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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백담사~곰골~마등령~비선대 산행이야기
산행일시: 2020년10월21일
누구와: 나홀로 산행
산행거리: 약17.0㎞
산행시간: 8시간45분(09:15~18:00)
산행코스:백담사주차장(`09:15)-길골입구(09:37)-곰골입구(09:58)-화전민터(10:10)-곰골폭포(11:05)-엄마곰골합수곡(11:43)-3단와폭(12:20)-폭포가있는좌지계곡합수곡(12:50)-와폭(13:28)-대각선폭포(13:58)-마지막폭포(14:23)-마등령3거리(14:50)-비선대갈림길(15:08~18)-금강문(15:30)-설악이정목02-04쉼터(16:05)-비선대(17:05)-와선대(17:17)-설악동매표소날머리(18:00)
갈 때 : 동서울터미널(06:30)-원통터미널(08:15)-진부령버스승차(08:20)-용대리하차(08:45)
올 때 : 설악동(18:10)-속초고속버스터미널(18:30~19:00))->강남고속버스터미널(21:25)
주요지점 통과 및 이동거리
06:33 동서울 출발
08:15 원통 도착
08:20 진부령행 승차
08:45 용대리 하차
09:03 백담마을 셔틀버스 출발
09:15 백담사추차장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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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백담사주차장에서 산행시작 해발479m
09:27 황장폭포
09:37 길골입구, 산행거리1.6km,산행시간23분, 해발496m
09:50 사미대
09:58 곰골입구, 산행거리2.8km,산행시간43분, 해발520m
10:11~16 화전민터, 산행거리3.3km,산행시간56분, 해발527m
10:23 첫 번째 좌지계곡
10:28 두 번째 좌지계곡
10:35 세 번째 좌지계곡
10:38 찢겨진 물탱크
11:04 곰골폭포, 산행거리4.8km,산행시1시간50분, 해발575m
11:11 곰골계곡횡단, 산행거리5.0km,산행시1시간58분, 해발576m
11:40 곰골계곡횡단, 산행거리5.8km,산행시2시간25분, 해발614m
11:43 엄마곰골합수곡, 산행거리5.9km,산행시간2시간28분, 해발616m
12:21 3단와폭, 산행거리6.7km,산행시간3시간06분, 해발739m
12:47 무명폭포, 산행거리7.4km, 산행시간3시간32분, 해발799m
12:51, 합수곡(좌측지계곡폭포), 산행거리7.6km, 산행시간3시간36분, 해발809m
13:07, 비박터
13:27~50 20m와폭(점심), 산행거리8.5km,산행시간4시간15분, 해발952m
13:57 대각선폭포(가칭)
14:06~17 골폭
14:20 무명폭포
14:23 마지막폭포, 산행거리9.1km,산행시간5시간08분, 해발1068m
14:49 마등령비박터
14:51~15:02 마등령3거리, 산행거리9.7km,산행시간5시간35분, 해발1214m
15:08 비선대갈림길, 산행거리9.9km,산행시간5시간53분, 해발1259m
15:11~15 1274봉, 산행거리10.1km,산행시간6시간00분
15:18 비선대갈림길
15:31 금강문
16:05 설악이정목2-4, 산행거리11.8km,산행시간6시간50분, 해발942m
16:52 금강굴입구
17:05 비선대, 산행거리13.6km,산행시간7시간3분, 해발327m
17:16~27 와선대
17:51 금강교
18:00 매표소날머리, 산행거리17km,산행시간8시간45분, 해발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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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 속초시내버스승차
18:46 속초고속버스터미널 하차
19:00 강남고속터미널행 버스승차
○산행 전 이야기
제 친구가 모임 밴드에 재미있는 유머를 올렸습니다.
얼마 전 삼성그릅 이건희회장님이 돌아가셨잖아요.
이건희회장님이 저승을 갔는데
먼저 저승에 온
현대그릅 정주영회장님이 반갑게 맞으며
대뜸,
“이회장, 미안한데 돈 5000원만 빌려 주시게“
이건희 회장이 주머니를 뒤져보더니 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선배님, 빌려 드릴 돈이 없는데요.“ 라고 겸연쩍게 말했답니다.
그러자
정회장이 껄껄 웃으시며
자네도 빈손으로 왔는가?,
나도 빈손으로 왔는데...........
유머지만 딱 맞는 말입니다.
산을 다니는 여러분!
누구나 저승은 빈 몸으로 가는 것이니
이 좋은 세상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삽시다.
이런 명언이 있잖아요.
돈을 잃으면 부분을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반을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삽시다.
○백담사주차장들머리에서 곰골입구 구간
주차장에서 산행이 시작된다.
등로로 들어서서 조금 지나면 오래전 백담대피소로 활용되던 돌로 지은 건물인 설악산 탐방안내소를 지나 5분정도 지나면 폭포도 아니면서 폭포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황장폭포에 이르게 된다.
조선시대에 설악을 찾았던 사대부들이 이곳을 찾아 뛰어난 경치를 보고 시를 읊었던 곳인데 현대에 사는 우리는 이런 경치는 수없이 보아온 터라 감격을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지명을 황장폭포라고 부르고 있지만 옛 기록에는 폭포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고 황장우, 황장뢰, 황장연 등으로 기록했으며 공통적으로 황장이 들어가는데 황장, 금강송을 일컷는 말로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부터 설악에는 금강송이 많았음을 알 수 있으며 우(隅)나 뢰(雷)는 여울을 뜻하고, 연(淵)은 못을 뜻하는 말인데 어떤 글에는 금강송을 베어 물에 띄워 이동하던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조선시대 이의숙은 오래전 설악산을 방문하고 쓴 곡백담기에서 "이곳에서 아래로 20리를 곡백담이라고 한다."라고 했으니 백담계곡의 시작점을 황장폭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며칠 사이에 등로에 번화가 생겼다.
지난 10월9일 큰감투봉과 작은감투봉을 넘어 백담사로 내려서며 이곳을 지났는데 당시에는 오래전 그대로로 물가에서 백담계곡의 자연미와 가을 단풍의 풍경을 즐기는 연인들이 많았는데 12일이 지난 오늘 보니 이곳에 인공을 가미한 다리가 놓아 예전처럼 물가에 앉아 황장폭포를 감상하는 자연스러움은 멀어졌으니 아쉽고 아쉬운 일이다.
아쉬움을 간직한 채 황장폭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계곡건너편으로 합수곡이 있는데 이곳이 흑선동계곡으로 오래전 조선시대사람들은 이 계곡을 길을 삼아 지금의 대승령을 넘나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3년 노산 이은상선생도 장수대에서 대승폭포를 지나고 대승령을 넘어 흑선동계곡으로 내려서 백담사로 가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흑선동계곡이 보이는 곳에서 수렴동계곡 길을 따라 약10분정도 오르면 철다리가 나오며 철다리 좌측으로 계곡이 있는데 이곳이 길골이다.
길골은 예전이나 현재나 유용하게 이용되는 계곡길인데 예전에는 널협이골, 길골, 수렴동 일대의 주민이나 화전민이 속초나 양양을 가기위한 고갯길이었다면 현재는 저항령으로 가는 산꾼들이 이용하는 길이다.
