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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마 [중생] 결론 부분, 연속적 중생관에 대해 언급한 부분:
후크마 {개혁주의 구원}이 제대로 번역되었는지 참 의심스러움
로빈슨크로소 2012-07-07. 21:33
Regeneration and the Preacher
We now face a problem. If regeneration, as has been shown, is totally the work of God and not in any sense the work of man, what can the preacher do about it? He may tell his hearers that they must be born again(John3:7). but he cannot urge them to regenerate themselves, since they cannot do this. Neither can he urge them to become regenerated, since only the Holy Spirit can bestow regeneration. How, then, must the preacher handle the doctrine of regeneration?
By way of reply, I would like at this point to discuss the relation between regeneration and the word. Regeneration usually occurs during the preaching, teaching, or reading of the Bible. From Acts16:14 we have learned that Lydia's regeneration took place as she was listening to Paul's gospel message.
We look next at James 1:18, "He (God) chose to give us birth(apekyesen) through the word of truth, that we might be a kind of firstfruits of all he created." The verb here used, apokyein, does not mean "to beget" but "to give birth to." It is used earlier in verse 15 of this chapter, where James says that sin, when it is full-grown, gives birth to death. God the Father, however, who is the source of every good and perfect gift(v.17), which is the evidence of our having received new spiritual life. The new birth as James here describes it is not regeneration in the narrower sense - the implanting of new life - but in the broader sense, namely,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new life in conversion. Regeneration in the broader sense, James is here saying, is produced in us through the word of fruit, through the Bible.
-p 181-
중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며 결코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면, 설교자는 중생에 관해 어떻게 설교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교인들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설교해야 할 것이다(요3:7). 그러나 그들 스스로 중생할 수 있다고 권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스로 중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듭남을 받아야 한다고만 외칠 수도 없다. 성령께서만이 거듭남을 부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중생의 교리를 어떠한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나는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를 지적하려고 한다. 중생은 일반적으로 설교시나, 성경을 가르침 받는 동안, 성경을 읽을 때 일어난다. 사도행전 16:14에서 본것처럼 루디아가 중생하게 된 것은 그가 바울의 복음 메시지를 듣고 있을 때였다.
다음으로 야고보서 1:18을 보자: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apekyesen) 우리로 그의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심이라." 여기에 사용된 "아포케인"이란 동사는 "출생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출생시키다"라는 뜻이다. 15절에서도 사용된 바가 있는데 그곳에서 야고보는 죄가 성장하면 죽음을 낳게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근원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17절) 우리에게 새로운 출생-우리가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았다는 증거-을 주심으로써 그의 넘치는 자비를 보여주셨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신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새생명의 부여)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 다시 말해서 돌이킴을 통해 나타나게 된 새 생활의 첫번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야고보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넓은 의미의 중생은 진리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된다.
베드로가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벧전 1:22~23 동사 “아나게나오(거듭나는 것)”는 “다시 출생하다” 혹은 “다시 태어나도록 하다”라는 뜻이다. 본장의 3절에서처럼 본절에서 의미도 일반적으로 두번째 의미로 이해되었고 NIV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25절을 통해 보면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말씀은 설교된 말씀임이 틀림없다. 넓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을 통한 설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돌트신경에는 복음을 가리켜 “중생의 씨앗”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철저하게 우리 안에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으키시긴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영적 생명의 최초의 외적 표출은 말씀을-그것이 전파된 말씀이든, 가르쳐진 말씀이든, 읽혀진 말씀이든 상관없이-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즉각적으로 부여된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하여 차후적으로 일어난다.
{개혁주의 구원론} [중생과 설교자] 중에서
현재 ‘기독교문서 선교회’에서 옛날에 번역된 이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이 제대로 번역 된 것인지 확실치 않지만 상당히 혼잡하게 번역된 것 같습니다. 앞에서는 ‘순간적인 중생론’을 언급하더니만 뒤에서는 ‘연속적 중생론’ 개념이 또한 나오는군요.
댓글 27
lamad 12.07.07. 23:51
후크마는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넒은 의미의 중생’을 말합니다. [중생과 설교자]에서는 ‘회개와 믿음’까지 언급하며 다루는 것입니다.
연속적인 중생은 회개와 믿음을 포함하기에 결국에는 결국에는 돌이킴까지 연관됩니다. 따라서 연속적 중생론을 말한다면 돌이킴에 대하여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돌이킴’에는 ‘점진적 돌이킴’과 ‘급직적 돌이킴’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 돌이킴’은 ‘중생과 회개와 믿음이 동시적’이니 ‘순간적 중생’이라고 할 수 있고, ‘점진적 돌이킴’은 급직적인 위기심보다는 ‘점진적인 형태’의 회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후크마는 이 둘을 다 인정하는 겁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7. 22:57
후크마가 둘 다 인정하는 것은 저도 압니다. 중생의 서론 부분과 결론 부분에서 그 부분을 언급했으니까요. 위의 부분은 중생의 결론 부분입니다. 그러나 순간적 중생이 연속적 중생은 아니지요.
