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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m봉에서 본 천왕산(619.2m)-화악산(930.4m)-형제봉(556.7m)으로 이어지는 비슬지맥모습 .
누르면 정지 화면이 뜹니다.
◈ 산행코소와 거리 및 소요시간. 도상거리 15.3km 5시간 55분.
봉천재(약 430m)-형제봉(兄第峰.556.7m)-562m봉-505.3m봉-산불초소봉-앞고개(안고개.24번국도)-
315.4m봉-납골당도로-317.2m봉-마흘리고개(날뒤고개.1080도로)
◈ 개요.
오늘부터는 경남북 도경계를 벗어나 경남 밀양땅으로 들어온 화악산중턱의 봉천재에서 밀양시내 옆구리인 마흘리고개까지다.
전반부 봉천재에서 앞고개까지는 500m대의산을 몇 개넘으며 그런대로 조망도 있으나,
앞고개에서 마흘이고개까지 후반부는 200m 후반에서 300m초반대의 산들로 조망도 없고 길조차 흐릿한곳이 더러있어 주의를 요한다.
후반부 315.4m봉을 내려간 안부부터 가복-골안을 잇는 안부까지 약 2.3km구간은 상태좋은 임도가 마루금을 바짝 따라가며 마루금을 을 4번을 넘어간다.
이임도를 잘 활용하면 길도 단축되고 주능선에선 조망이없어 보지 못하는 지맥모습을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길은 뚜렷한편이고 큰 기복이없어 어려움은 없으나 봉천재로 오르는길이 험하고 좁아서 봉고차이상은 오를 수 없다.
◈ 일시 : 2009. 5. 31(일).
◈ 인원 : 요맥회원 10명.강형태회장님.대맥 최평칠님.김한수님.최덕조님.현주환님.정한규님.정송자님.홍완섭님.이수일님.그리고 나.
◈ 날씨 : 아직은 5월이라 그리 덥지는 않고 바람도 솔솔불어 산행하긴 좋은날임.
◈ 지도 : 영진5만지도 P 437 청도.밀양. P 461 밀양. P 462. 밀양.국토 지리원 확대본.
비슬지맥 7구간(봉천재-형제봉-앞고개-마흘리고개)지도 1.
비슬지맥 7구간(봉천재-형제봉-앞고개-마흘리고개)지도 2.
◈ 일정정리.(10 : 45~16 : 40. 5시간 55분).
06 : 30. 사당역출발.
07 : 25. 천안통과.
10 : 22. 24번국도 대항리마을입구).운주암 10km.
10 : 40/45. 봉천재(약 430m).세멘트도로 삼거리.운주암 2km.
10 : 59. 형제봉(556.7m).형제봉표찰.
11 : 21/24. 562m봉밑 전망바위. 조망처.화악산,천왕산,비슬산 조화봉,열왕지맥조망.
11 : 27. 562m봉.정상표찰.작은 돌탑.좌로 꺽어 내려감.
11 : 34. 성터비슷한 돌무더기.
11 : 40. 길게 올라간 505.3m.표찰과 삼각점.
11 : 42. 화왕산줄기와 천왕산조망.
11 : 50. 참나무숲을 쭉 내려와 청도김한석묘에서 종남산쪽이 보임.
11 : 52. 안부.마루금은 좌측 20 여m에 있고 앞둔덕을 우측으로 돌아감
11 : 57. 다음안부에서 이번엔 앞 둔덕을 좌측으로 돌아가며 좌측에서 온 넓은길을 만남.
12 : 01. 팔방재.지저분한 잡목.작은 세멘트표석들이 있는 묘지들이 연달아나옴.
12 : 13. 안부.좌우로 흐릿한길있고 여기서부턴 길이 더 흐릿해짐.
12 : 22. 287m봉. 빼곡한 솔밭이고 살짝 우틀하여 내려감.
12 : 34/6. 산불초소봉.조망처.밀양시와 종남산,낙동정맥이 조망됨 우로 꺽어 내려가면 앞고개임.
12 : 40/55. 앞고개 절개지위에서 점심.
12 : 58. 앞고개(안고개).24번국도.절개지를 좌로 내려와 우로 오름.
