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로 읽는 역사 이야기(17)
천민 출신 시인 백대붕을 통해 본 조선시대의 종(노비)
조해훈(고전평론가)
술 마시며 취해 수유꽃 꽂고 혼자 즐기다가(醉搜茱萸獨自娛·취수수유독자오)
산 가득 밝은 달빛 비치니 빈 술병 베고서 누웠다네.(滿山明月枕空壺·만산명월침공호)
길 가던 사람들아, 무엇하는 놈인지 묻지 마시길(旁人莫問何爲者·방인막문하위자)
티끌세상에서 희어진 머리의 전함사 노복이라오.(白首風塵典艦奴·백수풍진전함노)
위 시는 조선 선조 때의 시인인 백대붕(白大鵬·?~1592)의 「취하여 읊다」(醉吟·취음)이다. 시는 어렵지 않아 굳이 해석을 덧붙이지 않아도 이해가 될 것이다.
그는 자가 만리(萬里)로, 천민 출신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함사(典艦司)의 노복(奴僕)으로 있었고, 천민 신분임에도 글재주에 타고나서 시를 잘 지었던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590년(선조 23년)에 황윤길이 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서장관으로 있던 허성을 따라 에도에 갔다. 이때 왜인들에게 시를 지어주면서 주목을 받았다. 현재 백대붕의 시로는 위에서 소개한 「취음(醉吟)」과 「추일(秋日)」이 남아있다. 문집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함사는 조선에서 조운선(漕運船)과 함선(艦船)의 관리를 담당하는 관청이다. 그러니까 백대붕은 이 관청의 노복으로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순변사 이일(李鎰·1538~1601)의 관군부대에 편제되어 병졸로 참전하였다. 백대붕은 경북 상주 싸움에서 왜군과 교전을 하던 중 전사하고 말았다.
백대붕이 전사한 임진왜란과 관련해 조금 더 언급하자면 왜군의 침략 소식은 침략 4일이 지난 후,4월 17일에 선조 임금과 조정에 알려졌다. 선조는 유성룡을 도제찰사로, 김명원을 도원수에 임명하고, 이일과 신립을 순변사·삼도 순변사로 임명해 왜군의 북상을 막도록 급히 명하였다. 이때 순변사로 임명된 이일의 부대에 백대붕이 병졸로 소속된 것이다. 이일이 상주 일대에 진을 쳤지만 왜군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지고 모두 섬멸되었다. 이때 백대붕이 전사한 것이다. 이일은 맨몸으로 빠져나와 신립 장군의 군진으로 갔다.
백대붕은 신분제도가 엄격한 조선 사회에서 천민 신분 중 드물게 글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어떻게 글을 배웠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조선시대에 백대붕 외에 노비 출신 시인으로는 정초부(鄭樵夫·1714~1789)가 잘 알려져 있다. 정초부는 유고문집인 『초부유고(樵夫遺稿)』를 남겼다. 이 문집에 정초부의 시가 약 90수 실려 있다
노복은 종살이를 하는 남자를 말한다. 노비는 종이나 하인, 머슴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재다.
조선시대는 노비라고 하더라도 본인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과거에 급제하거나 학자 및 시인으로 명성을 떨칠 정도의 학문적 성취를 도모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반석평·양극선·정번·유극량은 노비 신분으로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기는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써 호중(湖中)지역의 학문을 성대히 하는 데 일조하였다. 송익필은 이이·성혼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석학들과 성리학적 문제에 대하여 논쟁을 벌일 정도로 뛰어난 학식을 갖추었다. 또한 유희경은 사대부의 상례나 국상에까지 불려 갈 만큼 예학으로 이름을 떨쳤고, 시에도 능통하였다.
백대붕을 계기로 이번 호에서는 조선시대의 노비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조선전기에는 양반 7%, 중인·평민 65%, 노비 35%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돈이 많아진 평민들이 양반 신분을 사들여 양반의 비율은 70%, 노비는 18%였다고도 한다. 물론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노비는 주인의 재산으로서 상속·증여·매매의 대상이었다.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의 시카다 히로시 교수는 조선후기 호적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19세기에 들어와 양반층이 크게 늘어나고 평민층은 줄어들고, 노비층은 거의 소멸해간다고 하였다. 1960년대 서울대 김용섭 교수도 호적 연구를 통해, 양반층이 크게 늘어났다는 데 동의하고, 이를 평민과 천민층의 신분상승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영남대 정석종 교수도 역시 양반호의 급증, 상민호의 격감, 외거노비호의 소멸, 솔거노비의 존속이라는 유사한 결론을 도출했다.
