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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remnant7000 원문보기 글쓴이: sky blue
제 16 강
큰 성 바벨론의 멸망
(계 18:1-24)
Ⅰ. 도입
17장과 18장은 계속해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기사를 소개합니다. 17장이 바벨론의 타락상과 죄악상을 상징하과 있는 음녀의 죽음을 통해 큰 성 바벨론의 심판을 예고했다면, 18장은 큰 성 바벨론의 실제적인 심판과 멸망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집행적 측면을 소개합니다. 17장을 통해 음녀가 짐승의 권세를 업고 그와 연합해 바벨론의 시녀노릇을 철저히 수행하면서 땅의 권세자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음행과 음행의 포도주에 흠뻑 취하게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는 충성된 성도들을 핍박하고 순교에 이르기까지 온갖 박해를 자행했던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여기서 음행이란 욕심의 발로에서 표출된 갖가지 우상 숭배적이며 세속적이고 물질만능주의적이며 성공지상주의적 요소들을 총괄합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현세적인 행복과 성공을 위해 세상문화를 목적 삼는 삶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이처럼 악의 세력들이 승승장구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돌발사고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함께 단결해 연합전선을 피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데 동조했던 악의 동지들 간에 일대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짐승과 열 뿔로 상징되는 세상의 권세자들이 단합해서 음녀바벨론을 무참히 살해해 멸망시키는 돌발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는 일종의 미스터리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음녀가 자중지란의 표적이 돼 악의 동지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한 순간에 무참해 살해당한 것은 사단의 ‘자기 폭력적 속성’과 ‘내적 분열성’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됩니다(G.골드워다. 150/호크마 종합주석, 484/이필찬, 739/이순태, 255-266). 그러나 요한은 음녀의 죽음을 단지 자중지란의 희생으로만 간주하지 않습니다. 보다 근원적으로 창조주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악된 속성을 주권적으로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데 선용한 사건으로 해석합니다(17:117).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롬 11:36)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에 근거한 발상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서 악인도 악한 날에 쓰임받기 위한 피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잠 16:4). 이런 관점에서 온갖 피조물들의 행위는 그것이 피조세계든 영계든지를 막론하고 본질상 하나님의 주권과 의지에 의존되고 종속돼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원리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세상을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로 이끄시는 결정적인 단초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모든 권세의 출처는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사단이 일시적으로 세상권세를 잡아 세상의 왕으로 군림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이고 한시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섭리적인 작정의 기간에 종속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도로 찾으시고 악한 것도 악한 날에 쓰임받기를 원하신다는 의지를 발동시키시면 사단의 세력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데 도구로 선용된다는 것이 계시록의 일관된 사상입니다. 이를 신적 수동형(divine passive)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17장의 음녀의 심판으로 예고된 큰 성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의 실상을 18장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이미 예고한 대로 총체적인 관점에서는 16:17에 근거한 ‘공중’(엡 2:2, 6:12)의 파멸에 종속되며, 지엽적으로는 공중의 파괴로 비롯된 큰 지진의 여파로 큰 성 바벨론의 죄악상이 하나님께 기억한바 돼 진노의 포도주잔을 받은 사실에 근거합니다(16:19). 여기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았다는 것은 구약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18장은 구체적으로 바벨론의 멸망과정을 원인과 과정과 결과에 따라 진술합니다.
Ⅱ. 전개
18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 1-8절에서는 천사에 의한 바벨론 멸망을 예고하고 둘째, 9-20절에는 바벨론 멸망으로 더 이상 치부할 수 없게 된 땅의 권세자들, 상인들, 그리고 상인들의 물품을 운송하며 치부했던 바다의 선원들의 탄식어린 애가가 소개됩니다. 셋째, 20-24절에는 바벨론의 최후의 멸망이 기술됩니다.
