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숭모재, 반학정, 서락서당
프롤로그
지금까지 하빈면 하산리 하목정에서 출발해 기곡리 이유재, 고령 상곡 장육당, 다사읍 부곡리 부림정, 하목정 내에 있는 전양군 불천위사당, 주곡리 숙연재 등을 살펴보았다. 이들 건축물의 공통점은 전의이씨 예산공 종중 각 지파 문중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이 중에는 400년 전 선조가 직접 짓고 살았던 별당채·정자도 있었고,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재실과 사당도 있었다. 문중은 대체로 ‘재실’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재실은 문중을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앞서 살펴본 여섯 곳 외에 대구 달성과 고령 다산 인근에 산재한 또 다른 전의이씨 예산공파 문중 건물에 대해 알아보자.
문중문화를 담고 있는 문중 재실
대구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지산·시지·율하·불로·무태·칠곡·성서·화원·옥포·현풍 등 많은 신도시가 있다. 특히 대구 달성권은 지금도 농촌과 도시, 전통과 현대가 상생하며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렇다보니 대구 달성에는 대구의 ‘문중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중유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70-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도시개발붐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 문중문화와 문중유적은 대구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는 몇 몇 뜻있는 문중의 관심과 노력 덕분이었다.
대구에서 문중문화와 관련 있는 문중유적 중 수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재실齋室이다. 재실은 다른 말로 재사齋舍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하는데, 용도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다.
▖연거14)·강학형 : 적당한 터에 집을 지어 한가롭게 거처하거나 강학을 목적으로 하는 건물.
▖재계15)·제사형 : 묘제를 포함한 각종 제사를 앞두고 재계, 준비, 제사를 행하는 건물.
14) 燕居 : 일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평상의 일상을 말함. 한거閒居라고도 한다.
15) 齊戒·齋戒 : 제사를 앞두고 행동과 마음가짐을 조심히 하는 절차.
하지만 지금은 이 같은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 대부분 재실이 묘제나 제사를 위한 공간, 선조를 추모하고 기리는 공간, 문중모임 장소 등 복합적인 용도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재실은 어떤 곳에 세웠을까? 재실 입지 선정기준은 기본적으로 ‘문중 세거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거를 목적으로 한 재실이든, 묘제를 위한 재실이든 간에 문중 재실은 기본적으로 문중 세거지를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대구에는 몇 개 정도의 재실이 존재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우리 대구에는 지금도 약 400개 가까운 재실이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400개 재실 중 절반에 가까운 200여개가 달성군에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재실 수는 누정·정사·서원·서당·정려각 등 문중문화와 관련 있는 모든 건축물을 포함한 수다.
이처럼 문중과 재실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다. 이 둘의 관계를 컴퓨터에 비유하면 재실은 하드웨어, 문중은 소프트웨어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컴퓨터는 본체에 해당하는 하드웨어와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서로 조화를 이뤄야 제대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재실과 문중도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문중 없는 재실 없고, 재실 없는 문중 없는 법이다.
기곡리 터실 숭모재16)
앞서 우리는 전의이씨 예산공파 모든 종중원들의 혈연적 뿌리요, 정신적 귀의처라 할 수 있는 기곡리 터실 선영과 이유재를 살펴본 바가 있다. 터실 선영과 이유재 가는 길에 우리가 잘 모르는 또 하나의 재실이 있다. 터실 초입에 있는 재실로 선영과 이유재와는 거리가 15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재실은 숭모재崇慕齋로 전의이씨 19세世 진사공 이유李瑜[1609-1653]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한 재실이다.
이유는 수월당 이지영의 7남 3녀 중 2남이다.[이지영은 슬하에 이전·이유·이구·이민·이신·이박·이곤 아들 7명과 출가한 딸 3명을 두었다] 그의 자는 중온中溫이고 1651년(효종 2) 43세의 나이로 진사에 합격했다. 부인은 완산이씨인데 문과 출신으로 목사를 지낸 이영식의 딸이다. 이유는 완산이씨와의 사이에서 이시주·이정주·이천주·이우주·이하주 5남과 출가한 딸 3녀를 뒀다. 이유의 후손 중에는 크게 입신한 인물은 없으나 이유의 현손대에서 이응신李應臣[1719-1790]과 이응신의 누이인 이신옥李臣玉[1723-1748]이 세상에 이름을 남겼다.