노비가 전체 인구의 몇 십 퍼센트였다는 주장은 호적의 호를 자연호로 파악하고 그렇게 계산한 것이었다. 그런데 호적이 이처럼 많은 한계를 가진 자료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조선시대 인구의 양반·평민·천민층의 비율을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인구의 몇 십 퍼센트가 노비였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김의환 선생은 「17-19세기 진천 평산 신씨의 노비 소유와 노비의 존재양상」이라는 논문에서 노비에 대한 내용을 밝혔다. 이 논문에 따르면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평산 신씨의 호적 관계 자료에 나오는 노비는 1705년 300여 명에서, 18세기 이후에는 20~50명으로 줄어들었고, 19세기 말에는 아예 1명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또 17~19세기 신씨 소유의 노비는 연인원 1463명인데, 이 가운데 주인과 함께 사는 솔거노비가 371명(25.4%), 주인과 따로 사는 외거노비가 742명(50.7%), 도망노비가 349명(23.9%)이었다고 한다. 솔거노비는 17~19세기에 걸쳐 다소 증가하는 추세였고, 외거노비는 갈수록 격감했으며, 도망노비의 수는 18세기 전반에 가장 많았고 갈수록 줄어두는 추세였다고 한다. 전체 노비의 수가 줄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노비는 대부분 외거노비였다가 자취를 감춘 경우였다. 17세기 후반 신계(申繼)의 호적 단자에는 162명 가운데 19명이 도망 노비였는데, 같은 해 준호구에는 217명 가운데 72명이 도망노비로 적혀 있고, 20여년 뒤의 준호구에는 300명 가운데 95명이 도망노비로 적혀 있다고 한다. 이를 보면, 호적에 노비의 숫자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도망노비의 숫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문숙자 선생의 논문인 「18-19세기 재령 이씨가 호구단자를 통해본 노비 가계」를 보면 영해 재령 이씨 가(家)의 경우, 18세기 말까지 호구자료에 오른 전체 노비의 53%가 도망노비였고, 1792년에는 48명의 노비 가운데 44명이 도망노비였다고 한다. 이 호구자료에는 도망노비를 최소 63년부터 최대 207년 동안 기재하여 계속 관리했다고 한다. 전형택 선생의 연구를 보아도 광주의 전의 이씨 가(家)는 도망노비를 90~137년 동안 호적에 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도망간 노비가 낳은 자손을 잡는 경우, 자신의 재산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처럼 도망노비가 상당수 호적에 올라가 있고, 이들의 나이가 100살, 심지어는 200살까지(재령 이씨의 비 계선은 227살) 되기 때문에 이들의 숫자는 허수라고 보아야 한다. 앞서 본 것처럼 호적에는 누락된 이들도 많고(특히 평민), 그런가 하면 천민들 가운데에는 이런 허수도 꽤 실려 있다. 따라서 이런 호적 자료를 기초로 양반·평민·천민 신분의 구성의 통계를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노비 인구가 몇 십 퍼센트였다는 주장은 ‘자연호’설이 대세였을 때인 1980년대까지의 학계의 설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학계의 호적 연구, 고문서 연구가 크게 진척되면서 이제는 ‘편제호’설이 학계의 대세가 되었고, 신분 구성에 대한 논의는 완벽하게 정리가 되지 않고 있다.
노비들의 삶에도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무 도식적으로 생각하거나 단편적으로 판단하는 데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참고자료>
- 김의환, 「17-19세기 진천 평산 신씨의 노비 소유와 노비의 존재양상」, 『한국학논총』 44,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5.
- 김한종, 『한국사 사전』, 책과 함께 어린이, 2015.
- 문소영, 「조선시대 노비 비중, 알 수 없다」, 블로그 ‘문소영의 역사와 저널리즘’, 2022.
- 문숙자, 「18-19세기 재령 이씨가 호구단자를 통해본 노비 가계」, 『장서각』 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유진성, 「朝鮮時代 賤民의 修學 事例 硏究」, 한국교원대학교 석사 논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