1. 바벨론의 멸망 선포(1-8절)
천사에 의한 바벨론 멸망선포(1-2절)
17장이 음녀 바벨론의 죽음을 통해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예고란 성격을 띠었다면 18장은 바벨론에 대한 직접적인 심판이 집행되는 내용을 기술합니다. 이런 이유로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하는 18장의 천사는 17장의 천사와 역할 면에서 차별화됩니다. 특별히 18장의 천사가 ‘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사단왕국의 도성을 상징하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할 만큼 비중있는 권한을 가진 천사임을 시사합니다.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 졌다’라는 표현은 18장의 천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파송된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천사에게 반영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겔 43:2은 동일한 표현을 이스라엘의 종말적 회복을 기술하는데 사용합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반영된 천사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졌다는 것은 이후 선포될 바벨론에 대한 심판 메시지의 정당성을 확증해 줄 뿐 아니라, 종말적 심판의 종식으로 인해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도래까지도 전망케 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런 전망은 향후 전개되는 문맥 속에서 큰 성 바벨론의 멸망과 더불어 교회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의 등장(21:9-10)을 통해 사실로 확인됩니다.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힘센 음성으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바벨론의 확실한 멸망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바벨론의 멸망이 미래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루어진 과거사건처럼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바벨론의 멸망이 확실함으로 기정사실화시키고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의지의 표명이기에 때가 차면 반드시 성취될 것을 전제합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지경을 제비뽑아 배분한 후에 실제로 땅 분배를 다 마친 것처럼 선언했듯이 말입니다(수 21:43-45, 18:1-2). 한편 바벨론을 큰 성 바벨론으로 부르는 것은 과거 대 제국의 명성에 걸맞게 그만큼 바벨론의 타락상과 죄악상이 크고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쳤음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큰 성 바벨론의 철저한 파괴와 멸망은 ‘함락되었도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라고 시작되는 사 21:9의 반영이며, 그 결과 황폐화 된 현장은 사 13:20-22을 반영합니다. 계시록 본문은 바벨론이 황폐화된 현장을 묘사하면서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혐오스럽게 설명합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그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곳에 그 양 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 양이 거기서 뛸 것이요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사 13:20-22)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바벨론의 정체성은 역사 속에서 늘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적대세력의 대명사로 인식돼 왔습니다. 요한은 구약의 배경 속에서 이처럼 시종일관하게 하나님께 도전하며 각종 세속주의와 인간지존사상을 고취해 오던 바벨사상이 바벨론 제국을 통해 재현되고 활동했던 사실에 근거해 바벨론 모티브를 하나님께 도전하는 사단적 세력의 총화로 이미지화시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너진 바벨론은 철저히 파괴되고 황폐화된 사실로 인해 더 이상 과거의 영광과 명성을 되찾기에는 재기불능의 상태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과거 여리고성의 몰락과 황폐처럼 말입니다(수 6:26).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의 바벨사상 또한 철저히 붕괴되고 근절될 것을 암시합니다.
바벨론 멸망의 원인(3절)
그렇다면 그처럼 화려한 명성과 위엄과 권세와 극한 사치와 치부를 자랑했던 영광스런 바벨론이 어떻게 한 순간에 황폐화된 불모지로 전락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4절은 바벨론 멸망의 이유를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했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기 때문’이라고 고발합니다. 음행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적 범죄행위를 영적으로 일컫는 표현입니다. 이로 인해 주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인한 배도와 반역과 관련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음녀의 손에 든 금잔(렘 51:7)에 온갖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찼다(17:4절하)는 사실을 고려하면 비단 종교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욕심의 바로에서 나오는 인간의 행복과 영광과 성공을 추구하는 일체의 세속주의적 요소들을 총괄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요일 2:15-16). 이처럼 바벨론의 멸망은 첫째로 만국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한 것이 주원인으로 작용합니다(14:8). 둘째로 세상의 권세자들 또한 바벨론의 범죄에 가담해 하나님을 대적하며 악행을 일삼는데 뜻을 같이 했다는 지적입니다. 특별히 3절의 땅의 왕들이 바벨론으로 인해 음행했다는 표현은 17:2과 병행을 이루는 것으로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이 함께 더불어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보다 발전해 17:6에서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는 사실과도 연관됩니다. 이는 성도를 핍박하고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던 음녀의 범죄는 음녀와 더불어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세상 임금들과 땅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동의 범죄행위란 사실입니다. 이상의 이유로 음녀의 실체인 바벨론의 멸망은 불가피합니다. 종교적인 범죄와 일반적인 범죄가 모두 적용됩니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습니다. 음녀의 비참한 죽음을 통해 이미 예견된 바 있습니다(17:16).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의 일환으로 도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17:17). 따라서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 또한 필연적입니다. 세 번째로 바벨론의 멸망은 바벨론의 극한 사치와 허영을 통한 상인들의 치부와도 직결됩니다. 국가권력과 밀착된 데서 야기되는 온갖 불의와 불법과 탈세와 탈루의 편법은 고위 관료에게나 상인들이게도 공히 부를 축적하는 기회로 작용합니다. 이런 불법적인 처사로 인한 치부행위 또한 하나님 앞에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수밖에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행위로 성립될 뿐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바벨론의 멸망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요한의 지적입니다.
