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차례 그리스를 여행했다, 그리스에 머문 기간은 합하면 100일 가량 된다. 수도 아테네에 있는 유네스코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지정한 파르테논, 그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우뚝 솟은 곳)에는 모두 일곱 차례 올랐다. 그리스 답사 여행 경험은 나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경주를 수십 차례 여행했다.
경주에서 머문 기간은 합하면 100일이 훨씬 넘는다. 경주에 있는 남산, 우리의 노천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그 남산을 겨우 두 차례 올랐다.
목적은 고적 답사가 아니었다.
용장사 터 가까이에 있는, 막걸리 맛이 기막히게 좋은 산채 식당 때문이었다. 술 마시러 남산을 오르는 나의 눈에는 삼릉(三陵)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도 보이지 않았다. 1993년의 일이다. 다른 일에 매달려 있었기는 해도 경주에서 100일 가까이 머물렀지만 박물관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다. 경주 여행 경험은 나의 치부 중 하나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여러 차례 읽었다. 영어로도 읽고 일본어로도 읽었다. 나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우리 신화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를 비롯, ‘제왕운기’, ‘동국이상국집’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를 여행하기 시작하고나서다. 나의 치부 중 또 하나다.
나에게 경주는 보이지 않는 도시, 해독되지 않는 텍스트였다. 경주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 구석구석을 답사하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이제 뉘우침을 통해 죄인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 서울에서 ‘서울(서딗)’의 조상 ‘새벌(신라·新羅)’로 자동차를 몰 수 있다.
이제 겨우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에 ‘아크로폴리스’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크로무세이온(우뚝 솟은 박물관)’이 있다고, 그리스 인들에게까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의 자랑거리가 치부를 가려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가장 멀리 떠나 있던 자가 가장 확실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위안으로 삼는다. 그래서 나는 내 조상들께 용서를 빌면서 주말이면 내 집과 우리 신화의 고향을 오르내린다. 우리에게는 ‘아크로무세이온’이 있다.
알에서 나온 사람들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경주로 들어가면 탑정동 초입에 오릉(五陵)이 나온다. 오릉으로 들어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면 조그만 사당이 있다. 신라정(新羅井)이다. 정식 명칭은 나정(蘿井)이다. 아득한 옛날에는 우물 자리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언제 우물이 있었나 싶게 황량하다. 나정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 초기 신라의 6부 촌장을 모신 양산재(楊山齋)가 있다.
양산재 위에는 6촌장 중 한 분이자 뒷날 배씨(裵氏)의 시조가 되는 금산(金山) 가리촌 어른을 모신 경덕사(景德祀)가 있다. 신라의 건국 신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는 이 양산재에 모셔진 여섯 촌장에서 시작되어 나정에서 꽃으로 피어나 오릉에 진다. 이 모든 유적이 반경 500m에 들어온다.
양산재에서 경덕사로 오르면서 길가에서 본 당간지주(幢竿支柱)를 잊을 수 없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받치는 2개의 받침대이고, 당간은 절집에서 행사가 있을 때 깃발(당)을 거는 기둥이다. 당간지주는, 농부들이 모를 심으려고 물을 대어 잘 삶아놓은(써레로 논흙을 밀어 노골노골하게 만들어 놓은) 논 한가운데 서 있었다.
‘옛 사람들 무덤 위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이 밭을 간다(고인총상금인경·古人塚上今人耕)’이니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양산재 뜰에서, 신문지 고깔을 만들어 쓰고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여남은 명의 경주 아낙 중에 나정이 어디냐고 묻는 내 질문에 시원하게 대답하는 아낙이 없었다. 나정은 거기에서 겨우 100m 떨어져 있다. 폐사지에 모를 심는 경주 농민이나, 지척에 있는 나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주 아낙네를 원망하지 않으려고 했다.
혁거세 신화는 신라 건국의 기틀이 되는 6부 촌장 중 첫 자리를 차지하는 알평(謁平) 촌장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알평은 양산(楊山) 자락에다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을 세운 분이다. 알평이라는 이름과 이분이 세운 마을 알천 양산촌에 ‘알’자가 들어 있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알평은 하늘에서, 지금의 경주시 천북면 동천리에 있는 표암봉(瓢峰)으로 하강했다는 신인이다.
동천리 표암봉에는 표암, 즉 박바위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동천리의 한 할머니가 큰 바위 아래 박을 심었는데 어찌나 큰지 바위를 덮었고, 어찌나 단단한지 마치 차돌과 같았다. 할머니가 이 박을 가르자 한 동자가 걸어나왔는데, 바로 알평이었다. 이와는 조금 다른 전설에 따르면 알평은 허리에 박을 차고 온 도래인(渡來人)이다. 그가 차고 온 박을 바위 아래 두었더니 박 덩굴이 자라 바위를 덮었고, 그래서 그 바위가 ‘박바위’라고 불린다는 것이다.
‘알’과 ‘박’ 이야기는 혁거세 신화에서 고스란이 되풀이된다. 봄빛 화사한 양산재 뜰에서 ‘삼국유사’를 폈다.
“진한 땅에는 옛날에 여섯 마을이 있었다… (알평을 위시한) 6부 촌장은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모양이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 6부 촌장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 둑에 모여 의논했다.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을 가지지 못하고 있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모두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6부 촌장이 달려가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가 놓여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자 울음 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씻기자, 아이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어 천지를 진통케 하고 해와 달이 맑고 밝았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 하고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치하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제 천자님이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 있는 여자 임금을 찾아서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
… 사내 아이는 알에서 나왔는지라 알은 바가지 같이 생긴데다 그 고장 사람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고 하므로 이로써 성(姓)을 삼았다.”
어째서 다른 산 자락이 아니고 ‘양산’, 즉 버들 산 자락인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어머니도 ‘유화 부인’, 즉 ‘버들꽃 부인’이었다. 혁거세는 어째서 알에서 태어나는가. 고주몽도 알에서 태어나고, 가야의 여섯 임금도 알에서 태어난다. 어째서 ‘박’인가. 버들과 알과 박은 신라 건국 신화의 전반부에 자주 등장하다가 나라의 바탕이 잡히면서 사라지는 신화 모티프다. 2000년 전에 신라인들이 낸 수수께끼를 좇아 본다.
첫댓글 알은 우리 역사에 모계사회의 聖娼제도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알의 자식은 모계사회에서 아비 없는 자식, 곧 신의 자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