 1085년 철종이 즉위하고 태황태후 고씨가 수렴첨정하면서 그는 다시 문하시랑에 올랐으며 이듬해 상서좌복야를 지냈다. 이때 조정의 전권을 쥐면서 신법을 모두 폐지했다. 같은 해(1086년) 사망하여 태사온국공에 봉해졌다. 유저에 [온국문정사마공문집] 80권과 [계고록], [속수기문]이 있다. <01-6 <15-01
[사마광(司馬光(1019年11月17日-1086年10月11日),字君實,号迂叟。生於宋真宗天禧三年十月十八日,卒于宋哲宗元祐元年九月一日,享壽66岁。陕州夏县涑水乡(今山西省夏縣)人,世称涑水先生。/ 司馬光是北宋政治家、文学家、史学家,历仕仁宗、英宗、神宗、哲宗四朝。他主持编纂了中国历史上第一部编年体通史《资治通鉴》。]
소옹(邵雍 1011-1077) 소강절(康節邵先生) 중국 북송(宋)나라의 학자, 시인, 호 안락선생(安樂先生), 별칭 자 요부(堯夫), 시호(諡號) 강절(康節) < 02-2, <11-50, <12-17
현제(玄帝) 태극(太極)의 별체(別體)이며, 원시천존(元始天尊)의 화신으로 지부태양의 정기를 빌어 정락국왕 선승무인의 배를 빌어 14개월만에 태어나 장성한 후 무당산(武當山)에서 40여년간 잠형연기의 수련에 정진하였고 .. 후에 현천상제에 등극하였다고 한다. <02-3
- 현제[玄帝] 북방(北方)의 신으로, 동신(冬神)인 현명(玄冥)을 말한다
- 현제 [玄帝]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당나라 고종(高宗) 건봉(乾封) 원년(666)에 노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로 추존하였는데, 간략히 현제라고도 불린다.
익지서(益智書) 송나라 때 간행된 책인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02-4, 07-14, 12-29 <20-01
천복비(薦福碑) 요주(饒州)의 천복산에 있던 비석 원나라때 마치원(馬致遠)이 세웠다고 한다. 왕발(王勃)이 등왕각 잔치에 참여 하고 서문 지어... [왕발(王勃, 649/650年-676年), 字子安,绛州龙门(今中国山西河津)人。初唐时代的诗人,与杨炯、卢照邻、骆宾王合称“初唐四杰”].. <03-4
열자(列子): 열자(列子: 기원전 4세기)는 중국 전국 시대의 도가(道家) 사상가로, 이름은 어구(禦寇)이다. 장자보다 약간 앞선 인물 《열자(列子)》 8권 8편이 남아 있으며, / "우공이산(愚公移山)", "남존여비"(男尊女卑),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기우(杞憂)" 등은 《열자(列子)》에 실린 우화(寓話)로서, 이 책은 《장자(莊子)》와 함께 도가적 우화가 풍부한 서적이다. <03-5
시경(詩經) :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의하나.. <04-1
성리서(性理書) 송나라 때, 성리에 관하여 엮은 책, 성리란 天性. 天稟. 곧 本性을 의미한다. <05-1 <12-34, <13-05 [중위키에 성리서 항목은 없다] 성리대전을 말하는 것일까?
[주침(周忱, 1380年-1453年),字恂如,諡文襄。江西承宣布政使司吉安府吉水縣(今江西吉水)人。明朝政治人物。《周易大全》、《書傳大全》、《詩經大全》、《禮記大全》、《春秋大全》、《四書大全》、《性理大全書》、《雙崖詩集》: 그러나 연대가 맞지 않아 주침은 아니다. ]
손진인(孫眞人) 도가류에 속하는 인물 생몰미상 <05-10
근사록(近思錄) <05-13. 14권으로 되어 있는 주자(朱子)의 제자인 여동래(呂東萊)와 함께 만든 책. 주염계, 정명도, 정이천, 장횡거의 글 중에서 초학자를 위한 622조목을 골라 편찬하였다.