구별된 성도의 삶(4절)
바벨론의 필연적인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던 천사는 ‘하나님의 백성(내 백성)들이 죄악의 도시, 심판이 불가피한 도성으로부터 서둘러 나올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이는 렘 50:8과 51:6-9의 반영입니다. 바벨론을 서둘러 나와야 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바벨론의 죄에 참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고, 둘째는 바벨론이 받을 심판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이 두 요소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히 9:17). 여기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절박함과 애틋함과 간절함이 뒤섞인 절규에 가까운 외침일 수 있습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 속에 갇힌 자녀를 부르는 부모의 안타까운 심정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받게 될 진노의 포도주는 그 죄악의 관영으로 인해 무자비할 뿐 아니라 정상의 여지란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심판은 오래 참으심으로 수많은 회개의 기회를 주신 후에(일곱 인 재앙/일곱 나팔재앙/벧후 3:8-9), 이제 최종적인 심판의 성격을 띠고 집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으로부터 ‘내 백성을 나오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의 현대적인 해석과 적용은 무엇일까요. 바벨론은 이미 살펴봤듯이 한 마디로 세상질서와 세속주의를 포괄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180도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인적인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던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현세 지향적이던 삶을 천상 지향적으로. 세속적 가치관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이기적이던 언행심사를 이타적인 것으로, 세속적인 역사관을 구속사적 역사관으로 180도 전환하란 의미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의 과거 기득권의 총화라고 할 수 있었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떠나라고 말씀하셨듯이 말입니다(창 12:1). 청교도 신학자요 목사인 리챠드 박스터는 그의 저서 회심(conversion)을 통해 거듭난 성도의 삶의 성격을 가리켜 ‘차선 변경이 아닌 유턴’(u-turn)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전인적인 삶의 변화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의지의 결단이나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의 믿음의 결단입니다. 신약의 기자도 옛 사람과의 단절을 강조하면서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강권합니다(고후 6:17, 사 52:11).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엡 5:8-11, 고후 6:14) 이상의 논증을 고려하면서 ’내 백성을 부르시며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명제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백성(내 백성)과 아닌 자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마 13:24-30).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예수의 이름이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증거합니다(마 1:21). 하나님의 백성이 따로 있다는 진술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만이 주님께 나올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요 6:37, 39, 8:47). 이런 관점은 본질상 예수님의 구속의 대상은 자기백성에게 제한되며 속죄의 공효 또한 택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된다는 칼빈의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사상의 논지를 뒷받침 해 줍니다.
둘째,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따로 있음을 확증해 줍니다(행 13:48, 16:13-14, 18:10). 이런 주제는 자연스럽게 엡 1:4-6과 롬 9:11을 통한 하나님의 선택사상에로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집행되는 절대주권사상의 결과로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택자사상은 칼빈의 이중예언의 준거를 제공하는 결정적인 증거본문으로 작용합니다.
셋째, 죄의 값은 사망이요 죄의 관영은 필연적인 심판을 자초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역사 속에서 노아시대의 물 심판은 당시 인류의 죄의 관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입니다(창 6:5-7).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도 동일한 원리에 의한 멸망입니다(창 18:30-31). 아모리 족속으로 대변되는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심판(정복사역)도 죄악의 관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스라엘을 통해 대리적으로 수행케 하신 사건입니다(창 15:16). 한편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 종말의 심판 또한 노아시대와 롯의 때와 동일한 원리 속에서 진행될 것에 대해 복음서 기자들은 경고합니다(눅 17:26-30, 마 24:37-39). 그런데 종말의 시대적 상황을 증거하는 복음서 기자의 경고의 메시지의 내용을 보면 과거 노아시대나 롯의 시대처럼 죄의 관영이란 특징이 문자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만을 기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일상의 삶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면 성도의 삶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자의 관점과 창세기 기자의 관점에는 어떤 유사성과 일관성 및 연속성이 내포돼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현대인의 삶 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의식과 신관이 실종돼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일상의 삶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것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성경적 삶의 원리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는 지적입니다. 반면에 철저히 인간의 현세적인 행복과 유익과 성공을 목적 삼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물질지향적인 세속적 가치를 추구한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요일 2:15-16절은 세속주의의 실체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정의합니다. 이들 세속성이 갖는 삼대 요소는 그 출처가 하나님이 아닌 세상 곧 마귀로부터 기인된 것이며 근본적으로 하나님과는 원수 된 요소들로 규정짓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요소들의 특징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한시적인 가치라고 평가합니다(요일 2:17). 이런 이유로 복음서 기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종말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은 본질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목적삼아 살아가는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로마서 기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적 삶의 지침을 얘기하면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전제한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습니다(롬 12:3상). 본문에서 ‘세대’란 요일 2:15이 언급한 ‘세상’과 본질상 동의어적으로 사용된 용례입니다. 세대는 세상의 풍조와 사상과 주의와 주장 및 가치관을 비롯한 세속적인 제반 문화의 총화를 가리키는 사상체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성도가 현실을 살아가며 세상 풍조와 아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정체를 깨닫는다면 그것을 목적삼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세속주의는 본질상 인본주의와 연계돼 바벨사상을 부추김으로 하나님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의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만국을 미혹하고 땅의 임금들과 땅에 속한 사람들을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라는 의미가 이런 사실을 말합니다(계 14:8, 18:3).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하여금 거기 곧 온갖 죄와 타락과 우상숭배와 음행의 본산인 바벨론(바벨사상/세속주의)으로부터 나오라고 강권하시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넷째, 바벨론으로부터 나온 자는 죄와 무관한자로 사망과 심판과 불못의 형벌로부터 제외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존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이미 사죄와 구원과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바벨사상의 근본인 세속주의를 결코 목적 삼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물질의 축복에 미혹돼 하나님을 도구삼아 우상처럼 섬기지 않습니다. 온 천하(축복의 총화)보다 귀한 목숨을 이미 보장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마 16:26). 그래서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가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일에 최선으로 경주합니다. 계시록은 이런 사람들의 모범적 삶의 실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음녀 바벨론의 음행 죄)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라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입니다(계 14:5-6). 이들은 말씀을 신앙과 삶의 최고의 규범으로 삼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오직 말씀의 원리를 부단히 좇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로 호칭합니다(히 11:38).
