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데 실측조사를 하는 동안은 정도가 심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대개 석조물들이 노천에 있어 그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 낮엔 더위를 피해 잠시 그늘에 앉아 야장을 정리하였다. 그러다 해가 좀 누그러지면 다시 뙤약볕 아래로 들어가 하던 일에 매달렸다. 나중엔 이것도 이골이 나 해가 있으나 없으나 개의치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럴수록 얼굴과 팔다린 점점 그을려 구릿빛으로 변했다.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오랜만에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두고 방에서 뒹굴뒹굴 만화책을 읽었다. 선배들은 이참에 술 한 잔 한다며 시내로 나갔다. 술 담배완 아예 담을 쌓고 사는 나는 낄 자리가 아니다. 그걸 선배들이 잘 알고 있어서 언제나 그런 자리에선 나를 제외시켰다. 혼자 몸이 된 나는 더욱 홀가분해져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싫었다. 무작정 길을 나섰다. 금산사는 모악산 자락 산기슭에 자리 잡은 터라 산사를 찾아오는 관광객도 많지만 절집 옆으로 이어진 모악산 등산을 위해 오고 가는 행인들이 많았다. 나도 한 번 모악산 정상을 밟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오늘 같이 선배들이 자리를 비운 틈이 유일한 등반 기회다. 그러나 밖은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비록 가는 비가 내리고 있지만 산행하기엔 썩 좋은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호기심이 나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아무도 오르지 않는 산길을 나 혼자 추적추적 걸어갔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은 모악산에서 흘러내린 계곡과 함께 이어진다. 그러다 얼마쯤 올라가면서 계곡은 계곡대로 등산로는 그것대로 갈라지면서 좁은 등산로가 위쪽으로 계속 이어진다. 한 번도 모악산을 올라가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길만 쫓아서 올라갔다. 수풀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젖은 수풀에서 고인 빗물이 후드득 하고 떨어졌다. 머리 허리 허벅지까지 온통 빗물 0으로 인해 생쥐꼴이 되어갔다. 가파른 등산로를 굽이굽이 올라가는데 저만치 가파른 왼편으로 높은 축대가 보였다. 대개 큰 사찰이 있는 주변엔 작은 암자가 포진해 있기 마련이다. 그곳이 암자란 걸 금방 알아챘다. 지금 것 올라오던 등산로와는 다르게 축대에 이르자 암자로 올라가는 길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비구니승들이 거처하는 곳 같았다. 내 예상대로였다. 자그마한 절집 한 채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인기척에 문이 열리면서 곱상한 여승 한 분이 나오셨다. 상냥한 미소로 나를 맞으며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는다. 난 자초지종을 말하고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렸다고 했다. 스님은 잠시 툇마루에 앉아 젖은 몸을 닦고 가라라 하였다. 난 마지못해 툇마루가 아닌 마당에 놓인 평상에 앉았다. 잠시 후 스님이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이번엔 머리를 깎지 않은 앳된 소녀가 다른 방에서 엉거주춤 문을 열고 나왔다. 스님이 뭐라고 말하자 소녀는 공양간으로 들어가더니 과일과 수건을 들고 내게 가져다주었다. 난 공손히 감사하단 인사를 드리고 우선 젖은 머리와 얼굴을 닦고 잘 익은 사과를 깎아 먹었다. 스님과 소녀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나 혼자 평상에 앉아 멀리 산 아래로 보이는 풍경을 감상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속으로 생각해 보았다. 잠시 들려서 바라보는 풍경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멋지지만 여기서 두문불출 살아야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일이다. 나라면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마당가에 채송화가 예쁘게 피었다. 분홍 빨강 노랑 주황 색색의 채송화가 방금 본 소녀와 함께 마음속으로 들어와 잠시나마 나를 흥분시켰다. 얼른 그곳을 빠져나와 가던 길을 걸어갔다.
