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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핸리주석-
바울은 사람들이 얼마나 신앙과 멀어질 수 있는가를 말하고 또 그 결과는 믿음을 버리게 되고 영원히 멸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4,5절).
(1) "비췸을 얻은" 사람들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고대의 몇몇 교부들은 이 말씀을 세례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비췸을 얻는다"는 말은 기독교 진리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고 봄이 옳겠다.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늘 나라에는 이르지 못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발람은 진리의 눈이 뜨인 자였다"(민 24:3). 그럼에도 그는 그의 열린 눈을 가지고 캄캄한 어둠의 길로 내려갔다.
(2) 사람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을지라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의 어떤 면을 즉 성령이 그들의 영혼 위에 역사하는 힘을 맛보고 신앙의 신비한 맛을 보고서도 믿음에서 떠나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마치 시장에 간 사람이 어떤 음식을 사려고 맛은 보았으나 돈이 모자라므로 맛만 보고 사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누구나 신앙을 맛볼 수는 있다. 또 신앙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어려운 방법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보다 쉬운 방법으로 믿으려는 자들이고 그러기에 결국은 믿음에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3) 신앙과 떨어진 "성령에 참여한" 사람들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성령의 독특하고도 기적적인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타 여러 능력 있는 일을 행한 자들도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는 구원을 받지 못할 자들에게도 이러한 은사가 수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본" 사람들도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 그들도 복음을 기쁨으로 듣고 그 위로도 받으며 그 말씀을 많이 기억하고 있으며 또 그것에 대해 잘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말씀에 요구하는 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다.
(5)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도 타락할 수 있다. 그들 또한 천국과 지옥을 믿을 수 있고 또 하늘 나라에 가고 싶은 욕망도 지닐 수 있으며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다. 이런 자들의 위선은 오래 지속될 수 있으나 결국은 변절하고 마는 것이다. 이제부터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믿음에서 떨어질 사람들도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였다던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언급되지 않았음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배교자들도 행할 수 있는 이러한 놀라운 능력들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원받는 은혜를 받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실을 여기서 배울 수 있다.
[2] 이러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배교한다고 하여 참된 성도들도 결국은 믿음을 떠나고 말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믿음에서 떠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능력, 그리스도의 희생과 중제, 복음의 약속, 하나님이 성도들과 맺으신 영원한 계약, 성령의 내주(內住), 썩지 않는 말씀의 씨, 이 모든 요소 등이 성도들을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것들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나무는 결코 서지 못할 것이다.
-아더 핑크-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 이해하는데 있어서 히브리서 6장 4~6절 만큼 빛을 주는 구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참된 회심을 위한 성령님의 특별 사역에 성경적 빛과 열을 가지는 겸손한 시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깊이 배우고 있습니다.
아래는 아더핑크의 <히브리서 강해 1>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4절과 5절에 묘사된 자들을 ‘형식적인 신앙 고백자들’로 칭하는 것이 정확하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은 큰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이었고, 지금 복음전도를 수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특권을 누렸던 자들이었다.
여기서 묘사된 자들은 ‘다섯 가지 이점을 누렸던 자’들로 말하고 있다.
그 다섯 가지의 이점은 1절과 2절에서 열거된 여섯 가지 사항들, 이른바 유대교를 믿는 육체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속한 것들과 대조를 이룬다.
다섯은 '은혜'의 수(數)이다. 여기에 언급된 복락들은 기독교 시대에 속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언급되지’ 아니한 것으로부터 이 점은 명백하다.
그들을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들이라든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자들이라든지,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그들더러 의롭다 함을 입었다든지, 죄 용서함을 받았다든지, 사랑하는 자에 의해서 열납되었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또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순종에 대해서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를 다른 자들과 구별시키는 요점들이다.
첫째, 그들은 ‘비췸을 받았다’. 의의 태양이 그의 날개 그늘 아래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었다.
그리고 마태복음 4:16절이 말하는 바와 같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던 이방 사람들과는 달리,
그 음성을 들었던 자들은 기이하고 영광스럽게 비췸을 받은 자들이다.
“비췸을 받았다”는 말의 헬라어는 “가르침으로 빛이나 지식을 주다”라는 의미이다.
70인역 성경의 사사기 13:8과 열왕기하 12:2과 17:27은 그 말을 그런 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5과 디모데후서 1:10에서 “드러내다”나 “밝히다”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다.
사단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복음의 빛이 그들에게 비취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곧 복음을 아는 지식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비췸을 받다”는 말은 복음의 교훈으로 가르침받는다는 의미이며, 복음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가질 정도로 가르침받는다는 의미이다.
10:26에 있는 병행 구절에서 그 동일한 사람들을 향하여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고 말한다(벧후 2:20,21). 그러나 그 지식은 외적인 들음이나 독서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과 같은, 영적인 것들을 ‘자연적인’ 차원에서 아는 지식일 뿐이다.
마치 어느 과학을 특별하게 연구함으로써 사람이 비췸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변하게’하는 유의 신령한 비췸에는 미치지 못한다.(고후3:18).
여기에서와 같이 중생치 못한 사람이 “비췸”받은 실례가 민수기 24:4에 나오는 발람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둘째, 그들은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
“맛보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를 얻는 것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체험하였다는 의미이다.
“맛봄은 반드시 먹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게 맛본 것을 씹어 영양이 되게 하는 것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우리가 그 냄새와 향기를 좋아한다 할지라도 그 성질을 분변해 내려면
먹어 소화시켜 영양가를 발휘시켜 본 다음에 다른 생각에서 그 음식을 거부할 수도 있다.