바벨론 심판의 당위성(5-8절)
바벨론의 심판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고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불의를 기억하심으로 심판이 불가피함을 선언하십니다(5절). 이는 렘 51:9의 반영입니다. 바벨론의 죄는 치료불능의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금잔으로 열방을 취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렘 51:7). 여기서 바벨론의 금잔이란 음녀 바벨론의 손에 들려진 금잔과 병행을 이루면서 금잔 속에 가증한 것과 음행의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다고 기술합니다(계 17:4). 바벨론은 이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만국과 땅의 권세자들을 취하게 했으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충성된 성도와 순교자들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17:6). 게다가 땅의 상고들은 바벨론의 권력과 결탁해 사치와 허영을 조장하면서 재물을 축적하는 일에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죄악상의 정체성은 한 마디로 극단의 세속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인본주의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부추김으로 결과적으로 인간의 영광과 부와 성공을 추구하게 만드는 지존사상의 고취에 집중된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에 의한(by) 인간을 위한(for) 인간의(of)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상의 배후에 사단의 음모와 고도의 계략이 숨어 있었던 사실을 선악과 시험과 바벨탑 축조사건을 통해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처럼 바벨사상에 숨겨져 인간의 지존사상을 부추기는 사단의 미혹은 오늘날도 다양한 세속적인 매체(정치/경제/사회/문화/방송/통신 등)들을 무차별적으로 접근해 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경종을 울리며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받들어 행하라고 권고하는 사도의 심정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할 시기가 충분히 이르렀습니다(롬 13:14). 이 시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일에 주의를 게을리 말아야 할 시기입니다(고후 7:1).
6-8절을 통해 하나님은 바벨론의 심판의 필연성을 강조하십니다. 바벨론이 준대로 그에게 돌려주고 행한 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을 섞어 돌려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악한 행위에 따른 상응하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비록 매일의 인간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는 악을 악으로 갚기보다는 도리어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함을 받으며, 심지어 원수 갚는 것조차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고 요구받을지라도 종말의 심판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심은 대로 거두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따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와서 영생과 영벌로 자신들의 영원의 거처가 정해질 것입니다(요 5:28-29, 계 20:11-15).
이런 관점에서 바벨론의 죄의 항목은 교만과 사치로 집약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의 교만을 사단이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해 땅으로 내어 쫓긴 사건에 비유해 설명합니다. 그토록 바벨론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열국들로 하여금 신적 경배를 받으며 그들 위해 신처럼 군림했던 것입니다(사 14:12-15). 에스겔 선지자 또한 동일한 관점에서 두로의 교만과 부와 사치와 이로 인한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과 멸망을 예언합니다(겔 28:1-10). 이처럼 바벨론의 자고하는 마음과 이들이 향유하고 있던 온갖 사치와 향락과 허영의 죄가 하늘에 사무친바 되었다는 것이 계시록의 고발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그랬듯이 말입니다(창 18:20-21). 하나님은 이런 바벨론의 교만과 사치와 허영을 좌시 않으시고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고난과 애통으로 갚으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바벨론의 교만에 관한 비근한 예는 스스로 여황임을 자처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물질과 풍요와 권세를 의지하며 절대로 과부가 아닌 사실을 강조함으로 애통함을 당하지 않을 것을 호언장담하는 데서 찾아집니다(7절).
