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위대한 질문> -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
배철현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5장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에 그는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마태복음 14, 30-31)
신앙과 믿음의 차이
신앙이란 어떤사람이나 이상적인 삶에 대한 신뢰이자 충성이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 내재된 일종의 덕이다. 자신이 약속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그것을 지조 있게 지키는 행위가 바로 신앙이다.
신앙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자기성찰과 수양의 과정으로, 종종 의례와 이야기를 통해 배양된다. 인간의 삶에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바로 신앙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신앙을 ‘피스티스(pistis)’라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피스티스는 수사학적 용어로 그 원래 의미는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성적인 설득(피스티스)을 거쳐 도달하는 상태 또한 피스티스라 한다. 그러므로 피스티스는 설득이자 설득의 결과인 대상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기원 후 405년경, 그리스어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는 ‘믿음’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명사‘피스티스’와 동사‘피스튜오(pisteuo)’를 라틴어명사 ‘피데스(fides)’와 동사 ‘크레도(credo)’로 번역했다. 크레도는 ‘심장’을 의미하는 ‘코르(cor)’와 ‘우주의 질서에 맞게 배치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다레(dare)’의 합성어다.
‘크레도’는 흔히 ‘나는 믿는다’로 번역되는데, 그 의미는 ‘우주의 질서에 맞게 자신의 심장(생각과 정성)을 배치하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나는 한 분의 신을 믿습니다(Credo in unum Deum)”라는 문장은 초월적인 신을 맹목적으로 신봉한다는 의미보다는, 사실 ‘우주의 질서를 만든 절대자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즉, ‘나는 삶에 대한 신비와 경외심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부단히 설득하고 있다’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의 신앙
인간의 생존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가능하다. 아이는 태어난 뒤 ‘엄마’라는 존재를 절대적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 엄마는 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지적으로 그의 존재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신은 믿는다고고백하면 천국가고,그렇지않으면 지옥가는 그런 저급한차원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교리 역시 단순히 지적인활동으로 한순간에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온전하고 완벽한 종교 생활을 지향하고 그 종교의 신화와 의례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때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무신론자들은 종교를 선택하기 전에 이미 형이상학적인 주장을 지적으로 이해하려 시도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인 관행이다. 그들은 교리에 담긴 내용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려 한다.
성서 이야기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인 서술이 아니라 ‘신화’로 기록된 것이다. ‘신화’는 믿지 못할 거짓말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그 의미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이야기’다. 혼돈으로 상징되는 물을 바람으로 걷어내 마른 땅이 드러나는 주제는 창세기의 우주 창조 ‘이야기’다. 의례와 신화들은 시간을 초월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삶의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성서 ‘이야기’의 연대를 추정하고 그것을 증명할 역사적, 과학적 증거를 요구한다면 그 이야기의 본질과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던 성서 이야기에 대한 신화적인 사고는 17세기 데카르트의 등장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에게 우주는 생명이 없는 기계에 불과하며,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신화를 이용하지 않고 대신 ‘이성적인 사고’에 의존했다(그는 “나는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문장만이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다. 엄청난 무서움, 의미를 상실한 분노 그리고 파괴에 대한 두려움이 현대인들의 삶을 짓누른다. 현대인들의 삶에 신앙이 없다면 쉽게 절망의 늪에 빠질것이다. 아우슈비츠, 르완다, 보스니아, 코소보와 같은 우리 시대의 니힐리즘은 신앙을 상실하고 신성함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을 때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오병이어의 은유
세례 요한이 살해되자 충격을 받은 예수는 목숨의 위협을 느껴 외딴 곳으로 숨는다. 이 시점은 예수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다.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는 세례 요한의 말은 예수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한 직접적인 계기였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신에게바쳐질어린양’으로써의 삶을 점차행동에 옮긴 화두였다.
유대 민중들은 세례 요한이 죽은 뒤 예수를 메시아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예수는 아직도 배를 타고 외딴 해변에 머물고 있었지만, 민중들은 거기까지 몰려와 예수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예수는 절망적인 삶에서 한 줄기 빛을 찾으려는 이 불쌍한 민중들에게 길 잃은 양과 같다는 연민을 느껴 배에서 내린다.
날이 저물어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무리를 집으로 돌려보낼 것을 예수에게 종용한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 한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성서에 대한 은유적 해석은 중세 후반까지 가장 지배적이었으나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거치면서 그 영향력을 잃고, 이때부터 성서의 축자적 해석이 힘을 얻게 되었다.
신플라톤주의자였던 오리게네스(Origenes)는 성서에 은유적 해석을 적극 도입했다. 그는 성서는 세 단계 해석을 통해 그 깊은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단계는 ‘축자적 해석’, ‘도덕적 해석’ 그리고 ‘영적인 해석’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3요소인 육체, 정신, 영혼을 지칭한다.
첫째, ‘축자적 해석’은 이단자들의 해석이라는 주장이다. 오리게네스는 성서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축자적으로 믿는 것은 무지한 자들이며 이단이라고 폄하한다.
둘째, ‘도덕적 해석’은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를 염두에둔 해석이다. 오리게네스는 도덕적 해석을 초보 그리스도인들의 성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소유를 나눌 때 사회에 기적이 일어난다는 가르침이다.
셋째, ‘영적인 해석’은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해석이다. 이야기가 각자의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고 영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스스로 깊이 묵상하라는 요구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러한 삶이 나를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영적인 해석은 신과의 부단한 대화를 통해 서서히 삶에 내재되는 수련이다.
오리게네스는 도덕적 해석을 은유적인 해석이라 한다. 은유적인 해석은 영적인 해석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 해석은 일방적이지도 않고 정답 또한 없다. 각자가 자신의 삶 안에서 그 영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찾아야 한다. 성서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고백한 내용을 일상에서 은유적으로 적용시켜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과 민중들을 돌려보낸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즉 기도를 위해서다.
소명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 자신의 마음을 깊이 보는 연습을 통해 가능하다. 예수는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도 홀로 산으로 올라가 묵상한다. 예수의 삶 중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습관처럼 반복되는 행동은 바로 혼자 산에 올라가 행하는 묵상이다.
믿음은 실천이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서 ‘유령이다!’ 하였다. 그들은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다.
“예수가 물위를 걸었다”는 문장은, 은유적으로 해석하면, 성서에서 물이나 바다는 항상 혼돈을 상징하므로 혼돈의 세상인 물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살아가면서 유혹에 빠지지 말고 도덕적으로 살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를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한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에게 요청하여 물위를 걷지만,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금세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간다. 그러자 그는 예수에게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친다. 파도가 아니라 파도를 보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베드로를 바다에 빠지게 한 것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붙잡고는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꾸짖는다.
예수는 우리에게 “당신은 믿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 말의 의미는 “당신은 삶에 대해 깊이 묵상한 적이 있습니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찾았습니까? 그것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없이 최선을 다했습니까?”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