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문홰는 회의를 따라 낙양궁의 북성北城 문 밖에 도착했다.
북성은 궁성전체 가운데 태후와 황제의 가족들, 후궁 및 여인들의 처소다. "궁성"이라고 할 때는 주로 이곳을 가리킨다.
태후가 문무 관료들과 만나는 정사政事의 장소인 남성南城은 권세가들의 질시 때문에 회의가 출입을 꺼려했다.
실제로 얼마 후 회의는 객기를 부려 남성 조당朝堂에 들어가 좌상 소량사 앞에서 예를 취하지 않고 거드름을 피우다가 혼나기도 한다.
“문 밖에서 잠시 기다려주시면, 제가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곳은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저와 동행하시면 이곳에서 태후마마를 알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회의는 곧장 궁문 안으로 들어갔다.
조문홰가 한참을 기다리고 있자 과연 환관 두어 사람이 와서 그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조문홰는 환관들을 따라 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어느 한가하고 아늑한 대전 앞에 도착했다. 그가 그곳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리자, 마침내 승려 회의와 함께 내시가 나타난다.
“조 대인, 어서 드시지요. 황태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문홰는 황송한 마음 가눌 길 없어, 극히 겸허한 자세로 그들을 따라 조심스럽게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곳에, 안이 비치는 매우 얇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휘장 안의 크고 화려한 의자에 얼핏 보아 사십여 세쯤 되어 보이는 한 여인이 단아하게 좌정해 있었다.
조문홰는 그가 태후임을 직감하고 꿇어 엎드렸다.
“소신 영주도독 조문홰가 폐하(무태후)를 알현하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조문홰는 황제에게 드리는 인사말을 거침없이 토로했다.
당시의 당나라 황제는 예종 이단李旦이었으나 이단은 명목상의 황제에 불과하고 실질적인 통치자는 무 태후였다.
고종 이치李治(628-683)의 사망 후, 고종과 무태후 사이에 태어난 아들 중종 이현李顯이 황제로 등극했으나, 무 태후는 그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다른 아들 예종 이단을 황제로 세웠다. 그러나 얼마 후 무 태후는 예종 이단을 별전別殿에 거주하게 하고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
무 태후의 위세에 눌린 황제 이단은 왕王들과 공公 이하 대신들을 거느리고 가서 무 태후에게 황제라는 존호를 올렸다. 말하자면 황위를 양도한 것이다. 무 태후는 겸허하게(?) 이를 사양했지만 그 때부터 그녀는 실질적인 황제가 되어 전권을 휘두른다. 이것이, 이태 전인 684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때부터 예종 이단은 황제도 아니고, 황제가 아니지도 않은, 참으로 애매모호한 위치에 처한다. 말하자면 명목상 황제이나 실질상 황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685년에 무 태후는 조서를 내려 예종 이단에게 황제로서 통치권을 행사하라고 권했으나, 어머니의 권력욕을 잘 알고 있던 이단은 이를 굳이 사양했다.
따라서 신하들도 무 태후의 지위에 대해 헷갈린 나머지, 면전에서 그녀를 “황상” 혹은 “폐하”로 호칭했다가 “황태후”라 하는가 하면, 그녀가 없는 곳에서는 그녀를 “태후”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조문홰가 연달아 세 번이나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무 태후에게 절했다.
“어서 일어나시오.”
태후 무조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래 동북 지방은 평안하오?”
“황상 폐하의 은덕과 후광에 힘입어 태평하옵니다.”
“동북지방은 놓아두고 여기까지 은밀하게 나를 찾아온 용건이 무엇이오?”
조문홰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소신이 거친 동북지방에 우거하면서 뜻밖에도 놀라운 보물을 우연히 얻었습니다. 소신은 그 보물을 감당할 수 없어, 그것의 주인 될 사람이 누구일까를 생각하던 중 폐하께서 적임자라 사료되어, 행여나 도중에 분실될까 염려한 나머지, 소신의 위수衛戍지역을 벗어난 데 대한 폐하의 문책을 각오하고, 이렇게 수 천리 노정을 직접 달려왔사옵니다.”
“위수지역을 벗어난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우선 경의 충정이 참으로 갸륵하오. 그래 어떤 물건이오?”
조문홰는 보자기에 싸 들고 있던 물건을 두 손으로 받들어 공손히 내밀었다.
내시가 와서 물건을 받아보았다.
“풀어보시오.”
