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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날(5월 23일)
(9)
건양대학교 수련관의 수도꼭지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이 나를 어찌 알겠는가.
이 아침의 나만 본 사람은 간밤의 나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간밤에 파김치 상태였다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 처럼 말짱한 아침이니 말이다.
이에 더해 불가사의한 것은 안락한 집에서 보다 더 숙면을 하고 더욱 더 상쾌한 아침을
맞게 된다는 점이다.
춘장대해수욕장의 아침도 물론 그랬다.
"1.5도의 완만한 경사와 맑고 잔잔한 수면과 송림이 우거진 천혜의 해수욕장"
싱싱한 기분으로 출발해 마주친 것이 서천 제5경으로 선정한 서천군의 홍보판 글이다.
황해(黃海)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시각적으로는 동해에 비하여 청정도가 떨어지고 약간
혼탁하다는 느낌이 드는 서해인데.
전문가의 진단이 어떠하든 심한 간만의 차와 이로 인해 절로 형성되는 갯벌 탓이리라는
내 생각과 달리 맑다니 할 말이 없다.
썰물 때라 바다가 멀리 있고 해수욕장도 기지개를 펴기 전이라 고요한 해변.
안개낀 해안이지만 근거리 시야가 확보되어 걸을만 한 해변의 아침.
차림으로 보아 도둔리(해수욕장 마을) 주민인 듯한 유일한 중년 산책녀로부터 4km홍원
항까지 해안로가 이어짐을 확인하고 마음 편히 걷는 아침의 해변길은 분명 명상로였다.
그러나, 띄엄띄엄 한 송이씩 피어있는 온화한(꽃말?) 해당화만이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처럼 늙은이를 반길 뿐인 이른 아침부터 마음쓰게 하는 현상들이 대기중일 줄이야.
서해안 송림의 전반적인 현상인데 펜션 사유지니까 들어오지 말라는 푯말이 박힌 여기
송림지대 역시 과감한 간벌을 하지 않아 쓸모 없게 웃자란 나무들 뿐이다.
더욱 눈살 찌뿌리게 한 것은 이 해변 최고의 건물 '건양대학교 춘장대수련관'.
건물 앞마당 수도꼭지 앞에는 '수련관 이용객외 사용금지' 딱지가 붙어있다.
물이 부족하기 때문인가 수돗물값 절감을 위해서인가.
"수련관에 들어오실 때는 수돗물로 모래를 닦고 오세요" 라는 부탁을 하고, 수련관 이용
자 외에는 통행인이 뜸한 위치인 점으로 보아 위 2문제는 아닐 것이다.
내가 밟아온 산과 길의 거리는 지구를 몇바퀴 돌 만큼 길다.
오랜 세월, 양의 동서를 망라한 긴 거리에서 음료 부적합 외의 이유로 사용금지 표지가
달린 수도꼭지를 보기는 처음이다.
생사를 좌우하기도 하는 피에 다름 아닌 물.
아무리 인색하고 비정한 사회라도 물 인심만은 후하건만 건양대학교는 왜 이같은 딱지
를 부착했을까.
건양대학교는 1300리 삼남대로(해남대로)를 걸을 때(논산에서?)본 듯 하며 대학병원도
운영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어느 지방버스 옆구리에 붙어있는 건양대학교 대학병원 광고판을 본 적이 있으니까.
연구와 교수 및 봉사는 고전적인 대학의 사명이다.
연구해서 가르치고 배운 후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것.
그러나, 이 시대의 대학은 이같은 고전의 틀, 즉 상아탑을 박차고 나와 현실참여를 깊숙
이 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만다.
해수욕장의 수련관은 곧 현실 속으로 옮겨진 상아탑의 일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연구실의 불을 현실에 밝히지 않으면 생명력을 잃게 됨을 알았다는 뜻도 된다.
그리고는 왜 더불어 가려 하지 않고 다시 고답적 고립의 벽을 쌓고 있는가.
설마, 이러한 처사가 이 대학교 건학이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리라 믿고 싶다.
만일, 사실이라면 무수한 젊은이들이 단순히 귀한 재화와 시간을 낭비하며 헛고생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니까.
이 대학은 왜 이같은 사소한 일로 대학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홍원항 안내기둥에는 2개의 홍원항 길 안내표지판이 붙어있다.
썰물때는 해안을 따르고 밀물때는 산길로 우회하라는 2개의 루트다.
이 아침은 다행히도 해안을 타고 갈 수 있는 썰물 시간이다.
