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이 독일 분데스리가 79~80시즌에 프랑크푸르트 유니폼을 입고 실질적인 데뷔 시즌을 치르면서 얻어낸 결과는 눈부신 것이었다. 31경기를 뛰면서 12골을 넣어 분데스리가 득점랭킹 7위에 당당히 올랐다. 첫 시즌을 시작하면서 내심 기대했던 두 자릿 수 득점을 초과 달성했다. 또 80년 5월 21일 유럽축구연맹(UEFA)컵 결승 2차전 보루시아MG와 경기에서 1-0 승리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이른바 'UEFA 마이스타'(UEFA컵 챔피언을 지칭)의 자리에 등극한다. 그해 1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던 월드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1년 남짓의 기간 동안 차범근은 엄청난 일을 해냈다. 당연히 그 자신의 '신분'에도 큰 변화가 따랐다. 당시만 해도 축구 후진국 취급을 받던 한국에서 온 한 사나이가 이런 깜짝 놀랄 만큼의 성과를 이뤄낼 지는 아무도 몰랐다.
주간스포츠 80년 1월2일자는 차범근이 82년 스페인월드컵 예선에 국가대표로 뛸수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커버로 다뤘다. 하지만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
◇차범근이 한국의 프로시대를 앞당기다 (주간스포츠 79년 12월 19일자)
차범근의 성공시대는 동시대를 살았던 축구인들에게 거대한 충격이었다. 대표팀에서 차범근과 손발을 맞췄던 한국의 일급 선수들은 차범근의 성공을 부러움 반,시샘 반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또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엄청난 자극이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도 '차범근 쇼크'에 전전긍긍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프로선수로 탈바꿈한 차범근이 벌어 들이는 소득이 워낙 엄청나다 보니 국내 대표선수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이 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은 당시 최순영 축구협회장이 "국내에도 빨리 프로축구팀을 만들겠다"고 공약하게 되는 방향으로 진전됐다. 차범근이라는 빼어난 한 선수의 활약이 한국축구의 프로 시대를 앞당기는데 적지않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속사정을 한번 들어보자.
<차범근이 한국 프로축구 탄생을 촉진하고 있다. 최순영 축구협회 회장은 내년 8월 우리나라에 프로축구팀을 창설하겠다고 밝혔다. 차범근의 서독 프로축구 진출 성공이 우리나라에도 프로축구를 탄생시켜야 된다는 소리를 더욱 높이게 만들었으며 축구협회는 드디어 프로축구 창설을 결심한 것이다. (중략) 최근 화랑(대표팀) 선수들은 차범근 쇼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차범근이 서독 분데스리가에서 첫 경기를 가진 이래 국내 신문 방송 그리고 스포츠전문지 등에서는 쉴새 없이 차범근의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화랑 선수들은 아무리 잘해봐야 기사 한줄 날까말까한데 차범근이 서독에서 활약하는 것은 미주알 고주알 안나는 것이 없다. 그런 가운데서 화랑선수들에게 자극을 준 것은 차범근의 수익 내용이었다. '한 달에 쓸 것 다 쓰고도 5백만원은 저축할 수 있다'느니 '1년이면 1억원쯤 모을 수 있다'느니 하는 기사에서 화랑 선수들은 심한 충격을 느꼈던 것이다. 차범근에 비한다면 화랑 선수들의 수입은 너무도 한심하다. (중략)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장경환 대표팀 감독은 즉시 축구협회에 보고했으며 축구협회에서는 최순영 회장이 직접 화랑 선수들의 무마작업을 위해 태릉선수촌에 나왔다. 선수들을 모아 놓은 최 회장은 "여러분의 명예와 인기에 적합할 만한 대우를 보장하기 위해서 80년 8월까지 내가 프로축구팀을 만들겠습니다. 반드시 만들겠습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좀더 구체적인 설명으로 "지금 발족해 있는 할렐루야 축구팀을 모체로 본격적인 프로팀을 내가 직접 만들고 그밖에 2,3개의 재벌 그룹에서 프로팀을 만들도록 적극 권장하겠습니다. 내가 말하는 2,3개의 재벌 그룹에서는 이미 프로팀을 만들기 위한 기초작업에 착수했습니다"라고 했다. 최 회장이 80년 8월이라고 시한을 못박은 것은 내년 모스크바올림픽이 끝나면 지금의 화랑 선수들은 사실상 아마추어 자격을 버려도 되기 때문이다.>
최순영 회장은 공약한대로 80년 12월 국내 프로축구팀 1호 할렐루야를 탄생시켰다. 이영무 신현호 황재만 조병득 등이 창단멤버로 참여했다. 본격적으로 프로시대가 열린 것은 83년 유공이 2호 프로팀으로 창단하면서 아마추어의 강호 포철, 대우, 국민은행과 함께 '반(半) 프로, 반 아마추어'의 슈퍼리그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지금의 K리그는 이 슈퍼리그를 모체로 삼고 있다. 차범근의 프로 진출에 자극받은 대표선수들을 달래기 위해, 최순영 회장이 1호 프로팀 할렐루야를 만들고 이후 슈퍼리그가 출범하는 과정을 보면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이 결과적으로 한국축구의 프로화를 앞당겼다'는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차범근 개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분데스리가 진출과 성공은 한국축구 프로화에 대한 정당성과 근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간스포츠 80년 1월 23일자는 차범근이 유럽 최우수선수 후보 물망에 오른다는 기사를 커버스토리에 실었다. |
◇차범근,UEFA컵을 들어 올리다 (주간스포츠 80년 6월 4일자)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시절의 초창기와 끝무렵에 두 차례 UEFA컵을 품에 안는 위업을 남겼다. 8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리고 8년 뒤 레버쿠젠에서 UEFA컵을 차지했다. 당시 한 선수가 서로 다른 두 팀에서 UEFA컵 우승을 차지한 것은 차범근이 처음이었다. 제니트에서 뛰고 있는 김동진과 이호가 지난달 2007~2008시즌 UEFA컵 정상에 올라 '대 선배'의 뒤를 이었다. 제니트의 우승을 폄하하려는 뜻은 전혀 없지만 객관적으로 '차붐'이 들어올린 UEFA컵과 제니트가 차지한 그것은 '격'이 사뭇 다르다.