그러나 이런 바벨론의 교만과 물질과 사치와 허영심은 하루 동안에 패망할 만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고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과 애통과 흉년과 불사름으로 바벨론을 멸망시킬 것을 확증하십니다(8절).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나 일곱 머리 열 뿔 달린 붉은 빛 짐승을 훨씬 능가하시는 전능자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바벨론의 멸망과 애가(9-19절)
1-6은 바벨론의 죄악상과 멸망이 선포됩니다. 9-19절까지는 바벨론에 대한 멸망으로 악을 행하며 치부하던 땅에 속한 세력들이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치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애통해 하는 모습을 기술합니다. 사단의 속성은 본성상 회개할 줄 모릅니다. 종말적 심판에 처해져 불못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결코 회개의 심정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실상입니다. 범죄 한 인간의 모습 또한 본질상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를 따라 처치하신다면 우리 중 누가 스스로 행한 선행에 근거해 구원을 받을 자가 있겠습니까(시 103:10).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묵과하시며 오히려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 기능합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관련해 특별히 세 부류의 애가가 소개됩니다. 먼저 땅의 왕들의 애가가 9-10절에 소개됩니다. 땅의 상고(상인)들의 애가가 11-17절상에 소개됩니다. 배타는 선장과 선원들에 대한 애가가 17절하-19절에 걸쳐 소개됩니다. 이상 세 부류의 애가를 살펴보면 기록상 차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왕들의 애가(9-10절)와 선원들의 애가(17절하-19절)는 비교적 짧게 언급된 데 비해 상고들의 애가(11-17절)는 상대적으로 긴 내용으로 구성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상고들의 애가가 왕들과 선원들의 애가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필찬, 765). 다시 말해 왕들의 정치적 권력과 부와 사치의 유지를 위해 정경유착으로 말미암는 막대한 이윤의 일부가 정치후원금과 권력의 유지비 명목으로 왕들에게 돌아간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상인들의 막대한 물자의 수송과 고가상품의 반입은 선장과 선원들에게도 막대한 운송료를 보장받을 수 있기에 치부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삼자(三者) 간의 상부상조의 이해관계는 상호간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깊이 연계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바벨론의 멸망은 이들에게 큰 실망과 상심과 애곡으로 이어지는 당연지사한 일이었습니다.
땅의 임금들의 애가(9-10절)
음행과 사치와 부를 만끽하던 땅의 왕들이 불붙는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바라보며 애곡하며 고난을 무서워하며 탄식하였으나 진정한 회개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서 땅의 왕들이란 이들의 정체성이 사단과 밀접하게 연관된 자들에게 붙여지는 관용어적 표현인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들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이 심판으로 인해 일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세상권력과 사치와 부의 허무와 무상함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저들이 누리던 특권과 부와 명예와 명성을 아쉬워하는 나머지 전혀 회개나 자기성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패역한 자의 속성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과 무관하자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저들은 처음부터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는 것과는 관계도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멸망만을 기다리는 자들일 뿐입니다.
땅의 상고들의 애가(11-17상)
땅의 상고들이 애곡하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바벨론의 멸망으로 더 이상 상인들의 사치품을 비롯해 제반 고부가 상품들을 구입해 줄 수 있는 땅의 왕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11절). 여기서도 상고들을 ‘땅의 상고들’로 지칭하는 것은 ‘땅의 왕들’이란 표현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에 속한 자들임을 시사합니다. 12-13절에는 땅의 상고들이 바벨론과 거래했던 물품 목록들이 소개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온갖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물품목록들을 주의해 보십시오. 상류사회에서 극한 사치와 부와 향락을 만끽하는데 필요한 각종 보석과 최고급 옷감과 기호품과 온갖 식료품과 가축 및 심지어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까지 포함돼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상품화돼 매매의 수단으로 전락된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만물을 돈으로 평가하는 배금주의 사상(딤후 3:4)이 팽배된 결과를 반증합니다. 사실 현대사회 속에서도 이런 인간의 상품화 현상은 상업성과 연결돼 다양한 루트를 통해 합법적이고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한 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깊이 사로잡혀 종노릇하고 있는 세속주의적 삶의 전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 없는 문화가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이며 신기루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속히 지나가돼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기 때문입니다(요일 2:17, 고후 4:18). 성경은 절대가치로서 만물과 만사의 진위성을 가름하는 유일한 척도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땅의 상고들이 애곡하며 심히 애통하는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바벨론이 탐하던 과실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14절상). 과실들은 상인들의 사치품과 고급품의 목록 중에 과일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최고급 상품들에 대한 은유로 사용하는 용어로 12-13절에 언급된 사치품의 전 목록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이필찬, 775). 특별히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1절)이란 표현에서 사치품과 고급 상품들을 바벨론의 영혼들이 탐했다는 것은 단순한 생활의 필요차원을 넘어서 탐욕의 수단으로 삼아 우상처럼 착념했고 집착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바벨론사상 속에 내포된 물신숭배사상과 배금주의 사상의 만연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첫 번째의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설명했을 뿐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14절중). 본 절에서 맛있는 것(riches/all the things which are rich)이란 외국에서 들여온 값 비싸고 기름진 음식을 가리키며, 빛난 것들이란 값비싼 옷감이나 옷, 그리고 수입된 나무나 보석 등으로 만든 장식품을 가리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494). 그렇다면 본문의 맛있고 빛난 것들도 본질상 과일을 은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12-13절의 사치품과 고급상품들을 동일한 의미로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이상의 사치품과 화려한 고급제품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14절).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은 너무도 철저하게 파괴돼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해 버렸습니다. 상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통 중에 두려운 마음으로 멀리서서 애통하며 탄식하는 가운데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신 후에 내리는 심판이라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는 무자비한 심판이 집행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바벨론의 영광과 번성과 사치와 허영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잿더미로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마치 롯의 시대에 소돔과 고모라 성이 심판의 유황불로 일순간에 황폐한 땅을 변해버렸듯이 말입니다.
