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성 수 '나는 양궁 챔피언이다'
현재
인천계양구청 소속 양궁 감독
경력사항
2012 제 30회 런던올림픽 양궁 국가대표팀 임원(코치)
2003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양궁 국가대표팀 코치
수상내역
1988 제24회 서울올림픽 양궁 남자단체전 금메달
1988 제24회 서울올림픽 양궁 남자개인전 은메달
Q1. 대한민국에서 금메달리스트란 실제 스스로 느끼기에 어떤 존재인가요?
세계 최고라는 느낌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동네에서 1위가 아니라 세계무대를 상대로 1위를 했다는 느낌이 다르죠.
대한민국 양궁 남자 올림픽 첫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는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도전하는 마음이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 커다란 만족감을 느낍니다.
Q2. 지금 청소년들이 태어나지 않았던 국내 88올림픽 상황은 어떠셨습니까?
- 당시 국내상황은 경제적으로 낙후했습니다.
세계사람들에게는 코리아라는 나라는 작은 나라이며
선진국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986년에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고
1988년도에 올림픽 개최를 하였습니다.
그 이후 한국을 인정하고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죠.
Q3. 금메달, 은메달을 동시에 석권했는데, 그 뒤에 숨은 노력과 연습과정은 어떠셨습니까?
- 좋은 지도자를 만났었고 좋은 훈련을 했었습니다.
평상시 연습에서는 항상 실전과 같이 긴장감을 가지고 임했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새벽에서 일어나서 연습하는 훈련을 했던 적도 있었고
결론적으로는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을 거쳤습니다.
Q4. 2012 런던올림픽 국가대표들의 금메달을 얼마나 예상했나요?
- 여자선수들은 워낙 잘해서 기대했지만
그래도 긴장은 많이 되었습니다.
남자선수들은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딸 것이다 기대를 했었습니다.
오진혁 선수를 런던에서 맨투맨으로 맡아서 선수보다 오히려 제가 긴장되고
역할을 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개인전에서 오진혁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해서 기뻤습니다.
Q5. 2012 런던올림픽 국가 대표들중에 인상 깊게 기억 남는 선수들이 있다면요?
- 이번 런던올림픽의 경우에는 기보배 선수와
오진혁 선수의 멋진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중에서는 금,은메달리스 박경모 선수로
슬럼프와 시련을 겪고 있던 선수를 양궁을 포기하려 할 때
다시 지도하여 세계1위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시간은 아픔을 잊게 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슬럼프에서 극복하도록 했었습니다.
Q6. 실제 선수들이 훈련할 때 공동묘지나 야밤에 담력훈련을 하나요?
- 갑자기 기상시켜 새벽훈련을 하거나, 군사훈련,
특수부대훈련, 공포훈련 등 많이 있습니다. 번지점프, 11m다이빙,
유격훈련, 군인 관중을 동원한 실전 훈련, 야구장 소음 훈련
모두 특별하고 인상적인 훈련입니다.
특히 이번 런던올림픽에 나가기 전에는 실제로 군에 협조를 통해
군인들을 약 500~700여명 동원해
실전보다 더 긴장되고 시끄러운 상황에서 훈련했습니다.
시합장 양쪽에 군인들이 응원하고 있는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Q7. 금메달리스트 연금정책에 궁금해 하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수혜자로서 어떤 느낌이신가요?
- 먼저 수혜자로 감사하고 있죠.
설명을 드리면 개인에게 죽을 때까지 돈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제가 죽은 후 가족이나 아내에게 양도는 없다고 합니다.
웃음.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여 상승한다던지
부가적인 혜택은 금메달리스트라고 해도 따로 없습니다.
88년 서울올림픽때는 금 60, 은 30, 동 20만원의 연금정책이었습니다.
2000년도에 와서 금 100, 은 30, 동 20만원으로
금메달에 대한 파격적 대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2년 런던올림픽때 개정은 금 100, 은 70, 동 50만원으로
기존 은,동메달리스트에 대한 대우나 노고에 대한 혜택이 증가했습니다.
메달 모두가 소중하다는 차원이죠.
챔피언 님의 청소년기 이야기
Q1. 박성수 감독님의 청소년은 어떠했나요?^^
-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축구선수를 했습니다.
동네 형이 축구부 코치였습니다. 갑자기 축구부가 해체되었습니다.
학교 양궁부가 궁금해서 1,2주간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당시 선수들을 보고 이것밖에 못 쏘나?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시에 양궁이 하고 싶다 부모님에게 말을 했더니 하라고 하셔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양궁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해서 결국 소년체전에 나가기도 하고 대회에서 수상도 하고
경기 중 쓰러지기도 하고
불안함과 슬럼프도 청소년기부터 찾아왔었습니다.
Q2. 감독님의 청소년기 가장 큰 좌절이 있었다면?
- 초등학교 5학년 때 대회에 나가서 기절한 사건이 있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불안한 심리와 좌절로 운동을 그만두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갔고 양궁부 감독님들이 계속해서 찾아오시고
권유하셔도 거절했지만 이후 다시 용기를 갖고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Q3. 감독님의 청소년기 가장 큰 희망은 무엇이었나요?
- 훈련이 무척이나 힘든 당시 이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의문이 들고
어느 순간 힘들게 뭐 때문에 노력을 이렇게 하지? 자문했습니다.
결국 남을 위한게 아니고 나를 위해 하는거다. 사고의 전환이였습니다.
이때부터 힘든걸 극복하는 재미를 찾았고
힘들지만 긍정적인 마인드로 승화시켰습니다.
현실의 의문이 긍정적 사고의 전환으로 왔고 그게 희망이었습니다.
Q4. 감독님의 청소년기 롤 모델이 있었나요?
- 세계에서 양궁으로 5관왕을 휩쓰신 김진호 선배가 있었습니다.
중학교 당시 세계 1위인 한국인이 제게 영웅이였습니다.
Q5.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셨는데 청소년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길래, 성공하셨나요?
- 어릴 때 스포츠만화와 성장만화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같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만화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만화로 스포츠에 대한 벽이 없어지고 친숙했습니다.
물론 관심 가진 분야를 오래 연습했지만 저는 만화를 통해서 긍정을 얻고
스포츠에 친숙해졌고 힘을 냈습니다.
Q6. 대한민국 10대,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 자기 자신을 나와서 제 3자의 눈으로 보는게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남 지적은 잘 하지만 정작 나에 대한 지적이 없습니다.
나의 생각이 좁아집니다. 시골동네에서 장기판 바둑판 구경하며 훈수 두는 것처럼
자기자신에게 훈수를 둬 보면 좋겠습니다.
또한 힘든 시기에는 이것을 누굴 위해 내가 이렇게 고생하나?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를 바랍니다.
Q7. 감독님에게 '나'는?
- 챔피언 이다.
그냥 미치면 바보가 되고 비전에 미치면 신화가 된다.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2003년 (사)한국올림픽참피언클럽 상임이사,
2012년~ '희망나무 커뮤니티'의 상임이사..
첫댓글 인천시 양궁협회 전무이사직도 수행중이며...
금년 10월에 인천아시아게임에서도 큰 성과를 내길 기대합니다...
파라과이에 양궁 대표선수단을 창설하고 싶은 욕망이 가득하기에,
희망나무를 빨리 심고 싶습니다~!~~
박성수 감독님.. 아니 상임이사님.. 화이팅입니다!~~~~
양궁의 무궁한 발전을 우리 박성수 상임이사님께 함께 하길 응원하겠습니다.
열렬한 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