돌트신경의 “돌아서는”은 돌이키는 넓은 의미의 중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적용한 것은 명백한 오류지요. 그러나 이것이 번역상의 오류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만..
올해 가을에 ‘부흥과 개혁사’에서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이 다시 새롭게 번역되어 정식 계약본으로 나온다고 하니 그것을 한번 보아야겠습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7. 22:59
추측입니다만, 번역이 제대로 안 되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아마 돌트신경 “돌아서는”이란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인해 나타난 열매와 결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아서 ‘돌아서는 =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지요. 이 둘은 천지 차이입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7. 23:07
만약 후크마의 돌트 적용한 이 부분... 《 돌트총회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는(여기서 돌이선다는 것은 중생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 → 여기서 ‘돌아서는 = 중생’ 에서 후크마가 돌트의 ”돌아서는”이 넓은 의미의 중생으로 이야기했다면 맞는 것입니다.
즉 그가 순간적 중생(초기 중생: 중생의 시작)을 언급하기 위해 먼저 넓은 의미의 중생을 언급하는 도르트신경의 “돌다서다”를 인용한 것이라면 말입니다. 만약 그가 ‘돌트 신경의 “돌아서다”가 '넓은 의미의 중생'과 동의어다.’고 했다면 그는 연속적 구원론(넓은 의미의 중생)을 지지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앞뒤가 약간씩 아구가 들어맞게 됩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7. 23:19
순간적 중생론을 지지하는 분이 중생의 결론 부분을 넓은 의미의 중생 혹은 연속적 중생으로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7. 23:22
그런데 후크마와는 별도로 라마드 님이 말하는 순간적 중생과 연속적 중생이 좀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듯합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1NyO/43 → 제가 과거에 순간적 중생과 연속적 중생을 비교했던 글입니다. 한번 참고 바랍니다.
┗ lamad 12.07.07. 23:49
“신약성경은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의 설립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점진적 돌이킴에 관한 구체적 실례를 우리에게 주고 있지 않다.”고 언급합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7. 23:52
누가 그러던가요? 그분이 누군지 몰라도 ‘구약 성도와 신약 성도의 돌이킴이 다르다.’고 주장하나요?
로빈슨크로소 12.07.07. 23:06
그럼에도 후크마의 문제점은 다 해결되지 않는데..
후크마가 ‘루디아나 고넬료의 중생을 한 순간에 일어났다.’고 해석하는 부분에서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기면 되겠지만, 성경이 어디 그렇게 쉽게 넘어갈 문제입니까?
루디아나 고넬료가 중생하기 전에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를 하고 있었는데, 그럼 그 상태는 어떤 상태냐는 질문이 당연히 따라옵니다. 그러나 후크마는 그에 대해서는 무응답입니다.
로빈슨크로소 12.07.07. 23:09
저는 일단 올해 가을 경에 다시 번역되어 나오는 호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을 보고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려고 합니다. 번역이 깔끔하게 잘 정리되었으면 좋겠군요..
┗ lamad 12.07.07. 23:56
번역에는 저로서는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으리라 봅니다.
후크마가 아니라 후크마로 일관해서 말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돌이킴]까지 보셨는지요? 후크마의 중생 관점을 [돌이킴]까지 봐야 제대로 이해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일은 주일이니까 이와 관계된 댓글은 다음 주로 넘기는 게 좋겠습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7. 23:57
회개까지 다 보았습니다. 돌이킴이 회개와 믿음이니 그 부분까지 다 보아야지요.
후크마의 중생의 관점은 새 번역이 나와야 알 수 있겠습니다. 이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거나 후크마가 틀린 것입니다. 후크마가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의 성경해석이 틀린 것입니다. 이미 제가 결론을 냈습니다. 라마드 님의 답변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후크마는 왜 고넬료와 루디아가 회심 이전에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한 것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대한 답변을 라마드 님이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후크마의 {구원론}으로 이 논쟁을 이어 가시려면 말입니다.
┗ lamad 12.07.08. 00:00
네. 알겠습니다. 모두 보았다니 감사합니다.
제 입장은 ‘후크마는 홀리조이 님의 해석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일차 목표입니다.
과거에 “후크마가 연속적인 중생을 주장한다.”고 한 내용은 잘못된 사실입니다. 본문에 해석이 분명히 홀리조이 님과 다르기에 연속적 중생론을 후크마는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 답변은 분명히 했습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8. 00:02
같은 책을 본 저로서는 라마드 님께서 후크마의 책을 잘못 읽으신 것으로 이차적으로 생각합니다.
일차적으로는 번역자가 제대로 번역을 하지 않아서 라마드 님이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삼차적으로는 후크마는 회심 전에 루디아와 고넬료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 고의적으로 해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즉 후크마의 성경해석 오류입니다.)
그런데 후크마는 중생의 결론 부분에서 홀리조이 님과 같은 연속적 중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마드님은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그 근거를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홀리조이 님이 말하는 연속적 중생의 개념과 후크마가 말하는 연속적 중생의 개념을 말씀하시고 비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lamad 12.07.08. 00:03
하나님을 섬기는 다음에 나오는 후크마의 해석을 저는 따릅니다. 그러나 홀리이 님은 그 다음의 해석이 후크마의 해석과 다릅니다. 이 내용을 번역의 차이라고 하지는 않겠지요.