이견지(夷堅志) 선인(仙人) 귀신들의 일을 모아, 420권이나 지금은 50권만 남아있다. 송나라 사람 홍매(洪邁)가 편찬한 책. <05-14 [홍매(洪迈, 1123-1202), 字景卢,号容斋;饶州鄱阳人(今江西省上饶市鄱阳县),洪皓第三子。南宋名臣,官至翰林学士、龙图阁学士、端明殿学士。以笔记《容斋随笔》、《夷坚志》闻名于世。
순자(荀子) <05-15, <11-46, 이름은 순황(筍況, 전313-238) 《순자(筍子)》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221) 조나라 사상가. 초나라 경을 지냈다. 말기의 유가 사상가 순자(荀子: BC 298?~238?)의 말과 글을 모은 것이다.[1] 《순경신서(荀卿新書)》·《손경자(孫卿子)》라고도 불린다. [荀子(前313年-前238年),名况,时人尊而号为卿;因“荀”与“孙”二字古音相通,故又称孙卿[1]]
채백개(蔡伯喈) <05-24. 이름 옹(邕), 자 백개, 후한말 학자. 동탁에게 중용되었으나 여포와 왕윤의 거사 후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채옹(蔡邕(「邕」,拼音:yōng,注音:ㄩㄥ,音同「雍」;133年[1]-192年),字伯喈,陈留圉(今河南杞县南)人,中國东汉末年名士。]
재여(宰予 전522-전458) 공자의 제자. 노나라 태생, 자는 자아(子我) <05-25 [宰予(前522年~前458年),字子我,又名予我、宰我,春秋時代魯國人,孔子弟子,為孔門十哲之一,擅長言辭,《史记·仲尼弟子世家》记载他死於齊國的田常之亂。但根据唐代司马贞的《索隐》认为,《左传》中并未记载宰我参与田常之乱的事,参与叛乱的是阚止,阚止的字也是“子我”]
자허원군(紫虛元君) [위화존(魏華存 251-334)] <05-26 원군(元君)이란 도교에서 여자로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된 이를 말하며, 남자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된 이는 진인(眞人)이라고 합니다. / 자허원군은 위부인(魏夫人)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이름은 화존(華存), 자는 현안(賢安)으로, 《신선통감(神仙通鑑}에 따르면, 위부인은 진(晉)의 사도(司徒)인 위서(魏舒)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도교를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 [위화존(魏華存 魏華存(251年-334年),又稱魏夫人,晉代女道士,山東任城樊邑(今山東微山县)人,傳說傳授道教上清經出世,茅山宗追尊為第一代太師。/ 她是晉司徒剧阳侯魏舒之女,二十四岁时嫁给修武县令南阳刘幼彦,博覽老莊、春秋、五經、諸子百家,持斋修道多年,信奉天师道,擔任祭酒。傳說有清虛真人王褒等降授「神真之道」,景林真人授之以《黃庭經》。永嘉之亂時,魏華存帶同兩兒避亂江南,把天師道帶到南方。]
[도교의 과장이라 하지만, 허무맹랑한 거짓에서 출발한 것 같지는 않다.]
서경(書經) <06-5 은(상)나라와 주나라에 걸친 사관들의 기록인데 상서(尙書)로 불리웠다가 유가의 경전으로 서경으로 칭해졌다. 남송의 채침(蔡沈, 구봉선생)이 주자의 유지를 이어 완성한 책으로 전 6권이다. [채침(蔡沈, 1167年-1230年),一名蔡沉,字仲默,號九峰,建陽(今屬福建)人。.. 朱熹晚年命蔡沈撰《書集傳》。他用邵雍《皇极经世》所谓 “先天数学”讲《尚書·洪范》,认为天地、人物皆由数所派生,“天地之所以肇者数也,人物之所以生者数也,万事之所以失得者数也。”]
격양시(擊壤詩) <06-6, 07-2,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에 있는 시라 한다. 소옹(邵雍 1011-1077)의 저서 〈관물편〉, 〈어초문답〉(漁樵問答),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선천도〉(先天圖), 〈황극경세〉(皇極經世) 등이 있다. [송나라 정이(1033-1107)에게 이천격양집은 없다]
< 격양시(擊壤詩) - 소옹(邵雍 1011-1077)> <07-2
富貴如將智力求(부귀여장지력구)부귀를 지혜로만 얻게 된다면
仲尼年少合封侯(중니년소합봉후)공자는 어렸을 때 제후가 됐지
世人不解靑天意(세인불해청천의)세상 사람들이여 뜻을 펴고자
空使身心半夜愁(공사신심반야수)수심으로 반밤을 지새지 마소
범충선공(范忠宣公) 북송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의 둘째 아들 순인(范純仁 1207-1101). 자는 요부(堯夫) <07-3 [范純仁(1027年-1101年),字堯夫,苏州吳縣(今江苏省苏州市)人,名相范仲淹次子。皇祐元年進士,從胡瑗、孫復學。
소서(素書) <07-5 한나라 초기 황석공(黃石公)이 지은 책. 송나라 때 장상영(張商英, 1043-1122)이 주를 달았다 한다. 주로 도가적이라 한다. [張商英(1043年-1122年),字天覺,號無盡居士,宋朝新津(今四川省新津縣)人。] . [장량이 황석공 소서를 보았다 던가?]