해안로라 해도 백사장과 콘크리트 방파제 외에는 만만치 않은 길이다.
멀리에서는 도저히 통과할 수 없을 듯이 보이는데도 걸어가게 되어 있어서 다행이기는
하나 밀물때 금지하는 바다의 너덜지역은 썰물때도 신중해야 하는 길이다.
춘장대해수욕장과 동백정 언덕 사이, 움푹한 만의 홍원항(洪元港)도 옛 모습이 아니다.
서해안의 항구중 유다르게 간만의 차가 적어 어선의 출입이 빈번한데 비해 규모가 작은
듯 했는데 놀랍게 넓어진 것 같다.
그러나, 거금을 투입한 새 시설들이 왜 정연하지 않고 산만하게 느껴질까.
새 방파제의 등대까지 어항 깊숙이 들어가 살펴보며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내가 워낙 무지 무식한 탓일까.
유사한 규모의 외국 어항들에 비해 혼란스러운 것은 설계의 한계 때문 아닌지.
모방의 천재들이 왜 벤치 마킹에는 등한할까.
콘크리트 의존도가 과도하여 더욱 투박한 이미지를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 홍원항의 아침.
밤샘 했거나 새벽같이 출어했던 대소 어선들의 속속 귀항에 따른 아침 경매로 바빠졌다.
어종과 그 이름에 무식하지만 이 아침 경매의 주종은 어판장(?)에 가득한 새우인 듯.
풍어라는 내 느낌에 경매 관계자들이 동의할까 미흡하다고 할까.
서천의 월별 축제에는 9월의 축제로 홍원항의 전어큰잔치가 포함되어 있다.
연전 가을에 들렀을 때는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굽는 냄새에 홀렸는지
찾아온 미식가(식도락가?)들로 항구가 북적댔다.
그 냄새와 맛이 어떠하기에 그런 익살스런 표현이 나왔을까.
심지어 "며느리 친정 간 사이에 문 잠그고 먹는다"는 삭막한 말까지.
며느리는 성이 다른 점 외에는 가계(家系)를 이어주는 중추 가족의 핵심 멤버다.
더구나, 당장에는 하위계급 같으나 장차 VIP, 즉 안방 마님으로 등극할 신분인데도 옛
부터 왜 물과 기름의 이질적 관계로 설정한 것일까.
십인십색의 길안내에 자칫 배가 산으로 올라갈 지경일 때는 공공기관을 찾는 내 버릇이
목전의 해양경찰 파출소 문을 열게 했다.
직원들은 한입으로 해안길이 없으므로 도로 따라 마량포구 또는 월하성으로 가라는 것.
낮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된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데도 나는 왜 바다쪽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까.
서남쪽으로 노루꼬리 처럼 뻗은 지점인 마량리 동백나무숲 까지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홍원항 서쪽 벼랑의 너뱅이 등대횟집에서 엿본 방조제 저쪽에는 길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암벽타듯 오르내려 간신히 올라선 둑 저쪽은 먼 서천화력 한하고 광대한 간척 갯벌이다.
<서천화력의 중요시설 및 위험지역이므로 관계자 외 일반인의 출입을 절대 금함>
경고판이 엄연히 있는데도 공사용 임시차로를 따라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갯벌에서 어지럽게 펼쳐지고 있는 토목공사 현장 옆으로 길이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그러나,<수심이 깊어 위험하다'>는 갯벌을 맨발로 건너갈 자신이 없으면 돌아서야 하는
공사장에서 1시간여를 낭비하고 방조제로 후퇴했음에도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니.
마지막으로 공사현장 출입차량들의 통행로 이용 가능여부를 확인하려고 진출한 방조제
끝에서는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there's will, there's way)고 절로 외쳐졌다.
서천화력 쪽으로 가는 길게 뻗은 방조제를 발견했으니 그런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오직, 새로 들어설 서천화력발전소의 중요시설을 위해서 작은 섬을 가운데 두고 마량리
동백나무숲과 홍원항 서남단 사이를 막은 ㄱ자 방조제의 긴 쪽이다.
이 쪽에서는 단지 위험하다는 이유로 출입을 전면 금지하고 있으나 저 쪽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올 수 있으며 조사들이 애용하는 방조제다.
위태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통행 가능한 길임을 모를 리 없는 홍원항의 모든 사람이 왜
나를 오도(誤導)하려 했을까.