길골에서 저항령 구간은 위험한 곳도 없고 가파른 경사도 없는 유순한 계곡으로 백두대간을 중간에서 이어가기 좋은 계곡길이다.
1933년 일행 15명과 함께 31살 나이에 설악산 산행을 나섰던 노산 이은상 선생은 백담사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세암으로 향하며 이곳에 대해 이렇게 썼다.
「어제 우리가 대승령에서 나려오다가 이리로 갈려 오던 몫을 지나니 길가에 한 목비(木碑)가 서잇서 좌로 가면 들목고개를 넘어 외설악으로 질러 빠지는 길이 되고 우로 가면 영시암이 된다는 주의가 적혀 잇음을 봅니다.」
「늘목고개」라~
늘목고개는 저항령을 뜻함이며 토속정인 내음이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목비(木碑)라~
목비는 요즘으로 방향이나 거리를 나타내 주는 이정목을 뜻하는 것 같은데 길골입구에 요즘 말로 이정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리가 현재 부르고 있는 저항령을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는 늘목고개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늘목고개의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황철북봉과 저항봉 사이 V곡을 늘어진 것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길골입구에서 수렴동계곡길로 10여분을 오르면 우측 계곡으로 바위가 솟은 곳, 바위와 바위 사이를 두고 못이 하나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사미대와 사미소라고 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미대로 내려서서 사진을 찍고 동자승이 자기 얼굴을 물에 비치며 눈물로 엄마를 그렸을 사미소를 보고 있자니 지나는 사람들이 6~7명 내려서서 “여기가 뭐냐?“고 묻는다.
사미대라 답하니 “사미대는 무슨 뜻이냐?“ 되묻기에 백담사의 전신이 심원사가 아주 가까이 있었으며 심원사가 불타고 지금의 자리에 백담사를 세웠다고 설명하고 동자승이 엄마생각이 날 때 이곳에 와서 엄마를 그리던 곳으로 사미란 동자승을 뜻한다고 말해주자 이들은 2가지에 놀란 듯 관심을 보인다.
백담사가 원래 이곳에 있던 심원사가 불타자 지금의 자리에 세웠다는 사실과 어린 동자승이 엄마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라며 동정을 나타낸다.
그런데 노산 이은상님은 사미대라는 지명은 아예 기록하지 않았는데 사미대라고 여기고 있던 곳을 영산담이라 적었다.
영산담(影山潭)
영산담이라는 뜻은 산이 물에 비치는 못이라는 뜻으로 조선 사대부들이 기록한 산행기에는 영산담이 황장폭포 조금 못 미친 지점이었는데 노산선생은 이곳을 영산담이라 했다.
많이 헷갈리는 대목이다 보니 설악인문기행을 쓴 권혁진님도 설악인문기행에 영산담을 딱 짚어 어디라 하지 못하고 황장폭포 바로 아래 있는 담을 「나만의 영산담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기록했는데 필자도 영산담은 황장폭포 아래로 알고 있다.
노산선생은 산행기에 이렇게 적었다.
「담은 영산담! 내산제봉의 면용이 이 담 속에 투영하엿다는 뜻이라 하거니와 바위에 올라 앉아 물속을 굽어보매 과연 산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사람도 보입니다.
영산담 맑은 물에 저기도 내가 잇네
뉘가 참이 온지 어뉘 것이 그림잔지
물속에 지나는 구름 보고 웃고 돌아 서니라
소허에 판교(板橋)를 건너게 되는데 좌로 보이는 동곡(洞谷)은 웅정동(熊井洞)이라 쓰고 곰이골이라 부르는 곳이요, 그 안에는 인가도 7~8호는 잇다고 합니다.」
사미대!
지금은 갈수기라 계곡에 물이 많지 않은데 이곳 사미대는 푸른 물이 깊게 보였으며 사방으로 높은 바위들이 튀어 나와 명경을 만들었다.
나이어린 동자승이 이곳 바위에 걸터 앉아 그리운 엄마와 고향집을 그리는 애절한 모습을 그리며 사미대에서 잠시 머물다 등로로 복귀한다.
심원사터는 사미대 길 건너편 인근으로 숲속으로 들어가 주춧돌을 확인해야 하므로 생략하고 등로를 따라 몇 발자국 떼어 놓다보면 작은 안내판이 반기는데 설담당부도 안내판이다.
등로에서 약30~40여m 떨어진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가 들리는 곳이다.
오래전 와보았던 곳인데 당시에는 관심 없이 보고 지났었다.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탑으로 둥근 원형모양과 종모양이 대부분으로 이곳 설담당부도는 종석형태의 부도로 앞에 설담당이라는 한문이 새겨져 있다.
이 부도의 주인이 되는 설담은 심원사라는 절이 불타고 새로 지금의 터에 절을 세우며 백담사라는 이름을 지은 승려라고 한다.
설담당부도를 보고 등로로 복귀해 1분정도 지나면 왼쪽으로 계곡이 있으며 계곡을 건너는 철다리가 있는데 이곳이 곰골이다.
▷백담사주차장들머리에서 곰골입구까지 산행거리2.8km, 산행시간43분, 해발520m, 현재시간09시58분이다.
○곰골입구에서 엄마곰골 합수곡 구간
곰골!
앞서 노산선생이 쓴 설악행각의 한 부분에 「소허에 판교(板橋)를 건너게 되는데 좌로 보이는 동곡(洞谷)은 웅정동(熊井洞)이라 쓰고 곰이골이라 부르는 곳이요, 그안에는 인가도 7~8호는 잇다고 합니다.」라는 구절을 보면 지금은 철다리가 놓여 있는 이곳에 1933년 널빤지로 작은 다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곰이골이라 부르고 쓰기는 웅정동이라 썼다고 하니 이는 이 지역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일 것이다.
설악산의 마지막 반달곰이 저항령 일대에서 살다가 속초 포수 이모씨에게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저항령에서 저항봉 능선을 넘으면 곰골이므로 예전에 이곳 곰골에서 곰이 살기는 살았던 것 같다.
곰골로 들어서면 희미한 등로가 보인다.
비법정탐방로로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기에 등로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생각했는데 그래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희미한 등로가 있다는 것만도 반가운 것이다.
바닥에는 떨어진 낙엽이 수북하고, 단풍나무는 늦가을 풍경을 말해주듯 절정을 넘긴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은 채 오랜만에 찾아든 산색을 반갑게 맞아준다.
곰골!
노산이은상 선생께서 곰이골이라 부르고 쓰기는 웅정동( 熊井洞)이라고 했던 곰골로 들어선 것이다.
마음이 편하다.
곰골입구로 들어서서 5분을 지나자 비박터가 있다.