13 : 09. 265m봉.가느다란 소나무밭.산죽밭을 올라 두번째봉.살짝 좌틀하며 이어서 우측으로 능선분기봉을 지남.
13 : 19/20.오름길이 가파른 310m봉.순창 설재정묘.상석,향돌이 흩어져있음.좌측으로 내려감.
13 : 26/31. 조금 내려온 묘지에서 마루금이 좌측같은데 우측으로 내려가며 바로밑 안부에선 좌우로 하산길 있음.
13 : 33. 너덜비슷한 잔돌밭.직진이마루금이나 우측길도 곧만남.
13 : 38. 가파르게 올라간 315.4m봉.우측 10m 잡목속에 표찰과 삼각점(글자없음)있음 .좌로 꺽어 내려감.우측능선에 묘있음.
13 : 46. 앞둔덕을 내려서며 능선이 흐릿함.처음엔 좌측으로 다음엔 우측으로 틀어 감.
13 : 52/14 :00. 파평 윤종수묘등 묘3기 있고 앞에 300m봉과 그 우측 능선의 293봉을 보며 휴식.
14 : 03. 수렛길따 내려온 안부.정자나무있고 좌측 50m거리에 납골당가는 도로있음.
14 : 10. 납골당가는 도로를 따라 오르며 화악산이후의 온길을 둘러봄.300m봉을 좌측으로 우회함.
14 : 19. 주능선안부.납골당 포장도로가 끝나고 우측70m에 납골당있음.지맥은 우측에서 내려와 좌측으로 가나 직진하는 자갈깔린 임도를 따라감.
14 : 36. 임도사거리.임도표석과 안내판.좌측 20 여m에 320m봉에서 내려온 주능선 안부있음.직진하는 임도를 따라감.
14 : 46/15 :16.임도 삼거리.좌측 30여m거리에 주능선을 넘는 임도있음. 납골당도로에서 헤어진 선두를 기다림.
15 : 25. 205.3m봉 갈림봉을 넘는임도.우측 236m봉둔덕에서 좌로 꺽어 내려와야하나 임도와 바로 만남.
15 : 29. 임도가 좌측으로 살짝돌아가는곳에서 우측 마루금따라 내려감.(좀더 임도를 따라가도되나 여기선 마루금이 빠름).
15 : 33. 벽진 이원동의묘에서 갈길이 조망됨.
15 : 34. 돌아온 세멘트 임도를 만나고 바로 임도는 좌측으로 내려가며 작별함.좌측에 보호수(?).전신주있고 우측은 비포장임도.
15 : 45. 한턱 올라서면 웅덩이같이 움푹파이고 빼곡한 솔밭봉.
15 : 52. 268m.묘지뒤에 NO184 세멘판.
16 : 07. 291m봉.소나무숲봉.
16 : 13. 317.2m.표찰과 삼각점(창원 305).5,6m앞에 조망바위있음.
16 : 24. 310m. 함몰지.
16 : 27.별 특징없는 316m봉을 내려가다 우측으로 꺽어 급경사를 내려감.
16 : 40/17 :03. 마흘리(馬屹里)고개(날뒤고개).1080도로 삼거리.서쪽에 효자각.포장마차와 과일행상.도원사,중림정사,무봉사 안내판.
17 : 06/15. 김종직생가방문.
17 : 50/55. 오우진나루.비슬지맥의 끝자락인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수점.
18 : 47. 말양시내에서 돼지국밥으로 저녁먹고 출발.
21 : 25. 천안도착.
◈ 산행후기.
지난 한 주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중으로 나라 안팍이 어두웠고
북한의 지하 핵실험에 로켓발사로 긴박한 한주였는데 난 화요일밤차로 내려가 지리종주를하고 금요일에 칠선계곡으로 내려왔다.
칠선계곡을 90년대초에 다녀오곤 처음이니 아마도 15년정도는 됐나보다.
중부내륙고속도로를타고 내려가 창녕IC를 빠져나가 24번국도를 타고 높디높은 천왕재를 넘어 청도면을 지나 앞고개를 넘어가
대항리마을 표석앞에서 좌회전하여 제대천을타고 올라가면 대항저수지가 좌측에 나오고 길은 점점 좁아진다.
