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규(23)씨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목소리로 첫인상을 기억한다. 20대들이 그러하듯 통화보다는 문자 메시지를 주로 이용한다. 친구들과 만나면 영화를 보러 가거나 PC방에서 머드게임을 하기도 한다. 혼자 다니는 게 그리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낯선 거리를 갈 때는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 1급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앞에 주어진 인생길은 두가지 뿐인 것 같았다. 학교 선배들이 그러했듯 안마사가 되거나 사회복지사가 되는 게 정해진 수순 같았다.
그러나 중1때부터 클라리넷을 혼자서 익혔던 그는 정해진 대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넉넉치 않은 가정 형편때문에 그의 선택을 지지하는 데 주저했고, 여러 선배들이 도중에 포기했던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선생님들도 그를 염려했다.
음대에 가겠다고 고집했지만 매순간 흔들렸다. 돈을 벌고 나서 음악을 다시 할 거라며 안마 아르바이트를 택했지만 음악이 머리속에 떠나질 않았다.
“(음악을 하겠다는 결정이) 성급한 선택은 아니었을까라는 후회, 잘하는 애들이 저렇게 많은데 내가 해낼 수 있을까란 자괴감, 좋은 악기를 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상황때문에 겪은 서러움까지 많은 생각이 교차했지만 그때마다 세광고 선생님들 등 주위에서 도움을 많이 줬다.”
그렇게 힘든 고3시절을 보낸 그는 세광학교 졸업생 중에서 처음으로 음대에 합격한 학생이 되었다.
광주대 음악학부에 들어갔을때 대학 홈페이지에 자신이 소개될 정도로 관심이 컸다. 그러나 `반짝 관심’은 있어도 학교측의 지속적인 관심은 부족했다.
“특혜를 원하는 게 아니라 배려를 해달라는 거죠. 장애인들을 위해서 학교 건물을 소개하는 내용의 오리엔테이션만 갖춰도 훨씬 학교생활이 수월해져요.”
그동안 줄곧 시각장애특수학교에 익숙해져 있다가 비장애인들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는 어려움이 많았다. 비장애인들은 무의식중에 부주의한 말이나 행동으로 장애인들을 소외시켰다.
“원래 낙천적인 성격이지만 성격 개조가 필요했어요. 마음을 한번 청소했습니다”며 지금은 웃지만 그가 겪은 마음 고생은 컸다.
친구들은 자신과 다른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서 다가서기를 주저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그를 지켜보던 친구들도 서로 부딪혀가면서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점차 넘어서 갔다. “이제는 친구가 성규야! (악보에서) 101마디 좀 봐라 했다가 제가 `안 보이잖아’이러면 `깜박했다야’ 하고는 같이 웃어요.”
그는 전공인 클라리넷을 비롯해 피아노, 색소폰, 플루트, 트럼펫 등 10여 개나 되는 악기를 다룰 줄 안다. 악보를 볼 수 없는 대신 그의 음감과 기억력은 다른 이보다 뛰어나다. 담당 교수도 가끔 그에게 음을 확인할 정도다. 친구들도 그에게 화성법이나 악기 지도를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지만 그의 장애는 과외선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한국실로암선교회에서 주최한 `장애인선교활동’ `장애인캠프’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꾸준히 자신을 돌봐준 김용목 목사님과의 인연도 있지만 이미 서로 돕는 관계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장애인들과 장애인들의 넘을 수 없는 벽에 대한 안타까움은 남아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내용의 교육이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통합교육이 학교에서 이뤄져야 한다”면서 “장애인들을 대하는 시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졸업을 앞둔 그는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많다. 분명 더 큰 장애물이 있겠지만 미리부터 겁먹지 않기로 했단다. “제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는 이들을 위해 꾸준히 연주할 생각”이라면서 “그동안 나를 도와줬던 분들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나도 힘이 되었으면 한다”며 꿈을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