설악산 곳곳을 지나다 보면 생각하지도 못할 곳에 비박터가 있는 곳을 보기도 하는데 희야봉과 작은 범봉 사이 아래에도 비박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런 곳에서 비박을 하는 사람은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
비박터를 지나 계곡을 우측에 두고 계곡 좌측으로 5분을 지나면 작은 지계곡을 건너게 되며 지계곡을 건너서 2분정도 지나면 인의적으로 쌓은 석축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노산선생이 기록한 화전민터인 것 같은데 노산선생은 곰이골 안에 7~8가구가 살고 있다고 했는데 마을터도 넓고 석축의 규모로 보면 7~8가구 보다 더 많은 가구가 살았을 것 같은 규모였는데 아마도 오래전에는 20~30여 가구가 살다가 노산선생이 설악을 찾았을 1933년 당시에는 7~8가구가 살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
5분정도 화전민터를 지나면 계곡방향으로 등로가 접하며 계곡아래 폭포는 아니지만 폭포 같은 돌확이 있는 짧은 협곡을 지나는데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서야 하므로 계곡 위 등로에서 풍경을 보고 다시 등로로 접어들어 1분을 지나서 두 번째 좌지계곡을 건너고, 다시 5분을 더 지나 세 번째 좌지계곡을 건넌다.
세 번째 좌지계곡을 건너서 7분을 더 지나면 네 번째 좌지계곡을 건너게 되며 등로는 계곡과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거듭하며 이어가는데 처음 곰골로 들어서서 계속 계곡 좌측으로 진행하며 한 번도 곰골계곡을 건너지 않은 것이다.
네 번째 좌지계곡을 건너서 2~3분 오르면 찢어진 물탱크가 버려져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이렇게 큰 물탱크를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가지고 왔을까? 하는 의문이고, 더 궁금한 건 어떻게 이곳까지 운반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작아서 간단하게 운반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이런 산중에 버리면 누가 치운단 말인가?
버려진 큰 물탱크 옆에는 오래전 죽어 고목이 된 굵은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에 귀한 버섯이 달렸는데 흔하게 볼 수 있는 버섯이 아니고 조금은 귀한 소나무잔나비버섯인데 필자도 처음에 이 버섯을 말굽버섯으로 알았는데 우연하게 서울대교수에게 버섯 사진을 보여주니 소나무잔나비 버섯이라고 알려주었는데 흔하게 볼 수 있는 잔나비걸상버섯과는 다른 버섯이다.
버섯을 딸까? 그냥 둘까? 망설이다가 그냥 두고 가기로 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필자보다 더 간절하게 이 버섯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것인데 필자는 버섯으로 만든 식수를 마시고 있으며 한동안 이용할 버섯이 남아 있기도 하다.
잘 생긴 소나무잔나비버섯을 뒤로하고 희미한 등로를 따라 5분을 지나면 경사가 가파른 사면을 지나게 되는데 아래 계곡은 약30여m되는 절벽 같아 보였는데 길은 좁고 홀드가 될 수 있는 나무도 적어 아주 조심스럽게 지나야 하며 험지를 지나 내려서는 등로는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인데 계곡은 협곡으로 계곡물에 깎인 돌확이 뚜렷한 바위협곡이 아주 멋있게 보이는데 내려서는 것도 만만하지 않아 위에서 보고 지나친다.
협곡을 지나 5분을 가자 희미한 등로는 한 가닥 계곡으로 내려섰으므로 계곡으로 내려섰는데 계곡 건너편으로 오르는 길이 없어 계곡치기나 아니면 다시 올라서야 했으므로 다시 올라섰는데 해답은 잠시 후 알게 된다.
등로로 복귀해 3~4분 오르면 계곡에 곰골계곡에서 가장 폭포다운 폭포가 나오는데 이 폭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폭포로 내려섰는데 조금 전 내려선 곳으로 계곡치기로 2~3분 오르는 편이 더욱 더 편했을 것이다.
폭포는 높이가 높은 것도 아니고 규모가 웅장한 것도 아닌데 곰골에는 다른 계곡에 비해 30~100m되는 규모의 폭포도 없고 넓이도 아주 넓은 폭포도 없는데 이곳 폭포는 웅장하지도, 높지도 않지만 담(潭)의 깊이는 아주 깊은데 아마도 3~5m는 족히 되지 않을까 싶다.
지난번 감투봉 갔을 때 카메라가 고장 나 인증사진은 스마트폰로 상체만 나오게 찍을 수밖에 없어 간단히 사진을 찍고 잠시 머물다 내려섰던 등로로 다시 올라선다.
등로로 복귀해 몇 발자국 지나자 이제까지 단 하나도 보이지 않던 표지기가 보였는데 설악비탐지역에서 어쩌다 보았던 '바람의땅' 표지기였는데 표지기는 등로를 계곡으로 안내한다.
곰골로 들어서서 처음 계곡을 횡단한 것이다.
계곡을 횡단해 계곡 우측으로 들어서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가다가 등로를 찾았는데 비교적 등로는 희미하지만 양호한 편이다.
등로를 따라 첫 번째 우지계곡을 지나고 두 번째 우지계곡을 만나게 되는데 등로는 두 번째 우지계곡을 따라 70~80m 올라가서 계곡을 건너게 된다.
계곡을 건너 등로가 희미해 계곡쪽으로 이동하여 다시 등로로 복귀하자 쓰러져 썩어가는 고목을 지나고 등로 좌측 계곡 쪽으로 거대한 바위가 서있는 곳을 지나면 큰 소나무 옆 작은 가지에 '바람의땅'표지기가 보이고 등로는 계곡으로 안내한다.
계곡으로 내려서면 계곡을 건너서 숲으로 이동해도 되고 계곡을 따라 계곡치기로 올라도 되는데 내려선 계곡에서 2분 정도 지나면 큰 합수곡에 닿게 되는데 좌측이 엄마곰골로 합수곡 삼각주에는 엄나무와 물푸레나무가 있는데 삼각주에 사는 나무가 엄마곰골을 알리는 랜드마크가 된다.
▷백담사주차장들머리에서 엄마곰골 합수곡까지 산행거리5.9km, 산행시간2시간28분, 해발616m, 현재시간11시43분이다.
○엄마곰골 합수곡에서 마등령3거리 구간
곰골에 엄마곰골은 무언가?
어찌 생각하면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곳으로 오르는 길은 험하고, 험하고 험한 곳인데 엄마곰골의 최고점은 저항령 남측 봉우리인 저항봉이다.
곰골을 스터디하며 우연하게 엄마곰골을 오른 높은산님의 블로그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높은산님과 또 다른 2명이 엄마곰골로 들어서서 저항봉으로 오르는 글을 읽으며 푹 빠져들었는데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은데 등로가 험하고 혼자서는 자신이 생기지 않는데 언젠가는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곰골과 곰골 합수곡 삼각주에 살아가는 나무가 멋있어 보이고 합수곡의 경치도 아주 좋아 배낭을 내려놓고 10분을 쉬어간다.
쉼을 마치고 곰골 우측으로 희미한 등로를 따라 오르면 약70여m 오르다가 계곡으로 내려선 다음 등로는 따로 없으며 계속 마등령까지 계곡치기가 이어진다.
곰골계곡의 물은 아주 적은데 낙엽이 떨어져 물 위에 떠 있어 낙엽만 보고는 물이 있는 곳인지 없는 곳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물로 들어설 수가 있다.
계곡과 바위의 생김새를 보면 그간 다른 블로거들이 올린 사진에서 본 풍경이었으며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는 계곡을 계곡치기로 30분을 오르니 3단와폭이 나타나는데 밑에 있는 소(沼)도 그런대로 크고 깊으며 물이 많은 철이나 단풍이 물든 때 이곳의 풍경은 아주 멋있을 것 같다.