여기에 묘사된 사람들은 어느 정도로 긍휼의 계시를 이해했고 그 냄새도 맡았던 사람들이다.
마치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처럼
그들은 말씀을 잠간 동안 기쁨으로 받았다”(J.Owen).
“맛봄”은 요한복음 6:50~56의 먹는 것과 대조된다.
“하늘의 은사”가 주 예수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성령의 인격을 가리키는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하여 교의적일 수 없다. 사실 어떠한 것을 취한다 할지라도 차이는 없어진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승천 ‘선물’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면 요한복음 3:15과 4:10등 적절한 참고 구절이 될 것이다.
만일 성령을 가리킨다면, 사도행전 2:38; 8:20; 10:45; 11:17 등이 좋은 참고 구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후자의 경우를 택하고 싶다.
하나님의 은사를 여기서 “하늘에 속한”이라고 말한 것은 하늘로서 왔고,
하늘로 사람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유대교와는 차이가 있다.(행2:2; 벧전1:11 참조).
이 배도자들은 이 “은사”를 “맛보고” 또는 체험했다.
마태복음 27:44을 비교하라. 거기서 “맛봄”이 실제적으로 마시는 것과 반대되어 있다.
여기에서 언급된 사람들은 복음과 친밀하여,
자기들의 죄와 자기들의 운명을 크게 절감시킬 정도로 그 복음의 복락을 얻었던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13:21에 그에 대한 한 실례가 나타난다.
셋째, 그들은 “성령에 참예한바 된 자들이었다”.
먼저, 여기서 “참예한 자들”이라는 말의 헬라어가 골로새서 1:12과 베드로후서 1:4에서
사용된 어휘와는 다른 헬라어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사용된 어휘는 단순히 ‘동반자들’을 의미한다.
내적이라기보다 외적인 동반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어휘는 다른 넷의 활동 원리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넷은 사실 이 오휘가 말하는 바의 결과들이다.
이 배도자들은 결코 “성령으로 난 자들”은 아니다(요3:6).
또한 그들의 몸이 하나님의 전이 된 적도 없음은 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고전6:19).
또한 우리는 이 구절이,
어느 때에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한 적이 있음을 가르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빌립보서 1:6은 중대한 모순을 범하는 진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작용과 나타남들의 유익에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그곳이 진동되었다”(행 4:31)는 말씀은 그것을 예증한다.
우리는 브라운 박사의 주해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영감받은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 나타나 그 시대를 이끌어 갔던
성령의 이적적인 은사와 작용들을 일차적으로 언급할 가능성이 극히 높다.
이 은사들은 결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마태복음 7:22,33에 있는 우리 주님의 말씀과, 고린도전서 13:1.2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말은,
새롭게 되지 아니한 사람들도 이러한 것들을 가지는 것이 그 시대에는
그렇게 비상한 일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어쨌든 그 말씀들은,
그러한 것들을 소유하고도 중생치 않은 상태에 머무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넷째,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라는 이 표현이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모든 메시야 약속의 본질과 여지가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이 약속이 예레미야가 ‘선한 말씀’이라고 칭한
탁월한 방식으로 주어졌음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33:14).
그런데 ‘이 선한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을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며,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축복과 이점들을 누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것을 즐긴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라는 말씀은
새 시대의 이점들을 즐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J. Brown).
사도가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배도자들이 목격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확증은, 예레미야 29:10의 말씀을 비교해 보면 더 확실해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서 사도가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더 잘 알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면밀히 “맛보다”는 말을 고수하고 있는지를 주목하라.
그 사람들은 예레미야처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15:16).
사도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영양분을 공급받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신령한 젖’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것을 통해서 마땅히 자라났어야 할 것을
그저 맛보기만 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J. Owen).
단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기만”한 사람들에 대한 엄숙한 실례가
마가복음 6:20에서 발견된다.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
‘달게’ 들음이러라”.
다섯 째,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여기서는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오신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통해서 도래된 새로운 세대를 가리킨다.
그 말은 히브리서 1:2의 “이 마지막 날”이라는 말과 상응된다.
그리고 “지난 세대” 또는 모세의 경륜과 대조되는 말이다.
그들의 메시야는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사9장).
그리고 그의 이적적인 사역은 놀랍고 영광스럽고 엄청나고 독특하다.
새 시대의 이러한 ‘능력들’이 히브리서 2:4에서 언급된다.
우리는 히브리서 2:4에 대한 그의 주석을 독자들이
다시 한 번 상기하도록 해주겠다. 이 배도자들은 권능의 능력들을 “맛보았다”,
또는 체험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들을 스스로 목격하였으며
승천 다음에 일어나는 기사들도 보았다. 성령의 영광스러운 나타남이 주어졌을 때
그러한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핑계댈 수 없게 되었다.
확증적이고 결론적인 증거들이 그들 앞에 제시되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에 부응하는 믿음이 없었다.
요한복음 11:47과 48에 그 점에 대한 엄숙한 실례가 나타나 있다.
“그들이 타락할 것이면”(타락한 자들은).
기에 쓰인 헬라어는 매우 강하고 강조적이다.
마태복음 7:27에서는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완전한 넘어짐이요,
기독교 전체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등을 돌리며
복음을 철저하게 모독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믿음의 파선”이다(딤전1:9).
이 무서운 죄는 그저 단순한 형식적인 신앙고백자에 의해서 저질러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상 텅 빈 이름 외에는 타락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묘사된 사람들은,
자시들의 마음에 비췸을 받고, 양심이 요동되며, 생각이 상당하게 영향을 받았으나
결단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지 아니한 자들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실족하여 넘어진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