손사막(孫思邈, 541/581-682) 당나라 때 명의(名醫). <07-7, 《千金翼方》 是对《千金要方》的补编。800여종의 약물을 제시하고 200여종은 채집과 제조방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孙思邈(541年或581年-682年),唐朝京兆华原(现陕西耀县)人,是著名的醫師與道士。他是中国乃至世界史上著名的医学家和药物学家,被誉為药王,許多華人奉之為醫神。] (48TLE)
주문공(朱文公) <07-10, 주자(朱子), 주희(朱熹) 회암(晦庵) 격물치지(格物致知)정심(正心)성의(誠意) - [朱熹(1130年-1200年),南宋江南东路徽州婺源人(今江西婺源),生於福建路龍溪縣(今日福建漳州龍海縣)。行五十二,小名沋郎,小字季延,字元晦,一字仲晦,齋號晦庵、考亭,晚称晦翁,又称紫陽先生、沧州病叟、云谷老人,諡文,又稱朱文公。南宋理学家,程朱理学集大成者,尊称朱子。- 《近思錄》(與呂祖謙合編) 《四書章句集註》 《詩集傳》《通鑑綱目》 《宋名臣言行錄》 《楚辭集注》 《易學啟蒙》[41] 《朱文公家訓》 後人集有《晦庵先生朱文公集》、《朱子語類》。]
구래공(寇萊公, 961-1023) 구준(寇準) 자는 평중(平仲) 북송명제상. <07-13, [구준(寇準, 961年-1023年10月24日),北宋名相。字平仲,华州下邽(今陕西渭南)人。]
계성편
자장(子張), 전손사(顓孫師, 전503-존447), 성이 전손(顓孫) 이름이 사(師), 공자의 제자, 자는 자장(子張) 진나라(陳國人) 당현종이 진백(陈伯)이라 하였다.... (ch.Wiki) 顓孫師(前503年-前447年),複姓顓孫,名師,字子張,陳國人,孔子的弟子。唐玄宗尊之为“陈伯”,宋真宗加封为“宛丘公”,宋徽宗又尊为“颍川侯”。宋度宗又尊为“陈国公”。明嘉靖九年改称“先贤仲子”。 [명심보감의 이 문장, “천자불인국공허(天子不忍國空虛) ... 은 논어에 없는 이야기라 한다. ]
성심편 상
위맹(韋孟 생몰불명)[200?-140?]은 서한의 팽성출신(西漢彭城人)으로 초왕의 스승이었다 王師傅。韋孟任楚王劉交、劉郢客及劉戊三代師傅。劉戊荒淫無道。그는 3대에 걸쳐 초나라 왕을 섬겼다. 劉交(?-전178), 刘郢客(?-전174) 劉戊(?-전154). 유무가 음탕하여 풍간(諷諫)풍을 지어 왕을 교정하려 하였다고 한다.
예기(禮記) 유향(劉向, 前77年-前6年)130편 집성한 것을, 전한 시대 선제(宣帝)때 대성(戴聖, ?-? )이 《大戴礼记》89편으로, 서한 시대 동생 대덕(戴德 ?-?)이 《小戴礼记》49으로 하여 현재의 예기가 되었다. / (한위키) 공자와 그 후학들이 지은 책들이지만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흩어져서 전해지고 있었다. 한 무제 시대에 한나라의 제후인 하간헌왕(河間獻王)이 공자와 그 후학들이 지은 131편의 저작들을 모아 정리한 후, 그 후에 한 선제 시대에 유향과 대덕(戴德)·대성(戴聖)의 형제들이 잇따라 증보하거나 간추린 목록이 유향이 214편으로 엮었고, 대덕이 85편으로, 대성이 49편으로 간추렸다. 대덕이 증보하여 간추린 문장을 편집한 예기를 따로 구분하여 《대대례》(大戴禮)로 불리기도 한다. / (중위키) - [《礼记》,儒学经典之一,所收文章是孔子的学生及戰國时期儒学学者的作品。汉朝学者戴德将汉初刘向收集的130篇综合简化,一共得85篇,称为《大戴礼记》,后来其姪戴圣又将「大戴礼记」简化删除,得46篇,再加上《月令》、《明堂位》和《乐记》,一共49篇,称为《小戴礼记》。「大戴礼记」至隋、唐時期已散逸大半,現僅留傳39篇,而「小戴礼记」則成为今日通行的《礼记》[1]。] /- [ 劉向(前77年-前6年),字子政,原名更生,漢朝宗室。著有《別錄》、《新序》、《说苑》、《列女传》、《洪範五行傳》、《五紀論》等書,並且編訂了《戰國策》、《楚辭》。劉向曾官中壘校尉,故世称劉中壘。明人张溥辑有《刘中垒集》,收入《汉魏六朝百三家集》中。又有赋33篇,今仅存《九歎》一篇[1]。子為經學家劉歆。] /- 대성(戴圣 ?-?),生卒年不详,汉宣帝时礼学家,戴德之弟戴仁之子。梁(今河南省商丘市)人,汉代今文經學的开创者。他编注的《礼记》也称《小戴礼记》。] /- 戴德,生卒年不详,西汉时梁(今河南商丘)人,汉代今文理学的开创者。戴德活跃于汉元帝时(前43年一前33年),作《大戴礼记》。戴德是后仓(公元前70年在世)的四位弟子之一,《小戴礼记》作者戴圣是戴德之弟戴仁之子。]