오늘이 10월21일이니까 7~10일만 빨리 왔더라면 계곡에 단풍이 물든 3단와폭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3단와폭 위로 올라서면 폭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된 소(沼)가 나타나는데 계곡 위로 보이는 산릉에 암봉도 보이고 계곡이 V곡을 이루고 있어 이곳도 단풍이 물들 때면 아주 멋있는 풍경이 만들어질 것 같다.
3단와폭에서 첫 번째 소(沼)를 지나면 1분 후에 또 다른 소(沼)가 나타나고 3분 뒤 3번 째 소(沼)가 나타나는데 3번 째 소가 있는 곳에서는 계곡치기로 오를 수가 없어서 우측으로 우회를 해야 한다.
3번 째 소를 지나면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이 약15분 정도 오르며 15분을 지나면 제대로 된 소(沼)가 나오며 좌측으로 지나 위로 오르면 걷기 좋은 계곡이 5분정도 나오는데 5분정도가 지나면 좌측으로 지계곡이 나오는데 이곳 지계곡에는 작은 폭포가 있는데 엄마곰골 합수곡에서 정확하게 1.7km로 1시간이 걸렸다.
폭포가 있는 작은 지계곡에서 1~2분을 지나면 계곡을 막고 있는 소(沼)가 나오고 주변 계곡의 경치는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뛰어나며 계곡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약10분 정도 오르면 계곡 물을 지날 수 없어 우측으로 바위를 돌아 우회하게 되는데 이런 깊은 산 중에 비박터가 있다.
이런 곳에서 비박을 하는 사람은 설악사랑 맘짱님이나..........
비박터를 지나면 계곡은 물이 말랐으며 거친 바위 덩어리가 흩어져 있는 계곡을 20분을 오르면 와폭에 닿게 되는데 물이 적어 오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으나 겨울철 이곳을 내려서기는 만만치 않아 보였다.
와폭위로 올라서 시간을 확인하니 13시30분,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한다.
점심을 해결하며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지, 여기는 어디쯤인지, 앞으로 오르는 계곡은 위험하지는 않은지, 모는 것이 궁금하다.
조용한 계곡은 새들마저도 계곡을 떠났는지 조용하기만 하다.
스마트폰으로 다음지도를 몇 번을 시도해 보지만 현위치 확인이 불가하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캔맥주까지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가 배낭을 정리하고 와폭포를 떠난다.
와폭포를 지나 보잘 것 없는 계곡으로 약7분 정도 오르면 계곡 암반이 대각선으로 빗겨진 작은 폭포가 나오는데 편의상 대각선폭포로 기록한다.
대각선폭포는 소(沼)도 큰 것 같이 보였는데 대부분 메워지고 남아 있는 소는 넓지는 않지만 이곳을 지나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대각선이 끝나는 좌측으로 올라가야하는데 물이 있고 우측은 잡목이 있어 잡목을 헤치며 올라가야 했다.
대각선폭포를 지나 10분을 오르면 좁고 작은 골폭을 만나는데 골폭 앞에는 통나무가 걸쳐 있어 의자 같아 쉬어가기 좋다.
골폭을 지나기는 수월하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부상을 당하게 된다.
골폭 앞에서 좌측으로 지나갈까?, 우측으로 지나갈까? 망설이다가 좌측을 선택했는데 문제는 스틱이었는데 점심 식사하던 곳까지는 스틱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식사 후 스틱을 사용하며 여기까지 올랐다.
좌측으로 지나려고 하니 양손은 모두 사용해야하므로 스틱을 접어 넣어야 하는데 그게 귀찮아 한 손 손목에 걸고 홀드를 잡으며 조심스럽게 지나다가 발이 스틱에 걸리며 몸의 균형이 흐트러지자 왼손으로 잡고 있던 바위에 힘이 가해지자 고정되어 있는 바위로 알았던 바위가 빠지며 좌측 장지, 무명지, 약지 손가락을 뭉갰고 그 여파로 아래로 미끄러지며 가슴과 입술이에 찰과상을 입었고 무릎까지 물속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손가락이 아프지만 먼저해야할 것은 빨리 물 밖으로 나와서 등산화를 벗고 등산화 속에 있는 물을 쏟고 있는 힘을 다해 털어내야 했다.
양말을 바꿔 신을까하다가 금방 젖을 것이 뻔하므로 짜서 새로 신고, 신중하지 못한 처신으로 처량한 신세가 되었음을 한탄하며 스틱을 접어 넣고 이번에는 우측으로 잡목을 잡고 조심스럽게 골폭을 지난다.
설악을 들어설 때마다 항상 다시 생각하는 건 위험은 되도록 피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 홀드를 확실하게 잡고 안전하게 지난다는 생각을 하지만 사고가 날려니 이러한 상황에서 귀찮다고 스틱을 손목에 낀 채 지나려 했으니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으로 이번을 기화로 다음부터는 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다.
곰골의 골폭은 내게 이러한 기억을 남겼으니 아마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될려나? 곰골의 무명 골폭에서 있었던 경미한 사고가..........
골폭을 지나 계곡을 오르는데 손가락이 쓰라리고, 차갑게 느껴지고, 손가락과 입술에서 계속 피나 흐른다.
열대지방에서는 피냄새를 맡고 나타나는 동물들이 있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위험한 동물은 없으니 다행이지만 피는 멈추지 않는다.
배낭에서 밴드를 찾아보지만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밴드는 배낭을 세탁할 때 망가져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장갑을 낄까? 하다가 장갑에 엉겨 붙는 것이 싫어 조금가면 멈추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냥 가기로 한다.
골폭을 지나 5~10분은 지났는지 눈앞에 제법 크고 험상궂게 보이는 폭포가 보인다.
점점 폭포로 다가서며 겁부터 난다.
소는 없는 폭포인데 안전하게 올라야 하는데 좌측이나 우측이 미끄러워 보여 가운데 물이 적게 흐르는 곳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기어서 오르며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한번 사고를 당하니 많이 위축된 것이다.
어렵사리 폭포를 지나고 2~3분을 오르자 험상궂어 보이는 폭포가 또 나타났는데 이번 폭포는 소(沼)도 있고 물이 많을 때는 힘들게 올라야 할 곳인데 좌측으로 올랐다.
당시에는 스마트폰 다음지도로 볼 수 없어 현위치를 확인 할 수 없었는데 이 폭포가 곰골의 마지막 폭포였으며 이곳에서 30분이면 마등령3거리까지 충분히 갈 수 있는 위치다.
마지막 폭포를 지나면 계곡은 좁아지며 계곡으로서의 위엄도 없어지고 주변 풍경도 위협적인 암릉이나 암봉은 없고 일반적으로 평범한 계곡인데 물이 흐르다 말다를 이어가므로 마지막 폭포를 지나며 식수를 채울 필요가 있다.
마지막 폭포를 지나고는 손가락과 입술에 부상을 입어 사진도 거의 찍지 않고 주변 지형지물도 눈여겨보지 않은 채 빨리 마등령에 오른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지막 폭포에서 15~20분을 지나면 계곡은 좌우로 갈라지며 좌측계곡을 따라 오르면 색바랜 표지기가 보이고 우측으로 선명한 등로가 보이는데 이곳 어디엔가 샘터가 있다고 표기되어 있지만 샘터는 보지 못했다.
