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 오달운 등 유명인물 용지사에 배향
동복오씨 재신공파 제각 '효모제' 말끔히 단장동복오씨 하면 해남에서는 조선후기 「해금집(海錦集)」을 통해 실학사상을 꽃피운 해금 오달운(吳達運, 1700∼1747)을 떠올릴 수 있다.
또한 임란과 일제하의 어려운 시기에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동복오씨에서 많이 나오기도 한다.
해남에는 동복오씨들이 여러 지역에 살고 있지만 10여년 전만 해도 계곡면 사정리 용지마을에 40여호, 산이면 상공리에 30여호 그리고 북평면 오산리에 8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이중 계곡면 용지마을은 1550년경에 낙남조 오빈(吳彬)이 조선조 명종때에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현재 용지마을에 오달운(吳達運)을 비롯하여, 정유재란때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순절한 오극신(吳克信) 등을 배향하고 있는 용지사(龍池祠)가 있으며, 해방후에 다시 중건되었다.
또한 산이면 상공 마을은 1700년 말에 동복오씨 오발운(吳發運)이 화순 용지(龍池)에서 이곳에 입향하여 정착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중 계곡면 용지마을은 동복오씨 중에서도 승지공파에 해당하며, 이곳 북평면 오산마을은 재신공파(宰臣公派)에 해당한다고 한다.
재신공파 집성촌
단일 마을로는 가장 많은 동복오씨가 살고 있는 곳이 북평면 오산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북평면 오산(烏山, 이장 오석주 58세)리는 완도를 바라다보는 해안에 위치한 마을로 현재 118호가 살고 있는 꽤 큰 마을이다.
예전에는 마을 앞 바다에서 김양식 등 어업에 많이 의지하고 살았으나 10여년 전부터 김양식도 끊기고 지금은 바닷가이지만 고막이나 굴 정도나 할 뿐 벼농사 중심의 일반 농업을 주로 하며 살고있다.
오산 마을은 원래 천안전씨(天安全氏)가 살았으나 이후 동복오씨(同福吳氏) 종일(宗一, 1549∼1610)이 화순 동복(同福)에서 임란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11대손인 오사현(71세), 13대손인 오병준(64세)씨 등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까마귀형국을 한 산이 있다고 하여 「가막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오리(琴烏里)와 홍해(洪海)리, 대청(大淸)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오산으로 되었다
예전엔 가막이라
<호구총수>(1789)에는 「加幕里」라는 마을이 기록되어 있어 오래전부터 가막이라는 지명이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오산마을은 총 118호 가량이 살고 있으며 이중 동복오씨가 50여호 그리고 전주이씨, 김해김씨 등이 함께 살고 있다.
마을 앞 바다에는 율도(栗島)와 남도(南島)가 떠있다. 율도는 섬의 지형이 밤형국인데서 나온 지명이고 남도는 일명 나무섬 으로도 불리우는데 마을의 남쪽에 위치한 섬이라는 뜻이다.
마을에서는 정월보름에 당제를 지낸다. 이 당제는 약 3백여년 전부터 '별신제'로 지내오고 있는데 별신제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 아직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이 책에는 별신제를 지내면서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마을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근래의 동복오씨 인물로는 송지 금강출신인 오영대 전 도교육감이 동복오씨라고 한다.
오산마을의 동복오씨들을 모신 재신공파의 제각이 남창-강진간 국도변에 최근 말끔히 단장되어 들어서 있다. 「동복오씨 효모제(同福吳氏 孝慕齋)」인 이 제각은 이곳 동복오씨 재신공파를 모신 곳으로 애국지사 오문현(吳文鉉) 추모비를 비롯하여 동복오씨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동복오씨 중에는 임란때 참전하였던 오정달도 있는데 임란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올린 인물들이 나오고 있으며 일제하에서도 산이면 상공을 중심으로 한 동복오씨들이 항일 운동을 주도하는 등 어두운 시대에 나라를 위해 저항했던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출처 : 다음카페 '해남을 사랑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