길은 점점 가파르고 험해졌다. 나무의 종류와 모양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산의 능선에 따라 자라는 수종이 다른 듯했다. 숲 속 바닥은 온통 키 작은 설대로 가득 들어차 있다. 그 모습이 기이하고 낯설었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미끄러워서 몇 번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더 이상은 오르면 안 되겠다 싶어 아쉬운 발길을 뒤로 돌렸다. 올라올 때는 그렇게 멀고 힘들게 느껴졌는데 내려오는 길은 아주 짧고 홀가분하였다. 얼마간 내려가지 내리던 빗줄기는 뚝 끊어졌다. 운무가 서린 정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산하는 오솔길에서 진기한 야생화를 만나면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닐까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좀 전에 들렸던 암자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지나가는 길손이 잠시 들려 인연을 맺은 곳이라고 그것도 반가웠다. 사람이 살면서 마음을 내주고 받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인들 가슴에 남는 법이다. 비록 몇 마디 말을 붙여보지 못했지만 과일을 내주던 앳된 소녀의 고운 손과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이 생각났다. 아마 어디가 아픈 사람 같았다. 내려오는 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몇 번이나 찧었다. 우리 일행이 머무는 금산사 절집이 저기 보인다. 그 새 해가 중천에 떴다. 아직 검은 구름이 군데군데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올라갔던 모악산을 바라보았다. 높은 정상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하늘 구름에 비친 모악산 정상의 철탑 그림자를 보았다. 구름에 가려 철탑은 보이지 않았으나 구름 너머 정상에 우뚝 서있는 철탑이 햇빛에 비치면서 그 그림자가 구름에 서린 것이다. 아 얼마나 환상적이고 아름답던지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것이 일상화된 요즘 같으면 얼른 그 장면을 사진에 담았을 것이지만 그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때에 보았던 구름 속 모악산 철탑 그림자를 잊지 못한다.
금산사에 가을이 왔다.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지고 떨어진 은행잎은 사방으로 나부끼며 흩어졌다. 청 재킷을 걸치고 서늘한 가을 산사를 이리저리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막바지 실측조사를 진행하였다. 세월은 살같이 흘러 십일 월이 되었다. 집에서 편지 한 통이 왔다. 봉투를 뜯어보니 군 입대 영장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병무청에서 신검을 받았는데 갑종 판단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한편 두렵기도 했고 한편 염려도 되었다. 선배들은 올 것이 왔다면서 나를 놀리고 장난을 쳤다. 정신이 산만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그날 선배들께 “지금부터 저 단독으로 하루일과를 보낼 작정이니 아무것도 시키지 마세요.”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선배들은 웃으며 네 맘대로 하라고 하였다.
선배들이 그린 미륵전 단면도를 벽에 붙였다. 다른 한쪽 벽엔 평면도와 앙시도를 붙였다. 그 앞에 대판을 펼쳐놓고 앉았다. 그동안 제대로 된 건물 도면 한 장도 그려보지 못한 게 너무나 억울했다. 군데 가기 전 기본적인 도면작도를 완벽하게 익히고 싶었는데 약 이년 반이란 직장생활을 하였어도 그럴 기회를 허락받지 못했다. 어떻게 한 방에 도면을 이해할 수 없을까 고민하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륵전 내 외부 투시도를 그려보기로 맘을 먹었다. 전지에 해당하는 흰 종이를 바닥에 붙이고 3 소점 투시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다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얼른 미륵전으로 달려가 스케치해 왔다. 그림은 조금씩 형태를 갖춰나갔다. 처음엔 정기사가 뭘 그리나 궁금해하던 선배들도 점차 미륵전 내 외부 투시도가 모습을 드러내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덩달아 신이 난 나는 밤낮없이 그 일에 몰두하였다. 입대일은 점점 코앞으로 다가왔다. 생각 같아선 며칠이라도 고향집에서 쉬었다 입대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난 이 그림을 꼭 완성하고 싶었다. 약 일주일 후 전지 위에 미륵전 내 외부 투시도가 완성되었다. 그걸 다시 트레팔지 위에 잉킹작업을 하였다. 약 열흘 만에 그림은 완성되었다. 투시도 한 장으로 전체 도면을 이해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그림을 그리는 내내 내 머릿속은 도판 그림과 함께 3차원으로 미륵전에 대한 영상이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에 목구조의 결구와 가구구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투시도를 그리고 나서 선배들이 그린 미륵전 도면이 눈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그대로 들어왔다. 비록 일일이 해당도면들을 그려보진 못했지만 미륵전에 대한 도면이 내게 한꺼번에 각인된 셈이다.