70년대와 80년대 유럽에는 3대 클럽대항전이 있었다. 각국 리그의 우승팀만이 출전하는 유러피언컵, 1위팀을 제외한 복수의 차상위팀이 나서는 UEFA컵, 그리고 FA컵 우승팀이 경합하는 컵위너스컵이었다. 당시 UEFA컵은 유러피언컵과 양대 컵이라고 할만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지난 시즌을 예로 들자면 잉글랜드의 우승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홀로 유러피언컵에 나서지만 첼시 리버풀 아스널 같은 나머지 강호들은 모두 UEFA컵에 출전하는 셈이었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독일 등에서 출전하는 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니 그 치열함에서 UEFA컵의 비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하지만 유러피언컵이 빅 클럽들의 TV중계사의 압력에 의해 92~93시즌 챔피언스리그로 확대개편되면서 UEFA컵에 출전하는 팀의 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챔피언스리그의 규모(출전 팀수)가 늘어날수록 UEFA컵의 격은 더욱 떨어졌다. 2000년 컵위너스컵이 UEFA컵으로 흡수되면서 현재 UEFA컵은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지 못하는 차상위팀을 기본으로 FA컵 우승팀, 몇몇 리그의 리그컵 우승팀, 인터토토컵 승자 3팀, 페어플레이 점수 상위리그를 대표한 3팀, 챔피언스리그 본선 32강 탈락팀 등이 참여하는 '비빔밥'같은 형태의 대회가 됐다. 특히 챔피언스리그 본선 32강 탈락팀이 중도에 UEFA컵에 들어오는 것은 두 대회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갈랐다. 현재 UEFA컵은 100개 이상의 클럽이 참가하면서 규모는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게 커졌지만 위상은 많이 추락한 게 사실이다.
주간스포츠 80년 2월 6일자는 독일 여성지에서도 차범근의 기사를 다룬다는 내용을 커버에 실었다. |
어쨌든 차범근은 그 시절의 UEFA컵을 두 번 들어올렸다. 80년 보르시아MG와 결승 2차전에서 결승골을 어시스트했고, 88년 에스파뇰(스페인)과 결승 2차전에서는 극적인 동점골을 직접 넣었다.
언젠가 차범근 감독과 UEFA컵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 우승할 때는 결승골을 어시스트했잖아. 그래도 내가 공격수니까 직접 골을 넣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구요. 두 번째 결승전을 치를 때는 정말 내가 골을 넣었어요. 얼마나 기쁘던지. 하하하."
<차범근이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 UEFA컵 최종 결승전 보루시아MG와의 경기에서 그는 프랑크푸르트를 승리로 이끌면서 대망의 '웨파 마이스타(유럽 챔피언이라는 뜻)'가 된 것이다. 5월 21일 발트 스타디움. 차범근이 살고 있는 디센바흐에서 차편으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모여든 관중은 6만여명. 홈팀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대 보루시아 뮌헨그라드하바의 경기가 벌어졌다. 79~80시즌 UEFA컵 최종 결승전. 홈 앤드 어웨이로 벌어지는 결승 1차전(5월7일)에서 프랑크푸르트는 2-3으로 패한 전적을 안고 있었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 출전하기 앞서 "하느님에게 기도드리고 최선을 다한 끝에 그라운드에서 목숨을 거둘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타박상으로 퉁퉁 부어올랐던 오른쪽 장딴지와 복숭아뼈의 부상이 더욱 악화됐기 때문에 그로서는 오직 정신력 하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반전은 그런대로 팽팽한 대결 속에서 양팀 모두 득점없이 끝났다. 후반 26분 드디어 차범근에게 기회가 왔다. 적진 정면 오른쪽에서 볼을 잡은 차범근이 한 차례의 페인팅으로 적의 수비 초점을 흐리게 한 뒤 페널티 박스 안으로 슬쩍 스루패스해 준 볼이 브레드 샤우프에 의해 귀중한 골로 연결됐던 것이다. 1차전과 2차전의 골득실은 두팀 모두 3골이었으나 골득실차가 똑같을 때는 어웨이 경기에서의 골을 2배로 인정한다는 대회 규정에 의해 프랑크푸르트가 우승을 차지하게 됐다. "다시 한번 하느님에게 감사드리고 나 자신의 끈질긴 정신력에 스스로 흡족함을 느껴봤죠." '웨파 마이스타'가 된 차범근은 21일 밤부터 26일 밤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축하파티에 불려나갔다고 한다.>
위원석기자 batmaa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