한유(韓愈, 768-842) 자는퇴지(退之) 세칭 한문공(韩文公) 저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韓愈(768年-824年),字退之,河南河陽(今河南孟縣)人[1] 自稱昌黎韓愈,世稱韓昌黎;晚年任吏部侍郎,又称韩吏部。卒谥文,世称韩文公。唐代文学家,与柳宗元是当时古文运动的倡导者,合稱「韓柳」。苏轼称赞他“文起八代之衰,道濟天下之溺,忠犯人主之怒,勇夺三军之帅”(八代:東漢,魏,晉,宋,齐,梁,陈,隋)。散文,诗,均有名。著作有《昌黎先生集》。
주문공(朱文公) 남송(南宋)의 대 가리키는 유(大儒)인 주자(朱子)를 말이며, 이름은 희(熹), 자(字)는 원회 (元晦), 또는 중회(仲晦), 호(號)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휘종(徽宗)황제(皇帝) 북송 제8대 황제 본명은 조길(赵佶, 1082-1135)(재위, 1100-1125) [宋徽宗赵佶(1082年11月2日-1135年6月4日[1]),宋神宗十一子,宋哲宗之弟,是宋朝第八位皇帝,先后被封为遂宁王、端王。也同时具有相当高的艺术造诣。他兄长宋哲宗于公元1100年正月病逝时无子,向皇后于同月立他为帝。第二年改年号为“建中靖国”。在位25年(1100年2月23日—1126年1月18日),国亡被俘受折磨而死,终年54岁,葬于都城绍兴永佑陵(今浙江省绍兴市柯桥区东南35里处)。
반고(班固, 32-92) 중국 후한 초기의 역사가. 반표(班彪)의 아들, 서역도호 초(超)의 형이다.《한서(漢書)》 편집 중, 국사를 개작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20여 년에 걸려 완성하였다. 누이 반소(班昭)가 마무리했다. [班固(32年-92年,字孟堅,扶風安陵(今陝西咸陽)人,东汉史学家班彪之子,东汉历史学家,《汉书》的作者。
여영공(呂榮公) 이름은 희철(希哲) 북송의 학자. 이게 정답인 것 같다.
실존인지 알 수 없다. 중위키에 나오지 않는다. 구글 속에서 공자와 동시대 인이라는 설명이 있기는 한데 신뢰가 가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는 여영공(呂榮公)= 이름은 希哲, 榮은 시호임. 北宋의 학자. [呂希哲(?年-1114年?)字原明,號滎陽先生。北宋壽州(今安徽壽縣,一說鳳臺縣)人,祖籍萊州。曾任秘書省少監。《宋史》卷三三六有傳。]
풍간(諷諫)
풍간(諷諫)은 한나라 때 위맹(韋孟)이 초나라의 왕무(王茂)가 음탕하므로 이 시를 지어 풍간(풍자하여 간언)했다는 풍간시(諷諫詩)를 말한다. [위맹(韋孟 생몰불명)[전 200?-140?]은 서한의 팽성출신(西漢彭城人)으로 초왕의 스승이었다. 그는 3대에 걸쳐 초나라 왕을 섬겼다. 유교(劉交, ?-전178), 류영객(刘郢客?-전174), 류무(劉戊, ?-전154). 유무가 음탕하여 풍간(諷諫)풍을 지어 왕을 교정하려 하였다. [韋孟(?-?),西漢彭城人,楚王師傅。韋孟任楚王劉交、劉郢客及劉戊三代師傅。劉戊荒淫無道。]
소광(疏廣) 전100?-전30? <11-26
[疏广(?-?),字仲翁,西汉东海郡兰陵(今山东省枣庄东南)人,西漢太子太傅。 宣帝地節三年(前67年)四月戊申,立皇子劉奭為皇太子,任丙吉為太子太傅,疏廣為太子少傅[2]。] 여러 사람들의 평가 중에서 세 학자의 평가 반고(班固:「疏廣行止足之計,免辱殆之累,亦其次也。」한유(韓愈:「昔疏廣、受二子以年老,一朝辭位而去,於時公卿設供張,祖道都門外,車數百兩,道路觀者多歎息泣下,共言其賢。漢史既傳其事,而後世工畫者又圖其跡,至今照人耳目,赫赫若前日事。」백거이(白居易:「漢擇名儒,任先疏廣。」
왕단(王旦, 957-1017) 왕참정(王參政): 왕단(王旦, 957-1017) 북송(北宋) 진종(眞宗)때의 정치가. 종이품(從二品) 참지정사(參知政事). / 왕참정(王參政) 중국 북송(北宋)때의 정치가로 이름은 단(旦)이고, 참정(參政)은 참정(參政)은 참지정사(參知政事)의 준말이다. 사유명(四留銘) ; 네가지 남겨두고 싶은 말, [王旦(957年-1017年),因生于凌晨,取名旦,字子明。先天相貌较丑,脸、鼻稍偏,喉部突起,有异人相。大名府莘县人。宋代政治人物。
사기(史記) 사마천(司馬遷, 전145/135?-전86)의 사기,
1 史记[西汉]司馬遷130 2汉书[东汉]班固100
3 后汉书[刘宋]范曄120 4三國志[西晋]陈寿65
5 晋书[唐]房玄龄 等130 6宋书[梁]沈約100
7 南齐书 [梁]蕭子顯59 8梁书[唐]姚思廉56
9 陈书[唐]姚思廉36 10魏书[北齐]魏收114
11 北齐书[唐]李百藥50 12周书[唐]令狐德棻 等50
13 隋书[唐]魏徵 等85 14南史[唐]李延壽80