샘터라는 게 물이 있는 계곡이므로 샘터를 찾지 못했다면 계곡으로 조금만 더 내려서면 물을 구할 수 있다.
확연하게 나타나는 등로로 조금 올라서면 주변에 쓰레기가 많이 보이는데 이 쓰레기는 비박을 하던 사람들이나 뒤처리를 한 표시로 보기가 좋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깊은 계곡을 산행할 때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의구심이 들 때 모처럼 캔이나 비닐봉지 등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를 보면 무척 반가울 때도 있지만 등로가 인접한 곳에 많은 쓰레기는 보기가 좋지 않으므로 비박을 하는 사람들은 최소한의 예는 갖추어야 할 것 같다.
비박터를 오르면 마등령3거리가 눈에 들어오고 조금 더 다가서면 이정목이 눈에 들어오고 금줄을 넘으며 정규등산로에 접속하게 되는데 등로 옆 백담사7.4km, 오세암1.4km 이정표가 있다.
금줄을 넘어 약100m를 지나면 마등령3거리로 이곳에는 먼저 와있는 40대 초반의 부부산객인 김씨 성을 가진 분이 쉬고 있었다.
▷백담사주차장들머리에서 마등령3거리까지 산행거리9.7km, 산행시간5시간35분, 해발1214m, 현재시간14시50분이다.
○마등령3거리에서 설악동날머리 구간
마등령(馬等嶺)!
마등령은 고개의 형상이 말의 등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설악산 내설악 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능선에 있는 고개다.
더 자세히 쓴다면 설악산 대청봉에서 진부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상 나한봉과 마등봉 사이에 있는 고개로 남서방향으로는 인제의 백담계곡, 오세암이 있으며 동으로는 속초, 양양 그리고 신흥사가 있다.
노산 이은상선생의 마등령에 대한 이야기다.
1933년 일제강점기 때 노산 이은상선생은 포수2명과 이곳 지리에 밝은 심마메니 2명 그리고 사진사1명 등 15명이 6일 동안 설악을 산행하였는데 마지막 6일차 되는 날 오세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마등령을 넘었다.
사람들은 10분의7.8이 내설악이라고 하고 10분의 2.3이 외설악이라고 말하지만 외설악과 내설악을 답사한 후가 아니면 설악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다고 기록했다.
「지금 우리가 내려가는 이 마등령 뒷골짜기로 말하면, 승려 사이에서는 소위 천불동(千佛洞)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마는, 실상 주민들은 ‘설악골’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설악산 중 진설악’이라 할 곳이 여긴 줄을 알겠습니다.
조금 과장으로 말하면 거의 수직이라고 할 만큼 경사진 이십리 긴 계곡이 기암촉석의 천 명의 병사와 만 마리의 말이 뿔뿔이, 그대로 빽빽이, 또 그대로 번뜻이, 다시 그대로 환하게, 제각기 한 자리 한 모퉁이씩을 차지하고서, ‘혼자의 자랑’을 여지없이 발휘한 그대로 또한 모여 ‘모두의 자랑’을 조화롭게 성취하였습니다.
마등령에서 굽어 바라보는 이 설악골 즉 천불동은 금강산의 만물초와 작은 것 하나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 하면, 금강산의 그것은 답사할 수 있는 것이고, 여기 설악산은 오를 길이 없는 것이겠습니다.
이 기기묘묘한 암봉은 사람들의 자질구레한 묘사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범자들이 아닙니다.
뾰족하다, 뭉툭하다, 끌밋하다, 반지르르하다, 우뚝하다, 납작하다, 둥글다, 움펑하다, 불룩하다, 걸쭉하다, 꼬불하다 …… 등 우리가 가진 이따위의 모든 어휘를 다 벌려놓아 무슨 문장을 짓는다 하여도, 결코 이것 자체는 만 가지 중 한 가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자 같고, 다시 보면 맹호 같고, 그리다간 노승 같고, 또 더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것이 천 만 개가 다 그러하니, 진실로 여기서 이 변화무상한자, 아니, 이 변화무쌍한 광경을 무슨 말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 허망하고 부질없다.)이란 금강경의 대표적 명구를 과연 이곳에서 그 진리의 일단이라도 깨닫고 가는 것만이 가장 또렷한 사실인양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눈앞에 펼쳐진 첨봉들을 보고 시 한수를 읊었으니
「태초(太初)라 조화(造化) 사공 설악(雪岳) 큰 배 만드시고
구만리(九萬里) 하늘 길을 멀리 이리 오실 적에
저 ‘짐ㅅ대’ 네 공(功)이 크다 여기 우뚝 세웠나니.」
위 시에서 의문을 풀지 못한 게 있다.
‘짐ㅅ대’
짐싯대, 짐시옷대, 짐대.......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분명한 것은 짐ㅅ대는 마등령3거리에서 볼 때 눈앞에 보이는 첨봉들 중 어느 봉우리 이름이다.
동아일보 원문에는 사진이 실리지 않았는데 ‘짐ㅅ대 사진’이라고 주석을 달았는데 1275봉, 나한봉, 범봉, 화채봉, 칠성봉을 말함인지 금강문을 세우고 있는 봉우리인지 아니면 세존봉을 말함인지.................
이 글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설악골과 천불동계곡이다.
1933년 당시만 해도 승려들간에는 천불동계곡이라고 했고 일반인들은 설악골로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설악골은 마등령 발아래 있는 작은 골짜기가 되었고 20리 긴 계곡은 불교냄새가 풍기는 천불동계곡으로 바뀌었으니 원래의 골짜기 이름인 설악골로 바뀌면 좋겠지만 설악골은 천불동이라는 불교색체의 이름에 밀렸으니 도탄할 일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마등령3거리에 먼저 머물고 있던 김씨 성을 가진 40대초반의 부부산객은 아침 일찍 천불동으로 들어서 희운각을 경유하여 공룡능선으로 지나 마등령으로 왔다고 하는데 “어디서 올라왔느냐?” 묻기에 “곰골로 올라오는 중이다.”라고 했지만 곰골이 어디에 있는 계곡인지 모르는 듯 했다.
부부산객은 필자를 보자 얼굴에 “피가 난다.”며 마치 가족이라도 되는 양 걱정을 하며 밴드를 찾자 부인이 “구급함에서 약을 발라야 한다.”며 구급함에 있는 전번으로 전화를 했고 비번을 알려달라고 하니 비번은 설악산 대청봉의 해발 높이었다. 아마도 설악산에 있는 구급함의 비번은 모두 일체형으로 설악산 대청봉 해발일 것 같았다.
구급함에는 압박붕대, 대일밴드2갑, 마데카솔1개, 1회용 요도액1봉, 연고를 바르는데 필요한 귀이개1봉이 들어 있었다.
부인께서 세손가락과 입술에 정성으로 약을 발라주었는데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웠는데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생수 1병이 있어 주려고 하니 물이 남아있다고 사양을 해서 작은 은혜도 갚지 못했는데 성이라도 묻자하니 “김가입니다.”라고 한다.