형제봉을 좌측에,돛대산을 우측에끼고 올라가는계곡길은 급경사에 벼랑길이라 혹시라도 차라도 내려오면 어쩌나 마음졸이게한다.
지난번에 이여사님이 혼자 차끌고 올라가는데 무서워서 혼났다고하더니 이해가간다.
봉천재는 소형차나 오를 수 있는 삼거리로 승용차몇대는 주차할 공간이 있다.
봉천재(약 430m).10 : 40/45.
운주암 2km 이정표있는 세멘트길 삼거리로 소형차나 진입이 가능하고 소형차 몇 대는 주차할 공간이 있다.
형제봉오름길 초입은 능선길이나 우측 사면길이나 잠시후엔 만난다.
봉천재(약 430m).10 : 40/45.
좌로부터 강형태회장님.홍완섭님.나.최덕조 총무님.정한규님.정송자님.김한수님.새로나오신 이수일님.현주환님.최평칠님.
형제봉 오름길과 올무에걸린 너구리 사체.
형제봉(556.7m)정상모습과 준희님 표찰.10 :59.
봉천재에서 14분 거리다.
562m봉 전망대에서 본 화악산과 운주암.11 :21.
좌측이 화악산정상이고 우측에 운주암이 보인다.
좌측 뻘건 것은 소나무가 말라죽은것인데 창녕군일대는 이렇게 말라죽은 소나무들이 굉장히 많다.
562m봉 전망대에서 본 호암산(중)과 천왕산(좌측).11 :21/24.
562m봉 전망대에서 본 비슬산과 조화봉(뒷줄 가운데봉),비티재.11 :21/24.
앞줄은 좌측안부가 요진재.
562m봉에서 본 천왕산(619.2m)-화악산(930.4m)-형제봉(556.7m)으로 이어지는 비슬지맥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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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m봉 모습.
전망좋은 바위는 정상 바로전에 있다.
562m봉 넘어의 돌무더기.11 :34.
성터같지는 않은 돌무더기다.
505.3m봉.11 :40.
김한수님과.
505.3m봉 바로 밑에서 본 호암산(좌측)과 비슬산(뒷줄 가운데).11 :42.
505.3m봉 바로 밑에서 본 천왕산(우)과 천왕재(우측 아얀고개)와 그 좌측으로 뻗은 열왕지맥.
관룡산-화왕산줄기(좌측뒷줄기)
팔방재.
505.3m봉에서 쭉 내려와서 우측으로 한번우회하고 다시 좌측으로 우회하는곳이 팔방재같다.
좌측에서 올라온 옛날 수렛길같이 좀 넓은길이 올라와 앞쪽으로 가고있다.
산불초소봉. 12 :34/6
화악산과 운주암.형제봉이 건너다 보이고 밀양시내와 뒤로 낙동정맥의 산들이 보이는 조망처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앞고개다.
산불초소봉에서 본 화악산-팔방재. 12 :34/6
좌측봉부터 505.3봉,562m,형제봉,화악산
우측줄기 가운데는 돛대산,우측끝 뾰족봉은 윗화악산.
산불초소봉에서 본 가산 저수지와 철마산12 :34/6.
산불초소봉에서 본 밀양시내와 낙동정맥의 산들.우측봉은 납골당 건너편의 320봉.
산불초소봉에서 본 납골당 오르는 도로와 멀리 다음구간의 종남산과 우령산.
좌측 잘록이 넘어에 납골당이 있고 좌측봉이 320m봉이다.
산불초소봉에서 우측뒷쪽으로 본 열왕지맥.
산불초소봉에서 돌려본 동영상.
앞고개 절개지위에서 점심식사.
앞고개 절개지위에서 우측으로 본 천왕산과 앞고개 오름길.
이묘는 반쪽만 풀이나고 옆에 봉분이 작은 묘가 있다.작은부인인가?
앞고개 밀양시 부북면과 무안면경계로 24번 국도가 지난다.
절개지를 좌측으로 내려와서 우측으로 오른다.