15 北史[唐]李延壽100 16旧唐书[后晋]劉昫 等200
17 新唐書 [北宋]欧阳修 等 225 18 旧五代史 [北宋]薛居正 等150
19 新五代史 [北宋]欧阳修74 20宋史[元]脱脱 等496
21辽史[元]脱脱 等116 22金史[元]脱脱 等135
23元史[明]宋濂 等210 24明史[清]张廷玉 等332
相關東觀漢記 [東漢]劉珍 等 22
相關新元史[民國]柯劭忞 等 257
相關清史稿[民國]赵尔巽 等 529
재동제군(梓童帝君) 도가류의 신선으로 문창제군(文昌帝君)이라 불리기도 한다. 촉나라 사람으로 370년경 실존인물 장아자(張亞子)이다. <11-51,
<재동제군[ 梓潼帝君 ]: 도교에서 공명(功名)과 녹위(祿位)를 주재한다고 여겨 모시는 신이다. 『명사(明史)』「예지(禮志)」와 『삼교원류수신대전(三敎源流搜神大全)』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장아자(張亞子)이고 촉(蜀) 땅의 칠곡산(七曲山, 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쯔통시앤(梓潼縣) 북쪽)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진(晉)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전사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워주었다. 당나라와 송나라 때 여러 차례 벼슬이 더해져서 '영현왕(英顯王)'에까지 봉해졌다. 도교에서는 그가 문창부(文昌府)의 일과 인간세상의 벼슬살이를 관장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원나라 인종(仁宗) 연우(延佑) 3년(1316)에는 '보원개화문창사록굉인제군(輔元開化文昌司祿宏仁帝君)'에 봉해져서 흔히 '문창제군(文昌帝君)'으로 불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재동제군 [梓潼帝君] (서유기사전, 2004. 2. 2., 솔출판사)>
< 文昌帝君,全稱文昌梓潼帝君,簡稱梓潼帝君、文昌君,是保護文運與考試的神祇。民間容易將文昌與北斗七星中的文曲星相混淆,雖然兩者都是傳說中掌管文運和考試的星君,但兩者所指不同。中國有「北孔子、南文昌」之說,可見南方文昌梓潼帝君信仰之盛行。四川地區相傳文昌帝君化身為瘟祖大神,降伏五瘟神,故能制服瘟疫。/ 文昌梓潼帝君,本是號稱蜀王「張育」,與梓潼的境主神「亞子」兩位人物合併而成的神明。時人認為「張育」即為梓潼神「亞子」的轉世化身,故稱其「張亞子」。[1][2]> <當時,梓潼七曲山另有梓潼神亞子祠。傳說,張亞子,又名「堊子」,或「惡子」。《華陽國志》記梓潼縣有“善板祠”,供張亞子。《太平寰宇記》又記有張亞子顯靈的故事。張亞子曾經在長安見到姚萇,張亞子對他說:“九年後,君當入蜀,若至梓潼七曲山,希望您來找我。”。《十六國春秋輯補·後秦錄》則說,姚萇於前秦建元二年(366年)果然來到七曲山,見到一神人,神人說:「回秦地去罷!秦地無主,君主大概就是您罷!」姚萇請問那神人的姓名,神人說他叫「張亞子」,說罷就不見了。姚萇回到秦地後果然建立后秦,登基稱帝,于是就在秦地立「張相公廟」以祀張亞子。>
진종황제(眞宗皇帝, 968-1022) [재위 997-1022] 송 태종의 셋째 아들로 원이름 조덕창(趙德昌) 이름 항(趙恒) <12-01
[(중위키) 宋真宗趙恒(968年12月23日-1022年3月23日),原名趙德昌,又曾名趙元休、趙元侃,是宋朝的第三位皇帝。他是宋太宗的第三个儿子,登基前曾被封为韩王、襄王和寿王,曾任開封府尹。997年以太子继位。宋真宗是著名諺語「書中自有黃金屋,書中自有顏如玉[1]」的作者。]
신종황제(神宗皇帝, 1048-1085) [재위 1067-1085] 송나라 영종의 큰아들로 본명은 조중침(趙仲鍼) 이름은 욱(頊), 왕안석(王安石) 신법을 시행하던 시기이다. [왕안석(1021〜1086) 북송(北宋)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문학가]
[宋神宗赵顼(1048年5月25日-1085年4月1日),本名趙仲鍼,宋英宗长子,宋朝第六代皇帝,1067年1月25日—1085年4月1日在位]
고종황제(高宗皇帝, 1107-1187) [재위 1127-1162] 북송 휘종의 작은 아들 이름은 구(具). 아버지 휘종(徽宗)과 형 흠종(欽宗)이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자 1127년에 남경에서 남송을 세워 제위에 올랐다.