무조가 명을 내리자 내시는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서는 길이가 두 자 두 치쯤 되는, 고색창연한 하나의 단검이 나왔다. 검집은 황금으로 되었는지, 아름다운 무늬에 누런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시가 검을 들고 무조에게 건네려는 순간 곁에 있던 승려 회의가 갑자기 일갈했다.
“잠깐만!”
내시가 주춤하며 회의를 쳐다보자 회의가 그에게 말했다.
“먼저, 나에게 건네시오.”
내시는 회의의 뜻을 알아차리고 검을 두 손으로 받들어 회의에게 넘겨주었다.
회의는 만족한 미소를 머금고 검을 받아든 다음, 역시 두 손으로 받들어 무 태후에게 올렸다.
“마마, 이런 위험한 물건은, 언제나 소승이 먼저 받아 마마께 드리는 것이 안전하옵니다.”
“호호호! 아사阿師(무조가 회의를 부를 때 쓰는 애칭), 그대의 충정이 고맙기 그지없구려.”
무조는 검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조문홰에게 물었다.
“조 대인, 이 물건은 구조가 특이한 게 요새 물건도 아닌 것 같고 또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도 아닌 것 같구려. 하지만, 검집이 황금이라는 것 말고, 이 단검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이오?”
“마마! 말하자면 깁니다. 그것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옵니다.”
이렇게 말한 후 조문홰는 검의 내력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검은 마마께서 추측하신 대로, 저 고려 땅에서 근 이천 년 전에 조선의 색불루라는 임금이 청동으로 만든 것이옵니다.”
무 태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오, 그래요? 고려에 대해서는 나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제가 선황폐하(그녀의 남편이었던 당 고종 이치)께 고려를 침략하지 말라고 그토록 간청하였건만, 선황 폐하는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말았지요.”
물론, 그녀가 고려를 침략하지 말라고 고종에게 간청했다는 것은 허언虛言이다.
“이 검의 이름을 ‘천명신검’이라 하온데, 이검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비의전승이 지금까지도 고려인들 사이에서 면면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옛날 조선과 부여, 고려의 임금들이 이 검을 얻어 제위에 올랐다는 게, 정설로 굳어져 있사옵니다.”
“이 검에 무슨 신비한 점이 있어서 검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것입니까?”
무태후가 검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 신비에 대해서는 소신이 잘 모르옵니다. 다만 알고 있는 것은, 검집에 제왕의 통치이념이 새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는 ‘三三五六七七’이라는 신비로운 숫자가 박혀 있는데, 그 숫자는 색불루 임금이 평생 모은 모든 보화를 어딘가에 감추어 놓고, 그곳의 위치를 명시한 암호라고 합니다.”
(<다정선인 단정검> 및 <해와같이 빛나리> 참조)
“오, 그래요? 그게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 보물은 한 나라를 살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분량이라고 하옵니다. 그 보물을 실제로 부여의 해모수라는 임금이 찾아내었는데, 그 후로 어디론가 재차 사라졌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오, 참으로 흥미진진한 얘기로군요. 그 밖에 다른 놀라운 점은 없습니까?”
“또 한 가지 전설이 있사옵니다. 근 천 년 전에 그 검을 통해, 조선의 임금들이 천하절색의 어진 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검을 소유한 자는 그런 행운을 얻는다고 하옵니다.”
“호호호, 그것 참 재미있군요. 근데 저는 아쉽게 여자라서 천하절색의 미녀를 얻기는 다 틀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승려 회의가 눈동자에 힘을 주며 무 태후를 바라다보았다.
“아사! 그렇지 않아요?”
무 태후가 눈웃음을 치며 승려 회의에게 물었다.
“마마께서도 농담을 하실 줄 아는 군요. 저는 출가인이라서 그런 일을 잘 모르옵니다. 나무아미타불.”
승려 회의가 엄숙하게 합장했다.
무 태후가 다시 조문홰에게 눈길을 돌리며 묻는다.
“이런 진귀한 고려의 보물이 어떻게 경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실은, 우연한 기회에 고려 왕실의 유족이 제게 전해준 것이옵니다.”
조문홰는 검을 얻게 된 경위에 대해 대강 설명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짐은 여인의 몸이니, 내가 잘 간직해 두었다가, 훗날 어진 황제가 나타나면 전해드리겠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한 가지 불길한 얘기도 빠뜨릴 수 없사옵니다.”
“무슨 불길한 얘깁니까?”
“그 검이 세상에 한 번 나타나면, 반드시 피비린내를 맡아야만 들어간다고 하옵니다.”
“호호호! 그래요? 그것도 대단히 흥미진진하군요. 그렇다면, 이 검으로 경의 피를 먼저 보게 한다면, 괜찮을까요?”