앞고개를 올라서면 가지치기를했고 265봉가는길엔 이런 산죽밭을 지나는데 열기가 올라온다.
310m봉 모습이다.상석과 향돌이 흩어져있는 설씨묘다.좌측으로 내려서는데
또다른 묘지를 자나면서 능선이 흐릿한데 처음엔 좌측으로 다음엔 우측으로 간다.
315.4m봉 모습이다.길에서 우측으로 10여m떨어진 잡목속에 있어 지나치기 쉽다.
315.4m봉 내림길.
십자안부.좌측으로 50여m거리에 납골당으로 올라가는 2차선되는 포장도로가 있고수렛길이 고개를 넘고있다.
안부 바로전엔 설민근의 묘지가 있다.
납골당으로 올라가는 도로.
2차선은 됨직한 넓은 도로다.뒤로 화악산이 보인다.
납골당으로 올라가는 도로에서 본 화악산(우측뒤)과 형제봉과 지나온 비슬지맥
좌측앞 도로위로 산불초소가 보인다.좌측소나무뒤는 호암산.
납골당으로 올라가는도로에서 본 310m봉(설재정묘 있는봉)(가운데제일높은봉)과 앞고개(우측)과 산불초소봉의 산불초소(맨우측).
뒷줄은 천왕산-호암산능선.
납골당으로 올라가는도로에서 본 315.4m봉(우측)과 거기서 갈라진 우측능선(가운데줄기).
납골당으로 올라가는도로끝인 고개위.여기서 우측에 납골당이 있고 지맥은 우측에서 내려와서 좌측 320봉을 건너간다.
직진하는 임도는 자갈깔린 비포장도로로 양호한도로다.
납골당.
직진하는 임도는 자갈깔린 비포장도로로 보이는 저앞봉밑에 임도 사거리가 있다.
지맥은 임도 좌측으로 320봉과 작은 봉 하나를 지나 내려온다.
자갈깔린 임도에서 본 다음구간의 우령산(586m.우측)과 종남산(663.5m.좌측)
사진 앞줄기 우측끝에서 뒤로 넘어간다.
임도 사거리.직진하는 임도를 따라간다.
좌측 세멘트길 바로위가 마루금이고 이길은 지맥을 넘어가 뒤산을 돌아서 지맥줄기를 넘어와 다시 만난다.
우측 아래로 내려가는길은 계곡을 따랄 운정리로가고,
직진하는 임도는지맥능선 바로밑을 따라간다.
임도따라가다 우측으로 본 납골당과 320m봉(우).
뒷산을 돌아 오는 임도. 지맥능선길은 족적이 희미하여 마루금을 고집하자면 기운깨나 빠지고 전망도 없다.
265m봉앞 임도 삼거리에서 후미가 선두를 기다려 만나다.
납골당앞 도로에서 320봉을 넘어 임도표석있는 임도사거리까지만 주능선을 따라오고
임도 사거리에서부터는 임도를 따라왔는데도
임도따라온팀보다 30분이나 늦었다.
265m봉앞 임도 삼거리에서 .
아무도 산길로 들질않고 임도를 따라간다.
임도가 4번째로 지맥능선을 넘어간다(납골당앞 포장도로 포함).
앞둔덕에서 우측으로 205.3m봉능선이 갈리지고 지맥은 서남으로 가던것이 남쪽으로 꺽어진다.
임도가 좌측으로 꺽어가는지점이다.
계속 임도를 따라가도 되지만 여기서는 우측으로 몇m거리에있는 지맥길을 따라 내려가는것이 더 빠르다.
5분 내려가면 돌아온 임도를 다시 만났다가 바로 영원히 작별을 고한다.
벽진이씨 원동의 묘에서 본 268m,290m,317.2m봉과 우령산(우측뒤).
좌측에 돌아온 임도가 있고 세멘트 사각틀안에 큰나무 하나에 4개의 작은 나무가 심겨있고 바로앞에서 임도와 작별한다.
무엇일까?
세멘트 사각틀안에 큰나무 하나에 4개의 작은 아들나무가 있는데 뭘까?