[宋高宗趙構(1107年6月12日-1187年11月9日),字德基,宋朝第十位皇帝。南宋第一任皇帝(1127年6月12日-1162年7月24日在位),在位35年。北宋皇帝宋徽宗第九子,宋欽宗之弟,曾被封為「康王」。]
왕량(王良) <12-04 <명심보감(明心寶鑑)(유덕선 역해, 홍문관, 2015, P. 188.) 114쪽에 왕량의 자는 경지(敬止)라 되어 있는데 중위키에는 중자(仲子)로 되어 있다. >
[王良,字仲子,東海蘭陵(今山東蒼山縣)人。早年好學,習《小夏侯尚書》。王莽篡漢時,裝病不仕,教授諸生千餘人。建武二年,大司馬吳漢闢為幕僚,不答應。建武三年,徵拜谏议太夫。迁沛郡太守。建武六年,代宣秉为大司徒司直。其妻子不住官舍,布被瓦器
가어(家語) 위(魏)나라 왕숙(王肅, 195-256)이 공자의 권위에 가탁하여 정현(鄭玄, 127-200)의학설을 공격하려고 문헌들에서 채집 10권이다. <12-05 [ 王肃(195年-256年),字子雍,东海郡郯(今山东郯城西南)人,三国时期经学大师,曹魏重臣王朗之子,也是晋王司马昭的岳父。王肃注释的儒家六经曾经是从三国一直到南北朝的官方儒学教材,直至唐代孔颖达重新编撰确立了儒家六经的注释,这也就是迄今的标准六经注释版本。/王肃(464年-501年),字恭懿,琅邪临沂人,南齐入北魏的大臣。/ 郑玄(127年-200年)字康成,北海高密(今山东省高密市)人,东汉经学家、预言家。郑益(字益恩[1])之父,郑小同(字子真[2])之祖。
허경종(許敬宗, 529-672) 자는 연족(延族), 당나라 태종 정관년간에 국사를 편찬, 고종때는 재상을 지냈다.
[許敬宗(592年-672年9月20日),字延族。祖籍高阳郡新城县[1]。唐朝官员,官至中书令(宰相)。]
장원시(壯元詩) <12-13,
소동파(蘇東坡, 1037-1101) 소식(蘇軾) 호 동파, <12-16, <16-03
[苏轼(1037年1月8日-1101年8月24日),字子瞻,一字和仲,号东坡居士[1][2][3]。眉州眉山(今四川眉山市)人,北宋文豪。其诗、词、赋、散文均成就极高,且善书法和繪画,是中国文学艺术史上罕见的全才,也是中国数千年历史上被公认文学艺术造诣最杰出的大家之一
주돈이(周敦頤, 1017-1073) 호: 염계(濂溪), 중국 송(宋)나라의 유학자.
[周敦颐(1017年-1073年7月24日),原名敦实,字茂叔,號濂溪,又稱濂溪先生。道州营道县(今湖南道县)人,北宋官員、理学家,北宋宋明理学创始人。其学说是孔子、孟子之后儒学最重要的发展,在中国思想史上的影响深远。
주역(周易) 역경(易經), 산악시절 연산역(連山易), 농경시적 귀장역(歸藏易), 하은 시대를 거쳐서 주나라에서 주역. 연산역은 이원론이고 귀장역은 일원론이라 하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연산역은 하(夏)나라. 귀장역은 상(商)나라... 주역은 복희씨가 8괘 창안하고, 주나라 문왕이 쾌효를 짓고, 주공이 연역하고, 공자가 입익을 지어 가편하였다. 64쾌, 384효.