무조가 웃는 얼굴로 조문홰의 낯을 내려다보았다.
“황상 폐하!”
조문홰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소신의 피를 어찌 아끼겠습니까?”
“호호호!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어찌 귀하신 대인의 피를 동이東夷의 조잡한 검에 묻힐 수 있겠습니까?”
“폐하, 소신께 그 검을 잠시 건네주신다면, 제 손의 피를 그 검에 묻히겠사옵니다. 부디 소신의 충정어린 간청을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조문홰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오오, 그대의 충정은 가히 하늘을 감동시킬 만합니다. 경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무조는 환관에게 검을 건네었다. 환관은 조문홰에게 검을 넘긴다.
조문홰는 머리를 숙여 절하며 검을 받은 다음, 몸을 뒤로 돌이켜 검집을 뺐다.
그 순간 천명신검에서 나오는 신비롭고 싸늘한 검광이 대전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대전에 서기瑞氣가 은은히 어렸다.
“오오, 과연!”
무 태후가 검 빛에 놀라서 탄성을 발했다.
조문홰는 검집을 품에 조심스럽게 꽂은 후, 우수로 검을 잡고 좌수를 높이 쳐들어, 검으로 팔목을 그었다.
그 순간, 팔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아마도 조문홰가 하단전에 내력內力을 모은 것 같았다.
승려 회의는 그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적이 놀랐다. 영주도독 조문홰의 내공이 대단히 깊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조문홰는 솟구친 피가 땅에 떨어지기 전 검으로 받았다. 검신에 그 피가 흠뻑 묻었다.
조문홰가 검을 보며 중얼거렸다.
“검아, 검아, 네가 이미 내 피를 먹었으니, 내가 폐하를 위해 피를 흘릴 때, 너도 폐하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느니라.”
조문홰의 언동을 무 태후는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조문홰는 검의 피를 자신의 옷에 쓱쓱 문질러 닦은 다음,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팔목을 매어 지혈했다.
“저런! 값비싼 옷에 피를 묻히다니!”
무 태후는 곁에 있는 내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빨리 어의를 불러와 충성스런 조 대인의 상처를 치료해주고, 조 대인에게 좋은 옷을 한 벌 내리시오.”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조문홰가 머리를 숙여 겸손하게 감사를 표한 다음, 검을 검집에 꽂아 내시에게 공손히 넘긴 후 말을 이었다.
“마마, 이것보다 더 흥미로운 물건이 또 있습니다.”
“······?”
무 태후가 그윽한 눈길로 조문홰를 내려다보았다. 조문홰는 품에서 비단종이 같은 것을 꺼내 공손하게 바쳤다.
종이를 펼쳐 읽던 무 태후가 놀라 물었다.
“아니, 이건?”
“보시는 그대로입니다.”
“경은 이것을 어떻게 입수하였소? 설마 위서僞書는 아니겠죠?”
“틀림없는 진품이옵니다. 폐하의 안위와 우리 대당의 태평을 위해 동북을 수호하는 것이 소신의 임무이온데 어찌 영주로 흘러들어온 티끌 하나라도 소신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사오리까?”
“호오! 경의 수완이 참으로 대단하오, 대단해.”
무 태후는 몹시 감탄하는 눈치였다.
조문홰가 동도 낙양으로 출발하고 수일이 지난 후.
영주 계성 북문 밖의 고가장에서는 노장주老莊主 고승이 조영에게 은밀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영아야, 일전에 내가 말한 네 가지 길에 대해, 어떻게 하기로 결정했느냐?”
“이미 우리는 함께 거사하기로 계획한 것이 아닙니까?”
“맞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부황께서 편하게 뜻을 펴시도록, 낙양성의 낙양궁을 찾아가 천명신검을 바치고 당에 항복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지금 당 조정에서 무조에게 큰 신망을 얻고 있는 외방 출신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이다조李多祚(654-707) 장군이다. 너는 들어본 적이 있느냐?”
“예, 할아버지.”
“내가 그 분과 좀 안면이 있다.”
“아, 그러시군요.”
“그는 숙신肅愼(말갈) 계열의 우리 고려인이고 개모성蓋牟城 사람이다. 너의 이름 조祚 자와 그의 이름 조祚 자가 같은 글자라는 것을 아느냐?”
“네.”
“우리 가문도 부계父系는 대해모수 임금과 고주몽 성제聖帝의 혈통이지만, 모계母系에서는 다른 종족의 피도 많이 섞여 있단다. 너의 어머니는 거란의 대하씨 왕녀였고 나와 나의 선대에서는 숙신의 여인들과도 피가 섞여 있단다.”