이응신은 자가 성능聖能, 호는 학옹鶴翁이다. 영천의 큰 학자인 매산 정중기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해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고 소산 이광정, 후산 이종수 등과 교유했다. 하산 출신 이응신이 영천 땅 정중기의 문하에 들게 된 것은 일찍 어머니[연일정씨]를 잃고 누이와 함께 외가인 영천 선원마을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누이 이신옥은 24세에 혼례를 올리고 6개월 만에 남편이 죽자, 25세 젊은 나이로 남편의 뒤를 따른 여인이다. 이러한 연유로 그녀는 영조로부터 효열부 정려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효열부 정려보다 더 크고 중요한 업적을 남긴 여인이다. 죽기 전 남편에게 고한 ‘제문’과 ‘절명사’가 지금까지 남아 전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숭모재는 오래된 건물은 아니다. 1968년 다른 곳에서 건물 한 채를 구입, 이건해 재실로 조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숭모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은 방이며, 전면으로는 반 칸 퇴를 두고 모두 유리창호를 설치했다. 대청에 올라서면 정면에 숭모재 편액이 있고, 여느 예산공파 문중 재실처럼 동쪽 벽에는 ‘전의이씨수월당공파진사공문중세계도’가 걸려 있다. 대청 종도리에는 상량묵서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8년 3월 26일 기둥을 세우고, 3월 27일 오시[11-13시]에 상량”
그런데 숭모재 내부에는 다른 예산공파 문중 재실에는 다 있는 세종대왕 친필 ‘가전충효세수인경’ 여덟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다. 건물 전면 다섯 기둥에 그 뜻을 풀어 5폭 주련으로 걸어 두었기 때문이다.
16)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 750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차남마을 반학정
차남 입향조 반학정 이복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서쪽에 월성리가 있다. 월성리에는 자연부락으로 술래미·바래미·윗놉닥·장자골·노움방 등이 있다. 이중 술래미는 마을을 둘러싼 남쪽 산등성이가 마치 수레바퀴를 닮았다 해서 술래미인데, ‘수레 거車’자를 써 ‘차남車南’이라고도 한다. 차남은 250년이 넘는 전의이씨 반학정공파 세거지다.
차남에 처음 터를 잡은 이는 이복후李復厚[1688-1775]라는 인물로 자字는 형만亨萬, 호는 반학정伴鶴亭이다. 그의 고조부는 전의이씨 상곡 입향조 다포 이지화, 증조부는 장육당 이윤, 할아버지는 이시상, 아버지는 성균 생원 이익혐이다. 그는 아버지 이익혐과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에서 5남4녀 중 둘째 아들로 상곡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학문을 익혀 문장에 뛰어났고 특히 사서四書[유교 경전인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총칭]에 밝았다. 36세 때인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올랐지만, 이후 대과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성현의 도를 익히는 학업에만 열중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그의 집을 ‘오부자등과댁五父子登科宅’이라 불렀다. 자신을 포함한 아버지 이익혐과 1남 이곤후가 생원[1729년], 3남 이관후는 문과[1725년], 4남 이항후가 무과에 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학덕으로 이름이 나 한강 정구 선생을 제향한 성주 회연서원 원장을 세 번이나 지내기도 했다. 말년에 노다강老多江 가에 반학정을 짓고 여생을 보내다 1775년(영조 51)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모두 세 분인데 초배初配 지평 손덕승의 딸 월성손씨는 자녀를 두지 못했고, 후배後配 생원 송준의 딸 여산송씨는 딸 넷을 두었으며, 삼배三配 이동형의 딸 성주이씨는 아들 이정신·이갑신·이묘신·이임신 넷을 두었다. 묘소는 고령군 본면 벌지리 갈티골에 있다.
