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자료는 아래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업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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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님과의 대화
필자는 2015년 7월 이후 지금까지 유화당 종부님을 꾸준히 만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종부님은 연세에 비해 건강했고, 활동력이 왕성한 여성이었다. IMF 이후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종택 남호정사가 경매로 남에게 넘어가고, 하나 남은 유화당조차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종부님은 작심을 하고 결단을 내렸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떤 일이 있어도 유화당 만큼은 지켜내겠다고. 시청, 북구청 해당 관련부서를 직접 찾아가고, 지역 국회의원과 구의원 그리고 지역 오피니언 리더를 만나 유화당의 어려운 현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종부님의 바람과는 달리 세상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니 무관심했다.
1938년생 종부님은 올해로 연세가 84세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하지만 적은 연세가 아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종부님도 2-3년 전부터는 건강이 급속하게 나빠졌다. 무릎, 발목 수술로 이제는 혼자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2020년 초에는 심장에 문제가 생겨 중환자실 신세를 지기도 했다. 건강이 이러하니 이제는 유화당을 지키는 것도 힘에 부치는 듯하다. 결국 거처도 유화당에서 손녀 집으로 옮겼다. 이제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 유화당을 찾아 갈수도 없는 지경이 됐다.
지난 2021년 10월 22일 금요일. 북구 태전동 금정 경로당에서 종부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동안 종부님을 뵈면서 평소 메모해두었던 기록을 참고해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이날 인터뷰에는 도남동에 거주하시는 문중원 이장재(1942년생·남) 씨와 이갑수(1944년생·남) 씨도 함께 했다.
Q. 종부님 시집을 언제 오셨어요?
A. 스물네 살 되는 해 음력 12월 24일 겨울이었지. 1961년인가. 시종이모님이 중신을 했는데 정말 얼굴 한 번 못보고 혼례를 치렀지. 그것도 군복무 중인 군인하고. 혼인을 하고 석 달 뒤인 이듬해 2월에 남편이 제대를 했어.
Q. 돌아가신 종손어른과 종부님은 각각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죠?
A. 남편은 3남 3녀 중 장남이었고. 난 4남매 중 둘째였지. 오빠, 나, 남동생, 여동생.
Q. 신혼을 종택 남호정사에서 보내셨겠네요?
A. 그렇지. 혼인하고 처음 6년을 종택에서 생활했지. 그리고 남편이 공무원이 되면서 태전동으로 분가해 나왔지. 우리가 살림을 나오면서 종택에는 시어른 내외와 시동생들이 살았지.
Q. 종택 생활은 어땠어요?
A. 종택 생활을 하던 6년 동안은 바깥출입을 거의 못했어. 복숭아뼈를 크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젊은 새댁이가 남들 앞에 발목 드러내면 안 된다고 해서 병원도 못 갔어. 그래서 지금도 복숭아뼈 모양이 이상해. 그때 치료를 제대로 못한 탓이지. 한 동네인 윗마을 진걸이나 아랫마을 정골은 말만 들었지. 그땐 가보지도 못했어.
Q. 당시 종택과 유화당 모습은 어땠어요?
A. 예전에는 정말 선비집이란 품격이 느껴지는 그런 집이었어. 건물은 물론이고 뜰이나 화단도 얼마나 관리를 잘 했다고. 안채 뒤뜰 채소밭에는 없는 것이 없었지. 집 안에 밤, 대추, 감, 석류 등 과일나무도 있어서 장 안보고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어. 사람들은 우리 집을 사창리 부잣집이라고 불렀거든. 우리 딸은 나이 들어서도 ‘어렸을 때 할아버지댁에 대문이 4개였는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지.
Q. 당시에도 종택과 유화당에 국화밭이 있었어요?
A. 당연하지. 종택에는 사랑채 좌우에 화단이 있었는데, 동쪽 화단에 국화가 좀 더 많았어. 유화당은 지금처럼 뜰 화단에 국화가 있었고.
Q. 당시에도 국화주를 담곤 하셨나요?
A. 집에 국화가 많았으니 당연히 국화주를 담긴 담았지. 그렇다고 가양주라고 남에게 내세울 만한 정도는 아니었어. 다만 시어른으로부터 국화와 국화주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익히 알고 있었지. 국화로 음식도 했었어. 밥을 지을 때 국화잎사귀를 밥 위에 얹어 쪄서 반찬도 했고, 여름철에는 국화 잎사귀로 냉국을 만들어 먹기도 했지. 우리는 이 냉국을 국화 ‘챗국’이라 했어.
Q. 종택은 택호로는 뭐라 불렸죠?
A. 우리집은 사람들이 오태댁이라 불렀어. 시어머니가 구미 오태에서 시집을 오셨거든. 인동장씨인데 장택상씨 종질녀였어.
Q. 유화당이 예전에는 국동서당, 국동서실이라고도 했다면서요?
A. [이갑수씨] 우리가 어릴 때만해도 유화당은 마을 서당이었어. 그때는 우리 문중에서 접장[훈장]을 구해 서당을 운영했지. 주로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문, 국문교육을 했는데, 야학이라 부른 적도 있었어. 언젠가는 장가를 못간 접장을 우리 문중에서 장가까지 보내준 적도 있었고. 나도 어릴 때 이 서당을 다녔었거든.
Q. 옛날에 남호정사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었나요?
A. 많았지. 하루에도 몇 분씩이나 오셨지. 그런데 시아버님은 접빈객[손님을 대접함]에 분명한 원칙이 있으셨어. 대문간에 손님이 오시면 누구인가를 먼저 확인한 후 대접해야할 손님이면 사랑채에 모셨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절대 대문 안으로 손님을 들이지 않았었어. 정말 그것만큼은 철저하셨지.
Q. 소원이 있다면요?
A. 다 알면서 뭘 물어. 몸이 아프니까. 이제는 다 내려놓고 싶어. 나도 지쳤어. 몇 년 전만해도 소원이 있었지. 남호정사도 되찾고 유화당도 살리고···. 그런데 이젠 너무 늦은 것 같아. 그래도 소원이 하나 있다면 내 죽기 전에 유화당 수리하는 모습이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어. 비가 새고 기와가 흘러내리잖아. 대문 정효각은 또 어떻고. 기둥이 썩어 문이 한쪽으로 기울고 대문이 안 닫히잖아. 이 집이 대구 칠곡 역사에서 어떤 집인데···.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지만 이렇게까지 관심이 없을까···
Q. 시어른 환갑잔치 때 남호정사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종부님 손에 노란 국화가 들려 있던데요?
A. 그때가 아마 1970년대 초쯤이었지. 시어른 환갑잔치 때 남편과 함께 남호정사에서 사진을 찍었지. 그때 손에 국화를 들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참 자세히도 봤네. 어쨌든 그때가 가을인 것은 분명하고. 남호정사엔 국화가 지천으로 피었으니 국화를 들고 찍었을 수도 있었을거야···
첫댓글 작년에 닭백숙 먹으러 갔던곳 도남지.
그 곳에 유화당이 있는 줄 몰랐네요.
긴 유화당 이야기, 가슴 아픈 이야기.
어진선비 만나 유화당을 역사 기록에
남겼으니 작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늘보님.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화당 종부님께서 금년 봄 돌아가셨습니다. 유화당 종사를 마무리 짓지 못하셨다고 늘 한탄을 하셨는데요.늘보님 말씀처럼 저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종부님께서는 조건하에서는 최선을 다하셨다고...
나머지 일은 남은 사람들 몫이지요.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무탈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송은석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