2.3km정도를 따라온 임도는 여기서 작별을 고한다.우측 넘어로도 비포장임도가 내려가고 있다.
고개 좌측이 보덕사가 있는 덕곡리 골안쪽이고 우측이 운정리 가복마을이다.
268m봉.
묘지뒤에 NO184라고 쓴 삼각점비슷한 세멘트판이 있다.
317.2m봉.
5~6m앞에 전망좋은 바위가 있어 밀양시와 주변산들을 둘러볼수있고 삼각점은 우측에 있다.
317.2m봉 조망바위에서 본 밀양시주변산군들 1.
비슬지맥과 낙동정맥의 사룡산부근?
317.2m봉 조망바위에서 본 밀양시주변산군들 2.
낙동정맥의 운문산 부근과 운문지맥의 산들?
317.2m봉 조망바위에서 본 밀양시주변산군들 3.
가지산-능동산-영축산?
310m봉 정상의 함몰지.
마흘리고개(날뒤고개).
서쪽은 무안면,우측은부복면으로 1080번 도로가 넘고있고 서쪽에 마흘리로 들어가는 도로가있고,
버스정류장과 포장마차 효자각이있다.
마흘리고개(날뒤고개)모습.
마흘리고개(날뒤고개)의 포장마차와 과일행상.
마흘리고개(날뒤고개) 서쪽 아래에있는 효자각.
효자 성균관진사 어영하의 여각이다.
魚씨 본관은 함종(咸從) ·충주(忠州) ·경흥(慶興)의 3본이 전하지만, 대부분 함종어씨로 알려져 있다.
함종어씨의 시조 어화인(魚化仁)은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해 강릉(江陵)으로 왔다가 함종(평남 江西郡)에 정착 ·귀화하였다고 한다.
한편 충주어씨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본성이 지씨(池氏)였는데,
겨드랑 밑에 비늘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어씨로 사성(賜姓)했다는 전설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충주지씨(忠州池氏)와 동족이성(同族異姓)이 되는 셈이다.
경흥어씨의 시조 어계복(魚繼福)은 명나라 상서시랑(尙書侍郞) 석규(石奎)의 손자로,
상란(喪亂)을 만나 함경도 경흥에 표착하여 어씨를 사성받았다고 한다.
◈ 돌아오는길.
마흘리고개(날뒤고개) 에서 밀양쪽으로 고개를 다 내려오면 우측에 문충공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생가가 있고
4~5km거리의 우령산아래 후사포리엔 선생을 제향하는 예림서원이 있다.
예림서원은 시간이없어 못 들리고 생가터만 들려나와
비슬지맥의 끝자락인 외산마을에서 제방뚝을 따라 오산마을을거쳐
밀양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오우진나루로가서 비슬지맥의 끝모습을 뒤 돌아보고
밀양시내로 나가 돼지국밥으로 유명하다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대구-부산을 잇는 55번 중앙고속도로 남밀양 IC로 들어가서 귀경길에 올랐다.
우오진나루사진은 마지막구간인 다음차에 올립니다.
김종직 (金宗直.1431~1492)은 누구인가?
산꾼들이 김종직의 이름을 처음 알게되는 것은 무오사화나 조의제문이 아니고 지리산을 오르고 그 기록을 남긴 "유 두류록"에서 알게되고
그의 제자인 김일손도 "속 두류록"에 지리산 천왕봉에 성모사와 성모석상이 있었음을 기록으로 남겨준 바로 그분들이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 공의 자는 계온(季溫), 호는 점필재(占畢齋)이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으로 밀양 출생이며 본관은 선산이다.
부친인 김숙자(金叔滋)와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공의 부친은 원래 경북 선산 사람이었으나
모친 밀양 박씨와 혼인하면서 장인이 왜국 대마도 싸움에서 전사하자 밀양으로 이사하여 공을 낳았다.
16세에 향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으며 21세에 결혼을 하고 이듬해 1453년(단종1)에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공부를 계속하여 증강시에 급제하였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여막생활을 하였다.
1459년(세조5)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성종대왕이 경연을 열어 우수한 인재를 선출할 때 첫번째로 선출되었다
이로서 정자, 교리, 감찰, 경상도 병마평사등을 역임하고 성종 초기에 경연관이 되었다.