학과 짝하며 여생을 보내다, 반학정17)
반학정 이복후는 말년에 노다강老多江[낙동강] 변에 반학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노다강은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낙동강변에 형성된 바위절벽 노다암 인근 낙동강을 이르는 말이다. ‘디지털고령문화대전’에는 ‘노다’의 지명유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선생이 영조 임금의 아들[사도세자]의 경종사호景宗賜號 문제로 장희빈에게 휘말리어 제주도로 귀향을 가게 되었다. 이때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고령군 다산면 삼동의 동쪽 낙동강 가에 있는 마을인 송곡리의 많은 백성이 귀양을 가는 송시열 선생을 환영 차 나왔는데, 우암 선생이 잠깐 쉬어갈 때 ‘노인들이 많다’고 하여 노다老多라고 하였다. 이것의 음이 변하여 ‘놉대기’ 또는 ‘놉닥’이라 하고, 아래에 있다고 하여 ‘아랫놉대기, 아랫놉닥, 하로다’라 부른다고 한다. 일설에는 ‘놉대기’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노강서원老江書院이 있어 노론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서원에 많이 모였다고 하여 ‘노다’라 하였고, 이것의 음이 변하여 ‘놉닥’, ‘놉대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 사실은 우암 송시열 이전에도 이곳은 ‘노다’라 불렸다. 우암이 경종사호 문제로 유배를 간 것은 1689년(숙종 15)이었다. 그런데 그 보다 72년 앞선 기록에도 ‘노다암’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강 정구[1543-1620]는 1617년(광해군 9) 여름, 신병치료차 제자들과 함께 뱃길과 육로를 이용해 46일간 동래온천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때 한강 제자 석담 이윤우[1569-1634]가 봉산욕행록이란 기록을 남겼다. 봉산욕행록 출발 1일차[1617.7.20] 기록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노다암’ 위를 바라보니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고, ‘노다암’ 아래에는 천막이 높이 쳐져 있었다. 이육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향소鄕所의 사람들인데 선생을 위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다가가서 보니 백사장 위에 천막을 설치하였는데 과연 향소의 임원들이었고···
어쨌든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 이복후가 최초 건립한 반학정 위치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다. 현 위치에서 남서쪽으로 약 2km정도 떨어진 낙동강변이었다. 당시 반학정은 뒤로는 가야산과 의봉산 자락이 병풍처럼 두르고, 앞으로는 낙동강과 비슬산·도미봉이 조망되는 낙동강가 경승지였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반학정도 세월의 흐름에 퇴락하다 결국 그 자취만 남게 됐다. 1960년대 초 후손들이 나서 사라진 반학정 중건사업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로부터 또 40여 년이 흐른 2007년 1월. 후손들은 다시 선조의 뜻을 새기며 복원사업을 추진, 2008년 지금의 차남마을로 옮겨 반학정을 중건했다. 비록 반학정 위치가 본래 자리는 아니지만, 반학정 이복후가 상곡을 떠나 후손들의 번영을 기원하며 새롭게 터를 연 차남마을이기에 의미가 있다.
현재 반학정은 차남마을 입구에 있다. 솟을삼문을 갖춘 흙돌담 안에 있는 반학정은 재실치고는 규모가 상당히 크다. 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뜰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반학정이 있고, 우측에 ‘성균생원반학정전의이공휘복후유허비’와 ‘반학정중건비’가 있다. 반학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양식으로 전면 5칸에는 모두 띠살문을 설치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가운데 3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은 방이다. 왼쪽 방은 선조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의 경모재景慕齋, 오른 쪽 방은 인을 닦는다는 뜻의 수인당修仁堂이다. 대청 정면 중앙에 ‘반학정중건기문’이 걸려 있고, 좌우에 각각 전의이씨 선대 세계도와 반학정공파 세계도가 걸려 있다. 수인당 쪽 벽에는 전의이씨 종중의 가보라고 할 수 있는 세종대왕 어필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자 액자도 걸려 있다. 대청 천정을 올려다보면 대청 종도리에 상량문이 있다. 우리말로 옮겨보면 이렇다.
