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수성동(壽城洞),
수성들 아래쪽에 있어 ‘하동’이라 불린 마을
개관
수성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동(新洞)을 병합해 하동(下洞)으로 하고 달성군에 편입됐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됐다. 1966년 수성동을 수성1가, 2가, 3가동으로 개칭했고, 1975년 수성1가동, 수성2·3가동으로 분동했다. 1979년 신천동 일부를 편입해 수성4가동을 신설하고, 1980년 동구에서 수성구로 편입됐다. 대구부읍지(1899) 방리조에 “수현내(守縣內)는 대구부 남쪽 10리에 있다. 소속된 동이 셋이니, 상동·중동·하동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대구시사 ‘주거불량지역분포현황’(1984년 기준)에 수성4가 ‘영세민촌’에 영세민 62세대, 주택 26동이 보인다.154)
삼덕네거리-수성교-범어네거리-남부정류장-고산으로 이어지는 옛 4호 방사선 도로(달구벌대로)는 1970-80년대에 지금의 폭 50m 도로로 확장됐다.155) 수성로는 1974년 제정된 도로명으로 ‘대구은행 네거리-중동네거리-상동네거리’ 구간이다. 주요 공공시설로는 대구광역시교육청, 대구동중학교, 대구동일초등학교, 중앙고등학교, 중앙중학교, 남산고등학교, 신명여자중학교, 대구동성초등학교, 대구수성우체국, DGB대구은행 본점, 수성세무서 등이 있다. 보호수로는 신세계타운 남서쪽 어린이집 공터에 수령 350년 느티나무가 있다.
154) 대구시, 대구시사 4권, 1995, 86-87쪽
155) 남부정류장-담티 고개 구간은 폭 35m.
지명 유래
수성동은 본래 대구부 수현내면으로 수성들 아래에 있어 하동이라 불렀다. 이후 하동(대봉교-희망교 사이) 북쪽에 새로운 마을인 ‘신하동(新下洞·수성교-대봉교 사이)‘과 ‘신동(新洞·수성교 주변)’이 생겼다. 신동과 신하동의 경우 1930년대에 현 달구벌대로 북쪽에 신동이 먼저 형성됐고, 1950년대 초 이전에 신동과 신하동이 모두 큰 마을로 성장했다. 수성동은 본래 하동과 배일촌(동구 신천동) 사이 넓은 들판 지역으로 예전에는 전부 논밭이었다. 현재 수성동은 북쪽으로 동신교, 남쪽으로 희망교, 동쪽으로 대구은행 네거리, 서쪽으로 신천이 경계이며, 신천을 사이에 두고 이천동·대봉동·삼덕동과 인접하고 있다.
1954년 항공사진에는 지금의 수성교 동쪽에 약 270호 규모의 신동과 신하동, 대봉교-희망교 사이에 약 140호 규모의 하동이 보인다. 조선지지자료(1910년대초) 에는 수성동 지명으로 수문진(水門津·아래방천나루), 개불보(介佛洑) 등이 등재되어 있다. 수문진은 신천을 통한 수로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지금의 수성교처럼 신천 동서를 잇는 역할을 했던 나루로 보인다. 봄·여름에는 배로 건너고 가을·겨울에는 다리를 설치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때 개통된 수성교에 비해 대봉교와 희망교는 한참 뒤에 개통됐다. 대봉교는 1970-72년 사이에 개통됐으며, 희망교는 1993년 개통됐다.
대륜중고등학교, UN군 포로수용소, 부관학교
과거 수성동에는 학교가 많았다. 대구농업고등학교, 오성중고등학교, 남산여자고등학교, 신명여자중학교, 대륜중고등학교 등이다. 이중 대륜중고등학교에 대해 지명조사철(1959)에는 “24년 전에 건립. 6·25동란으로 UN군이 점령하여 포로수용소로 3년간 이용하였고, 현재 부관학교로 교사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산나무
수성1가 당산나무는 수성1가동 신세계 아파트(옛 대륜고) 남쪽에 있는 세 그루 느티나무로 수령은 250-400년이다. 본래 네 그루가 있었는데 20여 년 전 동네 아이들 불장난으로 한 그루가 죽었다. 수성1가 느티나무는 옛날부터 마을 수호신이 깃든 당산목으로 모셔졌다. 오랜 세월 주민들은 음력 정월 보름이면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기원하는 당제를 이곳에서 지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당제를 지낸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오래전 이곳 당산에는 본래 일곱 그루 당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세 그루 나무 중 남쪽에 있는 것이 가장 굵은데 가슴높이 둘레 5m, 전체 나무높이 15m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수성1가 당산나무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에 주둔했던 일본 보병 80연대 일부 병력이 한여름 훈련을 하다가 이 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이때 일부 몰지각한 일본 군인들이 나무둥치를 발로 차기도 하고, 나무 위에 걸터앉아 가지를 꺾기도 했다. 당산목에 대한 이들의 행패를 보다 못한 한 노인이 “이 나무는 마을 수호신이니 무례한 행동을 삼갈 것”을 청했다. 이 말을 들은 일본 군인은 그따위 미신이 어디 있느냐며 비웃으며 나무 아래 쌓인 보리 짚 더미에 불을 질렀다. 동민들은 겁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들의 만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보리 짚 더미를 다 태운 불은 신기하게도 느티나무로는 번지지 않았고, 불을 지른 일본 군인은 그 자리에서 게거품을 물고 사지를 뒤틀며 급사했다고 한다.156)
156)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 우리고장대구, 1988, 367쪽.
당촌(堂村)
당촌은 수성1가동에 있었던 자연부락이다. 당촌이란 이름은 마을에 있었던 당산나무에서 유래됐다. 당촌에는 500년 된 당산나무 전설이 전한다. 옛날 이곳에는 사형장이 있었다고 한다. 한 사형수의 아버지가 사형장에서 죽은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짚고 있던 지팡이를 꽂고 위안제를 지냈는데, 그 지팡이가 살아서 당산나무가 됐다는 전설이다.157) 구술자료에는 당촌 위치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현 신세계 아파트(옛 대륜고) 남쪽 세 그루 느티나무가 자리한 마을로 추정된다.
157) 대구시, 대구지명유래총람, 2009, 제보자: 상동, 곽태곤, 81세, 남, 채록일자 2009.1.12 / 수성1가, 최영숙, 84세, 남, 채록일자 2008.7.7.
수성들·한들
수성들은 수성구 상동·중동·하동(수성동)에 걸쳐 있는 넓은 들판 이름이다. 신천·범어천·수성못 등을 수원으로 하는 수성들은 물이 좋고 땅이 넓고 기름져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아온 곳이다. 과거 수성들에는 신천을 따라 청동기시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인 지석묘군(고인돌)을 들 수 있다. 수성들은 다른 말로 들이 크고 넓어 '한들'이라고도 불렀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수성못둑에서 지금의 수성네거리 교보빌딩에 이르는 신천과 범어천 사이는 신천변에만 상동·중동·하동(수성동) 마을이 있고, 나머지는 오직 들만 펼쳐져 있다. 당시 수성들은 남북 약 4km, 동서 약 1.5km에 이르는 광대한 들판이었다. 지명조사철(1959)에는 수성들에 대해 “과거 수성면 시대에 수성면의 제일 큰 들이라 하여 수성들이라고 불러왔으며 수성못의 몽리 지구는 500여 정보(150만 평)에 달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