선장과 선원들의 애가(17절하-19절)
땅의 왕들과 땅의 상고들에 이어 각 선장과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의 애가가 세 번째로 소개됩니다. 이들은 바벨론과 상거래시 상인들의 물품을 운송하던 해상 운송업자들 내지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자들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바라보는 이들의 애통하는 심정 또한 단순한 동정심의 발로라기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깊이 연루된 데서 오는 경제적 손실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부각됩니다. 특별히 19절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반응은 그동안 상품운송과 무역업을 통해 치부했던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한 순간에 잃게 되는 데서 오는 허탈감과 아쉬움을 탄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티끌을 머리에 뿌리고 애통하는 모습은 과거 무역항으로 유명했던 상업도시 두로의 멸망에 대한 선원들의 애통하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겔 27:30). 큰 성 바벨론으로 상징되는 세속성과 세상사의 결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마감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의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에 비하면 세상 열락(悅樂)이란 일장춘몽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성경기자들은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설파합니다(고후 4:18). 현재의 고난은 짧고 미래의 영광은 길고 영속적임을 강조합니다(롬 8:18).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한다”고 선언합니다(요일 2:7).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가치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거기에 따른 합당한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간단명료하게 단언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입니다(롬 8:5). 큰 성 바벨론이 목적적으로 추구했고 만국과 땅의 왕들과 땅의 상고들에게 적극 강권해서 탐닉하게 했던 사상의 정체는 결국 육신의 정욕과 세상열락을 좇음으로 자기 영광과 의를 구현하는 일이었음이 명백히 확인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요일 2:16) 결과적으로 심판과 영벌의 멸망에 처해질 뿐입니다.
성도들의 반전의 기쁨(20절)
20절은 바벨론의 멸망으로 애통하던 땅의 왕들, 상인들, 해운업에 종사하는 자들과는 달리 하늘에 속한 자들 곧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는 대조적으로 기뻐하라는 명령이 일종의 삽입구(parenthesis) 형식으로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의 신원의 기도의 응답으로 바벨론을 심판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18:20). 그런 의미에서 바벨론의 멸망 속에는 각종 불의와 불법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인 측면과 성도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을 갚아주시는 보상적 심판(6:9-11, 8:3-5)이라는 두 가지 관점이 담겨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로마서 기자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일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리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21). 성도의 신원을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의 마땅히 행할 바의 도리란 가능한 대로 평화와 화해의 전령(peace maker)이 되어서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극복하라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성도의 삶의 성격은 하늘의 질서를 땅위에 실현하는 천상적 신분으로 존재하는 거룩한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런 행동지침과 행동양식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친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수준입니다. 성도는 가히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벧후 1:4). 이는 성도의 정체성은 본질상 하늘에 속한 자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에 연합돼 그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천상적 신분의 소유자란 지적입니다.