늙은이가 위험한 길을 힘겹게 가지 않고 편히 가도록 하려고 그런 것으로 이해해 둘까.
4시간 걸린 800m 길
서천화력 뒤 서해 절벽 위에는 천연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된 마량리동백나무숲이 있다.
서천의 1경(景)이기도 한 수령 500여년의 동백나무 80여주는 전설도 지니고 있다.
"한 노파가 백발노인의 현몽으로 해안에서 5성황(城隍)과 씨앗들을 얻어 성황을 신당에
모신 후 심은 씨앗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85주의 동백나무숲을 이뤘다"
"바다 위에 꽃다발이 떠있는 꿈을 꾼 마량수군첨사(僉事)가 그 바다에서 건져 심은 꽃이
마량리의 동백나무숲으로 되었다"는 등의 전설이다.
성황을 모신 신당(豊漁祭祠堂)에서는 매년 정월 초하루 부터 3일간 제사가 진행된단다.
해발 30m도 못될 듯한 이 작은 동산은 본래 섬이었는데 간척사업지구에 포함됨으로서
뭍이 되었단가.
그런데, 괴이쩍게도 한 누정(樓亭)의 양편에 서로 다른 이름의 현판이 붙어있다.
동백정(冬柏亭)과 춘백정(春柏亭).
동백은 개화시기에 따라서 춘백, 추백, 동백으로 분류되는데 여기 동백은 봄에 피는 꽃
이라 해서 춘백정이라는 현판도 붙게 되었나.
7m까지 성장하는 나무인데도 2m내외에서 멈춰 있는 것은 강한 해풍의 영향일 것이다.
동백정 절벽 밑 바다를 걸어서 마량포구로 가는 방법은 없다.
서천화력 정문을 지나고 도로를 따라 길게 우회해야 한다.
마량포구(馬梁)는 만(灣)과 곶(串)이 잘 발달했으며 명품 서천김의 주산지(양식장)다.
근래에는 해는 동해에서 떠서 서해로 진다는 고정관념을 깨려는 소리가 요란한 곳.
당진화력의 왜목마을처럼 일출과 일몰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해서 연말연시의
관광객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단다.
'해짐이해돋이마을' 이름이 심상치 않으며 커브(curve) 벼랑끝 꽃밭에 단정하게 서있는
'마량포 해돋이 마을' 표석은 "서해에서도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일성에 다름 아니다.
마량포구는 미구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막은 갯벌 위에 개벽에 버금갈 공사가 진행중이니까.
마량진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전래지란다.
1816년 9월 5일, 영국의 두 해군대령 맥스웰(Murray Maxwell)과 홀(Basil Hall)이 두
순양함(Alceste호와 Lyla호)을 이끌고 서해안을 탐사중 여기 서천 마량진 해안에 들려
해도를 작성하고 한국에서는 최초로 마량진첨사 조대복에게 성경을 건네주었다는 것.
기독교의 한국전래 시기는 17c초로 알려져 있다.
1631년 명나라에서 서양문물과 함께 가톨릭교 서적을 들여왔다니까.
그러나 성서가 한국땅에 상륙하기는 마량진이 최초라는 것.
받기는 했지만 무슨 책인지 몰랐을 것이다.
홍원항에서 800m, 해양박물관 고개 넘어서 해안의'소문난해물칼국수'집에 도착하는데
무려 4시간여가 걸렸다.
도로를 이용하면 10분도 걸리지 않을 거리에 마량포구 해변길을 고집함으로서 4시간여
를 바친 지상 최고의 우매한 늙은이다.
그러나 스릴(thrill) 만점의 암벽과 너덜지대 등 바다에서 산의 모든 것을 체험했다면 꼭
손해만 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장애인이 좋은가
마량포구 동쪽 끝 월하성(갯벌체험장) 이후의 바닷길도 단절을 거듭한다.
도로 따라 선도리(비인면) 갯벌체험장을 지나면 장항 송림산림욕장 한하고 해안도로다.
오늘은 칼국수집과 인연있는 날인가.
갯벌체험마을 선도리의 유상덕(웰빙뽕입해물칼국수)님이 해안도로의 애로를 해결했다.
한데, 이 선량한 해결사는 수심에 차있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해 조개를 주재료로 하여 문을 연 식당이 무난하게 운영되었
으나 새만금방조제로 인해 봉착한 치명적인 애로를 타개할 길이 없단다.
서해안 최고의 조개 산지인 서천땅에서 조개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란다.