“서기 2007년 정해년 음력 8월 12일 오시[11시-13시] 자좌오향[정남향]터에 상량. 상량 이후 반학정 선조의 유업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차남마을 우리 문중이 대대로 번영하기를 기원 합니다”
17) 경북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200-2
고령 다산면 상곡리 서락서당
구한말 영남 큰 선비 만구 이종기
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를 꼽을 때 꼭 빠지지 않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종기李種杞[1837-1902]다. 그의 초명初名은 이종도李種燾, 호는 만구晩求 혹은 다원거사茶園居士, 자字는 기여器汝다. 고령 상곡에서 생부生父 소로小盧 이능용과 생모 광주이씨廣州李氏 사이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나, 이후 당숙인 이현용李鉉容의 양자로 들어갔다.
전의이씨 고령 입향조 다포 이지화의 9세손인 그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글재주로 세상을 여러 번 놀라게 했다. 그는 3-4세 때까지는 말도 못하고 걸음도 못했는데, 특이하게도 주변에서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면 기어가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5세 때 비로소 말문이 열리고 글공부를 시작, 7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었다. 이때 생부 이능용은 아들의 학문이 너무 조숙함을 염려해 10세까지 학문을 잠시 중단시켰다고 한다. 13세에 이르러 각종 유교 경전과 역사서 그리고 당송팔대가의 글을 읽었다. 14세에 성주 회연서원 강회에 참석해 예리하고 정확한 질문으로 선배 유학자들을 당황케 한 일도 있었다. 이듬해 고을에서 열리는 향시에 응시했는데, 이때 유명한 일화 하나가 전한다.
향시를 앞두고 그의 생부가 향시 관계자였던 자신의 처남에게 시험 청탁을 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종기는 “임금을 섬기려는 자가 어찌 임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라며 아버지의 시험 청탁을 거절하고 향시에 응했다. 향시를 보는 시험장에서도 일이 있었다. 그의 답안 작성 속도는 남들보다 월등히 빨랐다. 하지만 답안 작성을 거의 마친 그는 무슨 까닭인지 시 마지막 한 구를 마무리하지 않은 채 자꾸만 시험장 주변을 살피는 것이었다. 이를 본 관리가 빨리 답안지 작성을 마무리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이렇게 답을 했다. “아랫사람이 어른보다 먼저 쓸 수 없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학문은 가학家學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의 학문적 연원은 퇴계에까지 닿아 있다. 그의 집안이 퇴계학을 이은 대산 이상정[1711-1781]의 학맥을 이어받았고, 그 스스로도 퇴계를 이어 조선후기 영남학파를 이끌었던 대산 이상정과 정재 류치명[1777-1861]을 사숙私淑[가르침을 직접 받지는 않았으나 그 사람의 인격이나 학문을 본으로 삼고 배움]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조선말 근기 실학파를 대표했던 성재 허전[1797-1886]과도 교유했다.
그의 학문은 좀 특별난 데가 있었다. 특정 학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인 학문 활동을 했는데, 당시 영남학파를 이끌었던 거유巨儒 장복추·이진상·김흥락 등 어느 학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학덕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평생을 향리에서 처사로 살았다. 조정에서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에게 금오랑 의금부도사의 벼슬을 제수했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헛된 이름으로 왕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의 학문과 덕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동시대를 산 선배 유학자 고헌 정래석[1808-1893]과 사미헌 장복추[1815-1900] 같은 인물도 후배 학자인 그를 중히 여기고 의지했다는 사실이다. 또 서산 김흥락[1827-1899]은 그를 ‘사표師表’[학식·덕행이 높아 남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로 칭찬했고, 임종할 때 평생 그를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한 것을 탄식하며, 자제들에게 뒷일을 그에게 맡길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그 해에는 도산서원 원장도 지냈다.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 수는 약 200명이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수파 안효제, 금주 허채, 성헌 이병희, 위산 조용섭, 눌재 김병린, 수봉 문영박 등이 있다.