3. 바벨론 멸망을 확증하는 상징적인 환상(21-24절)
본 환상은 바벨론에 대한 멸망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환상으로 바벨론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도 준엄하여 회복의 여지가 전혀 없음을 확증시켜 줍니다. 이런 사실이 한 힘센 천사의 등장과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환상을 통해 증거됩니다(21절). 이를 행위적 상징(behavioral symbol) 이라고 부릅니다(유도순, 302). 이처럼 바벨론이 맷돌처럼 바다에 던져짐으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징을 통해 바벨론에 대한 심판과 멸망의 사실성과 확실성을 극적으로 묘사하면서 강조하는 환상입니다. 이상의 상징은 렘 51:63-64을 충분히 연상케 합니다. “너는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하수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앙 내림을 인하여 이같이 침륜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니 그들이 쇠패하리라 하라 하니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적은 책을 시종장인 스라야에게 지참케 해 바벨론에게 보내는 과정에서 당부한 내용입니다(렘 51:59-62). 이는 바벨론이 비록 유다를 침략해 속국으로 삼고 온갖 죄악을 일삼을지라도 그 결국은 돌로 맨 책이 유브라데 강에 던져져 물 속 깊이 가라앉아 사라짐 같이 멸망이 홀연히 임해 황폐케 될 것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역사로 바벨론 제국이 실제로 멸망케 된다는 예언의 말씀을 사단의 세력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영적 바벨론에게 적용시킴으로 큰 성 바벨론의 종말적 심판과 멸망을 확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2-23절에는 바벨론의 멸망과 비극적인 참상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다섯 가지 부정적인 현상들을 기술합니다. 이런 현상들을 요약하면 첫째로 다양한 악기 연주자들이 사라짐으로 당시 상류층을 중심으로 사치와 향락을 주도했던 다양한 음악소리가 그치고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을 기술합니다. 둘째로 각종 기술자들이 사라짐으로 경제가 마비될 것을 증거합니다. 특별히 당시 세공업자들은 상류층들을 중심으로 만연된 사치와 부를 주도하던 기간요원들이었음을 감안하면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셋째로 맷돌소리가 그칠 것을 예언합니다. 이는 식량의 고갈로 인한 식생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을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넷째로 등불이 더 이상 비취지 않음으로 낮의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야간의 활동이 일체 중단될 수밖에 없음을 예언합니다. 이는 경제활동의 추가적인 제약과도 밀접하게 연관되는 현상입니다. 다섯째로 신랑신부의 혼인예식의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진다는 경고입니다. 이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중단될 것과 이로 인한 인구의 점진적인 감소는 결과적으로 바벨론의 자멸과 직결되는 현상으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 오중(五重)의 부정적 현상들은 바벨론의 비극적인 종말을 기정사실화시키는 보증의 의미를 띱니다. 이로서 바벨론의 멸망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약관화한 사실로 확증된 셈입니다. 한편 여기서 소개된 큰 성 바벨론에 관한 멸망의 현상들은 역설적으로 바벨론 제국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예레미야서의 내용을 정황상 배경삼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 빛이 끊쳐지게 하리니”(렘 25:10).
잠시 요한의 구약인용과 관련해 살펴봅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면서 구약의 다양한 내용들을 필요적절하게 인용하며 배경을 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은 이스라엘의 미래의 회복을 통해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실상을 이스라엘의 실체인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 확증해보려는 구속사적 관점과 역사의식을 분명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계시록의 총체적인 주제는 어린양의 구속사역의 성취 안에서 보증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집중됩니다. 이런 사실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요한은 그의 구속사에 관한 깊은 혜안과 통찰력을 발휘해 다양한 상징과 환상과 비유를 통해 기술하고 있는 구약의 묵시문학적 내용과 사건들을 최대한으로 계시록을 기록하는데 적용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속사관은 유행과도 같이 한 때를 풍미하다 사라지는 인위적인 방법론이 아닙니다.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사상이며 성경의 내용을 일관성 있게 통합하는 총체적인 계시관의 뼈대(frame work)입니다. 결과적으로 구속사관에 대한 이해정도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총체적인 계시의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가름하는 결정적인 잣대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구속사관은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언약을 해석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사실 또한 더불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구속사의 정체성은 사실상 언약적 구속사입니다.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접근하게 될 때,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으로 귀결됩니다(막 1:14-15, 계 21:1-2, 마 6:33).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핵심주제(core topic)로 부각됩니다(요 20:31). 따라서 구속사란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생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이들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시며, 교회의 완성인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하나님의 남은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종말의 완성을 향해 부단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구속사의 주역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로 살아가는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현세지향적인 것으로 인해 일신상의 행복과 안위와 성공과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삼는 기복적인 자연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때를 따라 성취해 가시는 계시종교입니다. 복 중의 복이요, 상급 중의 상급인 죄로부터의 구원과 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미 보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 구원은 심판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복과 상급의 절정으로 소개됩니다(계 11:18, 14:13).