[《連山》,又稱《夏易》,據中國古籍記載為占卜的三種方法(三易)之一,號稱《連山易》。/ 連山之名出於神農氏(連山氏)。成書於夏朝(原書約有八萬餘言、十卷本),但相較於《周易》,連山易久已散佚而不完整。現存有連山卦(連山八卦圖),為伏羲八卦之衍生。] - [《歸藏》,又名《商易》,據中國古籍記載為占卜的三種方法(三易)之一,號稱《歸藏易》。/ 相傳歸藏之名出於黃帝(又称歸藏氏)。文字記載出於商朝(原書約四千三百餘字),但相較於《周易》,《歸藏》內容早已散佚而不完整。現存有歸藏卦(歸藏八卦圖),為伏羲八卦之衍生(旋轉一百八十度而成,伏羲八卦以乾卦為上,而《歸藏》以坤卦為首)。]
설원(说苑), 유향(劉向, 전77-전6)이 지은 책, 20권 유명한 인물의 일화를 엮은 책이다. <12-25. [[劉向(前77年-前6年),字子政,原名更生,漢朝宗室。著有《別錄》、《新序》、《说苑》、《列女传》、《洪範五行傳》、《五紀論》等書,並且編訂了《戰國策》、《楚辭》。劉向曾官中壘校尉,故世称劉中壘。明人张溥辑有《刘中垒集》,收入《汉魏六朝百三家集》中。又有赋33篇,今仅存《九歎》一篇[1]。子為經學家劉歆。]]
왕촉(王蠋 ?-전284) ; 왕촉(王蠋)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왕촉(王燭) - 연(燕)나라의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정벌하였을 때, 제나라의 화읍(畵邑)에 왕촉이라는 현자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출전: 《사기(史記)》의 〈전단열전(田單列傳)〉“충신불사이군(忠臣不仕二君)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 <13-07
충자(忠子) 미상 <?한나라 때의 학자로 알려진 충자(忠子)?> <13-08
[류창(刘敞(1世纪?-132年),东汉东平王,谥曰孝。/ 东平怀王刘忠子,元和元年(84年),即位為東平王。劉敞為母親服丧至孝,由国相陈珍报告朝廷。永宁元年(120年),邓太后为东平国增邑五千户。阳嘉元年(132年)十二月丁未薨。
장사숙(張思叔) 장역(張繹) 사숙은 자, 북송의 유학자. 정이(程頤, 호 伊川, 1033-1107)의 수제자. <13-09
범익겸(范益謙; 1067-1141)은 남송(南宋)의 뛰어난 문신으로 이름은 범중(范沖) <13-10
[范冲(?-1141年),字元长。成都华阳(今四川成都双流县)人。]- 중국에서도 출생년을 표시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디를 근거로 표시했을까?
무왕(武王): BC 12세기 주(周:BC 1111-255)의 제1대 황제(BC 1111-1104 재위).[중위키에서는 周天子 約前1046-約前1043)]<13-11, 12
정명도(程明道) 이름 정호(程顥 1032-1085) 아우 정이(程頤). 염계 주돈이에게 사사하였다. 북송의 유학자. <14-01
[程顥(1032年-1085年),字伯淳,号明道。世稱明道先生,北宋洛城伊川人,程顥與其弟程頤,皆理學大師,世稱“二程”。早年與程頤共師周敦頤。北宋嘉祐二年(1057年)进士,历官鄠县主簿、上元县主簿、泽州晋城令、太子中允、监察御史、监汝州酒税、镇宁军节度判官、宗宁寺丞等职。後追封“豫国公”,配祀孔廟。]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598-649) 당나라 제대황제 [재위 626-649], 唐高祖 이연(李淵) 수나라를 치고 당왕조를 세움. <14-02
[唐太宗讳李世民(598年1月28日-649年7月10日[1][2][3]),祖籍隴西郡成紀县(今甘肅省天水市秦安縣北),生于陕西蓝田,626年至649年在位。父親是唐高祖李淵,母親是竇皇后。竇皇后有四個兒子,一個女兒,按長幼顺序為:李建成、平陽昭公主、李世民、李玄霸、李元吉。
동몽훈(童蒙訓) 여본중(吕本中, 1084-1145)이 어린이를 위한 책 <14-03
[呂本中(1084年-1145年),初名大中,字居仁,號紫微、東萊,壽州(今安徽壽縣)人。生於宋神宗元豐七年(1084年),是道學家,學者稱之為“東萊先生”。著有《東萊先生詩集》、《江西詩社宗派圖》、《紫微詩話》及《童蒙詩訓》等。紹興八年(1145年),卒於上饒[1]。《宋史》卷376有傳。]
정이(程頤 1033-1107) 호 이천(伊川) 명도 정호(程顥 1032-1085)의 동생. 스승 염계 주돈이. 주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4-06
程頤(1033年-1107年),字正叔,北宋洛陽伊川(今属河南省)人,世稱伊川先生,北宋理學家,教育家,历官汝州团练推官、西京国子监教授。与其胞兄程颢共创“洛学”,人稱「二程」,为理学奠定了基础。後追封洛国公,配祀孔廟。
유안례(劉安禮) 북송 유학자. 이천 정이의 문인. 자는 원소(元素) 형 유안절(劉安節)과 함께 정호(程顥: 정명도) 문하에서 배웠다 <14-07
[유안절 刘安节(?-1116年),字元承,永嘉人。/ 生年不详。少年寓居枫林东郊狮溪,後前往洛陽师事程颐,元符三年(1100年)年中进士,初任诸暨县主簿、河东提学使幕僚,後升监察御史。歷官起居郎、太常寺少卿。後被宦官所诬,出知饶州(今江西鄱阳),离任时,“饶之民遮留之”,百姓流淚說:“吾州自范文正公而后,始见刘公。”。政和六年,卒於宣州(今安徽宣城)任上。编有《伊川语录四》,與许景衡、周行己、戴述、赵霄、张辉等同称“永嘉元丰九先生”。
포박자(抱朴子) 동진의 도가 사상가 갈홍(葛洪, 284-363)의 저술 2편의 책이름 <14-08.