치료를 해주고 김씨 부부산객은 비선대 방향으로 하산을 하고, 잠시 마등령3거리에서 외설악 첨봉들을 보며 감상을 하고 마등령3거리를 뒤로 한다.
아직 숙제를 풀지 못했다.
원래 계획은 마등령3거리에서 마등봉~세존봉을 지나는 것이었는데 손가락도 다치고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지났기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과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계획대로 가야한다는 2가지 생각이 서로 엉키어 갈등을 느낀다.
그런데 발길이 자연적으로 마등봉으로 향한다.
비선대 갈림길3거리에서 대간길을 따라 약3~4분 오르면 10평 정도 정리한 터가 나오는데 이곳에는 기후를 측정하는 시설같이 보이는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주변 잡목과 넝쿨로 조망은 없다.
잠시 사방을 보고 마등봉으로 향하다 말고 다시 갈등을 겪다가 이번에는 포기가 우세하여 발길을 돌려 비선대 갈림길로 되돌아온다.
비선대 방향으로 7~8분을 지나 계단에 오르면 설악 최고의 비경을 볼 수 있는데 육중한 세존봉의 모습, 발아래 펼쳐진 금강문의 풍경, 그리고 나한봉, 큰새봉, 1275봉으로 이어가는 공룡능선의 풍경과 좌측으로 조금 빗겨 있는 범봉, 희야봉, 왕관봉이 자리하고, 큰새봉과 1275봉 뒤로 대청봉과 중청봉이 자리하고, 희야봉 너머로 화채봉과 화채능선이 시원스럽게 보이고 설악골의 심장부가 내려다보인다.
잠시 조망을 하고 계단을 내려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금강문 앞에 도착하는데 언제 누가 금강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없으며 노산 이은상선생도 이곳 금강문을 지나며 특별한 예찬은 없이 시 한수를 읊었는데 이러하다.
「마등령 고갯마루에서 내려선지 한 30여분이 지나 좌편의 웅대한 바위가 조금 거리를 두고 마주 서서 닫힐 듯이 언제나 열려있는 천성(天成) 석문(石門)이 있음을 만나니, 이것은 금강문이다.
닫힐 듯 열리었네 밤낮에 열려있네
찬란한 금강문(金剛門)이 길이 여기 열리었네
우리 임 여신 문이니, 주저하지 말았스라.
아낄 듯 쓰라시네 마음대로 쓰라시네
풍성한 금강연(金剛宴)안에 남김 없이 쓰라시네
우리 임 주신 것이라 의심할 것 하나 없네.
막힌 줄 알지 마라 없는 양 알지 마라
언제나 열려있네 무궁무진 쌓여있네
진리(眞理)는 지금도 바로 네 발 앞에 놓였나니. 」
금강문을 지나 15분정도 지나면 마등령3거리1km가 표기된 이정표를 지나며 이곳에서 5분을 지나서 첫 번째 전망대가, 다시 3분을 지나서 두 번째 전망대가 있다.
이 2곳 전망대에 서면 설악골의 비경을 다시 한 번 감상할 수 있는데 조망은 뛰어나지만 금강문 전 조망을 뛰어 넘기에는 역부족이다.
전망대를 뒤로하고 10분을 진행하면 이정표(마등령3거리1.7km↔비선대1.8km)가 나오는데 이정표20m 전 급경사 아래로 내려서면 유명한 전람회길, 형제폭포를 지나 토막골로 내려서는 길이다.
여기서 노산 이은상선생의 설악행각을 짚어본다.
「금강문에서 한 30분 동안, 극히 고급적이요 극히 항구적인 매혹성을 가진 이 심산미에 다시금 취하면서 내려오다가, 잠깐 우편 송림 사이로 갈려 들어가매, 반석(盤石)에 반야대(般若臺)라 각자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이 반야(般若)란 것은 지혜란 의미의 범어(梵語) ‘프랏냐’를 음역한 것입니다마는 이 반야대로 말하면, 이 산에서도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 …과수렴동(過水簾洞), 등사자항(登獅子項), 역반야대(歷般若臺) 비파대(琵琶臺)… (창산기(昌山記)---
라 한것을 보면, 이미 지나온 내설악 중에도 반야대란 곳이 있는 모양이나, 나는 필경 찾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기 이 반야대의 대 아래에는 반야폭(般若瀑)이라는 폭포가 있습니다. 과연 수성(水聲) 산색(山色)에 고요히 묵념만 하고 앉았다 하면, 범상을 넘는 그런 지혜도 생겨날 것 같습니다.」
반야대(般若臺)
이곳 어디엔가 반야대라는 마애각이 있다.
작년에 설악행각 따라가기를 쓰면서 반야대가 궁금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높은산님 일행이 토막골을 지나며 반야대 사진을 올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높은산님 일행은 노산 이은상선생의 설악행각에 나오는 반야대라는 사실은 모르는 듯 했다.
노산선생의 설악행각에서 금강문에서 30분을 지나 우편 송림사이로 들어서서 반야대 각자를 보았다고 기록하며 반야대 아래 반야폭이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설악산에 반야폭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아마도 토막골의 형제폭포의 원래 이름이 반야폭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반야대는 이곳 말고도 여러 곳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세암 오르는 깔딱고개인 등사자항, 그러니까 사자고개 암벽 어디엔 가도 반야대가 있다는 것이다.
반야대를 찾아가야 하는데 확실한 위치를 알 수 없는데 분명한 건 금강문에서 30분 거리가 이곳인데 당시의 등로 사정을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금강문 방향으로 5분정도 지난 어디일 것이다.
설악행각 마지막 편을 본 윈터님의 댓글에는 토막골 거의 끝 부분이라고 힌트를 주셨는데 오늘은 아니더라도 다음에는 꼭 반야대를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잠시 숨을 돌리고 비선대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정표 쉼터에서 20분을 지난 지점에서 마등령3거리에서 은혜를 입은 김씨 부부산객을 다시 만나고, 양해를 구하고 먼저 내려선다.
비선대(飛仙臺)
비선대를 처음 찾은 때는 70년 수학여행 때로 이곳에는 식당가가 몇 곳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비선대는 세월은 지났지만 옛 선인들로부터 현재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명승지다.
문화재청에서는 2013년 설악10경을 국가명승으로 지정했는데 비선대와 천불동 일원을 국가명승 제101호로 지정했는데 비선대의 풍경이야 말할 것도 없으며 풍경이외 또 다른 건 식당바위 주변으로 있는 수없이 많은 마애명과 마애각으로 조선시대에 내노라하는 사대부들과 강원도로 발령받은 지체 높은 벼슬아치들의 마애명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인 마애각으로는 윤순의 초서체로 쓴 飛仙臺와 정체로 쓴 김창흡의 飛仙臺가 있는고 마애각으로는 銀瀑上下(은폭상하) 僊人飛臥(선인비와)라고 있는데 설악산에서 반평생을 보낸 삼연 김창흡은 비선대를 보고 조선의 제일이라며 이렇게 예찬했다.