요한은 오중의 부정적인 현상들을 통해 바벨론의 멸망을 구체화시킨 후에 다시 한번 결론적으로 바벨론 멸망의 필연적인 요소들을 강조하면서 바벨론 멸망에 관한 환상기사를 마감합니다(23-24절). 요한은 바벨론의 멸망의 요인을 정리하면서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상인들이 치부하면서 스스로를 왕족들로 여기는 가운데 교만해 짐으로 패망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지적입니다(23절중). 교만은 자고로 하나님께서 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죄목중 하나입니다(잠 16:18). 교만의 본질은 지존사상의 고취로서 본질상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대신하고 탐하려는 저의가 담겨있습니다(창 3:5). 이는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 시도했던 사단의 반역 사건과도 밀접하게 연관되는 죄목입니다(유 1:6, 사 14:12-14). 사단으로부터 비롯된 교만사상은 이후 선악과 미혹사건을 통해 아담과 하와에게 주입되고, 이후 바벨탑 축조사건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인 심성 속에 자리 잡게 되면서 역사 속에서 인본주의로 구체화돼 신본주의에 대응하는 사단적 세력으로 자리매김 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큰 성 바벨론으로 대변되는 사단적 사상의 핵심은 세속주의(요일 2:16)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상고들을 왕족들로 표현하고 있는 계시록의 지적은 두로의 무역업을 주도함으로 부와 권력과 사치를 만끽했던 상인들을 일컬어 방백이요 존귀한 자로 묘사하고 있는 사 23:8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이사야는 두로의 상고들의 교만과 자고함이 하나님에 의해 기필코 심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사 23:8-9). 요한은 이처럼 두로의 상고들의 교만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예언을 바벨론과 관련된 상고들에게 적용시키면서 두로의 멸망을 바벨론의 멸망에 동일하게 일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반면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잠 18:2).
둘째는 바벨론이 복술(卜術)로 인해 만국을 미혹했기 때문이란 지적입니다(23절하). 이는 자신들만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것이 아니라 열국들을 미혹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권함으로 음행의 포도주에 더불어 취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14:8, 17:2). 우상숭배의 현대적 해석은 탐심(골 3:5)입니다. 탐심의 발로인 우상숭배신앙은 세속적인 성공과 행복 및 육신적인 소원성취를 위해 신을 방편적으로 섬기는 자의적(恣意的)이고 기복적인 신앙관을 가리킵니다. 자의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기독교와 접목될 때 하나님은 우상으로 전락되고 자연히 계시종교로서 기독교는 여타의 이방종교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우상을 숭배하듯 보상심리의 발동 차원에서 자기열심을 추구하며 신앙하게 될 때, 성경은 이를 가리켜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정죄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마 7:21-23, 롬 10:2-3).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어떤 관점으로 섬기느냐에 따라서 때론 하나님이 우상으로 전락될 수 있는 위험성은 상존합니다. 바른 계시관은 바른 신관과 바른 신앙관을 결정짓는 최선의 척도로 기능합니다.
셋째는 보다 근원적인 관점에서 바벨론의 멸망의 이유가 확인됩니다. 그것은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자들의 피가 바벨론 성중에서 보였다는 지적입니다(24절).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시종일관하게 충성과 믿음의 정절을 지켰던 성도들의 무죄한 피가 바벨론 성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바벨론 심판과 멸망의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했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순교자들의 신원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6:9-10, 18:20)의 일환이며, 동시에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교를 각오하며 신앙의 정절을 지켜 충성심을 발휘했던 교회의 종말적 승리(14:4-5)라는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 37:9-11입니다.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Ⅲ. 결론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단의 총체적인 세력을 상징하던 음녀 바벨론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을 받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음행의 포도주로 만국을 미혹했으며(3절),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자신을 영화롭게 했을 뿐 아니라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만방자함을 드러냈습니다(7절).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해 신앙의 정절을 지켰던 성도들의 피를 흘리게 했으며 이들 영혼들의 신원의 기도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바벨론에 임한 것을 요한은 강조합니다(20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바벨론의 죄에 동참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 가운데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4절). 분리와 구별의 거룩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성도의 신분과 소속이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가운데 하나님 중심과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 것을 강력히 요청하십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씀을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삶을 가리킵니다. 구원을 누리는 삶의 실질이 이런 것입니다.
바벨사상의 핵심은 자아중심의 지존사상의 고취로서 곧 세속주의입니다. 세상의 행복과 부와 성공을 약속함으로 인간의 영광구현과 의를 보증해 줍니다. 세속주의의 정체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됩니다. 이들 삼요소의 기원은 세상으로부터라고 밝힙니다(요일 2:15-16). 세상 임금인 사단 마귀로부터 온 것이란 진술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세상과의 타협과 절충은 결과적으로 사단에 부속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재물로 상징되는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마 6:24). 세상의 배후에는 악한 세력들이 역사하고 있다고 성경은 증거합니다(엡 6:12). 현실을 직시하며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의 발휘가 어느 때보다 강력히 요구되는 영적 혼돈의 시대를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