“그럼 돌아가신 저의 할머니가 말갈족인가요?”
“그렇단다. 나와 함께 이다조 장군을 만난다면, 장군은 내 얼굴을 봐서라도, 틀림없이 무 태후를 알현하도록 주선해주실 것이다.”
고승과 조영은 며칠 후 행장을 갖춰 마차를 타고 낙양성으로 가는 수천 리 여정에 나섰다. 그들이 길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뜻밖의 인물과 마주친다.
마차가 가는 앞길 일백여 보쯤에 한 고승이 옷자락을 펄럭이며 고고하게 서 있었다. 마차가 그의 앞으로 다가갈 무렵 그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그 안에 계신 분, 혹시 고가장의 노장주이신 고대인이 아니십니까?”
마차 안에 앉아 있던 고승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계성 파사사인 십자사의 경승 고양원의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대덕님,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
고승과 조영이 마차에서 황급히 내리며 물었다.
고양원이 빙긋이 웃더니 말했다.
“고 대인을 만나 뵈러 가던 참입니다.”
“아,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린 먼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달포 이상이 걸릴 것 같습니다.”
“아마 낙양성에 가시는 거겠죠?”
“아니, 대덕님이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그래서 제가 두 분과 동행하기 위해, 이렇게 행낭을 꾸려 나왔습니다.”
고승과 조영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제가 동승하는 것이 아무래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승과 조영이 머뭇거리자, 고양원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무 태후를 만나러 가는 것까지 제가 짐작하고 있습니다. 몹시도 험난한 길입니다.”
이렇게 말한 후 고양원은 성큼 마차 위로 올랐다.
여러 날이 지나서, 세 사람은 낙양성내에 있는 이다조 장군의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다조는 동북방 고려인들의 맹주인 고승이 찾아오자 매우 반갑게 맞아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조영이 보니, 당시 세른 세살이었던 이다조(654년생)는 얼핏 보기에 사십여 세로 보였으며 머리가 벗겨지고, 얼굴이 평범해 보였다.
“대인께선 아직도 동안이십니다. 백 살은 너끈히 넘길 것 같습니다.”
이다조가 고승에게 덕담을 했다.
“하하하! 장군도 농담을 잘하십니다. 이제는 흙 속으로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땅에 들어온 우리 고려 백성들이 염려되고, 나의 일점혈육인 이 아이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그래서 장군께 신세도 질 겸, 태후마마께 고려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원도 할 겸,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신세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이다조는 경승 고양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사大師님은 풍기는 분위기와 외모가 파사사의 대덕님 같습니다. 어느 사찰의 사주이십니까?”
“저는 계성 십자사의 경승입니다. 마라나타!”
고양원은 이다조의 혜안에 놀라워했다.
이다조가 이번에는 조영의 면목을 자세히 훑어보다가 말을 건넨다.
“아, 제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이 젊은이의 얼굴은 대단한 귀인상입니다. 왕후의 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경거망동을 하지 않는다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 같습니다.”
“뭘요? 어린 둔재를 그렇게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승은 잠깐 바깥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기다가 이다조에게 털어놓았다.
“이 대인! 태후마마께 아뢰기 전, 이 대인께 상의를 드리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실은, 몇 달 전에 본국인 고려高麗(고중상의 후고구려)로부터 이 아이의 애비가 서찰을 보내왔습니다.”
“그런 일을 왜 제게 말씀하십니까?”
“아마도 아시겠지만, 이 아이의 애비가 바로 후고구려의 왕 고중상입니다.”
“오, 그렇습니까? 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편지에서 고중상이 이 아이에게 고려국 고리군왕 겸 발해군왕의 작위를 내리고 고토 회복의 사명을 부여했습니다.”
이다조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합니다. 이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건이 허용한다면, 고려국과 대당 사이에 서로 사신使臣이 오가는 가운데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저와 이 아이는 이미 대당大唐에 귀속한 몸이지만, 다시 한 번 행여나 있을지 모를 오해의 여지를 불식시키고 이 땅 고려 백성들의 평화를 진작시키기 위해 이렇게 대인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오,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힘이 닿는 대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다조가 흔쾌하게 수락했다.
“대인의 은혜,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리고 고중상이 이 아이에게 고려 왕가 전래의, 왕권을 상징하는 귀중한 보물인, 천명신검을 보내왔는데, 이것도 아울러 태후마마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후 고승은 천명신검의 내력을 간략히 설명했다.
(다음회로 계속)
****************
샬롬.
2023. 8. 19.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