새만금방조제의 축조로 조류의 진로가 교란됨으로서 어패류의 서식환경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며 패류를 주재료로 하는 영업에는 치명적일 수 밖에.
그러므로 새만금방조제가 원흉인 것이 당연하다.
파괴된 서식환경의 복원은 불가능하고 적응하는데는 긴 세월이 필요한데 어찌 한다?
소규모 방조제는 영향이 미미하지만 대형 방조제는 효과의 극대화에 반해 피해 계층과
지역 또한 광범위 하여 진퇴양난의 형국이다.
마서면에서 장항송림산림욕장 앞 백사장에 들어섬으로서 해안길이 다시 시작되었다.
승용차가 탈 없이 다닐 만큼 모래바닥이 단단해 걷기 아주 편한 백사장이다.
방파제 또는 접안시설 없이 옛 방식대로 배를 부리는 송림리 어부들의 바다 전초기지로
지금도 바갓가 배 말뚝에 소를 매어놓고 배를 띄워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는 해변이다.
1km가 넘는 사장에서 펼쳐지는 모래찜질은 서천의 5월 축제로 불린단다.
염분과 철분, 우라늄 성분이 많아 각종 질병(특히 신경통과관절염)에 효험이 있다 해서
팬(fan)의 분포가 전국적이라고.
그러나 충청남도의 서남단 장항의 해안로는 이 산림욕장이 시작과 끝이다.
연돌이 우뚝 솟아있는 장항제련소 앞길을 통해서 장항항으로 진출할 때 제련소를 견학
했던 때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참담했던 6. 25동란 피난살이 고등학교 학생 때 군산에서 선편으로 장항만을 건너간 것.
목발(crutch)의 절망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환희와 새 열망으로 채워가는 시기라 거칠
것은 없으나 고지대를 오르내리는데 어찌 불편하지 않았겠는가.
현실 적응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록 태산 위의 태산이었던 당시의 일들이 오래지 않은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되나 가는 곳마다 전혀 생소한 지형이다.
역시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다"
지금은 '장애인'이지만 당시에는 '병신, 불구자'라 했는데 단어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D.J. 전대통령이 주도해서 바꿨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나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병신,불구자는 자기 몸에 이상이 있음을 뜻하는데 반해 장애인은 장애가 있는
사람인 동시에 남에게 장애가 되는 사람을 뜻한다.
어느 쪽이 덜 나쁜 이미지인지 자명하지 않은가.
장애를 주지 않는데도 장애가 되는 사람으로 취급된다면 비인격적 대우를 받는 것이다.
나는 걸을 때 외에는 목발을 감추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었다.
그 때는 상이군인의 행패가 심하여 오인받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 않으려고 말짱한 사람처럼 시침을 뗐던 것.
그러나 이즈음은 장애인 우대 환경의 유혹에 걸린 사람들이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다.
장애인이 받는 각종 우대가 탐나기 때문이라면 말이 씨가 된다는데 그리되어도 좋은가.
불구의 극복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꼭 겪어야 깨닫겠는가.
"긴 목에 읍이 생겼다"는 뜻의 이름이라는 장항읍(長項邑)은 꽤 알려진 지명이다.
전적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건설된 남한 유일의 건식 제련소 효과라 할 수 있다.
금. 은. 동. 아연 등을 제련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비철금속의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증설
했으나 중금속 오염을 비롯한 복합적인 이유로 1989년에 폐쇄되었다.
친환경 첨단 정밀전자기기 핵심소재 생산 공장으로 탈바꿈하게 된다니 다행이다.
임진왜란때 부자의 피난처였다는 유부도(有父島/아버지가 살았던 섬), 유자도(有子島/
아들이 살았다 해서) 뒤로 군장국가산업단지가 뿌연 대기에 싸여 희미하게 보였다.
그 끝 부분이 새만금방조제의 한쪽(군산쪽) 끝이다.
금강 하류인 장항만에 막혀 고립상태였던 장항은 군산시를 연결하는 하굿둑과 철도의
효과를 얼마나 보고 있을까.
시너지 효과를 누리는 상호관계일 듯 한데.
해안 차로에서 고마운 이가 찜질방이 있다는 금강하굿둑관광지 앞에 내려놓고 갔다.
행정구역은 장항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서면 도삼리다.
내 천막집은 찜질방 대용이므로 이 날(5월 23일) 밤은 당연히 '대자연과 함께 마음까지
쉬어가는 곳 금강웰빙타운'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