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기
1. 지방제도의 변화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지방제도 개정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통감부는 1906년 4월 지방제도 개정작업을 전담하는 기구로 지방제도조사소를 설치하고, 9월 초부터 비입지(飛入地)와 두입지(斗入地)정리를 기본으로 하는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06년 9월 24일칙령제49호〈지방구역정리건〉을 공포하여 전국적으로 총 316개 대상지역 가운데 217개 지역의 비입지와 두입지를 정리하였다. 1906년 광주부에서 광주군으로 바뀐 광주는 비입지 초부면을 양주군으로, 두입지 성곶면, 월곡면, 북방면을 안산군으로 이속하여 관할 면이 21개 면에서 17개 면으로 축소되었다. 반면 안산군은 광주부의3개 면을 편입하여9개 면으로 늘어났다. 19세기 말까지 광주부 관할이던 월곡면, 북방면, 성곶면은 1906년 안산군 관할로 바뀐 이후에도 리수가 21개리에서 24개리로증가하고, 동리이름도 세분화 되는 등 촌락분화가 계속되었다.
대부동 지역은 대한제국기에 남양군 관할 하에 있었다. 즉 1709년(숙종 35) 대부진(大阜鎭)을 설치한 이래 1895년까지 치폐를 계속하다가 남양군에 소속되었고, 190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부면이 설치되어, 상동, 하동, 흘곶동, 영전동, 종현동, 풍도동 등을 관할하였으며, 이듬해인 1910년에는 선감동까지 아우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통감부의 지방제도 개정 방향에는 지방구획상의 비입지와 두입지 정리만이 아니라 345개 전국 부∙군을 220개로 대폭 통폐합하는 군폐합안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폐합안에 따르면 경기도의 경우 총 38개 군 가운데 16개 군이 폐지 대상이었는데, 여기에는 남양군을 수원군으로 통합하고, 안산군은 과천군과 함께 시흥군으로 통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군폐합안은 당시 반대 여론에 부딪혀 철회되기는 하였지만, 일제 강점 후인 1914년 지방제도 개정 때 상당 부분 수용되었다.
2. 국권회복운동의 전개
(1) 의병운동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1909년 9월 남한대토벌 직전까지는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
1907년 10월 11일의병20여 명이 안산군 논곡리에 사는 부자들을 위협하여 금품과 총포를 빼앗은 후, 논곡리에 사는 일본인 교사를 처단하려다가 40원을 받고 풀어 줬다. 1908년 3월에는 같은 마을에 사는 부호들에게 금품 제공을 강박하던 의병 유성집(柳聖}集) 등 6명이 인화면과 그 부근에서 체포되었다. 1908년10월19일에도 의병9명이 총기를 휴대하고 와리면 무곡리 윤시종(尹侍從)이라는 양반집에 들어가 신화(新貨) 100원과 명주 20자 등을 탈취해 갔다. 1908년 9월 5일에 성곶면 이리 이장 한원배(韓元培)집에 의병 10여 명이 들어와 이장을 협박하고 신화 20원을 탈취했다. 1909년 4월 25일에는 총칼로 무장한 의병 8명이 잉화면 능곡리 이장 이봉구(李鳳九)집을 습격하여 1원90전을 가져갔다. 한편 남양군에서 수원군을 잇는 경기도 남서부 해안지대에서는 남양만 앞바다에 있는 대부도, 영흥도 등을 근거지로 한 수적(水賊)의 항일투쟁이 계속되었다. 수적은 1900년 무렵 중부 이남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활빈당 투쟁과정에서 나타난 민중항쟁의 한 양상이었다. 일제 근거지를 토벌할 목적으로 수원 수비대장 시모무라下村이하 33명으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1908년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토벌전을 벌였다. 물류 이동의 통로라는 점에서 이 일대에 대한 일제의 정찰과 수비는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1908년말부터이 지역의 의병운동은 거의 소멸해 갔다.
(2) 학교 설립과 교육계몽운동
안산군에는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확산되기 이전에 이미 공립학교가 설립되어 있었다. 한말 개화파 정부는 신학제 제정의 일환으로 1895년「소학교령」과 1896년 학부령 제1호「보조공립소학교규칙」등 일련의 법령을 제정 공포하여 공립소학교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1899년 9월 안산군공립소학교(安山郡公立小學校)가 개교하였으며, 그해 11월 6일 김광식(金光植)이 첫 교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1906년 8월「보통학교령」이 제정되면서 종래의 공교육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경기도의 경우 1906년 8월 현재 20개교에 달하던 공립소학교가 상당수 폐교하여 1909년에는 보통학교 6개교로 축소되었다. 안산군공립소학교의 경우 학제 개편에 따라 공립안산보통학교로 개칭되어 군수가 학교장을 겸임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통감부 설치 후 일제가 교육 주도권을 장악하고 식민지 교육을 강화해 나가자, 국권회복은 교육 계몽과 실력 양성에 있다고 판단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교육을 대신할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확산되어 갔다.
이 시기 안산 지역에도 다수의 사립학교가 설립되는데, 이 또한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난 교육계몽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먼저 1907년 5월 와리면 초지동에서 사립초지보통학교가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초지동에 사는 전 주사(主事) 이민선(李敏善)이 세운 학교로 설립 당시 학생이 40~50명에 달하였다. 초지보통학교는 설립자이자 교감인 이민선의 노력으로 교세가 확장하고 조형옥(趙瀅玉), 유철수(柳轍洙) 등이 교사로 활동하는 가운데 1909년 4월 15일개교3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여 주민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초지보통학교가 개교한 1907년 와리면 신각리에서는 신영학교新英學校가 문을 열었다. 윤세영(尹世榮) 등 7명이 발기하여 세운 이 학교는 40여 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1908년에는 신각리에 사는 전 감찰(監察) 함원식(咸元植)이 같은 마을 사는 이규신(李奎信)과 합심하여 이미 운영 중에 있는 신영야학교(新英夜學校)에 병설하여 신영주학교(新英晝學校)를 설립하여 학교 운영에 필요한 각종 경비를부담하는 한편, 교사(校舍)를 신축하자 학생수가 날로 늘어나 6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와리면에는 원상리에 1908년에 설립한 사립대성학교(私立大成學校)도 있었다. 주간반과 야간반을 두어 첫해에 52명을 수용하였다. 안산군 성곶면 구룡동에서는 전 참판 김용진(金容鎭)이 동민들과 협의하여 재정을 모아 사립 소학교를 설립하고 청년자제를 교육하였다. 이처럼 통감부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저항하고 교육계몽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학교설립 운동에 안산 지역도 적극 동참하였다. 이 시기 사립학교 설립운동은 일차적으로 군수를 비롯한 지역 유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초지보통학교를 설립한 전 주사 이민선, 신영학교의 전 감찰 함원식 등은 모두 전직 관료들이었다. 그러나 지역 유지만이 학교 설립을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와리면 원하리에서는 정태완(鄭泰完)의 부인 유씨가 남편의 학비가 곤궁하자 바느질삯으로 학비를 부담하여 부인계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