「벽하담은 장쾌한 물줄기를 자랑하나 땅이 좁기 그지없고, 선유동은 그윽한 맛이 있다고 하나 멋스러운 풍채가 부족하고, 파곶동은 큰 반석이 장관이나 크기만 하지 쓸데가 없으며, 병천애는 영롱한 것이 기묘하다고 하나 주위와 어울림이 전혀 없고, 백운대는 위로 푸른 봉우리와 아래로 흰 돌들이 펼쳐있어 조금 굽에 쳐다볼 수 있으나 빽빽한 나무들이 줄 지어 있어 멈췄다가 쏟아 붓는 운치를 감추지 못해 뜻과 멋이 쉽게 다 하여서 식당암과 나란히 논할 수 없다.」
위 글에서 벽하담은 금강산의 명승으로 푸르른 시내물이 물안개를 일으키며 흘러드는 소(沼)라고 하는 곳이며, 선유동이나 백운데는 전국에 있어 어느 곳을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괴산선유동이 생각나고, 백운대는 희양산 아래 계곡이 생각나고, 파곶동은 괴산 화양동에 있는 경승지로 화양구곡의 제9곡이며, 병천애는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는데 본문에서 뜻하는 건 ‘벽하담’ ‘선유동’ ‘파곶’ 병천애‘ 백운대’를 합친 것이 곧 비선대라는 뜻이다.
그러면 수백년이 지난 1933년에 이곳을 본 노산 이은상 선생은 마애명을 어떻게 보았을까? 설악행각에서 노산 선생은 이렇게 썼다.
「반석 위에는 어느 때 어떤 사람들인지 빈틈없이 이름을 새겼는데, 얼른 보니, 제각기 제 이름을 새긴 것이 아니라, 누가 이름 마차를 끌고 가다가 쏟아놓은 것 같이 보입니다. 비록 견분(개똥)이라도 그것은 주워가면 비료로 쓰려니와, 여기 흘려놓은 이 명분(똥같은 이름)은 주워가 쓸데가 없는 것이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만 이 비선대의 풍경을 감상함에 있어서 왠지 모를 불쾌감을 주는 죄는 천추만대에 이 이름들이 지고 갈 것입니다.」 라고 따끔하게 질책을 했는데 노산선생은 이러한 마애명을 보고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는지 본문에서와 같이 마차로 실어다 쏟아 놓은 개똥에 비유하며 개똥은 거름으로 쓰지만 개똥만도 못한 마애명은 아무 쓸데가 없다고 혹독한 비판을 했다.
조금은 늦은 시간인데도 비선대에는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 있었고 아래서 올라 오는 사람들도 눈에 띤다.
비선대에서는 머무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 와선대로 이동한다.
상황을 보아 세면과 세발을 하고 옷도 갈아 입어야 하는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와선대에 도착하니 와선대 계곡 안으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안쪽으로 들어가 대충 씻고 나니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와선대(臥仙臺)
와선대는 어떠한 곳인가?
삼연 김창흡은 와선대라고 각자를 새겼다고 했는데 어느 날 각자를 찾으려고 계곡 뒤져본 적이 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노산 이은상선생은 와선대를 어떻게 왔을까?
설악행각을 보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금강굴에서 반야대를 거쳐 비선대로 내려서지 않고 와선대로 내려섰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물을 따라 내려가지 말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굉창(宏敞)한 계류(溪流)를 소상(溯上)한지 한 10분여에 와선대(臥仙臺)를 만나니, 이 와선은 단명으로서, 단의 높이는 약 3척, 그러나 폭이 10여간이나 되매, 이를 일러 와선이라 한 모양입니다. 백여명이나 앉을만한 소광(昭曠)한 암상(岩床)에 잠깐 바랑을 베고 누웠으니, 과연 무엇으로 보든지 남의 눈엔 신선으로 보일 것입니다.」
글을 되새겨 보면 노산선생은 지금의 초태막골로 하산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내려오는 과정에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분명한 건 와선대로 먼저 내려선 뒤 비선대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문신 김유는 금강산을 가는 길에 이곳 신흥사를 보고 지금의 비선대와 와선대인 상식당암과 하식당암을 보고 이렇게 예찬했다.
「점심 식사 후 상, 하 식당암을 가보았다. 식당암은 신흥사에서 남쪽으로 10쯤에 있다.
너럭바위가 시내를 끊었는데 가로는 한길이고 길이는 배가 된다. 점차 작아지면서 2층이 되는데 작아진 곳은 바른 것이 사람이 공을 들인 것 같다. 물이 그 위로 베를 널은 듯 흐른다. 기이한 봉우리가 끼고 있는데 높은 절벽이 솟기도 하고 웅크리기도 하며 입을 벌린 듯 아래로 임해 있다. 쳐다보니 정신이 오싹해 진다.」
위 김유의 글 마지막 부분은 와선대에서 비선대를 올려다 보았을 때 적벽과 장군봉을 표현한 것으로 김홍도의 와선대 그림을 보면 와선대의 풍경에 적벽과 장군봉을 우뚝 솟게 그렸다.
와선대를 벅어나 조금 내려서면 매번 이곳을 찾을 때마다, 아니 365일 키스만 하는 넘이 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니고 바위다, 사람들은 이바위를 키스바위라고 부르는데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키스바위를 지나면 설원교가 나오고 설원교에서 보는 저항골에도 어둠이 내리고 있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설악동이 가까워지자 긴장이 해소되어서인지 손가락에 통증이 오고, 손가락은 멍이 들고 부어 올랐다.
설악동으로 들어서니 어둠이 벌써 설악동을 잠식한 상황으로 낮의 길이도 많이 짧아졌다.
매표소를 나서며 이런 생각이 문득 든다.
조금만 차분하고,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산행을 했더라면 오늘 같은 부상은 없었을 텐데....................
▷백담사주차장들머리에서 설악동 매표소 날머리까지 산행거리17.0km, 산행시간8시간45분, 해발195m, 현재시간18시00분이다.
