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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구름길(제3구간)
'순례길'은 이준 열사의 묘역 앞에서 '흰구름길'로 바뀐다.
흰구름길은 북한산성생태숲 앞까지 4.1km의 제3구간이다.
북한산 하늘에 떠있는 흰구름이 어찌 이 구간에만 유난하랴만 구간명이 된 것으로
보아 이름 지을 때 무척 고심했던 듯.
마땅한 이름이 없을 듯한 구간이니까.
아카데미하우스가 종점인 찻길 건너편 통일교육원(통일부) 담을 끼고 간다.
교육원 안 뒤쪽에도 애국선열묘소가 있다.
춘헌 이명룡(春軒李明龍/1872~1956)의 묘다.
통일교육원 본관 건물 앞 지점에 있던 묘를 교육원 건물 신축으로 인하여 현 위치로
(1988년 10월 10일) 이장하였단다.
이장하려면 애국선열묘역으로 할 것이지 왜 정부관련 건물 뒷구석으로 밀려났을까.
1956년 당시는 통일교육원은 커녕 아카데미하우스도 없었고, 오솔길에 불과한 길이
지역을 나누지도 않았을 때였지만 지금은 홀로 격리된 처지 아닌가.
이 구역을 고집하는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다면 유족도 선열묘역을 바라련만.
막 시작했을 뿐인데(500m), 교육원 뒤 게이트볼장(강북구 인수동)을 지나 완만하게
오르는데도 힘겹다고 주저앉는 아내.
겨우 1.2km쯤 되는 본원정사 앞에서도,낮은 능선 넘어서 냉골 입구에서도 마치기를
바라는 아내를 1km남은 화계사까지만 가기로 종용했다.
이러는 내 앞(둘레길)이 아득해 보이기만 했다.
냉골 입구의 옛 삼원수영장 일대는 서울영어마을로 바뀌었다.
팔봉 김기진(八峰金基鎭/1903~1986)의 집이 찻길로는 종점이었으며 그 옆에 있던
작은 정신지체아의 집 각심학원(覺心學院)은 대규모 국립재활원(병원)으로 컸다.
팔봉은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리더, 일본명 가네무라야미네
(金村八峯)로 대표적 친일작가,철저한 반공문인,군사쿠데타 권력에 가담 등 변신을
거듭한 작가, 언론인이었다.
6. 25동란때 피납, 인민재판에서 타살형을 당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냉골 입구에서는 노선이 바뀌었다.
소유자(대우건설)의 요청으로 기존노선을 이용할 수 없으므로 우회하라는 것.
편한 길을 두고 된비알을 오르내려야 한다.
대우건설이라면 부실경영으로 죽어가다가 국민의 혈세로 수혈해 살려낸 기업인데
만약, 동일업체라면 이 소유자는 이기적일 뿐 도덕적이지 못한 기업체다.
받기만 하고 베풀줄 모르는.
산길 밟으면 땅이 꺼지거나 신발에 묻어 달아나기라도 하는가.
우리는 기존 길(용봉약수/배드민턴장길)을 따라 화계사 직전 능선에 당도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기 전에 북한산쪽 둘레길을 1주했을 때도 이 길을 걸었기 때문
인지 우회로를 걸어보고 싶은 바람이 갑자기 일었다.
나는 눈 앞의 화계사를 내려다 보면서 한 궁리를 했다.
어차피 화계사에서 마감할 것이므로 우회로를 따라 냉골로 내려갈 것을.
아내는 쓴소리를 쏟아내면서도 우회로까지 걸었다.
이번에는 내 완벽주의 때문에 아내가 고생했는데 냉골 끝에 있는 유석 조병옥(維石
趙炳玉/1894~1960)의 묘역을 함께 다녀오기는 커녕 혼자 귀가해버렸다.
유석은 "협상과 타협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신념대로 산,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 민주주의의 진수를 온몸으로 실천한 분인데.
"빈대잡기 위해서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는 명언으로 내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분이지만 아내에게는 체력의 뒷받침 여부와 관계 없이 관심 없는 분이다.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그가 1960년 2월 15일 월터리드 육군병원(미국)에서 급서하지
않았더라면 4.19민주혁명이 발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대통령이 됨으로서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이승만의 장기 독재정권이
종언을 고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 때의 4년 전인 1956년에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야당대통령후보였던 해공 신익희가 선거를 앞두고 급서함으로서
4년을 기다렸기 때문에 이 때(유석의 서거)의 국민적 충격은 극에 달했던 것이다.