1473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성리학적 실천윤리로 백성을 다스려 봄가을로 향음례와 경노행사를 실시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였으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 선생과 아버지 김숙자의 교육 방법대로 소학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리학의 윤리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수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함양에 부임하였을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학사루에 시를 지어 시판을 걸어 놓은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인품을 좋게 보지 않았던 공이
시판을 떼어 가마솥에 불을 때어 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유자광과의 감정이 악화되어 훗날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으며
두류산(지리산)을 유람 유두류록을 남겼다.
또한 차가 생산되지 않는 함양 백성들이 특산물세인 차세를 납부하기 위하여 전라도로 가서 쌀 1말에 차 1홉을 맞바꾸어 납부하는 것을 보고
이를 감면해 주기 위하여 휴천면 엄천에 토지대금을 백성들에게 보상해주고 관영 차밭을 조성하여 대신 납부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함양읍성의 담장이 240간이나 되는데 그 지붕이 초가로 되어 있어 해마다 군민들이 부역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이것을 기와로 바꾸어 민폐를 덜어 주는등 선정을 베풀어 1476년에는 선산부사로 승진 역임하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낙향하여 3년을 묘옆에 띠집을 지어 지냈다.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집안의 연못가에 서당인 경렴당을 짓고 후진양성을 하고 있을시 성종이 홍문관 응교로 불렀으나
사양하여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하였으나 감당하기 어렵다며 다시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셨다.
곧 이조참판겸 동지경연사로 제수하시면서 금대 한 벌을 하사하셨다.
이후 전라감사, 한성부윤, 공조참판, 형조참판, 지중추부사,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공의 학문은 고려말 정몽주 및 길재선생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버지로부터 배워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으며 문하생으로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표연말등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공의 학문적 계통을 보면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로부터→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로 이어져 내려가는데
길재 및 아버지 김숙자의 영향을 받아 효제충신을 주안으로 하는 실천적 방면에 치중한것이다.
성종의 총애를 받아 당시 훈구공신파 일색이던 조정에 문하생들을 많이 진출시켜 신진 사림세력을 형성함에 따라 훈구파와 심한 반목과 대립을 일으켰다.
공은 1489년(성종20)에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양하여 지중추로 벼슬을 옮기고 김천으로 돌아와 경렴당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성종이 특별히 벼슬을 바꾸지 말라 하시고 녹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라 권하여도 불응하고 세 번이나 상소를 하여 사양하니 성종이 친히 비답문을 지어서 어사품을 내리셨으며
가세가 빈한함을 듣고 경상도에 하명하여 쌀70석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셨다
1492년(성종23)에 밀양 외가에 갔다가 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8월에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2일간 정사를 보지 않고 애도하였으며 '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중국의 고사를 이용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제문)을 지은바 있는데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것이 화근이 되어
유자광이 주도하여 자신들의 방호를 위한 무오사화를 일으켰을때 사화때에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문하생 33명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나 생질 강중진이 화를 당하면서 10여권의 책을 숨겨두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다.
중종이 즉위하자 신원이 회복되고 영의정에 추증되면서 '문충'으로 시호가 다시 내려졌다.
밀양의 예림서원, 구미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고종때 철폐), 금산의 경림서원, 개령의 덕림서원에 제향되었다.
또한 고령군 쌍림면에 선생을 모시는 부조묘가 있다.
함양의 상림숲의『함양을 빛낸 사람들』역사인물공원에 흉상이 2001년 건립되어 있다
문집은 점필재집, 저서에는 유두류록, 청구풍아, 당후일기 등이 있고
편서로는 동국여지승람, 일선지, 이존록 등이 있다 <함양홈피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은?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김종직과 그의 제자 일두 정여창,김일손에 대한 얘기는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이 참수(斬首)되었다. <두산 백과사전에서>
저의 카페 가족여행 "정자문화의 메카 함양"편에 있습니다>
문충공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생가.
문충공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생가.
추원제 안내문.
점필제 김종직선생은?
추원제 .
점필제 김종직선생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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