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두 잔
이경애
''오늘 한잔할까?''
남편의 전화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옷매무새를 챙기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내 쪽으로 해맑게 웃으며 (술 마시러 갈 때만 볼 수 있는 모습) 걸어오는 남편을 보면 나도 웃음이 나온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전문가답게 이 술집, 저 술집의 장, 단점을 친절하게 쫘악 나열하는 남자. 이런 날은 친절하기까지 하다.
입에 술잔만 대도 얼굴이 빠알게 지는 내가 몇 년 전부터 술 좋아하는 남편의 술친구가 되면서 야금야금 양이 늘어 이제는 소주 두 잔까지 마신다.
두 잔을 마시면 취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돈도 안 든다고 좋아한다. 나머지 술은 몽땅 본인 차지라며.
하여튼 나와 함께 하는 술자리가 이로운 게 많은가 보다. 술만 먹으면 빨간 얼굴로 히죽히죽 웃어대는 것도 재미있다나 뭐라나.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평상시 잘 하지 않던 이야기도 적나라하게 풀어 헤친다.
아이들 이야기, 책, 친구들 이야기부터 정치, 경제, 사회문제까지 쏟아 내고 혁명이
란 단어까지 튀어 나오는 등 횡설수설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남편이 취기가 오를때면 가끔 나에게 진심(?)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당신은 멋진 여자야''
라든가, 아이랑 같이 갔을 때는
''너희 엄마는 괜찮은 사람이다'' 라고. 그러면 나는 그 말을 진담으로 믿으며 기분 좋게 취한다.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지 않나. 술 깬 다음날은 어김없이 그런 적 없다고 시치미 떼는 남편이지만.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당신같이 성질 드러운 여자를 누가 데리고 살겠어. 나니까 같이 살아주는거야.''
라고 한다. 워낙 귀에 못이 박힌 말이라 신경 안 쓰지만, 기분이 안 좋은 날은 핏대를 세우며 옥신각신하기도 한다.
이렇듯 술은 진심을 농담으로, 농담을 진담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 기막힌 묘약이다.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상태로 술집을 나와서 하는 산책도 좋다. 삐뚤삐뚤 걷는 나를 보며 본인 다리도 못 챙기면서 넘어진다고 내 손을 잡는다.
친구처럼, 노부부처럼 이 나이에 손잡고 걷는다는 것. 짜릿한 전기가 오기는커녕 어느 것이 누구 손인지 구별 할 수 없을 만큼 감각이 거시기하다. 갑자기 다정한 부부인 것처럼 되어진 것뿐.
그러나 나는 안다. 단지 넘어질까봐 잡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이 들어갈수록 부부란 사랑보다는 서로에 대한 고마움으로, 끈끈한 연민으로 잡아주고 일으켜주며 살아가는 관계라는 것을.
나는
''아이고, 우리가 손도 다 잡고. 제 정신이 아닌 거 맞네''
평소에 안하던 행동을 술 취했을 때만 하는 남편에게 말한다.
늦은 밤, 누구 목소리가 더 큰지 내기라도 하듯 이야기하며 걷노라면, 술 냄새 나는 거리의 모습은 재미나다 .
바람은 살랑살랑 등 뒤에서 밀어주고 거리가 흔들흔들 길을 열어주면 나는 둥실둥실 떠 다닌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커피 생각이 나면 단골 카페에 들른다.
조용한 카페에서 얼굴이 벌건 여자와 술 냄새 풀풀나는 남자가 무슨 말인가 열심히 한다. 폐를 안 끼치려 목소리를 낮추는데도 이상하게 시끄럽다.
''참 보기 좋습니다. 부부간에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 하시는 분들은 드물어요.''
라고 하며 주인 아저씨가 웃는 얼굴로 따끈한 차를 서비스로 준다.
우리가 무슨 말을 했더라?
방금 한 말도 떠오르지 않지만 아마도 서로 '내가 더 잘났다.' 라는 문제로 열을 내고 있었을 게다.
그래서 그 찻집은 술 마신 날만 간다. 아마도 그 카페 사장님이 우리를 횡설수설 목소리만 큰 괴상한 부부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맨 정신인 것을 본 일이 없으니까.
산책하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면 어느 정도 술이 깬다. 시간이 지나 신데렐라가 다시 재투성이로 돌아오듯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만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날리고 또 다른 세상을 둘러보는 재미를 맛본다.
내가 술을 배우기 전, 가끔 남편과 술자리를 할 때는 남편만 취하고 나는 말짱하니 대화가 안돼 스트레스를 받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술 취한 사람들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지 못했고 '뭐 마실게 없어서 눈이 풀리도록 술을 마실까.' 하고 속으로 비난도 했었다.
그러나 몇 년 전 서울을 떠나 순천으로 이사오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멀리 두고 온 남편과 나는 친구가 필요했다. 특히 술을 즐기는 남편은 마음을 터 놓고 술을 함께 마실 사람이.
그런 남편이 그때부터 나와 가끔 술을 마시러 갔다.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할 정도로 술에 약한 나였지만, 술친구가 없는 남편이 짠하기도 해서 그냥 앉아라도 있자라는 마음으로 따라갔다.
''자~건배! 입만 살짝 대봐.''
남편의 이 말과 함께 소주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에 소주에는 거의 입을 안 대었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나도 모르게 조금씩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두 잔을 마시면 얼굴에 열감이 느껴지면서 발갛게 달아 오른다. 물체가 조금 흔들리 듯 보이고 왠지 내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 든다. 목소리도 조금 커지는 거 같고 조금 전의 근심거리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그 자리에 집중하게 된다. 이렇듯 적당한 양의 술은 꽉 조인 삶을 조금 풀어 줘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
사람들이 술을 좋아한다기보다는 그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닭다리를 양보하는 척, 보이지 않는 닭다리 경쟁도 하고, 풀어져가는 눈동자에 연민을 담아 동지애를 다지는 데는 술만한 것이 없다.
오십하고 중반을 넘긴 나이, 이제서야 술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왜 마시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술 좋아하는 이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 기쁜일이 생겼을 때, 슬플 때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술잔을 기울인다.
예전에는 술먹고 싶으니 핑계도 잘 잡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
이 '내로남불' 은 지금 내 경우를 말하는 것 같다. 내가 마실 때는 좋은 술이고 내가 못마셨을 때에는 나쁜 술이었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늦은 밤, 널찍한 거리가 독무대인 양 웃으며 흐느적거리는, 카페가 제 집인 듯 시끄럽게 떠드는 우리와 스쳐 지나가더라도 놀라지 마시라.
우리는 단지 정겹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