[葛洪(284年-363年),字稚川,号抱朴子,人称葛仙翁,丹阳句容(今属江苏)人,是晋朝时代的医学家、博物学家和制药化学家,炼丹术家,著名的道教人士。他在中国哲学史、医药学史以及科学史上都有很高的地位。相傳靈寶經內中經文,為葛玄傳給鄭隱,鄭隱傳給葛洪,後轉傳予葛巢父。]
왕통(王通, 582-616)은 수나라의 유학자이다. 자는 중엄(仲淹)이고 문중자(文中子)라고도 한다. <15-08.
[王通(584年-617年),字仲淹,谥号文中子,外號王孔子,河东郡龙门县通化镇(今山西省万荣县通化)人[1],隋朝大儒。]
안지추(顔之推, 531-591) “안씨가훈(顔氏家訓)” <16-01
《안씨가훈(顔氏家訓)》은 중국 6조시대(六朝時代)의 학자인 안지추(顔之推, 531-590 전후)의 저서 20편이다.
[顏之推(531年-591年),瑯琊臨沂(在今山东省)人,南梁至隋朝皆为官员,撰有《顏氏家訓》。]
증자(曾子, 전505-전436) 증자는 중국 전국 시대 제나라의 유가 사상가이다. 이름은 증삼(曾參), 자는 자여(子舆)이며, 증자는 존칭이다. 남무성 출신이다. 공자의 만년의 제자로서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이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여 공자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의 언행은 《논어》에 몇 조목이 보이며, 또 《대대례기》의 증자 10편 및 《효경》은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된다. 위키백과
[曾參 曾参(Zēng Shēn注,前505年-前435年),字子舆,春秋末期鲁国南武城(山东平邑)人,儒家主要代表人物之一,孔子的弟子,而子思便曾是他的門人,世稱“曾子”,有宗圣之稱。曾提出“吾日三省吾身”的修养方法[1],又曾以「忠恕」去應對孔子的「吾道一以貫之」。相传他著述有《大学》、《孝经》等儒家经典。同時,他亦為《二十四孝》中“啮指痛心”的主角。平邑存曾点、曾参两父子墓,曾姓后裔均把曾参作为自己的开派祖。]
유회(劉會) <18-01.
[(중위키) 刘会(?-?),字逢甲,号望海,福建惠安邑北城畔(今福建省惠安县螺城镇西北街)人 [1] 。/ 明万历十一年(1583年),刘会中进士,授萧山县令。先后任御史、巡按云南、按察使等。刘会75岁时去世。/ 이 사람은 아니다. 책이 나온 이후 사람이니. ]
군평(君平) (중위키) 장준(莊遵) 엄준(嚴遵) 자는 군평이라 한다. 서한시대 촉나라 사람이다. 도가학자이다. 한무제때 은거하여 저술로는《老子注》가 있다. <18-3,
[ 莊遵[编辑] / 嚴遵,字君平。西漢蜀郡人,道家学者,思想家,亦以善於卜筮聞名。“蜀之八仙”之一。汉成帝时隐居蜀成都,以卜筮为业,“因势导之以善”,史称“蜀人爱敬”。著有《老子注》和《道德真经指归》[1][2]。/ 东汉班固著《汉书》,因為了汉明帝刘莊之避讳,將莊姓改為嚴姓,写为严遵或严君平。]
안영(晏嬰, 전578-전500) 안평중(晏平仲), 춘추시대 제나라 대부. 사상가. 《晏子春秋》 <18-03, [ 晏婴(前578-前500年),字仲,谥平,习惯上多称平仲,又常被稱晏子。齊國萊地夷維人(今山东省高密市)。春秋後期外交家、思想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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