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 : 54 - 8 : 1절
“스데반의 순교”
전라남도 신안군의 복음화 율이 35%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의 복음화 율보다 높은 수치인데 이 신안군 안에 증도라는 섬은 복음화 율이 90%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 섬에 1900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1500명가량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아주 독특한 섬이 증도라는 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작은 섬에 교회가 11개가 있을 정도인데 이 섬이 이렇게 높은 복음의 능력과 복을 받게 된 이유는 그 섬에 살았던 문준경 전도사님이라는 분 때문에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 전도사님이 세운 교회를 통해 우리나라 CCC의 대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고인이 되신 김준곤 목사님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이고, 동대문에 가면 우리 교단에서 몇 째 안가는 중앙교회라는 교회가 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만신 목사님도 문 전도사님이 전한 복음을 듣고 문전도사님이 세운 교회를 통해 배출된 목회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태기 목사님이나 이봉성 목사님 같은 분들도 문 전도사님의 영향 때문에 목회를 했던 분들이기 때문에 문 전도사님의 영적인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문 전도사님은 17살 나이에 남편의 얼굴도 모른 채로 시집을 갔는데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남편이 첩을 얻어 자식까지 낳고 생과부 신세가 되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 분이 예수님이셨던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고부터는 그 열정이 대단해서 경성신학교라고 지금의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데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신안 증도로 내려가서 진리교회, 증동리교회, 대초리교회, 증도교회 같은 교회들을 세우고는 일 년에 고무신이 아홉 켤레가 바뀌도록 전도하는 일에 온 힘을 다 기우렸다고 합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온갖 고문 속에서 고초를 당하셨고 6.25 사변 때는 그곳을 점령한 북한군 때문에 엄청난 시련을 당하다가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북한군들이 도망가면서 총살을 했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한 마디를 남기시고는 순교를 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59절에 나타나고 있는 스데반의 마지막 외침과 똑같은 외침을 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그런 순교의 바탕 위에 세워진 교회들이 증도에 있는 교회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크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은 90%에 가까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혜의 섬, 믿음의 섬, 복된 섬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순교의 능력이고 순교를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사람이 가장 무섭습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 “나 죽고 너 죽자.”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면 사실 뾰족한 대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북한의 군사력과 정보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늘 벼랑 끝 외교전술을 쓰기 때문에 미국이 가장 대화하기 싫어하고 또 힘들어 하는 나라가 북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죽을 생각을 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를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에스더 같은 경우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갔더니 민족을 구원하는 큰일을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천국을 믿고,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각오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스데반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하는데 이런 각오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데반처럼 이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다면 최고이겠지만 이런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주의 일을 하다가 순교를 하면 가문에도 영광이고 개인적으로도 인생 승리이겠지만 순교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절대 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순교에 목을 매면서 사는 것도 지혜로운 모습이지는 않습니다.
이런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누군가는 인생을 엉망으로 살다가 마지막 부분에 순교를 해서 영광스러운 결말을 얻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악착같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평범하게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하게 두 사람의 이런 상황만 놓고서 보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서 더 칭찬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순교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스데반이 보여 줬던 세 가지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보여 줬던 세 가지 모습대로 살다가 평범한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순교자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칭찬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순교에 목표를 두며 살기 보다는 우리 삶에 세 가지 영적 습관을 가지고 살아야 설사 평범한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순교자의 영성을 가지고 산 것이기 때문에 순교자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55절 말씀에 나와 있는 것처럼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의 각종 은사와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삶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성경을 통해 깨달아야 하고 깨달은 것을 잘 적용해서 열매를 맺으면서 살면 특별한 성령의 은혜를 맛보지 못해도 누구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에 대해서 너무 신비롭게만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이단들처럼 신비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늘 성도님들을 위해서 세 가지를 축복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과의 교통!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을 근거로 목사들이 축도를 하고 있는데 그 말씀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은혜와 사랑을 받으려면 성령님과 교통, 쉬운 말로 하면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님과 교제를 하면서 살게 되면 누구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기회가 되어서 순교자가 되면 감사한 것이지 평소에 성령님과 교제도 없이 살다가 순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죽음을 순교로 보시겠습니까?
두 번째는 55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절대 주님을 위해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1절)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저자는 사도바울입니다. 58절에 보세요.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자리에서 옷을 지켜줬던 사람이 바로 사울, 골로새서의 저자 바울이었습니다. 그랬던 바울이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니까 스데반처럼 위만 바라보며 살았더니 결국은 골로새서 3장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소년이 길에서 5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줍고 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행여 또 이런 행운이 있을까하여 땅만 쳐다보고 다녔더니 결국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땅만 보다가 길에서 물건을 줍는데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와 수천 개의 동전, 그 외에 수많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주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런 것들을 줍느라고 푸른 하늘이나 지상의 꽃과 새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기회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지 않으면 그 정도 손해에서 그치지 않고 믿음을 잃게 되고 순교자의 영성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볼 수 있는 영적이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 봐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확신이 있었을 때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각오하면서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지 이런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이 두렵고 무서워서 절대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비겁하고 초라한 삶을 살았던 사도들이 하루아침에 용기를 얻어서 자기들 목숨 줄을 쥐고 있던 사람들 앞에서도 죽을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봤기 때문에 사도들 또한 설사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도 그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는 우연히 주의 일을 하다가 죽게 되는 것이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위에 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고, 영적인 눈을 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면서 기뻐하며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었을 때 순교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설사 순교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순교자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습관과 믿음이 기초가 되었을 때 스데반의 순교 위에 초대 교회가 변화되고 성장했던 것처럼, 문준경 전도사님의 순교 위에 증도라는 섬이 변화되고 복음화 율이 90%가 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삶을 너무 신비롭게만 생각을 하는데 순교자의 삶을 사는 방법을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쉽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 동안 성령 충만하지 못하게 살았던 모습, 하늘을 주목하며 보지 못하고 살았던 모습, 하나님 우편에 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못 보고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이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스데반처럼 세 가지 영적 습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 우리도 순교자의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예수님을 믿고, 죽을 각오로 기도하고, 죽을 각오로 복음의 증인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교자의 영광과 은혜를 반드시 허락해 주실 줄 믿으시고 그런 결단의 마음으로 오늘부터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