┗ lamad 12.07.08. 00:07
연속적인 중생론을 주장하는 분은 홀리조이 님이시고 답변할 분은 제가 아니라 홀리조이 님이십니다.
루디아의 경우, 사도 바울의 경우, 고넬료의 경우를 홀리조이 님처럼 해석하는 분이 피터마스터스 말고 누가 있나요?
‘후크마의 오류냐, 아니냐?’는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8. 00:07
성경해석의 차이는 후크마가 틀렸다고 저는 말했습니다. 성경해석이 후크마가 맞았다면 ‘루디아와 고넬료가 회심 이전에 하나님을 공경, 경외’한 것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후크마는 해석하지 않습니다. 즉 후크마가 틀린 것입니다.
제가 주석도 올렸지만 박윤선, 맨튜 헨리 모두 이 부분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후크마만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후크마가 틀린 것입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8. 00:08
아니지요. 라마드 님이 지금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마드 님이 후크마의 책을 보고 이렇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라마드 님과 같은 후크마의 책을 보고 라마드 님과 다른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후크마의 오류를 언급했고, 라마드 님은 후크마의 오류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 lamad 12.07.08. 00:11
홀리조이 님처럼 본문을 주장하는 개혁주의자들이 있는가를 차라리 언급하는 게 낳지 않겠습니까?
홀리조이 님이 과거의 개혁주의자들과 해석이 같다면 굳이 연속적 중생론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요? 벌코프도 후크마의 해석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전에 벌코프의 글을 제가 올렸습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8. 00:10
라마드 님 지금 제가 위에 올린 주석 박윤선 주석, 맨튜 헨리 주석, 칼빈 {기독교 강요}... 모두 연속적 중생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심하기 이전부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다들 해석하고 있고, 후크마만 그 부분을 일부러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8. 00:11
후크마처럼 그 본문을 해석하는 자들이 과연 어디 있습니까? 한번 주석 찾아서 후크마처럼 성경해석 한 분을 찾아 올려주시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 아닙니까?
지금 라마드 님은 논쟁 절차까지 솔직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근거 자료 하나 없이 지금 후크마의 잘못된 성경해석을 올바르다는 전제하에 지금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솔직히 유감스럽긴 합니다.
저는 여러 근거들을 올렸습니다. 이제 라마드 님이 올릴 차례입니다.
┗ 로빈슨크로소 12.07.08. 00:13
라마드 님이 후크마의 해석이 옳다면 그처럼 해석한 주석을 올려봐 보십시요. 제가 알고 있는 주석에 고넬료와 루디아의 회심 이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한 것이 거짓된 것이라고 해석한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 lamad 12.07.08. 00:15
타자 정말 빠르시군요.
돌잔치 갔다 오느라 시간이 없어서 목사님이 올리신 글을 못 본 상태입니다. 그러니 다음 주로 미루는 게 좋겠네요.
┗ 로빈슨크로소 12.07.08. 00:15
논점을 벗어나지 않게 정확히 흐름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1. 후크마: 회심 이전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는 것은 모두 거짓된 것이다. (이런 해석하는 경우 없음. 그래서 후크마도 이 부분을 일부러 해석 안함)
2. 홀리조이: 회심 이전 하나님을 공경하고 경외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박윤선, 맨튜 헨리, 칼빈 기독교 강요 등)
이것이 논점입니다.
┗ lamad 12.07.08. 00:25
그래요. 주일 지나고 한번 글을 쭉 읽고 답변하겠습니다.
“논점을 벗어낫다.”는 말은 저를 취조하듯이 몰아붙인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저는 논점을 흐뜨리려고 한 말이 아니라 몇 문장 타자 하니 쭉 내려오는 글을 보고 순간의 느낌을 한 말인데요^^
holyjoy 12.07.08. 06:53
ㅎㅎ 두 분 열심히 토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영어가 후크마의 입장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The new birth as James here describes it is not regeneration in the narrower sense - the implanting of new life - but in the broader sense, namely, the first manifestation of the new life in conversion.......
이런 견해를 두고 피터 마스터서 왈 “연속적 중생(회심)론”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측면강조, 회심은 중생자의 인간적 결단적 측면을 강조함. 라마드 님이 연속적 중생(회심)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고 비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듬.
┗ holyjoy 12.07.08. 06:56
그리고 로빈슨크로소님께서 “하나님 공 경”에 대한 저의 입장을 정리해 주셨는데, 하나만 보충했으면 합니다.
회심 전의 하나님 공경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일 수도 있는데, 그 은혜가 특별한 은혜, 곧 구원(회심)에 이르게 하는 은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방인들 중에 유대교에 대해서 호감을 가진 자들을 일반적으로 “하나님 공경자”라고 부르고 있는 용례의 분석에 근거한 것입니다. 루디아의 경우는 하나님의 공경을 특별은혜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하겠고, 이미 유효적 부르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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