1956년 5월 2일, 한강백사장에서 목도한 인산인해는 지금도 선하다.
서울시민은 물론 경기도에서도 도시락을 지참하고 걸어서 도착하는 등 30만 군중의
함성이 천지를 뒤흔드는 듯 했건만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더 많은 시련을 강요했다 .
유석의 묘를 다녀온 후 모처럼 맘껏 걸을 수 있게 된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 걸음은
물론 아내에 맞추느라 빠뜨렸던 12묘역을 모두 참배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해공과 유석의 묘를 참배할 때는 매번 그렇거니와 우리 국민의 운명적 불행이
아직도 야속하게 느껴진다.
정치군인들의 쿠데타 정권 30여년의 한과 울분이 사그라지는 듯 하였는데 웬걸 또
다시 악몽의 시대로 회귀해 가는 듯 하니 말이다..
시발점 소나무숲길
된비알 우회길을 걸은 후 아내는 어느 만큼 자신감을 갖게 된 듯이 보였다.
둘레길 완주에 본격적으로 도전할 자세였으니까.
우리는 빠뜨린 제1구간(소나무숲길)을 먼저 걷기 위해서 3월 23일 오후에 둘레길의
시발점으로 갔다.
우이령길 입구에서 솔밭근린공원 상단까지 3.1km를 걸으려고.
우이천을 거슬러 올라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분소와 의암 손병희(義菴孫秉熙/1861~
1922) 묘역을 지나는 길이다.
북한산 중에서도 삼각산 자락으로 구간 이름대로 소나무숲이 울창한 우이동길이다.
진달래능선에 오르는 샛길들이 있고 '만고강산' 약수터도 있고 그 앞으로는 꽤 너른
채소밭이 일궈지고 있는 편안한 구간이다.
이 구간 내에는 한국육군 장군 이용문(李龍文/1916~1953) 부부의 묘가 있다.
국립묘지에 있지 않고 왜 북한산 자락에 외로이 있을까.
하긴, 미국의 알링턴국립묘지에서 D. 맥아더 원수의 묘소를 참배하려 했으나 같은
버지니아주지만 동남쪽 꽤 먼 해안 노퍽(Norfolk)에 있다고 해서 포기했었다.
이용문은 애국선열이 아니고 일본육사출신으로 황군 엘리트 장교, 소좌(소령)였다.
대한민국정부 수립후 국군이 되어 장군에 올랐는데 1953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지휘중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건개)이 30세에(1971년?) 서울시경국장(현 서울경찰청장)이 되었다.
전무후무한 파격적인 인사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좌익에 연루되어 위기에 빠진 자기를 구해준 일본육사의 하늘같은
선배(7기 선배) 이용문에 대한 보은으로 그랬을 것이다.(후문이 그랬다)
그리고 30세 경찰국장은 '330수사대'를 만들었다.
밤에 문 단속 하지 않고도 편안히 잠잘 수 있게 하겠다고.
절도범 체포 전담반의 명칭인데 30세라 3자(字)를 좋아했던가.
형법330조(야간주거지침입절도죄?)를 인용했다지만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
소나무숲길은 우이동 마을 한 귀퉁이를 통과해 솔밭공원에 진입하는데 주택 담벼락
에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안내판들이 부착되어 있다.
조용히 지나가라는 것과 쓰레기 버리지 말라는 내용이다.
이베리아반도의 수많은 순례길도 대부분 마을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 곳에는'아니모'(animo/힘내세요)를 비롯해 격려의 방(榜)이 붙어 있거나
휴식용 탁자에 음료수를 비롯해 먹거리가 비치되어 있지 이처럼 부정적인 안내판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문화의 차이일까.
제1구간의 끝은 우이동솔밭근린공원이다.
내 동네에 이처럼 오래된(100여년) 소나무숲 공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하마터면 1천여 그루의 소나무가 무참히 잘리고 아파트가 들어설뻔 했던 땅이다.
더구나 건축회사(건영)의 소유였기 때문에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던 숲이었다.
매입했건 대토 교환을 했건 지자체 강북구의 잘한 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솔밭공원 조성을 들겠다.
아쉬움이 있다면 3만5천여평방m의 공간이 협소하다는 점인데 이 공원 옆으로 있던
이만큼 넓은 숲이 주택지로 먹히지 않고 공원으로 보존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계 속>
둘레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서울영어마을(위)과 국립재활원(아래)
유석 부인의 묘(위)