한편 학자로서는 세상에 이름이 난 그였지만 삶은 녹록치가 않았다. 어릴 때 그의 집은 남의 밭 몇 두락을 빌려 농사를 지을 만큼 가난했다. 당시 그는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콩잎에다 글을 썼고, 그 콩잎들을 마치 책처럼 한 곳에 모아 두기도 했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해 결국 그는 출생지인 상곡을 떠나 낙동강 건너 하산으로 이사했다. 하산에서 모친상을 치르고 난 후 다시 동곡에서 잠시 우거하다 고향 상곡으로 돌아왔다. 이후 초배인 광산이씨光山李氏를 잃고 난 뒤에는 밀양에 있는 이모집에 머물렀으며, 후배인 밀양박씨와 혼인 후 다산과 관동을 거쳐 다시 고향 상곡으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상곡 서락서당에서 강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구한말 영남의 큰 선비로 칭송받는 것은 그의 장례에 모인 추모객 수만 봐도 알 수 있다. 1902년 음력 3월 28일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난 그의 장례에는 전국에서 1천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그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심산 김창숙의 여동생과 혼인한 아들 이영로李泳魯는 김창숙과 함께 항일활동을 한 공로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묘소는 다산면 월성리 산99번지에 있다.
만구 이종기를 기리는 서락서당18)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에 있는 서락서당西洛書堂은 만구 이종기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892년(고종 29) 그의 문인과 후손이 중심이 된 ‘서락서당 영건계營建契’에 의해 처음 건립됐다. 이후 서락서당은 두 번 자리를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 자리는 지금의 상곡리 마을회관 앞이며, 1926년 지금의 장육당 인근[다산면 상곡리 465번지]으로 옮긴 것이 두 번째 자리, 1951년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 세 번째 자리다.
1902년 이종기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가 뒤를 이어 서락서당을 이끌었고, 1946년 이기로마저 세상을 떠나자 이종기, 이기로로 이어진 서락서당 강학은 끝이 났다. 서락서당은 강학활동 외에도 기념비적인 일을 한 바가 있다. 시골의 작은 서당으로서는 쉽게 할 수 없는 문집출판을 한 것. 이종기 사후 6년 후인 1907년 이종기의 아들 이영로가 주도하고 척암 김도화가 교정을 맡아 만구선생문집(원집) 17권 10책 목판본19)을 발간하고, 1936년에는 속집 8권 4책 석인본石印本을 간행했다.
1950년 6·25한국전쟁 때 안타깝게도 서락서당은 소실됐다. 서락서당에서 소장하고 있던 수많은 문적도 불에 타 한 줌 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듬해인 1951년 그의 제자들과 후손들이 나서 다시 서당을 세웠으니, 직전 위치에서 북쪽으로 70m 쯤 옮긴 지금의 서락서당이다. 당시 서락서당 이건에는 그의 후손과 제자를 비롯한 영남 16개 지역[고령·성주·대구달성·칠곡·김천·영천·청도·창녕·밀양·의령·합천·초계·창원·칠원·함안·사천]에서 1,537명이 모금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서락서당은 없던 건물을 새로 건립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상곡에는 천석군으로 알려진 전의이씨 참봉댁이 있었다. 6·25한국전쟁 때 참봉댁은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고 사랑채만 살아남았다. 이때 살아남은 사랑채를 서당으로 리모델링(?) 한 것이 바로 지금의 서락서당이다.
18) 경북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281-3
19) 현재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기탁
에필로그
전의이씨 예산공파 문중 재실은 특징이 하나 있다. 앞서 개별 문중건물을 소개할 때도 언급한 것처럼 모든 재실마다 ‘대형’ 세계도世系圖가 게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조로부터 15세 예산공 이필과 16세 참판공 이경두까지는 공통이고, 이후부터 해당 지파별로 세계도가 나눠진다. 문중 별로 세계도 크기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양식은 동일하며, 좌우 길이가 긴 것은 5m에 이를 정도로 대형이다. 문중원이라면 누구라도 이 세계도를 보면 자신의 뿌리와 현 위치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요즘은 문중원들 간에도 내왕이 드문 탓에 누가 누군지 잘 모른다. 하지만 전의이씨 예산공 문중원들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문중 행사 때 자신들의 재실 벽에 걸려 있는 세계도 아래에 서면, 누가 아제인지 조카인지, 촌수가 어찌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는 다른 성씨 문중에서도 벤치마킹하면 어떨까 싶다. 여하튼 전의이씨 예산공파 문중원들은 참 좋겠다. 선조가 물려준 유무형의 훌륭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있어서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