군에 입대(1986.11.14.)하고 얼마 안 가서 금산사에서 큰 불이 났다. 내가 절을 떠나오기 직전에도 한 밤중에 절간에서 크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었다 사람 사는 곳이니 수도에 정진하는 곳이라도 시시비비는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고 난 입영날짜를 삼일 앞두고 금산사를 떠나왔다. 그런데 얼마 뒤에 사찰에서 방화사건(1986.12.6.)이 터졌다. 처음엔 미륵전 뒷문(높이가 약 3m)에 불을 붙였으나 창호지만 그슬리고 불이 붙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엔 일곱 불상을 봉안하고 있는 대적광전에 불을 질렀다. 결국 대적광전은 잿더미로 주저앉았다. 후일에 우리가 앞서 정밀실측한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다는 소식을 군사신문을 통해 읽은 기억이 난다. 이 사건은 끝내 미궁속으로 빠진 것으로 안다. 이 일로 당시 현장에 남았던 사무실 선배들이 밤샘 취조를 당하며 무척 힘들어했다는 얘길 들었다. 먼 옛이야기 같지만 불과 삼십팔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한 사람의 기억에도 이런 역사의 기록들이 남았는데 하물며 기록화된 역사의 뒷이야기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들어 있을까 그 중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숱한 사건들이 있다. 당시 연루되었던 피해자들의 가슴 속엔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어도 여전히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면 어쩔 텐가. 그저 남 일이라고 무시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관심을 갖고 함께 가슴 아파해야 하는 것일까. 누가 뭐란다고 생각해 볼일도 아니다. 그런 건 개인적인 생각에 맡길 따름이니까. 최근 한 강의 노벨상 소식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그러면서 한 편으론 그의 작품에 앙심을 품고 노벨상의 발상지까지 찾아가 한 강의 작품을 폄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어떤 사건엔 억울한 사람이 반드시 끼어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지난 과거를 하나의 작품으로 그려낸 작가를 패대기치는 오만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설령 본인이 그런 피해자의 한 사람일지라도 작가에게 몰매를 돌리는 건 무식한 행동이다. 정말 그에게 그런 행동을 보이고 싶다면 직접 국가를 상대로 소송할 일이다. 내가 본 사건은 그저 내가 본 대로 느낄 뿐이다. 그걸 왜 네 맘대로 느끼냐고 따지는 건 말도 안 된다. 사람에 따라 보고 느끼는 건 자유요 가지각색이란 걸 왜 모르나.
언젠가 금산사가 그리워서 한 번 찾아가 보았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변해 버린 것에 적잖이 실망을 하였다. 문화재 보수란 이름하에 과거의 아름다웠던 원형(그것도 변형된 것일 수 있겠지만)이 너무도 훼손되어 있었다. 건물 배치도 발굴을 전제로 그랬는지 모르나 상당수가 철거되고 새롭게 조성되었다. 새로 조성된 것까진 좋으나 그 형국이 너무 인위적이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금강계단 주변도 반듯한 화강석으로 교체보수 되면서 이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 뒤론 금산사를 찾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청춘의 한 때를 보낸 곳이다. 마당에 앉아 홍시를 나눠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 꽃을 피우던 지광스님은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새하얀 모시적삼을 입고 가야금을 연주하시던 노승은 이미 작고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분( 당시 국립국악원장 퇴임 후 노후를 그곳 암자에서 보냈음)의 여유로운 가야금 연주를 실측조사를 하던 미륵전 중층 발판에 누워서 낮잠을 자다 듣고 나도 속세의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지고 중이 되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금산사는 나와는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은 국가유산이다. 언젠가 한 번은 다시 찾아가 옛 추억을 더듬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