설악산, 곰골~마등령~비선대 산행가이드북 ◎갈 때 ○동서울터미널(06:30)->원통터미널(08:15~20)~용대리정류장(08:40) ◎올 때 ○속초고속버스터미널(19:00)->강남고속버스터미널(21:20) ◎들,날머리 접근 및 탈출 -원통터미널에서 08시20분에 진부령행 버스로 환승한 후 용대리에서 하차하여 백담사행 마을버스터미널로 약15분 걸이서 이동한 후 마을버스를 타고 백담사에서 하차한다. -설악동에서 산행을 마친 후 7번 또는 7-1번 시내버스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이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를 탄다. ◎산행포인트 ▶백담사에서 정규등산로를 따라 길골입구를 지나 곰골 입구까지 약2.8km를 이어가며 약40~45분 정도 걸린다. ▶곰골입구 철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 계곡으로 들어가 5분을 지나 비박터. 비박터에서 5분을 지나면 좌측으로 첫 번째 지계곡을 건너며 지계곡을 건너 2~3분을 지나면 옛 화전민터가 나온다. ▶화전민터가 끝나는 지점 우측 계곡으로 돌확이 있는 계곡이 나오는데 계곡으로 내려서지 않고 위에서 보고 지난다. ▶이어서 좌측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지계곡을 건너게 되는데 등로는 무척 희미하며 계곡을 우측에 두고 계속 좌측으로 오르며 등로는 계곡과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데 네 번째 지계곡은 입구에서부터 35분이 지난 지점이다. ▶네 번째 지계곡을 건너 밋밋한 등로를 오르면 찟겨진 대형 물탱크가 등로 옆에 버려져 있다. ▶물탱크를 지나면 고도를 높이면서 계곡과 가깝게 계곡쪽으로 30m 정도 절벽이 나오며 이어서 사면을 내려서면 우측 계곡은 돌확이 있는 짧은 협곡 비경이 있다. ▶계곡의 비경을 보고 4~5분 오르면 곰골에서 제일 폭포다운 폭포가 나오며 폭포를 막 지나며 ‘바람의땅’ 표지기를 만나는데 이 표지기가 있는 곳, 폭포 위 계곡으로 내려서며 처음으로 곰골계곡을 건너게 되는데 곰골입구에서 약1시간10분 정도 지난 시간이다. ▶곰골계곡을 건너 계곡 우측으로 올라서 희미한 등로를 따라 우지계곡을 2번지나 2번째 ‘바람의땅’ 표지기를 만나게 되는데 표지기가 있는 곳에서 다시 곰골계곡으로 내려서는데 25~30분만에 다시 계곡을 건너게 된다. ▶2번째로 곰골계곡을 횡단하여 1~2분을 오르면 좌측으로 큰지계곡이 있는 합수점에 닿게 되는데 좌측계곡이 엄마곰골로 곰골입구에서부터 1시간40분 정도 걸리며 거리는 3.1km다. ▶합수점 가운데 엄나무가 엄마곰골의 랜드마크가 되며 엄마곰골은 저항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합수점에서 곰골로 들어서면 등로는 따로 없고 마등령 다 갈 때까지 계곡치기가 이어진다. ▶합수점에서 곰골계곡으로 오르며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다가 30분이 지나면 보기 좋은 3단와폭이 나오고 3단와폭에서 다시 30분을 오르면 좌측으로 작은 폭포가 있는 지계곡이 나온다. ▶작은폭포가 있는 지계곡에서 40분을 오르면 15~20m정도 물이 적은 와폭이 나오고 와폭에서 7분정도 오르면 대각선폭포(?)을 지나며 대각선폭포에서 10분을 지나 좁은 골폭을 지나고, 이어서 10분을 지나면 큰 폭포 2곳(마지막폭포)을 지나는데 수량은 적으나 신경을 써야한다. ▶마지막 폭포를 지나서 약10분 정도 오르면 건계곡으로 바뀌며 건계곡으로 10분 정도 지나면 건계곡 우측으로 확연한 등로가 나타난다. ▶등로를 따라 5분을 오르면 비박터가 나오고 멀지 않은 곳에 마등령3거리가 보이는데 곰골입구에서 마등령3거리까지는 약4시간50분이 걸렸으며 거리는 약6.9km다. ▶마등령3거리에서 외설악 비경을 보고 설악동으로 향하면 15분 후 금강문, 50분 후 이정표(비선대1.8km)가 있는 쉼터, 1시간35분 후에 금강굴입구를 지나 비선대까지 내려선다. ▶비선대에서 와선대를 지나 설악동으로 들어서서 매표소를 나선다. ◎산행코스 백담사주차장(09:15)-길골입구(09:38)-곰골입구(09:58)-화전민터(10:13)-돌확협곡(10:52)-곰골폭포(11:04)-엄마곰골입구(11:45)-3단와폭(12:21)-좌지계곡폭포(12:51)-15m와폭(13:27~50)-대각선폭포(13:57)-무명폭포(14:20)-상류마지막폭포(14:23)-마등령3거리(14:51)-금강문(15:30)-등로옆전망대(15:55)-설악이정목02-04쉼터(16:05)-비선대(17:05)-설악동날머리(18:00)----17.0km, 8시간45분소요 |
첫댓글 우와~ 산행보다도 이런 어마어마한 산행기를 쓰자면 저는 한 달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1988년 10월 88올림픽 기간에 자전거 타고 2700km에 달하는 전국일주를 혼자서 하면서 설악산 등산도 3박4일간 했었는데요.
당시 산행코스는 용대리에서 시작해 백담사 부근 내설악산악구조대 텐트에서 1박,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에서 남의 텐트에 꼽사리 껴서 2박, 희운각을 거쳐 공룡을 지나 마등령 샘터에서 3박(비박), 마지막날 곰골로 해서 용대리로 복귀했었습니다.
곰골은 상류 쪽이 폭포가 몇 개 있어서 우회하고, 길흔적이 희미해서 힘들었습니다. 그 때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네요.^^
단독산행에서는 무엇보다도 안 다치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짐이 되더라도 압박붕대, 거즈, 다양한 크기의 밴드, 소독약, 가위, 칼, 작은 손거울, 족집개, 진통제 등의 응급처치용품은 반드시 휴대하시는 게 좋습니다. 거의 쓸 일이 없지만 쓸 때는 매우 요긴하게 쓰이니까요.
대구담님 반갑습니다.
온라인 상이지만 참 오랜만에 소식전합니다.
요즘은 사업이 바쁘신선지, 아니면 대간을 멈춘건지 통 대간 산행소식이 없네요.
대간이 아니래도 금정산 소식이라도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제 지인들에게 대구담님 이야기, 자랑도 많이 하는데......
저주 소식 주시고요~~~
88년에 3박4일 설악산행이 있었군요.
저는 비박산행은 해보지를 않아서 그런건 못하고요,
서울에서 당일코스로 가능한 곳만 다니는 거지요.
산행자료는 많이 쓴 편인데 대부분 사진만 보고 글은 잘 안익는 편인데 그래도 쓰면 누군가는 읽고 설악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쓰고는 하지요.
곰골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아 길은 희미한데 위험한 곳은 없더라고요.
작은 부상은 소홀하게 생각해서 난거고요.
산행시 기본 구급약품은 가지고 다녀야 하겠더라고요.
반가웠고요, 자주 봐요~~~
홀로산행시 부상당하면 참난감합니다...
특히 날씨가 추울땐 옷을 젖으면 무조건 불을 펴서 옷과 신발을 말리셔야..
저체온증이 않오니 전 배낭에 항상 불피울것을 준비하고다닙니다...
마산골에서 바위홀더에서 미끌려서 물속에 잠수해서 그때 혼났던기억이
다행이 일행중 스쿠바형님이 불을 피워줘서 옷을 말리고 신발을 말렸던기억이 납니다
항상 안전하고즐거운산행되십시요
산행고수도 실수할 때가 있나 봅니다.
산행 할 때는
일행이 있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저는 늘 혼자다니니 그것도 문제입니다.
스쿠바님은 맘짱님과 자주 산행했던 분 같은데.....
곰골에서 예기치 못한 부상은
스틱을 접어야 하는데 손목에 감고 지나다 그랬는데
작은 사고지만 큰 교훈이 되어 다음부터는 안전 제일 주의로 산행을 합니다.
저도 늘 라이터는 가지고 다니는데
비상 구급약은
예전에 가지고 다녔는데 사고가 없으니 최근에는 안 가지고 다녔었지요.
지맥님도 기억하세요, 설악산 구급함 비번은 설악산 해발인 1708입니다.
언젠가는 다른사람들을 위해서도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올리는 폭포하강 흥미롭게 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