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신라 문무왕의 생부는 연개소문
제목이 쇼킹하다.
이러한 놀라운 해석이 내가 이 연재물을 스크랩해 두고 30년을 보관한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 이영희 선생은 이 이야기를 「삼국유사」에서, 그리고 일본의 고대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 여사의 저서를 통해 풀어나간다.
「삼국유사」 속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의 이야기 속에는 김유신의 두 누이 보희와 문희가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김유신은 김춘추와 자신의 누이 문희의 연을 이어주려고, 일부러 자기 집 근처에서 공 차기를 하다,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찢어놓고 집안에 데리고 들어가 문희에게 바느질하게 했다.
그리고 그의 계획대로 두 사람이 연을 맺어 혼전임신을 하게 만들었다.
김유신은 그 사실을 소문나게 하고 혼전 임신한 누이를 태워죽이겠다고 온 나라에 소문을 냈다.
그리고 당시의 임금인 선덕여왕이 경주 남산으로 행차하던 날을 택해 장작불을 지펴 연기가 나게 했다.
여왕이 그 연기를 보고 자초지종을 알아본 결과 아이의 아비가 김춘추인 것을 알고, 여인의 생명을 구하라고 다그치고 결국 김춘추는 문희와 혼례를 치른다.
그리고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 법민이 태종 김춘추를 이어 문무왕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삼국유사」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는 김유신이 애초에 연을 맺어주려 했던 누이는 언니인 보희였다고 한다.
그런데 보희가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병 때문에 나오지 않았다는 주석을 달고 있단다).
왕이 된 법민(문무왕)이 친당(親唐) 정책을 펴던 아버지 태종과는 달리 반당(反唐)으로 돌아서자,
당나라에서는 동생 김인문을 왕으로 봉하고 신라를 침공했다.
이것은 형제간의 갈등을 부채질하는 중대한 도발이었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일본 고대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의 저서 내용을 등장시킨다.
‘문무왕의 친아버지는 태종 무열왕(김춘추)이 아니라 연개소문’이라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생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삼국사기」, 「신구당서」 등에 의하면 666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664년 10월이라고 명기하면서 그의 아들 남생, 남건, 남산에게 남긴 유언장까지 싣고 있다.
고바야시 여사는 연개소문이 664년 10월에 일본에 망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8년 후인 672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아
일본의 천황위(天皇位)에 오른 천무왕이 바로 연개소문이고,
신라 문무왕도 일본에 망명하여 일본 문무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소개한다.
일본의 제40대 왕인 천무(673-686 재위)와 42대 왕 문무(697-707 재위)가 바로 그들이며, 「일본서기」, 「속일본기」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로 기술되어 있지만 실은 부자지간이라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여기에 더해 단재 신채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서도 우리 중부 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온 <갓쉰동전>의 주인공이 바로 연개소문이라고 밝힌다고 말한다.
<갓쉰동전>의 내용은 이러하다.
‘연국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갓 쉰 살이 되던 해에 비로소 아들을 얻어 ‘갓쉰동’이라는 이름으로 키웠는데 ,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어떤 도사가 나타나 이 아이를 보고 한탄하더란다.
그래서 재상이 그 이유를 묻자 “이 아이에게는 공명과 부귀가 무궁하나, 수명이 짧아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다만 15년 동안 부모가 아이를 버리고 만나지 않으면 그 액을 때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더란다.
결국 부모는 아이의 등에 ‘갓쉰동’이란 글자를 새겨 멀리 내다 버리고 만다.
그런데 그 먼 곳에 사는 마을의 대가댁 영감이, 전날 밤 꿈에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 개울가에서 사내아이를 발견하여 데려다 키웠다.
그 댁에는 문희, 경희, 영희라는 세 딸이 있었는데 막내 영희가 착하고 영특하였다.
나중에 ‘갓쉰동’은 ‘달딸국’이란 나라를 통일하여 영희와 결혼하여 잘 살았다.
이 이야기에 대해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의 일생을 조선조 때에 소설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개소문의 별명 ‘개금(蓋金)’은 ‘갓쉰’이란 우리말을 이두체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연개소문은 또 ‘금해(金海)’라고도 불렸는데 그가 지어낸 금해병서(金海兵書)라는 책자는 고려 때까지 역대 왕들이 절도사들에게 하사했던 유명한 병법서였다고 단재는 밝히고 있다.
일본의 천무왕 또한 전략 전술에 탁월했는데, 왕이 되기 전 이름은 대해인(大海人)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 지통은 가야계 도래인인 김정흥의 후손이었다.
이와 같이 연개소문과 개금, 금해, 대해인, 천무의 이름과 상황에는 두 인물 사이에 적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막연한 추리에 의해서가 아닌데, 고바야시 여사의 추정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속일본기」 ,「신구당서」, 「자치통감」 등 한-일-중 3국의 고대 문헌을 세밀히 비교 분석한 결과에 근거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결론적으로 연개소문은 일찍이 부모의 슬하를 떠나 고생할 때 김유신의 누이동생 보희와 관계를 맺어 얻은 첫아들이 법민(문무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보희가 밴 아이를 문희의 아이처럼 꾸며서 김춘추의 아들로 입적시켰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 대한 사실 여부는 사학자끼리 논쟁하여 규명할 일이라고 작가는 슬며시 빠진다.
다만 이런 맥락에서 볼 때 7세기 말에 읊어진 「만엽집」을 우리말로 해독한 내용들과 흐름이 일치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일본 문무왕이 요시노 궁으로 거동했을 때 지은 노래를 독자 스스로 풀어보라며 수수께끼 같은 힌트를 내놓는다.
그 힌트대로 해석하면 차마 옮길 수 없을 만큼 적나라한 성애가라고 하면서....
이 글은 1993년 5월 30일부터 조선일보 일요판에 연재된 기획물 ‘노래하는 역사’를 간추린 내용이다.
더불어 스크랩한 신문의 뒷면에 실린 30년 전의 사회 실상을 추억하는 내용을 덧대었다.
작가 李寧熙(1931-2021) 선생은 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화작가, 한국일보 기자,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만엽집(萬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요슈)
8세기 나라 시대에 편찬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모음집( 20권 4,516수).
5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시가이지만 대부분 7세기 초반에서 8세기 중반에 지어짐.
당시 일본에는 문자가 없어 우리의 향찰(이두 문자)와 비슷하게 일본어 발음을 한자로 표기.
그러나 문자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않아,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현재도 정확한 의미가 불분명한 것들이 있다.
만요슈의 많은 노래는 중국, 한반도(특히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30년 전쯤에
광고 : 하노백
그 당시 영양제에 관심을 가질 나이는 아니었지만 분명 내 부모에게는 필요하셨을 것이라는 때늦은 후회를 해본다.
‘천연성분 토코패롤’이라는 광고 카피는 많이 들어본 것 같고, ‘하노백’이라는 이름도 ‘한오백’년에서 따온 듯싶다.
모델 중 엄마 얼굴이 왠지 낯익어 ‘정영숙’배우인가 했더니 검색 결과는 ‘김윤경’ 배우로 소개하고 있다.
주식 시세표
주식은 장기 보유하며 자손에게 물려주라는 말이 맞나 싶어 30년 전 시세와 오늘 현재 시세를 확인해 보았다.
몇몇 대표적 기업을 비교해보니 주당 2~4배 정도 상승하긴 하였지만, 표에 나와 있는 기업 중엔 사라진 기업도 꽤 많다.
떼돈 버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어디 부동산을 따라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